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56. 야르칸드와 카르가릭
백양나무 있는 곳에 오아시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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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의 당나귀 수레> |
사진설명: 서역엔 지금도 당나귀 수레가 많다. 도로에 자동차보다 당나귀 수레가 더 많을 정도이다. |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다’는 뜻을 가진 ‘신비의 땅’ 타클라마칸 사막, 환상적 오아시스 도시에 둘러쌓인 타림분지. ‘몽환(夢幻)적 환상’을 품고 ‘실크로드’에 들어 온지 3일째되던 2002년 9월15일.
카슈가르와 탁스쿠르간 취재를 마치고, 야르칸드(莎車)로 이동했다. 타림분지의 가을은 청명했고, 일기는 덥지도 춥지도 않았다. 백양나무 잎은 여름처럼 여전히 푸름을 자랑했고, 방울을 짤랑거리며 거리를 달리는 당나귀들은 무척이나 귀여웠다. 카슈가르에서 야르칸드로 가는 거리엔 참으로 당나귀들이 많았다. ‘아스팔트 위를 차들보다 당나귀 수레가 더 많이 지나간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농담(弄談)삼아 “당나귀 고기 맛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안내인의 답이 걸작이다. “중국에서는 ‘하늘에는 용고기, 땅에는 당나귀 고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매우 맛이 좋습니다. 그러나 신강성에서는 당나귀 고기를 잘 먹지 않습니다.” “그렇게 맛있어요.” “정말입니다.” 격의 없는 대화를 하는 사이 당나귀 수레가 옆을 지나갔다. 주고받는 농담을 아는지 모르는지, 순진하게 생긴 당나귀는 방울을 짤랑이며 수레를 끌고 점점 사라졌다.
가을 햇살을 받으며, 카슈가르를 출발해 서역남도를 달리길 2시간. 저 멀리 백양나무 우거진 오아시스가 보였다. 우리에겐 나무젓가락 만드는 재료 정도로 다가오지만, 서역에선 백양나무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사람 사는 동네 언저리엔 반드시 이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서역에서 백양나무를 만나면, 그곳이 바로 마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럭저럭 야르칸드에 다 온 것이다. 야르칸드 시내는 붐볐다. 어느 현대 도시와 다르지 않았다. 각양각색의 위구르인들이 거리를 왔다 갔다 하며 우리를 쳐다보았다.
불현듯 “위구르인들은 언제부터 타림분지 주변에 정착하게 됐을까”하는 의문이 생겼다. 현재 신장성을 장악하고 있는 위구르인들은 본래 바이칼호수 근방의 셀렝가강 유역에서 동돌궐의 지배를 받았다. 744년 동돌궐을 멸망시키고, 오르콘강 기슭에 도읍을 정한 뒤 위구르제국을 건설했다. 그런 그들이 신장 지역에 내려온 것은 대략 9세기 초반(808~821). 오늘날 중국인들은 신장 지역과 중국 대륙은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어왔다고 반복적으로 주장하지만, 사실 문화적으로 두 지역이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것만은 분명하다. 고대 비단길이 융성하던 시기, 그러니까 한나라 때와 수·당 왕조 시기에만 신장 지역은 중국 관할권 아래 있었을 뿐, 당의 쇠퇴와 함께 745년경 위구르 국가연합이 오늘날의 몽골·신장 지역을 접수했다.
