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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정론
-경계를 허문 화엄을 향한 여정
김우연
1. 단시조와 두 수의 연시조
김미정 시인은 첫 시조집『고요한 둘레』(동학사, 2011)를 발간한 후 5년만에 제2시조집『더듬이를 세우다』(목언예원, 2016)를 다시 세상에 내어놓았다. 꾸준히 시조의 길을 걸어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년이라는 시간의 경과 속에 어떤 변화가 있는가에 초점을 두면서 대강을 살펴보았다.
시조는 정형시이다. 3장 6구 12음보, 45자 내외의 형식 속에 인생과 우주를 해석하고 담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시와는 달리 참신한 비유와 함께 응축, 정제, 절제, 비약 등의 시조 고유 특성을 발휘할 때 단아한 시조가 되는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전시는 시가(詩歌)였다. 오늘날에는 시와 음악이 분리되었다. 자유시는 읽기 위한 시라서 한때 시조도 읽기 위한 시조라야 현대성이 있다면서 맹목적인 추종을 하는 경향마저 일부에 있었다. 정형시인 시조를 두고 음수율에 맞는 시조는 4%밖에 안 된다는 기이한 이론을 들고 나와 지금까지도 일부 시인들은 이 학설을 따르고 있다. 우리말의 특성을 외면하고 중국어나 일본어와 동일시한 글자수의 정형시를 생각하니 정형성이 없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음보율 위주로 생각하면서 음수율을 임의대로 변형할 수 있다고 오해한 것이다. 음수율을 무시하고 음보율을 강조하면서 구의 파괴나 장이 연의 구실을 하는 시조의 특징을 무시하고 시조의 음악적 특성을 파괴하는 것이 현대시조인 양 오해하는 시인들마저 생겨났다. 배행법도 지나치게 다양하게 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자유시로 읽히게 하는 것이 좋은 시조라는 착각을 하기도 한다. 근대 과학에서 햇빛이 입자나 파동인냐를 두고 100년 동안 논쟁한 결과 빛은 입자이면서 파동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마찬가지로 시조의 정형성이 음수율에서 음보율로 옮겼지만 그 어느 하나만으로 만족시키는 정형이 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조동일 이론의 모순을 파악한 원용우는 “시조의 율격은 음수율과 음보율이 동시에 적용되어야 한다.”(『우리시대의 문학과 인생』(2011)고 말하고 있다. 글자수를 꼭 맞추어야 하는 음수율의 정형시는 시조에 없었지만 한 두자 가감이 허용되는 45자 내외의 작품이 85% 정도 되는 것으로 보아 음수율을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형식에 대해서는 별로로 논의해야 할 것으로 이것으로 줄이며, 김미정 시인의 시조는 우선 시조 형식이 탄탄하여 시조의 특성을 잘 발휘하고 있었다.
첫 시조집과 2시조집 사이의 가장 큰 형식상의 특징은 1)단시조가 대폭 늘어난 것이다. 2) 3수의 연시조 위주에서 2수의 연시조 위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3수는 두 시조집 모두 장별 배행을 위주로 하고 있으나 2수의 연시조에서는 배행을 다양하게 함으로써 변화를 주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시형식을 살펴보면 첫 시조집에서 단시조 12편(13%), 2수의 연시조 18편(19%), 3수의 연시조 57편(60%), 4수의 연시조 7편(7%)이다. 제2시조집에는 단시조 22편(29%), 2수의 연시조 44편(59%), 3수의 연시조(12%)로 나타났다.
이렇게 볼 때 김미정 시인은 정형시인 시조의 본령은 단시조에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압축, 절제미를 향하여 치열한 시의식을 가진 것을 알 수 있다. 연시조는 3수보다는 2수가 더 압축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장경렬의 주장처럼 연시조가 “연의 수를 임의로 결정함으로써 정형시에 걸맞지 않는 창작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자칫하면 이는 시조의 정형성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고 볼 때 2수나 3수의 연시조가 바람직하다고 본다. 실제로도 대부분이 시조단에서는 2수나 3수의 연시조 위주로 발표되고 있으며, 갈수록 3수에서 2수의 연시조가 늘어나고 있다.
첫 시조집에 비해서 형식상으로 단시조가 늘어난 것과 3수의 연시조 위주에서 2수의 연시조 위주로 한 것은 이번 시집의 형식에서 가장 큰 특징이다. 정형시인 시조를 향해 치열하게 노력을 하고 있음을「짝사랑」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2. 시조 사랑
그 깊이 다 몰라도 닿고 싶은 네 안에//
더듬어 잡히지 않는 아득한 그림자//
한 번도 격렬하지 못해 흐름조차 막히고,//
쉽사리 흔들리고 뿌리를 드러내도//
마음을 주무르고 상처에 말을 걸면//
물오른 마흔다섯 글자 시가 되어 꽃필까//
-『짝사랑』전문(『더듬이를 세우다』)
“물오른 마흔다섯 글자 시가 되어 꽃필까/”에서 45자 내외로써 시조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쉬운 길이 아님을 “더듬어 잡히지 않는 아득한 그림자”라고 첫째수에서 겸손하게 말하고 있다. 쉽게 시를 쓰는 시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마음을 주무르고 상처에 말을 걸면”이라며 자신의 내면과 이웃과 사회를 향해서 위안을 주는 시를 쓰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판을 위한 비판의 시는 목소리가 높지만 위안을 주는 시는 따뜻한 눈으로 바라본다. 비유와 상징을 통해서 드러내는 시들이 많기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를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거나 목소리를 조용하게 함으로써 행간의 울림을 크게 하고 있다. 이미지라는 자신의 시 창작 태도가 반영된 것으로 형식과 내용과 표현에서 자신의 빛깔과 향기를 찾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폭포에서 그 단아한 시조를 만나게 된다.
“목이 타는/ 긴긴 여름// 허리춤에/ 감추고 와// 돌아갈 수/ 없는 길을// 쉬지 않고/ 달려서// 한사코/ 건네주고 간// 무명털실/ 한 타래// 내 안의/ 그리움// 올올이 흩어진다// 말이 되고/ 노래 되고// 마침내/ 날개가 되어// 한순간/ 직립의 환상,// 꿈길처럼/ 빛난다.(「폭포」전문, 『고유한 둘레』)
첫째 수에서는 시원한 폭포수를 따뜻함을 간직한 ‘무명털실/ 한 타래’로 참신하게 비유하였으며, 둘째 수에서는 ‘내 안의 그리움’을 시로 승화시켜서 “한순간/ 직립의 환상”이라고 하여 수직으로 떨어지는 폭포수와 같은 시를 쓰겠다는 것이다.「폭포」는 첫 수에서 서경, 둘째 수에서는 서정으로 표현하여 서경과 서정을 잘 조화시켰다. 시의 대상을 첫 수만으로 서경으로 처리하여 상징화시키고자 한다면 시의 압축력은 높일 수 있지만 독자에게 전달력은 부족할 것이다. 단순 서정시로 읽힐 가능성이 높다. 어디에 초점을 둘 것인가는 시인의 의도에 달려 있는 것이다.
3. 시인의 길
김미정 시인은 등단 7년 만에 첫 시조집을 엮은 ‘시인의 말’에서“작은 집 한 채, / 이렇게 마련하고 / 또 다른 나를 찾아 길을 떠난다.”고 하였으며, 5년 후 제2시조집에서는 “또 다른 나를 찾아 떠나온 길”, “”내 안의 고요한 힘을 믿고, 또다시 떠나야한다“고 하였다.
