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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8일.토요일)신년산행! 구로 올래투어자리배정표 .= 아래 좌석은 지난 3월산행 임시 예약석 입니다, 2017년 2월산행은 다시 신청하는 순위로 (조정합니다,) -신청하시길 바랍니다, | |||||||||
기사님 |
| 예비석명단. 회장 :깁중환 부회장:김광연 부회장:정미숙 총무:손경희 재무 :임화준 *산행 신청시 지정한 좌석에 앉아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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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조 | ||||
1 | 주혜숙님 | 2 | 이판임님 | 3 | 김중환님 | 4 | 손경희님 | ||
5 | 황규제님 | 6 | 장순심님 | 7 | 강현구님 | 8 | 한순화님 | ||
9 | 정채윤님 | 10 | 김종표님 | 11 | 공무영님 | 12 | 김정희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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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 정명숙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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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 천미자님 | 19 | 차인숙님 | 20 | 이수경님 | ||
21 | 박유순님 | 22 | 이유숙님 | 23 | 김양덕 | 24 | 신재숙님 | ||
25 | 홍해옥님 | 26 | 원성희님 | 27 | 변순자님 | 28 | 함장호님 | ||
29 | 김인순님 | 30 | 김광연님 | 31 | 김영수님 | 32 | 김순자 | ||
33 | 유재복 | 34 | 김종석님 | 35 | 이희숙님 | 36 | 정미숙 | ||
37 | 김경업님 | 38 | 한상연님 | 39 | 이외숙님 | 40 | 황희숙님 | ||
41 | 김영희님 | 42 | 이현숙님 | 43 | 김경미님 | 44 | 송중근 |
희망좌석번호와 이름을 꼬리글에 남겨주시면 바로 지정해줍니다,
자리배정석.
선암사 와룡송.
수령 500여년으로 정호승 시인의 시의 등장인물이다.
선암사 / 정호승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 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 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승선교 昇仙橋
무지개 모양의 홍예교이다.
기단부는 자연 암반이 깔려 있어 홍수에도 다리가 급류에 휩쓸릴 염려가 없으며, 아래부분부터는 장대석을 연결하여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쌓았다. 양쪽 시냇가와의 사이는 자연석을 쌓아 석벽을 이루고 그 윗부분에도 돌을 쌓았는데, 모두 주변의 냇돌을 이용하였다. 다리 한복판에는 물을 타고 사찰에 들어오는 사악한 기운과 잡신을 지키는 공하를 설치하였다.
승선교는 임란 이후 설치하였으며 달빛에 벚은 전설이 전한다.
조선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가 관음보살의 모습을 보기 바라며 백일기도를 하였지만 그 기도가 헛되자 낙심하여 벼랑에서 몸을 던지려 하는데, 이 때 한 여인이 나타나 대사를 구하고 사라졌다. 대사는 자기를 구해주고 사라진 여인이 관음보살임을 깨닫고 원통전을 세워 관음보살을 모시는 한편, 절 입구에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를 세웠다고 한다.
"선암사는 도선국사에 의해 세워진 호남의 3巖 사찰의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더라도 선암사는 승선교,
사찰의 산신각이 민간신앙, 독성각이 단군신앙, 칠성각이 도교사상과 어우러진 즉
불교와 타종교와의 습합 현상으로 여기듯이 仙을 도교와의 관련으로 보고 싶어진다.
비약해서 택도 없는 소설을 이어나가 보면 결국 선암사의 아기자기한 가람배치,
사찰에 드문 조경도 신선이 사는 仙界임을 상징하려고 온갖 꽃과 나무를 조성한 것은 아닐까?"
선암사
542년(신라 진평왕 3)에 아도 화상이 해천사(海川寺)라고 부른 것이 선암사의 기원이라고 전해진다. 사적기에 의하면 875년(헌강왕 1)에 도선 국사가 남방비보를 위해 경상남도 진주 영봉산의 용암사, 전라남도 광양 백계산의 운암사와 함께 선암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1092년(고려 선종 9)에 대각국사 의천이 크게 중창했으나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었다. 1660년(조선 현종 1)에 경잠·경준·문정이 재건을 시작했고, 1698년(숙종 24)에는 호암 약휴선사가 원통전을 짓고 그 안에 목조관음보살상을 봉안했다.
1701년에는 약 30년간에 걸쳐 완성된 불조전에 과거 53불을 비롯한 60여 구의 목조불상을 봉안했으며, 대웅전의 개수 및 선암사 입구의 석조 다리인 승선교 축조 등 대대적인 확장과 정비가 이루어졌다. 1819년에 불이 나서 건물들이 소실되자 곧 상월이 중건했고, 1823년 다시 불이 나자 해붕·눌암·월파 대사 등이 중수하여 대규모 가람을 형성했다. 이 절은 1911년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사찰령과 사찰령시행규칙에 따라 31본산 중의 하나가 되었다. 6·25전쟁 때 많은 건물과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조계종과 태고종단에서 선암사의 소속을 놓고 논란이 되기도 했으며, 태고종의 총본산이며 조계종 20교구 본사이다.
