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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떠난 이방인 헤드릭 하멜,조선에 남은 이방인 박연 이야기
1653년 8월 바타비아(현재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떠나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스페르베르호가 항해 중 폭풍을 만나 제주 남쪽 서귀포 해안에서 좌초했단다.
승조원 64명 중 28명이 죽고 36명이 살아남았는데..
아들아,
전에 아빠 엄마랑 같이 전남 강진에 가서 전라병영성을 보고 하멜기념관도 봤고
하멜이 만들었다는 돌담장도 봤었지.
얼마전엔 제주에 갔을땐 하멜이 표착했다는 용머리 해안의 하멜상선전시관도
봤지 않더냐.
하멜이 우리나라에 있다가..네덜란드로 돌아가서 하멜표류기를 썼는데..
하멜과 그의 동료들이 우리나라에서 고생 많이 했고, 고향으로 가지 못하게
13년이나 잡아 두었기 때문에 감정이 좋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해주니
네가 한마디 하더구나. 그때 우리 조상님들 나빴다고.
아빠는 조금 당황했단다.
그 때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사정이랄까..얘기하긴 했는데,
어쨌든 아들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아.
아빠가 생각해도 그때 사정을 감안하고 봐도 하멜과 그의 동료들에게
인간적으로 그때 우리 조상님들이 가혹했던 것은 맞으니까.
하멜과 하멜 일행은 처음 제주에 도착해서 제주목사 이원진의 후대를 받았지만
후임 목사들에게서는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던 것 같아.
하멜 일행은 제주에서 탈출하려다 실패하고 곤장을 맞고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가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효종의 명으로 서울로 불려오게 되었지.
서울로 올라오던 중 선원 1명이 형벌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아들아, 효종실록에 보면 하멜 일행을 심문한 기록이 있단다.
'이전에 조선에 온 남만인(南蠻人) 박연(朴燕)이 있다.
박연이 그들을 확인한 결과 남만인이 맞다고 했다.
서양인들은 대개 화포를 잘다루기 때문에 이들을 훈련도감에 배속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어.
박연과 하멜 일행의 만남
하멜표류기에서는 1653년 10월 29일, 바로 그 '남만인' 박연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단다.
제주목사 이원진 옆에 붉은 수염을 한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하멜 일행에게
이 사람이 누구인것 같으냐 묻자, 네덜란드(홀란드)사람 같다고 하니..
제주목사가 그는 조선사람이라고 답하며 웃었다고 했다고 하는구나.
박연과 하멜 일행은 서로를 알아보았단다.
머나 먼 타국에서 고국사람을 만나 회포를 푸는데..
어찌나 울었는지, 옷깃이 젖을 때까지 울었다고 해.
하멜이 보니까..박연이 조선에 와서 정착한지 20여 년이 넘은 탓인지,
모국의 말을 많이 잊어 처음에 의사소통하기 힘들었지만..곧 익숙해지고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어다고 했어.
하멜표류기에 의하면..타국에서 만난 모국사람, 박연에게 그들을 일본으로
보내달라고 하니, 단념하라고..조선에서 살아야만 할 거라고 얘기했다고 해.
박연도 처음부터 조선에서 살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고,
조선은 표착한 외국인을 돌려보내지 않는 국법이 있어서..
날개라도 돋아서 날아가지 못할바엔 기대하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해줬대.
그 외에는 조선이 그들에게 나름 괜찮은 대접을 하고 살아갈 길을 마련해
줄거라고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
이 사람이 이젠 조선사람이 되어 그들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구나
그런 느낌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구나.
서울로 압송되어온 네덜란드 승조원들은 효종을 만나 그들을 일본으로 보내
귀향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효종은 조선의 국법이라며 거절하고..
이들이 총포술에 능하다는 것을 생각하여 훈련도감에 배속하였어.
당시 효종이 병자호란 때 청에게 당한 수치를 씻고자 야심차게 추진하던
북벌(北伐)에 표착해 온 네덜란드인들의 능력과 지식이 요긴하게 쓰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
그리고 훈련도감에서 하멜 일행은 감독관이자 통솔자로 박연을 다시
대면하게 되었어.
하멜 일행은 조선으로부터 달마다 급료를 받고 신분증인 호패를 발급받고
조선인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이들은 조선에서 살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
오직 일본으로 가서 귀국할 길을 찾으려는 일념 뿐이었지.
내 가족, 내 집, 고향과 조국으로 향하는 마음은 당연한 것이라 해야하나..
아니면 자유를 향한 자연스런 일이었을까.
아들아, 병자호란에서 패전하고 청의 속국이 된 조선 상황에서..