시인의 삶이란 길을 가는 것이며, 그것은 유한한 존재로서 다양한 이름과 역할로서 살아가는 길이기도 하지만 결과는 영원을 향한 몸짓인 시조를 향한 구도의 길일 것이다. 그 길에는 자신만의 발자취와 향기와 소리가 담겨지는 것이다. 김미정 시인은 자신의 목소리를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헤럴드 블룸이 말한 “잘못 읽기(誤讀)”가 곧 “좋은 읽기”라는 역설처럼 연상적 독서를 통하여 음미하여 시인의 정신 세계를 나름대로 찾아 읽을 수 있다. 시의 언어는 묘사나 서술의 언어가 아니라 연상의 언어, 울림의 언어라고 한다. 그런데 제2시집으로 오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좀 더 드러냄으로써 독자에게 감동이 더 직접적으로 전해지거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더 구체적이고 세부적이면서도 시적 표현을 탄탄하게 함으로서 높은 시적 성취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김미정 시인은 자신을 찾기 위해 길을 간다고 하였는데 시를 통하여 그 길을 찾을 수 있다.
만들어진 그 위에도 만들어갈 길 있음을 보이는 곳에서만 애써 찾던 나에게 이국땅, 넓은 평원 가르며 가르쳐준 길이 있다
간만큼 멀어지고 무심히 내어주는 두 갈래 서너 갈래 가파르게 흩어져도 지상의 잃어버린 길, 이젠 지울 수가 없다
턱없이 곧게 세우고 바라보던 먼 곳도 한순간 지나쳐서 길이 되는 뒷모습, 보이지 않는 곳으로 멀리 흘러가고 있다.
-「길」전문(『고요한 둘레』)
첫째 수에서는 “보이는 곳에서만 애써 찾던 나”가 “간만큼 멀어지고 무심히 내어주는” 길을 알게 된다. 현상계는 생성과 소멸은 동시에 이루어지듯이 방향의 문제이다. 간 길만큼 사라진 것도 새로 얻은 것도 없이 길은 그대로 있는 것이다. 우주의 시간과 공간 중에서 시간의 흐름만이 변했을 뿐이다. 그래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한다. 그래서 “턱없이 곧게 세우고 바라보던 먼 곳도 한순간 지나쳐서 길이 되는 뒷모습, 보이지 않는 곳으로 멀리 흘러가고 있다.”이라며 먼 곳의 한 지점도 한순간 지나치는 것이요 앞이던 길이 뒤로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멀리 흘러가는 것이다”라며 우주적인 흐름 속에서 유한자임을 나타내는 웅혼한 시상을 담고 있는 것이다.
제2시조집 마지막 작품인 강월헌에서도 이런 시간관을 보여주고 있다. “탑은 강에 기울어/ 저 달을 / 끌어당기고 // 나무는 / 탑에 기울어 / 슬며시 / 기대서도// 곱다시 기울어지는 건 / 흐름속의 / 저, / 달뿐”이라고 하였다. 불교의 연기사상을 담고 있다. 모든 것은 서로 의존적인 관계인 것이다. 그러나 ‘탑’이 ‘달’을 끌어당기고 ‘나무’는 ‘탑’에 기대는 것은 현상 세계로서 인과 연의 조건 속에서만 형상을 이룰 뿐 본질적인 것은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은 “곱다시 기울어지는 건 / 흐름속의 저, 달뿐”이라며 무한한 시간 속에서 끝없이 변화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언뜻 보면 기행시요 서경시로 보일 수도 있지만 고도의 상징을 동원하여 깊은 뜻을 품고 있는 작품이다.
김미정 시인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고 성찰하는 대상물로 두드러지는 것은 역사적인 소재, 차(茶), 생활주변, 바다와 강과 산 등의 자연, 사회현실문제, 그리고 서정시의 오랜 바탕인 자신의 삶의 기억들 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다양한 소재들을 통하여 시인은 무엇을 찾고 있는가? 그 길은 무엇인가?
4. 화엄의 길을 찾다
너른 만큼 깊어지면 닿을 수 있을까
춤추듯 밀려가다 저기 환한 허공으로
바람이 쓸어 갈 때면 텅 빈 하늘 한쪽
하루는 또 길어서 익숙해진 발돋움에
낡아빠진 이정표 길 위에 비켜서서
단 한 번 절정도 없이 이내 무너져 내린다
맨살 맨몸으로 세워가는 그림자의
서걱대던 귀엣말이 갈잎 속에 흘러들면
가슴에 담을 수 없어 묵연히 지워간다.
-「무진은 안개 속에 있다」전문(『고요한 둘레』)
길 위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끝없는 물음이기도 하다. 답이 어디 있을 것인가. 답을 찾았다하더라도 끝없는 실천이 따르는 것으로 끝없는 길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무진은 안개 속에 있다’며 그 실체에 도달하기는 어려운 길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너른 만큼 깊어지면 닿을 수 있을까”라며 그 본향에 닿기를 소원하고 있다. 그러나 “낡아빠진 이정표 길 위에 비켜서” 있으며 “이내 무너져 내린다”며 안개 속에 아득하기만 하다. 그래서 끝내 “가슴에 담을 수 없어 묵연히 지워간다.”며 길은 아득히 먼 곳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미망 속에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요. 시인으로서 갈 길이 멀고, 자기의 목소리와 빛깔의 시를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시인이 찾고자 하는 길의 단서는 첫 시집 여러 곳에서 드러나는 ‘경계(境界)’라는 단어이다. 첫 시집에서 맨 앞에 놓친 작품에서 ‘경계’가 나타난다.
모든 걸 덮겠다는 약속은 잊었나요
하늘과 땅의 경계 그 마저 허물더니
내 눈길
닿은 곳으로 다시
길을 여는
당신
-「눈길」전문(『고요한 둘레』)
눈이란 세상의 모든 것을 덮어 한 빛을 이루게 한다. 그것은 평화의 세계요 조화의 세계이다. 여러 존재나 상황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화엄(華嚴)의 사상이다. 눈 덮인 세상이란 그 조화를 넘어서서 완전 일체가 된 경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초장에선 “모든 걸 덮겠다는 약속은 잊었나요”라며 그 완전함에 도달하지 못한 안타까움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내 눈길/ 닿은 곳으로 다시/ 길을 여는/ 당신”이라며 “하늘과 땅의 경계를 그마저 허물”어 버리는 길을 찾는 것이다. 여기서 당신이란 시인이 추구하는 진리의 본체, 또는 절대자일 것이다. 제목의 ‘눈길’이란 자연의 눈이 내린 곳의 길이요 종장의 길은 인체의 길이지만 둘 다 중의적으로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으나 뜻은 변함이 없다. 또 “경계를 허무는 그 사이 달빛이 스며든다.”(「숲-여자1」)라고도 하였으며, “경계를/ 지우는 일이면/ 흔적마저 사윌까.”, “투명한/ 유리창을 경계로/ 대치되는 안과 밖”(「마네킹」), “그늘 그 너른 품이 경계한 햇살까지”(「나무의 말言」) 등에서 나타난다. 다음 시에서는 ‘경계를 떠나 버린 ’ 경지에 도달하기도 한다.
스쳐온 시간들이
포개어져 눈을 뜬다
누우면 일어서고 일어나면 다시 눕고
돌이켜
지울 수 없는 거부 못할 몸짓들
앞모습 뒷모습에
경계를 떠나버린
빛으로 가름되어 허물 벗는 그대와 나
숨어서
풀어놓은 길
나란히 함께 간다.