선암사, 송광사의 주봉인 조계산 장군봉의 위용입니다,
선암사의 천년 향나무,
동리산문과 선암사
선암사는 조계산의 품안에 안겨있는 고즈녘한 절이다. 지금은 비록 자그마한 규모를 가지고 있지만 고려․조선시대에는 상당한 성세를 자랑하던 절이다. 현재 태고종 중앙 총무원이 자리잡고 있다.
선암사에 관한 내력은 신라말 료공 도선(827-898)에까지 소급해 올라간다. 도선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후백제 견훤의 왕사였던 경보의 스승이고 동리산문을 개창한 적인 혜철의 제자이다. 최근에 들어 드라마 ‘태조 왕건’의 등장에 등장하여 왕건의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도선은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풍수지리설의 비조로 많이 알려져 있다. 풍수지리설은 원래 중국에서 기원한 택지법(擇地法)으로 晋의 곽박(郭璞)이 유명하다. 이 풍수지리설은 지금은 묫자리 잡는 법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원칙적으로 풍수설은 도시를 건설하기 위한 이론이었다. 이 풍수설은 선종이 수입되면서 신라에도 수입되었다. 그러므로 당시 풍수설에 대하여 상당수 선승들이 알고 있었다. 희양산문의 개창자인 지증 도헌도 지금의 봉암사를 창건할 때 “만약 이 땅에 절을 짓지 않으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절을 짓고, 땅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철불을 조성하여 안치하였다.
그러나 도선이 가장 뛰어난 풍수설의 대가로 알려진 것은 태조 왕건이 훈요십조를 내리면서 “우리 나라의 절은 도선이 점지한 곳에 지은 것”이라고 하면서 함부로 사원을 창건하지 말도록 한 것에서 비롯된다. 그런대 선암사에 가면서 왜 도선의 이야기를 하는가? 도선은 주로 광양의 옥룡사에 주석하면서 동리산문의 선풍을 앙양하였다. 그렇지만 도선이 우리나라의 지기를 누르기 위해 호남 삼암사(三岩寺)의 하나로 선암사를 창건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며, 또 선암사에 도선이 사용하였다는 직인통이 현재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도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찰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선암사와 도선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왔다. 고려 중기 최유청이 찬술한 〈옥룡사선각국사비명〉의 음기에 함통 6년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도선의 후손들만 선암사의 주지를 역임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도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찰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도선이 다시 부각된 것은 고려 인종대였다. 이 때 왜 부각되게 되었을까? 인종대는 이자겸의 난 등 고려 귀족사회가 가장 흔들리던 때였다. 인종의 외조부이자 장인이었던 이자겸은 조선국공으로 책봉되면서 국왕보다 더한 권세를 누리다 인종과 최사전 등의 계획으로 제거되었고, 북방에서는 금(金)이 새로운 강국으로 등장하면서 고려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조정에서는 태조 왕건의 탄생과 삼한일통을 예언하였다는 도선의 권위를 빌려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므로 인종은 도선을 국사로 책봉하고, 도선의 후계자들이 주지를 계승하던 사원에 대하여 특혜를 주면서 그러한 사실을 최유청을 시켜 기록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후 선암사는 운주사와 더불어 도선이 국조(國祚)를 늘이기 위하여 창건한 사찰로 인식되면서 지속적으로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아왔던 것이다.
송광사와 고려 중기 불교 결사운동
지금 조계종 제 21교구 본사인 순천 송광사는 일반적으로 승보사찰로 불린다. 송광사가 승보사찰로 불린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고려 중기 대표적인 불교결사인 수선사가 여기에 정착하여 선풍을 떨쳤기 때문이다.
수선사를 창립한 인물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이다. 지눌은 고향이 황해도 서흥군으로 아버지 광우는 국학의 학정이었다. 요즘식으로 하자면 서울대학교 교수인 셈이다. 지눌은 나이 16세 때인 1173년에 사굴산문으로 출가하였으며, 1182년 승과에 급제하였다. 그가 승과에 합격하였을 때는 무신정권 초창기의 혼란이 극도에 달하였던 시대였으며, 이에 실망한 지눌은 지방으로 퇴거하였다. 지눌은 처음 청평산 문수사로 옮겼다가 예천의 하가산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다시 공산의 거조암(현 은해사 속암인 영천 거조암이다)으로 옮겼다. 여기서 득재의 청으로 정혜사를 결성하였는데, 당시 정혜사의 결성취지는 <권수정혜결사문〉에 잘 드러나 있다. 여기서 지눌은 승려들이 이록(利祿)을 쫓는 풍조를 개탄하고 승려 본연의 자세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지눌의 정혜사 결성은 당시 뜻있는 승려들과 속인들의 공감을 얻어 많은 인사들이 정혜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후에 백련사를 결성하고 주도한 요세도 지눌의 뜻에 공감하여 참여하였다.