효종은 패전으로 인하여 청으로 끌려가 인질생활을 해야했던 일
그 수치심을 잊을 수가 없었지
하여 그 수치를 씻으려 몰래 군비를 갖추고 전력강화에 힘을 쏟고 있었는 데
당연히 이것은 청에 알려져서는 안되는 것이었지.
또 청은 청대로 조선을 믿을 수 없어서 경계하고 있었고.
그래서 수시로 조선에 사신을 보내 내정간섭하고 감시했는데..
하필이면 그런 상황을 조선에 억류된 하멜 일행이 알았는지 몰랐는지
알수는 없지만, 이들은 어쨌든 섣부르게 돌출행동을 일으켰어.
1655년 3월 조선을 찾은 청의 사신 일행 앞에 하멜 일행 중 일등 조타수
헨드릭 얀츠와 다른 1명이 나타나서 네덜란드 사람인 자신들을 고국으로
보내달라고 호소하며 매달렸지.
효종실록에서는 이때의 일을 기록하며 청 사신이 네덜란드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놀라서 조선 조정에 이들을 잡아 두라고 했으며,
억류된 남북산(南北山,얀츠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이 애가 타서 먹지 않고
그대로 죽어버려서 조정은 곤란하게 되었으나 청의 사신이 그 일에 대해
다행히 모르고 있었다 한다.
하멜표류기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박연이 효종에게 보고하는 바람에
청 사신이 알게 되어 조선 조정은 청 사신에 막대한 뇌물을 주어 그들의 입을
막았으며 이 운이 없는 두 친구가 서울로 압송되어 죽었는데 자연사인지
고문으로 죽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고 했다.
하멜 일행의 고초
아들아, 이 사건에 대해선 아마도 하멜의 추측대로..네덜란드인의 존재를
비밀에 부쳐야 했던 조선이 청 사신을 매수했고,
돌출행동한 두 네덜란드인을 죽여서 덮으려 했을 가능성이 클 것 같다.
그리고 조선 조정에서는 하멜 일행의 거취에 대해 심각하게 논의했지.
이 시한폭탄 같은 자들을 어찌 해야 할까.
처형하느냐 살리느냐..
결국은 이들을 서울에 둘 수 없고, 청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멀리, 외진 곳으로 귀양을 보내기로 결정되었지.
이것이 조선땅에서 만난 네덜란드인 박연과 하멜의 마지막이었어.
하멜표류기 속 삽화 '전라병영성에서의 노역'
하멜 일행은 전라병영이 있는 강진으로 보내졌단다.
강진에서 이들은 1656년부터 1663년까지 7년을 보내면서 잡역에 동원되고
구걸부터 나막신 등을 만들어 팔기, 춤과 노래 공연으로 돈벌기 등
어렵게 살면서도,
그래도 사람 사는건 다 그런 것인지..주변 사람들과 교류도 하고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었어.
하멜 일행이 강진의 전라병영에서 생활하던 1659년 효종이 승하하였다.
아들아, 효종의 죽음은 곧 그가 평생을 걸쳐 준비하던 북벌의 좌절을
뜻하는 것이고..자연스럽게 이들 하멜 일행의 효용가치가 없어졌다는
말도 되는게 아닐까 싶다.
이것은 하멜 일행의 고난길이 더욱 심해진다는 말이기도 했다.
전남 강진 전라병영성과 하멜 돌담장
효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현종의 치세에..사상 유례없는 대기근이 이어졌다.
이상저온현상, 가뭄, 폭우, 우박, 거기에 해충의 습격으로 상상할 수 없는
모든 악조건을 다 겪으며 농사를 망치니 온 백성이 굶주리고..
그렇게 쇠약해진 백성들은 또 돌림병에 노출되어 죽어나갔지.
7년 조일전쟁에 버금가는..아니 더할 수 있는 대재앙이었단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조정에서도 하멜 일행을 먹여 살릴 수 없어 여수, 순천,
남원에 분산시켜 수용하게 되었고, 이들은 그런 대기근에 관리의 괴롭힘에
힘든 세월을 감내하다가..
1666년 9월 여수와 순천에 수용된 하멜을 포함한 8명의 네덜란드인이
배를 구해서 또다시 탈출을 감행하고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는데 성공했어.
하멜 일행은 1년여를 일본에 머물며 일본 관리들의 심문을 받았는데..
이때 이들의 문제로 조선과 일본간 외교문제가 있었던 같아.
하멜 일행은 바타비아를 거쳐 1668년 7월 20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귀향했고..후일 조선에 남아있던 8명의 선원들이 추가로 송환되었다고 해.