-「그림자」전문, (『고요한 둘레』)
여기서 그림자란 상징적으로 처리하여 깊은 뜻을 함축하고 있다. 초장에서 “스쳐온 시간들이/ 포개어져 눈을 뜬다”는 것은 의상조사의 법성게에서 말하는 “한량없는 먼 시간이 한 생각이요”(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의 경지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한 생각이란 것도 나 자신만의 것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계를 이루는 것이다. 나 자신 속의 나와 경계를 이루기도 하고, 나와 남의 경계를 이루기도 한다. 깨달은 자의 마음은 법성게 첫 구처럼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습이 없다”(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는 것이다. 그러나 범부들은 항상 깨어있는 상태일 수가 없다. 그래서 중장에서 “누우면 일어서고 일어나면 다시 눕고”라고 본심 상태에 머물지 못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드디어 둘째 수에 오면 “앞모습 뒷모습에/ 경계를 떠나 버린”이라 하여 수없이 일어나는 생각들의 경계가 떠나버린다. 삼조(三祖) 승찬대사(僧璨大師)는 ‘신심명(信心銘)’에서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니라.(至道無難이요 唯嫌揀擇이니 但莫憎愛하면 洞然明白이라”고 하였다. “경계를 떠나 버린”에서 추구하는 것도 지나온 무수한 세월 속에서도 내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는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다. 업(業)의 소멸과 저 ‘밝은 마음’의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다. 지나간 것이나 현재 마주 하는 어떤 대상이나 상황에 대해서 ‘사랑함’과 ‘미워함’의 양극단의 집착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평정심을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빛으로 가름되어 허물 벗는 그대와 나”라고 하며 새롭게 태어났음을 노래하였다. 나름대로 추구하는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나 무명(無明)이란 어떤 계기를 만나면 홀연 한 생각이 다시 일어나기 때문에 제어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숨어서/ 풀어놓은 길/ 나란히 함께 간다.”라며 자기 마음을 잘 제어하고 있다. 그래 ‘나란히 간다’고 한 것이다. 저 유명한 심우도(尋牛圖)의 6번째 단계인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기우귀가(騎牛歸家)는 것을 떠올리게 하는 역동적 심상으로 끝맺으며 여운을 남기고 있다. 시인이 삶 자체가 종교적인 수행을 하고 있는 지는 알지 못하지만 이미 화엄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종교와 삶을 나누는 것 자체가 이미 ‘두 상’에 머문 것으로 시인은 그러한 것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첫 시집「화엄사행」은 네 수의 연시조인데 마지막 수에서 “스스로 상처 내어 울음으로 길을 내는// 물소리, 삶이란 정녕 저 계속 물 같은가// 화엄(華嚴)에 이르는 길은 끊어져서 몸을 다시 잇는다”라고 화엄의 길이 어떠한가를 보여주고 있다. 여울을 흐르는 물은 소리를 내면서 흐른다. 우리의 삶도 본질적으로 고해(苦海)라고 한다. 그러나 물처럼 가다가 큰 바위를 만나면 돌아서 가면서 제 갈길로 가는 것이 순리요 화엄의 길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흔히 고난을 만나면 남 탓으로 돌리고 있는 사회적 현상을 본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인간관계 속에서 얽힌 갈등은 물처럼 그렇게 흘러갈 때 해결될 것이며 이것이 화엄의 세계라며 자신이 찾은 길이 화엄의 길임을 밝히고 있다. 화엄의 핵심 사상은 조화가 아니던가.
자신을 찾고 본심을 유지하고 하는 삶의 근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아마 다인(茶人)으로서 항상 자신을 성찰하기 때문이라 본다.
5. 차향(茶香)이 시향(詩香)
김미정 시인은『시조21』에 연작으로 차와 관련한 시와 삶에 대한 이야기들은 다인(茶人)으로서 높은 정신적 경지에 있음을 많은 시인들이 느끼고 있다.
홀연히 내게로 와 긴 사연을 푸시는 이
가시어낸 슬픔마저 향기로나 피어내면
찻잔 속 새벽 산 하나 정좌(靜坐)하여 앉는다
한 모금 다시 한 모금 머금은 순간마다
떨리는 목젖 너머로 다가오는 그리움이여
어쩌면 짐작하겠네, 버려야만 얻는 이치를
물속에서 깨어나는 푸른 뜻은 내 모르고
수없이 흔들리는 마음의 중심 안에
인연(因緣)의 두터운 의미, 산빛으로 포갠다.
-「차를 마시며」전문, (『고요한 둘레』)
다선일미(茶禪一味) 또는 다선일여(茶禪一如)라고 하여 차를 마시는 것은 진심을 찾는 수행의 하나로 선가에서 이어왔음을 알 수 있다. 다인(茶人)들의 차를 마시는 것 또한 본심을 찾는 길이요 마음의 평정을 찾는 길일 것이다. 화두(話頭)를 든다는 것은 펄펄 끓어오르는 용광로처럼 불순물을 걸러낸 순수한 상태처럼 깨어있는 의식을 찾는 길이기도 하다. 그것은 중도(中道)의 길이요 화엄(華嚴)의 길이기도 하다. 시인 또한 ‘차를 마시며’ 본심을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차를 마시는 것은 집에 마련된 ‘다실’일 수도 있고 산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승속에 처한 공간이야 무슨 의미가 있으랴. 이미 온갖 ‘경계’를 허물어 버리고 유유히 살아가고 있는 시인의 모습을 앞에서도 볼 수 있었다.
첫째 수에서 차를 마시면서 ‘홀연히’ 한 생각이 일어난다. 홀연히 한 생각을 일으키는 것은 선가에서는 무명이라 한다.(忽生一念名無明) 그런데 ‘가시어낸 슬픔마저도 향기로나 피어내면’이라 하여 슬픔마저도 끝내 맑은 향기로 승화시킨 것이다. 그러니 “찻잔 속 새벽 산 하나 정좌(靜坐)하여 앉는다”며 평정심을 가지게 된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무명은 집착에서 생긴 것이니 그런 상태를 넘어선 것이다.
둘째 수에서는 “버려야만 얻는 이치를”이라고 하여 집착을 떠난 상태에서 얻은 환희를 표현하였다. 그래서 “떨리는 목젖 너머로 다가오는 그리움이여”라며 자신의 가장 중심에 있는 마음의 순수한 상태 또는 이 순수한 상태로 소중한 인연과 소통하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게 된다. 차를 마시는 것은 그 순수함을 마시는 것이요, 순수함을 회복하였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수에는 짐짓 “물속에서 깨어나는 푸른 뜻은 내 모르고”라며 반의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푸른 뜻’을 알았기에 말을 하는 순간에는 역설적으로 ‘푸른 뜻’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 절대의 경지를 말로서 표현할 수 없으며 말로써 소통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배어나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래서 결국은 ‘홀연히’ 새로운 생각들이 일어나더라도 “인연(因緣)의 두터운 의미 , 산빛으로 포갠다”며 말없이 진심의 상태에 들게 되는 것이다. ‘산빛’이란 ‘푸른 뜻’과 같은 말로서 진심을 뜻하는 것이리라.