그러나 거조암에 모인 인사들이 너무 많으나 거조암이 비좁아 수용할 수 없으므로 지리산 무주암으로 옮겼다가 1200년 송광산의 길상사로 옮기게 되었다. 이 길상사에 정혜사가 정착하였으나 같은 승주(지금의 순천) 관내에 정혜사가 있었으므로 수선사로 결사의 명칭을 변경하였다. 이 때 정혜사에서 수선사로의 변화는 단순한 명칭 변경만은 아니었다. 정혜사가 선교 모두를 포섭하면서 불교계 혁신을 강조했다면, 이제 수선사로의 명칭변경은 선을 중심으로 하는 결사로 변하였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원래 천태종 승려였던 요세는 수선사의 방침에 반발하여 강진으로 가서 백련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수선사로 명칭을 변경한 지 5년 뒤인 1205년(고려 희종 원년)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희종은 친필로 수선사의 현액을 써주고 지눌에게 가사를 내려 주었다. 지눌은 그로부터 5년 뒤인 희종 6년(1210) 입적하였으나, 지눌의 뒤를 이어 혜심이 수선사의 주법을 계승하였다.
지눌의 사상은 정혜쌍수, 돈오점수로 정리될 수 있는데 선을 중심으로 하면서 교를 같이 겸수하는 것이며, 깨달음 뒤에도 지속적으로 수행하여야 한다는 이론이다. 지눌의 돈오점수사상은 선종의 두 가지 흐름인 돈오돈수론과 점오점수론을 절충한 것으로 고려 선종의 독특한 오도론이라고 할 수 있다.
지눌의 사상적 경향은 선을 중심으로 하지만 교를 무시하지 않는 것이 특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지눌 자신이 이통현의 《화엄론》에 상당히 경도되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지눌 이후 수선사는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다. 지눌을 계승한 혜심(1178-1234)은 고려 무신정권기를 대표하는 대표적인 선승이다. 혜심은 세속에서 과거에 급제한 경력이 있던 인물이었다. 그의 속명은 최식(崔寔)으로 신종 4년(1201) 국자감시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 경력이 있었다. 모친 사후 그는 지눌의 문하에 출가하여 혜심이라는 법명을 받고 수행에 전념했다. 지눌 사후 왕명으로 수선사의 2대 주법에 취임하여 선풍을 앙양하였는데, 국왕과 당시 최씨 집정인 최이의 존숭을 받았다. 그는 고종이 즉위하자 선사의 품계를 받았고, 대선사로 승진하였다. 그는 왕족 이외의 승려로 승과를 거치지 않고 승계를 받은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또한 선의 체계화에 힘써 간화선을 집대성한 《선문염송》을 저술하였다. 이 《선문염송》은 1700여 칙(則)에 달하는 방대한 화두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조선시대까지 승과의 교재로 이용되었다. 그는 시문에도 상당한 능력을 발휘해 그가 저술한 시와 문장은 《무의자시집》으로 정리되었다.
혜심의 제자인 충지(1226-1292)도 과거 급제자 출신이었다. 충지는 속명이 위원개로 19세의 나이로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관료생활을 하다가 출가한 경우였다. 그는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온 경력이 있었으며, 당시 관계에서 상당히 촉망받는 인재였다. 그러나 그는 28세에 출가하여 혜심의 문하에서 수행하였으며, 출가할 당시 수도인 강화를 떠나면서 다시는 수도에 돌아가지 않으리라 맹세하고 그 것을 지킨 것으로 유명하다. 충지가 살았던 당시 불교계는 수선사를 후원해 주던 최씨정권이 몰락하고 새로운 무신집정인 김준-임연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변화기였다. 그는 다시 세속에 관여하지 않으리라는 맹세를 지켜 주로 김해 감로사에 주석하면서 수행하였으나, 무신정권이 몰락하고 고려가 원의 지배로 들어가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정계에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충지의 수행을 들은 원 세조가 충지를 초빙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대신 5대 주법 원오의 뒤를 이어 수선사의 6대 주법으로 취임하였다. 그의 저술은 《원감록》에 정리되어 있는데 당시 피폐했던 고려사회와 민에 대한 애정을 깊이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수선사의 흐름은 정혜쌍수로 표현되듯이 일정정도 학문적인 지식이 배경이 되어야 했다. 지눌 이후 수선사의 주법이 된 승려들은 상당한 정도 시문에 능력이 있었고, 경전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때문에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지눌의 수선사운동을 지식인 중심의 운동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수선사 계열의 사상적 흐름은 고려말기 나옹 혜근(1320-1376)까지 연결되어 조선초기 불교사의 큰 흐름과 연결된다.
이러한 승려들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송광사는 승보사찰로 불리게 된 것이다.
5월산행은 =홍천 (살둔 사가리) 갑니다,
첫댓글 원래는 함백산 코스였으나~ 봄철 입산금지 인지라~ 남도 벗꽃놀이와 천년 불심 길! 그리고 천년기념물 홍매화 감상도 할겸 선암사~송광사 천년불심길 조계산으로 변경하였습니다,
06시 30분에 출발합니다, -약 30분 단축하여 출발하니 꼭 시간 지켜주세요.
멋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