1명은 조선에서 여인을 맞아 일가를 이루고 그대로 남았다고 전하고.
하멜은 조선에 표착한 선원들 중에서도 특별한 사람이었어.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그는 상선 스페르베르호의 서기(書記)로 글을 알아서
기본적인 문리가 깨어 있으면서도, 네덜란드의 상선 승조원답게 총포술이
뛰어난 훌륭한 군인이기도 했지.
하멜표류기
하멜과 동료들은 그들이 조선과 일본에 머무른 13년여의 임금을 청구하고자
동인도회사에 '스페르베르호의 불행한 항해일지'라는 보고서를 제출하는데
이게 바로 하멜표류기의 시초였단다.
네덜란드와 유럽에 미지의 세계였던 조선이란 나라에서 그들이 보고 듣고
느낀 것들, 그들이 만난 사람들과 조선의 지리, 언어, 풍습등을 기록하여 알리며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지.
어쨌든..이렇게 해서 헨드릭 하멜은 최초로 근대 유럽에 조선이란 나라의
존재를 알린 사람이 되었다.
아들아, 헨드릭 하멜의 이야기를 하며 또 한명의 네덜란드 사람의 이름을
생각하게 된다.
박연(朴燕, 1595~?).
그의 원래 이름은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Jan. J. Weltevree).
이분의 삶도 헨드릭 하멜 못지않게 드라마틱하단다.
얀 야서스 벨테브레이, 박연의 상
박연도 동인도회사 소속 선원으로 우베르케르크호를 타고 바타비아에서
역시 일본 나가사키로 가다가 1627년 5월, 풍랑을 만나 제주에 표착하게 되고..
물을 구하러 동료 2명과 상륙했다가 관원들에게 체포되었지.
원래는 일본으로 송환하려 했는데 일본에서 일본인이 아니라 거부했고,
그렇다고 중국으로 보내자니..정묘호란 직후 적국인 청으로 보낼 수는 없어
일단 서울로 압송했는데 이들이 항해사이면서도 역시 총포술에 능한 뛰어난
군인이라 그것을 눈여겨 본 조선 조정에서는 훈련도감에 소속시켰어.
벨테브레이와 동료들은 훈련도감에서 왜인 포로를 감시, 감독하고..
신무기인 홍이포의 제작과 조작술을 가르치며 조선을 위해 공헌했으며
1636년엔 병자호란 때도 참전하였지.
동료인 하이스베르츠와 페르바스트는 병자호란의 전란 중에 전사하고
벨테브레이만이 살아남았고 조선인 여인과 결혼하여 1남1녀를 두어
일가를 이루어 박연이란 이름의 조선인으로 살아가게 되었단다.
벨테브레이는 원산 박씨의 시조(始祖)가 되었다고 하는구나.
벨테브레이, 아니..박연은 무과에 급제하여 정식으로 조선의 무관이 되었고,
평생을 훈련도감에서 복무하며 조선에 큰 공헌을 하였지.
강화 초지진의 홍이포
1627년 도래한 이방인, 박연이 소개한 그 홍이포(紅夷砲)가 2백 여년 후..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때까지 역사의 중심에 섰던 강화해협을
지키던 우리 조선군의 주력 화포로 활용되고 있었으니..
우리 역사 속에서 박연이 남긴 영향력이 적지 않다 해야 할 것이다.
네덜란드에서 도래한 이방인, 떠난 자 헨드릭 하멜은 고국으로 돌아가
조선을 알렸고..남은 자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는 조선에 남아서 박연으로
살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그렇게 그들의 삶의 행로는 다르게 흘러갔더구나.
아들아, 이 시기 조선이 대외활동이 극히 제한된 쇄국의 길을 걷고 있었다만
원래 조선은 그런 나라가 아니었다.
조선 초만 해도..위구르 출신의 이방인인 설장수(1341~1399)를 받아들여,
고려말부터 조선 초까지 대중국 외교에서 활약하게 했고,
그는 조선 개국공신이자 나라의 원로로 대우받았어.
드라마 대왕세종 속의 집현전 학사 설순
설장수의 조카인 설순(? ~ 1435)은 세종대왕 때 집현전 학사로 활약한 유명한
학자였지.
세종대왕 때 만들어진 조선의 실정에 맞는 독자적인 천문,역법(曆法) 체계인
칠정산(七政算)은 아라비아 역법인 회회력을 참고하여 개발된 것이다.
적어도 세종대왕 대까지는 세계에 열린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박연과 헨드릭 하멜..
이 두사람은 하늘이 조선에 준 하나의 기회,
세계로 통할 수 있는 기회였을지도 모르겠다.