이처럼 김미정 시인에게 차를 마시는 것은(茶)는 자신을 찾는 길이며, 수행의 길이며 진심(眞心)을 회복하는 길임을 알 수 있다. 끝없이 일어나는 무명이기에 끝없이 차를 마시리라 본다. 그래서 평소에 항상 미소를 띤 김미정 시인도 단순히 타고난 성품 탓은 아니었음을 이 시를 통하여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명이 차를 마실 기회가 있어 10년이 넘도록 살펴보아도 몸무게가 일정함을 유지하는 데 무슨 비결이 있느냐? 아니면 특별한 운동을 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식사는 밥을 많이 먹어요. 그리고 간식은 안 합니다. 특별히 하는 운동이 없어도 몸무게의 변화는 없어요.”라고 하였다. “특별한 음식은?”이란 질문에서 “건강이나 몸매 유지를 위한 특별한 음식을 먹는 것은 없고 차(茶)는 마셔요.”라고 하였다. 근일스님께서는 참선오계를 설명하시면서 “음식 조절이 제일 힘들어요”, “참선오계 중 음식을 첫째로 들기에 좀 뭐해서 세 번째에 넣었다.”고 하셨다. 김미정 시인의 답변을 듣고 내심으로 깜짝 놀랐다. 오늘날 다이어트 유행처럼 바람이 불고 있다. 조벽 교수도 다이어트의 핵심은 음식 먹는 양을 줄이는 것이 운동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고 하였다. 누구나 알 수 있는 평범한 상식이 진리인 것이다. 그러나 실천은 어려운 것이다. 수행이란 현실세계를 떠나서 어디 있겠는가. 김미정 시인은 밥 이외에 간식을 잘 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수행인이라 할 수 있다. 거기다가 다인(茶人)으로서 마음에는 “산빛까지 포개”고 있으며 그 결과 항상 미소를 머금고 있으니 차 향기가 시에서도 배어나는 것이다.
이밖에 차를 소재로 한 것으로는「가락차」에서는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이 바다를 건너 김해로 오면서 차씨앗을 가져와 김해지역에 전파한 것으로 전해지는 설화를 바탕으로 하였다. “수천 년 가슴 조여 온 드맑은 바람입니다.”라며김해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차를 통한 동양정신의 뿌리를 찾고자 하고 있다.
「황다인 정다(丁茶)」에서는 ‘다산(茶山)을 그리며’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 강진 땅에서 손수 차나무를 재배하고 차를 만든 것을 노래하면서 고통 속에서도 다산초당(茶山草堂)에서 저술한 목민심서에 나타난 그의 정신세계를 찬양하였다. 그의 고매한 정신 세계를 차의 맑의 향기에 빗대어서 “버려서 얻는 자유, 혹은 그 빛깔처럼” “목민(牧民)의 먼 새벽바다. 향기만이 드맑아”라고 하였다.
「일지암에 올라」에서는 초의선사가 거주한 일지암을 소재로 노래하였다. 초의선사는 조선 후기 흔적이 사라질 위기에 놓인 한국 차의 우수성을 복원, 차 문화를 중흥시킨 인물이다. 다인으로서 그에 대한 찬양의 노래이자 선사처럼 차를 통한 자신의 수행을 다짐하고 있는 작품이다. ‘일지암’에 가서 “근심이야 대숲에 스쳐가는 바람이리”라며 깨달음을 노래하고 있다. 첫 시집의 맨 뒤에 놓인 작품으로 “벗이여 다향(茶香)일랑은 가슴 깊이 담아 가자오”라며 벗에게 권하고 있다. 김미정 시인은 조용한 목소리마저도 잘 드러내지 않고 이미지를 통하여 상징적으로 처리하여 독자의 안목으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여운을 남기는 시적 표현이 많은데 94편의 첫 시집의 마지막 작품의 셋째 수 종장에서 벗에게 권하고 있다. 한 권의 시집 중에서 유일하게 단 한번 권하는 말이 마지막 작품의 마지막수 종장에 두고 있다. 그래서 이 시집을 읽고 나서도 “근심이야 대숲에 스쳐가는 바람이리/ 벗이여 다향(茶香)일랑 가슴 깊이 담아 가자오”라고 반복 또 반복하게 된다. 그러면 다도에는 무외한이지만 저 맑고 고운 차 향기가 방안 가득해지는 것 같다. 또한 변함없는 시인의 미소를 떠올리게 된다. 그 미소는 바로 세상을 향해 곱게 풍기는 차의 향기일 것이다.
그런데 제2시조집에서는 차(茶)를 소재로 한 작품이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경계를 허물다”가 제2시조집에서는 단 한번 밖에 나오지 않는 것과 함께 내용상 가장 큰 특징이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차(茶)라는 것을 통하기보다 좀더 현실에 눈을 돌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차(茶)를 마시는 행위보다 세상을 더 낮은 곳으로, 좀 더 가까이, 또는 더 구체적으로 시를 보는 눈이 열렸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차를 마시는 것은 자아성찰에 머물기 쉽다면 좀더 아픔을 공감하기 위해서는 ‘나를 찾아 떠나는 길’이 좀더 성숙의 단계에 이러렀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그러나 결국은 ‘산은 산이요’라고 볼 때 언젠가 제3시조집에서는 차(茶)가 어떻게 나타날까 궁금하기도 하다. 세상에 걸림없는 모습으로 차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시들이 나타났으면 하는 기대도 있다. 이런 차를 통한 자아성찰은 결국 자신의 길을 찾게 된다. 먼저 시인으로서는 “부끄러움을 알기에/ 서늘한 그 머리맡”이라며 29살에 죽은 윤동주의 순수성을 노래하면서 시인 역시 “죽어서 다시 살아날 부끄러울 수 없는 시”(「부끄러운 시-윤동주」)를 쓰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6. 길을 찾다
첫 시집에서 ‘무진은 안개 속에 있다’고 하였는데 2시집에 와서는 다음과 같이 ‘해무 속에서 길을 찾다’라고 말하고 있다.
중심 잃은 구름이 하나 둘 몸을 던져
아스라이 피워 올린
알개꽃 망울망울
들리네, 신들의 낮은 음성
포로가 된
밤바다
서로를 가둔 적 없는 바다와 구름 사이
서로가 넘지 못한
수평가 지평 사이
보이네, 희부연 그 꽃길이
멀어질 듯
닿을 듯
-「해무 속에서 길을 찾다」전문(『더듬이를 세우다』)
해무 속의 밤바다에서 ‘신들의 낮은 음성’을 듣게 된다. 첫째 수에서 바다안개가 바다를 가두고 포로로 삼았다고 하였다. 그것은 짙은 안개로 우리 눈으로는 바다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다의 파도소리는 안개를 넘어 평소대로 들려오고 있는 것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현상계라면 해무로 보이지는 않지만 바다는 본질에 해당하며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들의 낮은 음성”을 듣는다고 하였다.
둘째 수에서는 그래서 처음부터 “서로를 가둔 적 없는 바다와 구름 사이”라며 변함없는 본질의 상태를 노래하였다. “서로가 넘지 못한/ 수평과 지평 사이”라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것임을 알게 된다. 종장에서는 “보이네, 희부연 그 꽃길이/ 멀어질 듯/ 닿을 듯”라며 ‘희부연 그 꽃길’을 보았다는 것이다. 인생의 길을 어찌 분명하게 보았다고 말을 할 수 있는 것인가. 본 길은 무엇일까? 시인으로서 먼저 자아성찰의 길로 나아가며 밖으로는 여행에서, 생활주변에서 그 길을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7. 역사와 기행
첫 시집과 제2시집에서 중요한 소재로 역사적인 소재와 기행에 대한 것이 다수 나타나고 있다. 이 둘은 서로 공통점이 많이 완전 분리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건과 유물이 우리 역사에서 두드러진 것은 역사적 소재이며 과거를 현재에 재현시키는 성질이 강하게 나타난 것이며, 기행은 새로운 지역이나 사물을 보면서 그 아름다움에 대한 찬탄이나 자신을 돌아보는 성질의 계기가 강한 것은 기행으로 보았다. 첫 시집에서 역사 8편((9%), 기행 15편(16%)로서 1/4을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2시집에서도 5편(7%), 11편(15%)로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김미정 시인에게 중요한 소재 중의 하나가 역사적 소재와 기행임을 알 수 있다.
