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상(은)나라의 실존을 증명한 지배층의 점복인 갑골의 발견과 학술적 논의를 살펴보자. 동양의 역사에 관한 기록문화는, 고대왕조의 정통성내지는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신화적이고 과장된 필치의 정치적 수단의 하나로 파악함도 무리는 아니다. 역사의 논리적 파악은, 근대 서양 학문의 도래로 부터 본격화 되었는데, 중국이 역사를 서양식으로 탐구 기록하게 된 사건의 단초는 갑골문자 발견에 있는데, 다음과 같다.
~상나라는 동북쪽에서 중원으로 내려와서 흥했으며, 상이 망하자 다시 동북으로 갔다~는, 부사년傅斯年(1896~1950)의 주장처럼, 상(은)나라는 북방 유목민적인 특징인, 동물의 뼈를 태워서 점을 쳤던 복골卜骨인 갑골은, 역사이래로, 갑골이 발견되어 해석되기 전까지는, 갑골의 존재조차 기록됨이 없었는데, 우연히 발견되는데, 갑골의 발견일지를 정리해보자.
~허난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 소둔촌小屯村에 살던 이성李成이, 논밭에서 발견되는 갑골을 귀판龜版과 용골龍骨이라, 가루로 부순 것은 도첨약刀尖藥이라 하여 수십년간 독점으로 약 장사를 하던 중, 1899년에 유악劉?(1857-1909)이 말라리아 약으로 구한 용골로 부터라는 설도 있으나, 금문학자인 당시 청나라 국자감제주國子監祭酒(대학총장격) 왕의영王懿營(1845-1900)이 귀판龜版에 고문자(갑골문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우연히 보고, 또는 골동품 상인이 고문자가 새겨진 용골龍骨을 왕의영에게 감정을 의뢰하면서, 왕의영이 시중의 모든 용골을 수집하고, 용골이 나온 곳을 추적 연구하다, 1900년 중국 북부에서 의화단義和團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미국 영국 일본을 비롯하여 8개국의 연합군이 북경에 입성함에, 외래의 군화발에 짓밟히는 망국의 한에 분개한 왕의영이 투신하여 자살하자, 왕의영이 수집하였던 귀갑龜甲과 수골獸骨 등은 유철운劉鐵雲이 맡게 되었고, 유철운은 이후에도 계속 수집하여, 1903년 석판인쇄로 ‘철운장구鐵雲藏龜’를 출판하여 갑골문자를 최초로 학계에 알렸다. 의화단 사건이후에 중국에 식량난이 일어나매, 유철운이 정부의 쌀을 사서 허가 없이 난민들을 구휼했다는 억울한 죄목으로, 1908년 신장성新疆省 우루무치에 유배당하여 병으로 죽으니, 왕의영과 유철운은 갑골문자만 발견, 수집했을 뿐, 그것들을 제대로 연구해 보지도 못하고 죽었다.
이들의 뒤를 이어, 갑골문자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어, 나진옥羅振玉(1866-1940)이 갑골문 출토지를 조사하여 ‘소둔촌이 은허殷墟(은나라 폐허)라’고 학계에 최초로 보고함에, 학계에서 관심있게 은허를 추측하게 되었고, 1917년에 왕국유王國維(1877-1922)가 수집한 갑골문에서, 상나라 왕과 공들의 세차歲次를 모아,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와 대조하여, ‘소둔촌은 은나라 왕 반경盤庚이 천도한 후의 수도라’고 밝혀 상왕조의 사실성을 실증하여, 상나라를 역사적 사실史實로 만들었다.
인류학자 이제李濟와 갑골문자 연구자 동작빈董作賓을 중심으로 한 중앙연구원에 의하여, 1927년 가을에 은허 발굴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갑골이 처음부터 뼈의 조각형태로 땅 밑에 흩어져 있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땅 밑에서 발견되는 갑골들은 완전한 형태의 거북 등껍질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것에 주목한 동작빈은 연구 끝에, 복사卜辭에는 왕명을 받들어 점을 쳤던 점장이(=정인貞人)가 자신의 이름을 써서 점복의 책임과 기록을 분명히 하는, 정인貞人들의 서명을 처음으로 발견해 냈고, 복사에 나타나는 은(상) 왕조의 조상 이름에는, 점을 쳤던 왕의 이름과 각자의 이름에 제각기 특징 있는 호칭이 있다는, 학문적 성과를 올린다. 1932년 동작빈은, 은 왕조의 어느 대의 것인지 알 수 없었던 복사卜辭를, 무정武丁에서 주왕紂王까지의 12왕, 다섯 시기를 시대별로 구분하여, 갑골문의 시대 구분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는데, ~반경盤庚은 황하의 홍수를 피하여, 오늘날의 안양현 소둔촌에 해당하는 은허로 도읍을 옮긴 왕으로, 아직까지 반경시대의 복사가 발견되지 않아, 가장 오래된 복사는 무정의 시대의 것으로, 무정武丁은 반경 동생의 아들이었다. 무정시대에서 은왕조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까지의 왕의 복사가 나오고 있으므로, 반경이 이곳으로 도읍을 옮긴 것도 사실이며, 은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이곳에 도읍이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라는 것을 증명한다.
1936년 13차 발굴 때, 복사가 새겨진 17,096점의 갑골이 대규모 갑골 땅굴에서 쏟아지는 등,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까지 총 15차에 이르는 발굴조사 끝에 24,794점의 귀갑龜甲(거북의 껍질)과 수골獸骨(길짐승이 뼈)에 새겨진 갑골을 발굴하였고, 1976년, 22대 무정왕의 정실부인인 ‘부호’의 묘를 발굴, 호랑이와 용무늬를 발견하는 등의, 고고학적 업적은, 소둔촌지역이 상商나라 마지막 도읍이 있던 곳으로 공인하여, 은허殷墟(은나라 폐허)라 부른다.~
그 외에도, 주거, 종묘의 유지, 왕궁 터로 보이는 유적과 청동기와 옥으로 된 그릇 등의 부장품이 발견된 왕의 묘로 추정하는 대묘를 포함한 1천여 개의 묘가 발굴되었고, 은허의 서북쪽에서 발견된 예술적 가치가 높은 많은 귀중품들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지하 궁전을 방불케 하는 분묘의 묘실은, 그들이 생전에 얼마나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하며, 순장의 풍습을 보여주는 목이 잘린 10여구의 시체가 같이 묻혀있는 1200여기의 구덩이 발견되어, 삼한시대의 순장과 연결하여 동이의 풍속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청동기 유물과 지금까지 출토된 약 10만여 편에 달하는 갑골이 대개 22대 무정武丁 이후 마지막 30대인 제신帝辛(紂王) 때까지의 것으로, 점복의 기록이라는 자료상의 한계는 있지만, 갑골문이 해석됨으로써, 갑골문자가 한자의 모체임을 알게 되었고, 상(은)왕조 시대에 이미 정전제井田制가 실시되었음도 확인되었으며, 특히 공자가 편집한 ‘시경, 상서商書’편의 기록과 일치하고, ‘사기’에 기록된 은나라 역대 왕들의 이름들이 확인되어, 상나라의 역사적 실재성이 입증되어, 중국의 기원은 기원전1,600년에 건국된 상나라가 중국 최초의 국가형태로 인정되어, 중국 역사는 600년 이상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10편 |
출처: 성주산포럼 원문보기 글쓴이: 날벼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