소현세자
병자호란 후 인질로 갔던 청나라에서 선진문물을 접하여 세계의 정세를 깨닫고
돌아와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잘살고 강한 나라를 만들려고 했던
소현세자(昭顯世子, 李汪 1612~1645)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의문의
죽음을 맞은 것은 조선이 내부에서 스스로 변혁할 수 있는 기회를 잃은 것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외부에서 온 변화와 충격이 필요한데..그것이 바로 이들이었을거야.
조선을 위해 하늘이 준 또 하나의 기회.
그런데 당시 조선은..인조도 효종도 이 이방인들을 붙잡아 놓고 박연과 하멜이
가져온 선진적인 총포 제작과 운용술만 취하려 했지.
강진 전라병영성 하멜기념관
그들이 온 네덜란드는 어떤 나라인지,
그들이 소속된 동인도 회사의 실체는 무엇인지,
네덜란드와 유럽, 그리고 동남아시아를 통해 일본까지 세계를 누빈 그들에게
다른 세계의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들의 문명과 기술 수준은 어느 정도 수준이고, 어떻게 그 성취를 이루었는지,
일본과 통교하는 네덜란드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무엇을 교류하며
교류 품목은 어떻게 되는지,
하다못해 그들이 거래한 일본의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는지..
그들에게 묻고 알아내야 할 중요한 일들이 이렇게 수없이 많은데..
어떻게 조선 왕과 조정 관료 중 한분도 그것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없고
또 이것들을 알아 내려고 묻지 않았다니..이럴 수 있느냐.
조상님들이지만 그때 그분들 한심하다고 얘기 할 수 밖에.
아들아, 왜 그때 우리 조선은 이들을 붙잡아 놓을 생각만 했지..
이들을 이용해서 우리가 아는 중국, 일본과 일부 동남아 국가를 벗어난
미지의 세계와 접해 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들의 능력이 필요해서 끝까지 잡아 놓을 생각이었다면 인간적으로
정들게 환대하고, 확실한 일자리도 주고 결혼도 시키고 해서..
정착시키고 확실하게 주저 앉혀 놓든지.
고려 때는 잘 하던 것을..이때의 조선 조정은 그것도 못하고 있으니 무지하고
무능하단 소리를 또 안하겠느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서는 하멜표류기의 기록을 토대로 코레아호를
건조하고 조선과의 교류를 시도했으나 지리적 여건과 일본 막부의 반대로
좌절되었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왜 일본은 네덜란드와 조선의 접촉을 그렇게나 막으려 했던 것일까.
그리고 일본은 하멜 일행을 1년간 심문하며 조선에서의 모든 것들을
집요하게 캐묻고 조사했다는데 그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마음 속으로 짚히는 바는 있는데 무서운 일이 아니더냐.
이걸 우리만 새카맣게 몰랐다는 것이.
만약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계획대로 코레아호가 조선에 왔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고 섣불리 예측하는 것은 금물이라 한다만..
당시 조선의 여건을 보았을때 오랜 세월을 외부세계와 단절해서...
외부세계와 접촉을 할 수 있는 여러가지 준비가 안되어 있었기에
좋은 결과를 생각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라고 아빠는 예측해.
하지만, 또 반대로 생각해보면 외부로부터의 접촉과 충격이 2백여 년 앞으로
당겨진다면 그 변화의 파장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때는 유럽의 대항해시대, 그리고 식민지 개척의 초기라..
병인양요나 신미양요 때처럼 격차가 크지 않기 때문에, 잘 풀린다면
더 좋은 상황에서, 그리고 대등한 입장에서 개화의 불씨를 당길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랬다면..우리 역사에서 큰 흐름이 바뀔 수도 있었을거야.
떠난 자 헨드릭 하멜과 남은 자 박연, 그의 또다른 이름..얀 벨테브레이.
이들의 존재는 단순히 흥미로운 역사 속 한장면으로 넘길게 아니라..
그들이 우리 역사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볼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들아, 네가 만난 헨드릭 하멜과 박연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더냐.
그들은 네게 무슨 얘기를 건네주더냐.
아들아, 전에 하멜기념관을 찾았을 때도 말했다만..
우리의 눈과 귀는 세계를 향해 있어야 하고 그 변화의 흐름에 기민하게
대응해야 우리는 살 수 있다.
그게 우리나라의 생존을 위해 절대적인 조건 중의 하나다.
기억하거라.
세계의 흐름에 무지하여 때를 놓치고, 고난의 역사를 자초했던
우리 조상들의 실책을 또 반복해서는 안된다.
-----작성자;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