역사적 소재는 과거 사건을 현재화시킴으로서 생생한 과거의 한 장면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나 역사적 소재를 오늘날에 자신의 시각으로 새롭게 의미를 찾아서 적절한 시적 표현을 하여 성공을 거두기는 누구나 쉽지 않는 일이다. 김미정 시인은 역사적 재현을 생생하게 표현한 것으로는 성공을 거두고 있으나 오늘날에도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는 것에는 다소 미흡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대부분이 시인들이 겪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가슴을 뛰게한 역사적인 사건이나 사물을 노래하고 재현시켜서 많은 사람들이 돌아보게 하는 것도 시적 성취를 이룬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서정시의 본령은 서정이기 때문에 자신의 서정이 좀더 녹아들 때 감동의 폭이 큰 것이라 생각된다. 이것은 모든 시인들의 과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기행의 소재에서는 흔히 아주 경이로운 소재를 만나면 찬탄으로 끝나기 쉽다. 그러나 김미정 시인은 기행의 소재를 가볍게 처리하기보다 깊은 자아성찰과 적절한 비유로 높은 시적 성취를 보이고 있어 기행시의 전범이 될 작품들이 눈에 많이 들어왔다. 자신의 자아성찰의 계기가 된 작품들이 큰 감동을 불러일으키며 시적 성공을 거두고 있다.
버둥대던 손 마디마디
하늘 향해 얼어붙고
눈 더미 숨구멍에
몰아쳤을 두려움마저
차갑게
묻혀버린 시간
봄은
언제
오
려
나
-「해빙-1951년 1월 27일 경기도 양지」전문(『더듬이를 세우다』)
부제목을 통하여 6.25라는 역사적 배경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인터넷 검색을 하면 2014년 6월 27일 중앙일보에는 참여했던 데스포(Max desfor)의 사진이 게재되어 있으며 1951년 ‘대동강 철교’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2014년 우리 나라에서 그의 사진전을 개최하면서 ‘한국전쟁특별전’도 열렸다. 세계적으로 비참한 전쟁의 사진을 통하여 전쟁의 비극과 인간성 상실에 대한 반성과 인간성 회복의 계기가 된 것이다.
‘1951년 1월 27일 경기도 양지’에는 공산군이 퇴각하며 살해한 민간인 사체가 눈더미 속에 숨구멍과 두 손만 드러내고 있어 비참함을 폭로하고 있는 데스포의 사진이다. 6.25가 내란이 아니라 소련, 중국, 미국이 개입한 ‘국제전’이라는 게 이제는 정설이 되었다. 그래서 ‘한국전쟁’이라는 말이 적절한 용어이다. 냉전체제의 산물로서 동족상잔의 비극적 체험은 휴전이라는 냉엄한 현실은 아직도 진행 중에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장의 사진을 바라보는 시인은 “버둥대던 손 마디마디/ 하늘 향해 얼어붙고”라며 죽어가는 한 인간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눈 더미 숨구멍에/ 몰아쳤을 두려움마저//”에서 한 인간의 극한의 모습을 제시하면서 무한히 상상의 폭을 넓히고 있다. 우리의 비극적 현실을 노래하되 누구의 탓이거나 자신의 가치관으로서 역사를 판단하지 않고 끝까지 인간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종장에서 “차갑게/ 묻혀버린 시간/ 봄은 언제/ 오/려/나”라고 하며 눈이 녹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상징적으로 처리되어 있다. “차갑게/ 묻혀버린 시간”이란 사체의 모습이면서 현실 우리민족이 처한 현실이기도 하다. 그래서 “봄은 언제/ 오/려/나”라며 통일을 기원하고 있다. 통일의 그날이 오면 원한도 눈 녹듯이 녹고, 아픔도 감싸 않으며 새롭게 더 높은 차원으로 우리민족 전체의 희망의 길이 열리기 때문일 것이다.
단시조로 처리하여 응축력이 높으며, 한 장면을 통하여 민족상잔의 비극을 돌아보게 함은 물론 인간성에 대한 깊은 반성을 하게 하고 있다. 또한 사실적 묘사이면서 깊은 의미를 간직한 상징적 기법을 통하여 표현이 단단하다. 역사적 소재로서 시적 성취를 이루기에는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이 작품은 크게 성공을 거둔 작품이라 본다. 역사적 소재를 다룬 작품의 전범(典範)이 될만한 작품이라 본다. 대체로 첫 시집의 역사적 소재보다 2시집에서 더 높은 시적 성취를 거두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시인이 관심있게 다루고 있는 역사적 소재에 대해서 치열하게 갈고 닦아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밖에도 「2013, 4·3」(『더듬이를 세우다』)에서는 제주 4·3사건 65돌을 맞이하여 “용서하라/ 용서하라/ 용서하라/ 용서하라/ 파도가 알아차리고/ 예순다섯 번/ 되뇌네”라고 하며 ‘용서하’는 길이 역사적 아픔을 치유하는 길이라고 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되뇌네’라며 조용한 목소리로 표현함으로써 더 큰 공감의 폭을 넓히고 있다. 큰 목소리로 ‘외치네’라고 했다면 시적 감동을 훨씬 부족했을 것이다. 이처럼 시인은 이제 역사적 소재도 아주 효과적으로 표현하며 공감하도록 하는 자신의 보법을 터득하였으며 자신의 길을 걷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해방촌」에서는 “해방촌 백 팔 계단 아래 옛집인 양 들이네”라며 해방과 6·25전쟁후 잠시 머물다가 떠나려고 했던 사람들이 아직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아픔을 노래하여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바람이 부는 대로 솟구치는 하얀 모래
삼킬 듯 포효하듯 난장으로 춤을 추네
도저한 흐름만으로 너그러이 짚어 가던 강
물살을 이겨내고 방향을 바꾸면서
정녕 알고 싶은 건 그 물의 길이일까
스스로 상처 안은 마음, 그 마음의 깊이일까
자운영 키를 낮춰 바람에 제 몸 맡기는
보랏빛 강 언덕과 하동포구 흐린 물빛
실타래 풀어내리듯 풀어서 다시 손잡네.