위구르인들 9세기 초반 신장성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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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인들의 무덤> |
사진설명: 카슈가르에서 아르칸드로 가다 들어가 본 위구르인들의 이슬람식 공동묘지. 질서정연했다. |
‘위구르’라는 명칭은 745년부터 840년까지 중앙아시아의 광활한 지역을 지배했던 고대 투르크-위구르족의 초원 제국에서 유래했다. 이후 수 백 년 동안 이 지역은 투르크-몽골 유목민족들이 번갈아 지배했는데, 18세기 중엽에야 청 왕조가 이 지역을 군사적 식민지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1870년 무슬림 지도자 ‘야쿱 벡’은 청의 반군과 연합하여 신장지역의 독립을 선포했다. 신장지역의 독립은 그러나 1877년까지 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이후 이 지역은 중국과 러시아의 각축장이 됐다. 1933년부터 1944년까지 중국에서 벗어나 동투르키스탄을 세우려는 시도가 두 번 있었지만, 번번이 좌절하고 말았다. 결국 1949년 10월 말, 인민공화국이 건설된 직후 인민해방군은 이 지역의 독립 움직임에 종지부를 찍었다. 마침내 신장성(新疆省)이 생겨났는데, ‘신장’이라는 말은 ‘새로운 경계’라는 뜻이다.
1955년 10월1일 이후 중국은 신장위구르 지역에 대해 자치를 허용한다는 내용의 서류를 작성·명시했으나, 정치적 실권이나 독자적 권리를 위구르족에 부여하지는 않았다. 이로 인해 중국과 신장지역 사이엔 지금도 갈등이 팽팽하게 존재한다. 취재팀도 현지에서 몇 번이나 한족과 위구르족 사이의 갈등을 경험했다. 우리를 안내한 ‘요셉’이라는 위구르족 가이드는 한족(漢族) 식당에 절대 가지 않았으며, 설혹 간다 해도 식사하지 않았다.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으나, 한족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족(漢族)의 중국’도 이를 가만히 두고 보지만은 않았다. 1955년 이후 한족들은 이 지역에서 위구르인들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정책을 시행했다. 공식통계에 따르면 1949년 이 지역의 한족 인구는 전체 인구 대비 6.6%에 불과했으나, 1994년엔 37.7%로 급증했다. 실제 비율은 이 보다 훨씬 더 높을 것이다. 이 지역에 주둔하는 군인과 군속들, 국영농장의 직원들, 그리고 중국 동쪽에서 온 뜨내기 일꾼들이 공식 집계에서 빠졌기 때문이다. 수 천 년 간 ‘다른 민족’들에게 시달림 받은 한족들이 이민족 다스리는 노회(老獪)한 정책을 나름대로 시행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는 연변 지역에 대한 정책도 이와 유사하다.
중국이 타림분지 일대를 중요시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다. 대표적인 것이 ‘군사적 측면’(전략적 목적)과 ‘에너지 공급측면’(경제적 이익), 중국 서쪽 국경의 공고화와 풍부한 지하자원의 개발 때문이다. 티베트나 신장성이 독립하고, 여기에 다른 나라 군대(미국 러시아)가 주둔이라도 하면, 중국은 두 발을 편히 뻗고 자기 힘들다. 신장성 지하엔 엄청난 양의 석유도 매장돼 있다. 몇몇 전문가들은 타림분지 밑에 700억 톤 가량의 석유가 매장돼 있을 것으로 추산한다. 사우디아라비아 석유매장량의 두 배에 해당되는 양. 경제개발을 최우선 정책으로 삼고 있는 중국이 어찌 신장성의 독립을 지켜만 보겠는가.
여기서 잠깐 ‘투르크’(Turk)라는 말을 살펴보자. ‘터키인’이라는 뜻으로, 투르크족이 사는 지역은 흔히 ‘투르키스탄’으로 불려진다. 투르크에 이스탄(지역이란 뜻)이 붙은 투르키스탄은 ‘터키인의 땅’을 뜻하는 이란어며, 동·서 투르키스탄(=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구분된다. 동투르키스탄은 중국의 신장위구르자치구며,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우즈베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 등이 서(西)투르키스탄에 포함된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이 지역은 인도유럽 인종, 또는 이란계 인종(이란의 인도·유럽계 인종)의 거주지였다. 돌궐(突厥) 지배와 위구르인의 서방 진출(9세기 중엽)이 이뤄진 300년 뒤인 12세기 말경 동투르키스탄 지역이 완전 투르크화됐다. 서투르키스탄은 티무르 제국(1369~1508) 지배를 거쳐 남러시아의 킵차크한국 자손인 우즈벡족이 이란인들을 멸망시키고, 시르다리아강 이남의 비옥한 땅을 차지한 이후 투르크화가 이뤄졌다. 물론 아직도 이란인이 조금 남아 있다.
