<책소개 29> 시를 읽는 천 개의 스펙트럼
김백겸
2012. 3. 16
이 책은 김백겸 시인이 자작시나 감동을 받은 시를 읽고 삶의 영역에서 해석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전체 227쪽을 3부로 나누어 전체 37개의 소제목으로 글을 정리하고 있다. 첫 글에서 비둘기의 눈은 산의 바위와 신전의 대리석을 구분하지 않음을 말하면서 기호체계에 대해서 언급을 한다. 처음부터 시작이 만만치 않다. 심리적인 것을 이야기하는가 하면 역사와 종교의 해석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정보사회에 대한 문화콘텐츠를 말하면서 ‘멀티’(multi)와 ‘폴리’(poly)를 이야기한다. 책의 내용이 점점 깊어진다. 신경 미학과 추상미술에 대한 자기 표현인 ‘매트릭스’(matrix)를 거리낌 없이 사용한다.
나는 이런 학문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좋아한다. 그런 스펙트럼이 교차되면서 형용되는 글의 묘사는 나의 눈을 즐겁게 한다. 시를 이야기하면서 우주를 이야기하고, 내 속에 내재하는 기호와 상징을 끄집어내는 것은 해박한 지식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을 읽으면서 첫 문장이 우주를 관조하는 모습으로 마치 빅뱅을 보는 듯 하다. 하루살이가 태어나고 죽는 찰나의 순간과 빅뱅을 통한 새로운 별의 탄생을 그저 감정도 없이 표현한 느낌이다. 그러나 읽을수록 몇 백 억 광년이 순간적으로 오간다.
시를 통해 시인의 마음을 다 읽을 수도 없고, 또한 시를 읽는 감정이 같을 수야 없지만 우주가 보내는 신호를 마음으로 받기 위해 눈을 감아야 하는 그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 아닐까? 우주의 신호체계를 읽기 위해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는 시인의 마음은 마치 ‘쿼크’가 이리저리 흩어지듯 그러면서 제멋대로 가고 싶은 곳으로 달려가는 자기만의 세계가 보인다.
나는 가끔 이런 말을 한다.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 ‘기쁜 달’을 읽고 느낀 감정이다.
‘개가 짖으나 달은 움직이지 않았다 / 바람이 불었으나 달은 움직이지 않았다 / 기차가 지나갔으나 달은 움직이지 않았다’는 표현이 내 마음에 확 와 닿는다. 내가 그렇게 살고 있는데, 그런 마음으로 책을 읽고 사유를 하고 있는데 어쩌면 그렇게도 내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을까?
<기쁜 달>
김백겸
물 속에
어두운 황혼 속에
조용한 숲 속에
개가 짖었으나 달은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이 불었으나 달은 움직이지 않았다
기차가 지나갔으나 달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당신의 사랑도 움직이지 않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가고
한 해
십 년
백 년
천 년이 흘러가서
연인들의 유골이 모두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연인들이 있었던가 하는 기억도 모두 없어질 때까지
달의 아름다움만 스스로 빛났다
물 속에서
어두운 황혼 속에
조용한 숲 속에
위의 시는 세월의 덧없음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우주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 영겁을 읽는다. 인간의 삶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그저 그렇게 있는’ 노자의 ‘자연’을 읽는다. 그러면서 변함없는 사랑을 노래한다. 진정한 사랑은 변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야!"라는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달의 아름다움이 변함없는 사랑이요, 감미로운 마음이다. 이 사랑이 내 마음에 스며든다.
김백겸 시인은 자연과학에 대한 수준도 대단하며 그 내용을 멋지게 이끌어내어 표현하는 탁월한 글재주가 있다. 그의 글을 읽으면 빠져들어 간다. 문학은 자연에 덧칠한 인간 정신에 관한 학문이며 자연과는 다른 무늬 즉 언어라는 기호작용으로 기록된 학문으로 정의한다. 시는 은유라는 말을 김 시인은 신봉한다. 그러면서 ‘A=B’라는 동일성을 드러내는 거울임을 알았다고 한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병든 장미’ 시를 들어서 설명을 하는데, 장미꽃 속에 벌레가 생명을 파멸시키는 일을 검고 비밀한 사랑으로 이야기한다.