-「화해-섬진강에서」전문(『고요한 둘레』)
제목 ‘화해’가 주제를 나타내고 있다. 첫째 수에서는 바람, 하얀 모래, 포효, 난장 등을 통하여 ‘도저한 흐름’을 이루는 강의 모습은 우리들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너그러이 짚어 가던 강”이라며 순리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둘째 수에서는 반전이 일어난다. “물살을 이겨내고 방향을 바꾸면서”라며 “정녕 알고 싶은 건 그 물의 깊이일까”라고 묻고 있다. ‘물의 깊이’란 갈등의 근원을 상징한다. “스스로 상처 안은 마음, 그 맘의 깊이일까”라며 갈등의 탓을 남에게 돌리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게 함으로써 감동을 오히려 크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수많은 시련과 갈등을 겪으며 소용돌이 치는 물결처럼 살아가고 있다. 셋째 수에서는 정과 반을 거치고 합의 과정을 이루고 있다. “자운영 키를 낮춰 바람에 제 몸 맡기는”에서 자운영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상대방을 이해하고자 ‘키를 낮추’며 거기다가 ‘바람에 제 몸 맡기는’ 순리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소극적인 모습이거나 상대방에 굴복하는 모습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 갈등으로 목소리가 커지고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모두 자기 중심의 이기심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도 사랑이란 본질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고 했다. 평등을 외치는 자는 남보다 덜 가진 자들이 남의 것을 빼앗겠다느 것을 에둘러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모두 진심의 상태가 아닌 것이다. 희브리민중사를 쓴 문익한 목사님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절대자, 진리, 백성, 요즘 용어로는 정의, 국민 등을 외치는 자는 군인과 정치가들이라고 했다. 우리의 근현대사만 보더라도 명분은 그럴 듯하게 바람을 일으켰다가 실패로 끝난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모두 순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보랏빛으로 가득한 강 언덕과” “흐린 물빛”은 “실타래 풀어내리듯 풀어서 다시 손잡네”라고 화해의 길을 찾고 있다. 흐린 물빛도 더 이상 흐린 물빛이 아니라 노래하며 맑게 흘러갈 것이다. ‘강 언덕’과 ‘물’은 서로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연기(緣起)이며, 화해이며, 조화를 이룬 화엄의 세계이다. 이처럼 평범한 소재를 가지고 인생역정에서 자신을 성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을 갈등을 해소하고 화해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까지 조용한 목소리로 보여주고 있어 성찰과 깨달음을 주고 있다. 여행시로서의 절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런 경향의 시는 이미 2004년 동아일보 당선작인 「왕피천, 가을」에서 보여주고 있다. 왕피천으로 회귀하는 연어들을 소재로 하여 쓴 4수의 연시조인데 넷째 수에서 “건 듯 부는 바람에도 산 하나가 사라지듯// 끝없이 저를 비우는 강물과 가을 사이// 달빛에 길 하나 건져 온몸으로 감는다.”(「왕피천, 가을」부분, 『고요한 둘레』) 라며 “끝없이 저를 비우는”이라며 자아성찰의 모습을 보여준 바 있다. ‘시인의 말’에서 “나를 찾아가는 길”이 곧 여정에서도 끝임없는 자아성찰의 모습을 변함없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키로 서서 바라만 보려할 때
바다는 모로 누워 말씀에 가 닿으려
겹겹이 무늬를 밀어 들어 올린 채석강
해 저무는 외변산 첩첩 쌓인 물결 언덕
풍경이 풍경 속으로 스며드는 그 자리
흐르던 시간이 멈춰 돌아보고 돌아보는
바람은 예까지 와 필사를 도왔으리라
바다가 너른 만큼 다 받아 적었으리라
층층이 깊이를 더해 증거물로 놓인 책
-「채석강 백서」(『더듬이를 세우다』)
기행시를 통하여 자아를 성찰하는 시로서는 누구나 쉽게 도달하기 어려운 시적 성취를 이룬 작품으로 수작(秀作)이다.
채석강은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반도 맨 서쪽, 격포항 오른쪽 닭이봉 밑에 있다. 채석강의 이름은 중국 당나라의 시선 이태백이 달빛 아름다운 밤, 뱃놀이를 하며 술을 즐기다 강물에 비추어진 달을 잡으러 푸른 물에 뛰어들어 그 삶을 마감하였다는 장소에서 기인하는 이름이라고 한다.
이 시는 바닷물에 침식되어 퇴적한 절벽이 마치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한 모습에 착안하여 쓴 것이다. ‘책’ 같다고 누구나 시각적으로 인식하더라도 이 시처럼 참신한 표현을 통하여 울림의 폭을 넓히기는 쉽지 않다.
첫째 수에서 우리가 아름다운 채석강의 겉모습을 보고 즐길 때, “바다는 모루 누워 말씀에 가 닿으려” 끝임없이 침식작용을 하고 있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둘째 수에서는 “풍경이 풍경 속으로 스며드는 그 자리”라며 그림처럼 아름다운 채석강에 저녁 노을을 맞이하여 새로운 진풍경을 연출하고 있음을 노래하였다. 그래서 “흐르던 시간이 멈춰 돌아보고 돌아보는” 환희심에 젖어 있다. 셋째 수에 와서 ‘바람’이 ‘필사’를 도왔다는 상상이 책을 만드는 과정에 적절한 상상력이 동원되었으며, “바다가 너른 만큼 다 받아 적었으리라”는 것도 참신한 표현이다. 그래서 채석강 절벽을 “층층이 깊이를 더해 증거물로 놓인 책”이라고 묘사하였다. 바다가 넓고 다 받아 적었기 때문에 저 오랜 세월에 걸쳐 저 수많은 책을 증거물로 내놓았다는 것이다. 그 책은 독자에 따라 평생을 읽고 탐구해온 것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 울림의 폭이 크다. 자연에 동화하려는 경향은 시조의 오랜 전통이지만 김미정 시인은 참신한 표현을 통하여 울림을 크게 함으로서 자신의 시적 특징을 이루어내고 있다.
“목청을 가다듬으며 소리마다 귀 기울여// 하늘도 땅도 세 평// 아슬아슬 닿는 곳// 서로가// 서로에게 쏠리는// 등 너머를 허락하는,”(「승부역」전문, 『더듬이를 세우다』)에서도 태백산속의 좁은 역사 승부역을 소재로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쏠리는// 등 너머를 허락하는,”이라며 상대방과의 평화, 화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좁거나 작은 것 앞에서는 갈등이 심화되는 것이 보통의 인간 세상인 것과는 다른 정신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김미정 시인에게 여행이란 자신을 찾는 길이며, 이것을 직서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묘사를 통하여 울림을 크게 함으로써 높은 시적 성취를 이루고 있다.
자연 속에서 인생을 해석하고 자신을 찾는 그는 현실 세계, 곧 세상 속으로 그의 눈길과 발길을 돌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연과 우리의 삶이 분리 되어있으면서 그 순수성 속에서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8. 세상 속으로
이양하님은「신록예찬」에서 “사람이란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역시 가장 아름다운 존재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사람으로서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사람 사이에서 울고 웃고 부대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감동을 주는 시는 역시 세상 속으로 걸어들어갈 때 공감의 폭을 넓힐 수 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시인은 그 중에서도 장애인, 노숙자, 청년실업문제 등 낮은 곳으로 시선을 돌려서 노래하고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겪거나 공감을 할 수 있어 보편성을 획득함으로서 감동을 크게 주고 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기에 관심을 보인 것은 2003년 대구시조주최 전국시조공모전 장원으로 세상에 시인의 모습을 드러낸 바 있다.
파 잎사귀 타 들어가듯 마음마저 타는 날
탈골된 시간들이 호명을 기다리는
영천 장 노전을 걷는 노을빛이 시렸다.
명패 하나 걸지 않고도 2대를 퍼질러 온
좌판머리 둘러앉은 싱싱한 저 사투리
누구도 빈속을 채워 줄 주먹밥이 되지 못했다.
발길을 묶는 것은 허기만이 아니었다
쭈그리고 돌아앉아 동전까지 셈하여도
무심한 그림자 끝에 밀려오는 현기증……
잃을 만큼 잃고 보면 오히려 가득해지는
오늘, 이 외상장부를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취기를 감추는 눈에 별 하나가 돋는다.