야르칸드, 한 때 서역 최강국으로 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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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야르칸드 거리에서 만난 위구르 모자. |
상념이 끝나자 야르칸드 시민들의 얼굴이 다시 보였다. 야르칸드도 한 때 서역 최강국으로 군림한 적이 있었다. 전한(前漢. 기원전 206~기원후 5)과 왕망(기원전 45~기원후 23)의 신(新. 기원후 8~25)이 멸망하고 후한(後漢. 기원후 25~219)이 들어설 즈음 중국은 서역에 진출할 힘이 없었고, 흉노도 세력이 약화돼 서역 전역은 독립왕국들이 들어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당시 사차(야르칸드)는 서역남도 최대강국으로 발전, 현왕(賢王) 때 선선·호탄·쿠차 등 서역남북도상에 있는 모든 나라들을 복속시킬 정도였다. 그러다 73년, 반초(班超. 33~102)의 서역평정으로 차차 세력이 위축됐지만, 반초가 25,000명이나 되는 군대를 이끌고 와 사차를 제압했다고 하니 당시 야르칸드국의 위세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점심을 먹고 호탄을 향해 다시 달렸다. 1시간 정도 가니 엽성(葉城), 카르가릭(Karghalik)이 나왔다. ‘카르가릭’이란 새가 모여든다는 뜻. 사막에 새가 모여든다는 것은 그곳이 그만큼 풍요롭다는 의미와 통한다. 당나라 현장스님도 카슈가르와 야르칸드를 지나 이곳에 도착했다.〈대당서역기〉엔 이렇게 적혀있다. “작구가국의 둘레는 1000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0여리에 달하는데, 사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두 강을 끼고 있어 농사가 아주 잘 되며, 포도·배·능금과 같은 과일들이 아주 풍성하다.”
그런데 “카르가릭 사람들은 조급하고 난폭하며 풍속은 남을 속일 줄만 알고 공공연히 겁탈과 강도짓도 일삼는다. 예의가 경박하고 학예도 비천하다. 삼보(三寶)에 대한 믿음이 돈독하고 복과 이익을 짓는 행동을 즐긴다. 가람은 수십 곳 있는데, 대부분 무너졌다. 승도는 100여명 정도 있으며, 이들은 대승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다”고 기록해 놓았다. 난폭하며 남을 속일 줄만 아는 사람들이 어찌 삼보에 대한 믿음이 돈독할까. 현장스님이 무언가 잘 못 기록한 것은 아닐까.
안내인에게 물으니 “남아있는 불교유적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곤륜산맥을 오른쪽에 두고, 타클라마칸 사막을 왼쪽에 안은 채, 차는 계속 달렸다. 언제부터인지 한낮의 폭염(暴炎)이 차창 밖 대지(大地)를 달구고 있다. 대지의 폭염을 구경하며 달리고 또 달렸다. 황량한 사막과 흰눈을 머리에 인 곤륜산맥, 그리고 간간이 보이는 평원의 잡초가 전부다. 너무 더워 그런지 “위로는 나는 새 한 마리 없고, 아래로는 달리는 짐승 한 마리 없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망망하여 도무지 가야할 길을 찾지 못하겠다”는 법현스님의 〈불국기〉구절이 떠오른다. 구마를 지나 1시간 정도 달리니, 저 멀리 무성한 백양나무 숲이 보였다. “드디어 연옥(軟玉)의 고향 호탄에 도착했구나!”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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