독자가 ‘텍스트’를 문자로 읽느냐 은유로 읽느냐 하는 문제는 아직도 진행형인 연구이다. 어느 입장에서 풀어 가느냐 하는 부분에서 해석이 시작이 되지만, 거기에서 또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기에 어쩌면 텍스트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일수도 있다. 그래서 ‘시’는 독자의 해석이 필요하다. 아니 어쩌면 '텍스트'의 뜻을 알아내기에 어려움이 있는지도 모른다. 언어와 이미지와 리듬은 시인의 정신과 욕망으로 탄생을 한다. 그러나 그 결과로 표시된 ‘텍스트’는 잡지나 시집 안에 죽은 듯 누워있다. 이 ‘텍스트’는 독자/해석자의 감정과 정신으로 되살아 난다. 이런 의미에서 문학적 텍스트란 태생적으로 다중적·반어적 의미가 있다. 텍스트의 진짜 모습은 그 자체이다. 누군가 읽는 순간 텍스트의 모습이 아닌 해석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독자의 몫이 있다.
김백겸 시인은 다재다능하다. 과학, 철학, 음악, 종교, 역사 등 다방면으로 해박한 지식을 뽐낸다. 적어도 시인이라면 그 정도로 자신감이 충만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이야기를 하건 저런 이야기를 하건 해박함으로 논리를 펼 수 있는 시인의 지적 수준은 감탄 그 자체이다. 시의 해석에 있어 철학자들의 사유 방식을 설명하는 데는 글을 읽는 독자의 수준을 생각지 않고 ‘독자인 네가 알아서 읽으라’는 오만함도 있다. 각주처리도 없고, 설명도 없다. 그저 철학적 입장에서 알든지 말든지 그냥 손가는 대로 글을 써 내려간다. 니체, 들뢰즈, 푸코를 이야기하는 모습은 마치 철학강의를 듣는 듯하다. 그런 바탕에서 나오는 사유의 몸부림은 독자의 지적 목마름을 해갈해준다.
그러나 모든 책에 완전무결이 없듯 이 책도 완전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읽다가 보니 왜 그렇게 오타가 많은지... 사유를 통해 우주를 논하면서 정작 ‘텍스트’로 표현된 책이 ‘텍스트 속에 시체처럼 잠자라’고 쓴 것은 아니겠지? 적어도 문학을 말하고 시를 말하고 있다면, 해박한 지식을 편린으로 이용하여 여기저기에 붙여 아름답게 표현하려 했다면, 적어도 그 시대의 문법적 입장에 바로 서 있어야 되지 않을까? 또한 주어와 주제어의 오류는 글쓰는 이들이 꼭 알아야 할 문법이다. 저자는 간간히 그런 오류를 범하고 있다. 띄어쓰기를 제대로 못한 곳도 보이고 매끄럽게 정리되지 못한 문장도 보인다.
이 책은 늘팀에서 안학수 시인이 추천한 책으로 3월 독토를 한 책인데, 책익는마을분들이 읽어야 할 추천도서로 올립니다. 지적 욕구가 가득한 분들이 읽어야 할 필독 도서입니다.
첫댓글 원문에는 '한해'로 붙여 썼으나 나는 '한 해'로 띄어쓰기를 했다.
내용으로 보든 문법으로 보든 띄어쓰기가 맞다.
시야 시인 마음대로 쓰지만 붙여서 쓸 이유가 없다.
오타를 일일이 지적하지는 않는다.
안학수 시인께 저자를 잘 알고 계시니 개정판을 내라고 하는 요청을 했다.
한국작가회의 대전충남 지회장, 한국민예총 대전충남지회장의 직함이 있는데
여러 곳의 오타로 인해 흠집이 생겼다.
이런 오타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낸 <Bookin>도 이 질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출판사는 인쇄만 해 주는 곳이 아니다. 철저히 탈고를 해야 한다.
오타가 많기에 하는 말이다.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목사님이 권하셨던 들뢰즈의 '천의 고원'이 떠올랐었지요.
우주와 철학과 자연과학과 문학의 향연이 펼쳐진 책이었습니다.
덕분에 어려웠지요. 목사님 독후감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