-「파장(罷場)」전문, (『고요한 둘레』)
고향 영천 장에 파장(罷場)이 되도록 팔아도 “노전을 걷는 노을빛이 시렸다.”며 힘든 모습 나타내는 ‘노을빛’인 시각을 ‘시렸다’로 촉각적으로 처리했다. 팔아도 빈 속을 채워줄 수 없는 것이며, 현기증이 밀려온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잃을 만큼 잃고 보면 오히려 가득해지는”이라며 물질적 고통, 빈곤 속에서도 오히려 넉넉한 마음을 표현하였다. 이 땅의 백성들은 수많은 전쟁과 물질적 고통과 관리들의 착취 속에서도 오히려 달관의 여유를 가짐으로서 생명을 이어온 근원적인 힘이 되었다고 본다. 이 시에서도 그래서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취기를 감추는 눈에 별 하나가 돋는다.”며 희망적으로 잔잔하게 끝맺음으로서 감동을 주고 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손끝으로 하는 말//
다사한 손등 위를 토닥토닥 눌러서//
귀 막고 눈이 멀어도 아프도록 새긴다
절반의 키로 서서 포개지는 그림자//
소리와 빛을 잃은 그대 눈, 귀가 되어//
으늑한 울림을 찾아 더듬이를 세운다
보고, 듣지 못한 시간을 끌어 모아//
당당히 소통하는 둘만의 절대음감//
달팽이 하늘을 나는 꿈 세상 속에 심는다
-「세상 속으로-손의 대화」전문,(『더듬이를 세우다』)
“으늑한 울림을 찾아 더듬이를 세운다”에서 제2시집『더듬이를 세우다』의 표제로 삼은 것을 알 수 있다. 청각을 잃은 장애인이 손으로써 대화를 주고 받는 것을 노래하고 있다. 나아가 시각 장애인은 물론 청각 장애인도 나름대로 당당히 소통하는 것을 “소리와 빛을 잃은 그대 눈, 귀가 되어”라며 그들에게도 희망을 가지도록 응원하고 있다. 그래서 “달팽이 하늘을 나는 꿈 세상 속에 심는다”고 그들에게 희망을 응원하고 있다. 타안에 무관심한 이 시대에 관심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에게는 큰 힘이 될 것이다.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소리가 움직인다// 흩뿌린 화면 가득 먼지 이는 묵점(墨點) 사이// 들리나, 저 말발굽 소리/ 눈 감고도 보이듯…”(「군마도 1969-운보, 비단에 수묵 채색」전문, 『더듬이를 세우다』)에서는 7살 때 열병으로 청각을 잃었으나, 장애를 극복하여 한국 전통화를 현대적으로 이끌었으며 말을 잘 그렸다는 운보 김기창 화백(1913-2001)을 소재로 한 시이다. ‘군마도’는 1969년 작품으로 6마리의 말이 질주하는 모습에 힘과 속도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그런데 말들이 질주하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오도록 공감각적으로 처리하여 단시조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그림을 본 적이 없는 사람도 정말 눈에 말이 달려가는 소리와 모습이 눈에 선하도록 역동적인 이미지를 잘 표현하였다. 그러면서 장애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밑에 깔고 있어 더욱 울림이 크다. 첫 시집에서도 「수화(手話)」를 표현하고 있어 장애인에 대해서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호선 중앙로역 퇴근 길 4번 출구
실밥 터진 낡은 모자 뒤집혀 날아가도
고개를 들지 못하는, 손 내밀지 않는 남자
동 전 몇 개로는 흙 한줌 나를 수 없어
뿌리째 내려앉아 갇혀버린 울어리
고개가 함정이 된 남자, 허울뿐인 남자
남루의 등골 타고 비탈진 저녁노을
층층이 가파르고 그 빛에 휘둘려도
점점 더 파고드는 남자, 벽화 속 그 남자
-「고개 숙인 남자」전문,(『더듬이를 세우다』)
직장을 잃고, 가정에도 머물지 못하고 결국 노숙자가 된 남자를 그리고 있다. 시적 장소가 대구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2003년 2월 18일 대구지하철화재 참사가 있어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역이다. 이 역에 노숙자가 “고개를 들지 못하는, 손 내밀지 않는 남자”에 눈길을 돌린다. 그런데 “고개가 함정이 된 남자, 허울 뿐인 남자”라며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리고 “점점 더 파고드는 남자, 벽화 속 그 남자”라고 하여 살아있어도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이 시대에 물질의 풍요로움 속에 소외 받고 있는 사람을 그려냄으로써 이들에게 좀더 관심을 가질 것을 조용히 돌아보게 한다. 목소리를 높혔다면 높은 시적 성취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김미정 시인은 울림을 크게 하는 효과적인 표현에 능숙함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숨어서 날 수 있을까/ 강파른 벼루에서// 부러진 날갯죽지 곤두박인 삶을 딛고// 고시원/ 비상구 계단/ 흐린 불빛에 이끌려// 우거진 빌딩숲 속/ 한 평 섬에 갇혀// 가도 가도 물거품 헛손질만 거듭하는// 환승을/ 꿈꾸는 통로/ 새 한 마리 깃을 턴다”(「사각지대」전문, 『더듬이를 세우다』)라며 대학을 나와도 원하는 직장이 마땅찮아서 고시원에서 새로운 삶을 꿈꾸고 있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하였다. 청년들의 처절한 삶의 현장을 이토록 눈물겹도록 표현하되 화자의 감정을 자제하여 시조의 격조을 높혔다. 현대시조가 이토록 탄탄한 표현으로 눈부신 시적 성과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현대시조가 현대의 정형시로서 세계에서 제일 시적으로 뛰었났다는 평가를 받을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날까지 많은 시조시인들이 시조에 대한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묵묵하게 시조의 길을 걸어가고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박수를 크게 보낸다. ‘환승을 꿈꾸는’ 젊은이들로 가득한 고시촌의 현실, 이것은 개인의 게으름 탓이 아니다.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사회를 국민의 대표부터 관심을 가지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시인들이 시로서 관심을 촉구한다고 해서 목소리만 높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이 시는 이런 면에서 사회현실 문제를 다루면서도 공감을 불러일으키도록 한 것에 아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이밖에도 제2시집에서는 현실을 노래하는 작품이 좀더 다양한 소재의 폭을 넓히고 더 구체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울림의 폭을 크게 하고 있다. 김미정 시인이 시에 대해서 꾸준히 자신의 길을 가되, 좀더 새롭게 가고자 치열한 시의식을 가지고 노력한 결과로서 시적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9. 존재의 근원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게 된 근원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나 나이가 들수록 자신을 돌아보면 부모님의 은혜를 갈수록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가장 그리운 존재이다. 영원히 계시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첫 시집은 어머니에 대한 헌시라면, 제2시집은 아버지에 대한 헌시라고 볼 수 있다.
내 이름 석 자로만 나는 가끔 비겁합니다
또 다른 이름으로 용감하게 사는 것은
어머니,
내 안의 그림자
지우신 형벌입니다.
수평선 끝닿는 곳 운이 부신 하늘가
가혹한 그리움에 흔들리는 목소리
어머니,
차마 기억하는
내게 주신 선물입니다.
애돌아 가는 길이 나는 때로 두렵습니다
한 발 한 발 옮겨 가는 꼭 닮은 발자국들
어머니,
당신 속의 그림자
지켜야 할 약속입니다.
-「어머니」전문, (『고요한 둘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곡진하게 그렸다. 첫째 수에서는 “어머니, 내 안의 그림자/ 지우신 형벌입니다”라며 어머니의 진정한 모습을 자각하지 못하고 살아왔음을 후회하고 있다. 둘째 수에서는 어머니에 대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형벌을 넘어서서 “내게 주신 선물입니다”며 그리움의 고통을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승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셋째 수에서는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에 자식들을 위해 헌신한 어머니를 생각하면 “에돌아 가는 길”마저 두렵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 은혜를 생각하면 그 성스러운 길을 나도 내 자식들에게 옮기는 것이 어머니의 뜻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한 발 한 발 옮겨 가는 꼭 닮은 발자국들”이라며 어머니가 가신 그 길을 자신도 걸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머니, 당신 속의 그림자/ 지켜야 할 약속입니다”라며 한 번더 굳게 다짐하는 것이다. 이 사모곡을 눈물 없이 어찌 읽을 것인가. 김미정 시인 개인의 사모곡이자 이땅의 모든 어머니들에 대한 찬사의 노래이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 6·25, 그리고 1970년대 초반까지 되어서야 겨우 밥이 거의 해결된 우리의 삶이 아닌가. 철 모르고 살아온 세대들은, 보릿고개인들 모르고 살았지만 어언 부모가 되어 또 자식을 출가시켜야 할 나이가 될 무렵이 되면 지난날 부모님이 어떻게 자식을 키웠는가 생각하면 존경을 넘어서서 성스러운 은혜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시인은 감정을 절제하고 목소리를 낮춤으로써 행간의 폭을 크게 하여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이밖에도 첫 시집에서「골무」에서는 “아프고 시린 기억 손끝마다 즈려와서// 가만히 나도 모르게 돌려 끼워봅니다”라고 하였으며, 「어머니, 병상에서」는 “ 그 올곧은/ 삶으로도/ 풀 수 없어/ 굽은 등// 꼭 닮은 거울로 다시, 당신 앞에 섭니다.”라며 어머니의 성품이 올곧았음에도 힘든 일로 인하여 등이 굽은 어머니를 떠올리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 성품을 “꼭 닮은 거울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어머니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과 고마움이 물씬 묻어나는 표현이다.「재봉틀 위의 건반」에서는 “발 시린 어머니 재봉틀 발판을 몰고 간다”라며 어머니를 회상하고 있다. 물론 아버지에 대한 작품으로는「모자」에서 “아버지 지천명에 육남매 끝자리에 선// 제 생의 절반도 이제 반백의 그림자인데// 중절모 봉우리마다 희끗희끗 잔설입니다.”라며 가족과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으며, 「정거장」에서는 “저 굵고 단단했던 목숨이 가벼워져” 결국은 “아버지 슬픔을 거두어 효자병원 떠난다.”라며 죽음을 향하여 떠난 아버지를 돌아보고 있다. 첫 시집은 어머니에 대한 노래가 더 많이 비중을 두고 노래하고 있어 ‘어머니에 대한 헌시’라고 한 것이다.
숨은 뜻은 모르는데, 말은 늘 아끼시던
어, 하고 전화 받고
그래, 한번 끄덕이고
끊어라, 하며 휘갑치는
굵고 짧은
세 마디
지상의 오랜 시간 아버지가 남기신 말
기억은 울림이 되어
행간을 넓혀 가네
속귀에 녹아내리는
무뚝뚝한
세 마디
-「세 마디」전문, (『고요한 둘레』)
김미정 시인은 이 한 작품으로 사부곡(思父曲)의 명편을 남겼다고 본다. 제2시집의 첫 머리에 놓인 작품으로 쉬우면서도 울림이 크다. 첫 머리에 둔 의도는 아버지에 대한 헌시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를 비유적 표현과 이미지에 치중하다보면 자칫 뜻을 잃을 수도 있다. 비유적 표현의 목적이 생생한 이미지 재생에 있는 것인데 가끔은 그 수단과 목적이 전도될 수 있다. 그렇다고 시를 직서적으로 써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는데 특별한 비유법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이처럼 더 큰 울림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행간의 깊은 뜻이 살아나며 누구나 쉽게 각자 이해할 수 있어 더욱 감동을 주고 있다. 이 한 편의 사부곡은 우리 현대시조사에서 길이 남을 작품이라고 본다.
어머니를 자모(慈母)라 한다면 아버지는 엄부(嚴父)가 우리 전통의 전형적인 부모님의 이상적인 모습이다. 이 시 역시 전형적인 경상도 어른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말을 많이 하지 않지만 속으로 사랑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잘 형상화하였다.
“어”, “그래”, “끊어라”며 굵고 짧은 세 마디 속에는 딸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세 마디’로 짧게 전화를 끊는 것도 자식에 대한 배려요 사랑 때문이다.
결혼한 자식들에 대한 궁금함과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나 안부 전화를 받고 별 탈없이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면서 빨리 끊어라고 한 것이다.
그렇지만 김미정 시인은 세월이 흘러도 ‘세 마디’의 음성은 가슴 속에서 크게 울려옴을 깨닫고 있다. 무뚝뚝한 아버지의 말씀 속에서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그리움이 솟아나고 있는 것이다.
2013년 대구시조 연간집에서 실은 작품으로 개인적으로 감동받은 바 있어 시인의 자작시 해설을 부탁하여 나의 블로그에 올려두었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시를 쓰는 일이 가끔은 고통스러워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다. 여기까지만 하고 그만 해야지 하는 생각을 수없이 하면서 그래도 달아나지 못하고 또다시 쓰고 있는 나를 지켜보며 때때로 웃곤 한다. 이유가 뭘까? 의외로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것은 시가 내 그리움의 바탕이고 잊어버린 기억의 길잡이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를 통해서 현실을 통찰하고 미래를 꿈꾸고 덤으로 지난 일들을 되살려와 팍팍한 삶을 달래주는 위로를 받기도 한다.
경북 영천이 고향이신 아버지는 경상도 남자의 무뚝뚝함을 온몸으로 증명하듯이 과묵하셨다. 그런 아버지의 속마음을 유일하게 읽어내는 어머니가 나는 오히려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적도 많았는데, 결혼을 하고 아이 셋을 낳고 부모가 되는 가혹한 시간을 지나면서 다시금 떠오르는 그때의 아버지는 내게 온통 그리움뿐이다.
간결한 세 마디, 항상 깊고 그윽한 음성만 남아서 행간의 의미를 알아채려면 얼마나 주의를 기울여야하는지 모른다. 덕택에 모든 일에 조심하는 마음과 행동을 익혔고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지 이제 삼십년이 넘었지만 모든 게 아직도 생생하다.<자작시 해설/ 김미정>(2013.11.19)
과묵한 성격으로 말씀은 별로 없지만 자식을 사랑하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모든 일에 조심하는 마음과 행동을 익혔고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하는 시인은 힘들 때면 아버지가 떠오를 것 같다.
10. 서정시
서정시란 개인의 추억 또는 기억을 현재화하는 것이다. 그 속에는 슬픔과 기쁨 등 다양한 감정들이 있겠지만 그 모든 것은 ‘그리움’의 바탕이 되고 있다. 위에서 부모님과 대한 그리움을 비롯하여 여행이나 역사적인 소재를 접하고 시를 쓰는 것도 서정일 것이다. 시조 자체가 서정시가 아닌가. 그러나 자기가 살아온 과거의 삶에서 같이한 혈육이나 어릴 때 살았던 공간이 기억의 중심이 될 것이다.
내가 살던 그 집
깊이 닿는
그곳
발자국
지워지고
겹겹이
사라지고
그리메 향기만 남아
그지없는
그곳
-「그집」전문,(『고요한 둘레』)
김미정 시인의 고향은 영천이다. ‘그집’이란 자연과 접하며 살았던 부모형제와 이웃 어른들, 일가친지들, 그리고 동무들과의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일 것이다. 그런데 단시조로서 모든 것을 절제하고 단아한 시조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고향집의 이야기를 이야기로 한다면 어찌 한 두 권의 책으로 다 말할 수 있으랴. 그래서 시조의 미학인 ‘절제’로서 함축적으로 제시하여 울림의 폭을 크게 하고 있다. 읽는 이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읽으며, 읽을수록 더욱 “그리메의 향기”가 더 진하게 더 넓게 퍼져 나갈 것이다.
기차가 들어오네, 기억 먼저 끓어올라
길어진 목덜미에
기다린 시간 앉고
담쟁이 타는 높이로
감아올린
넝쿨 탑
화전을 끌어오네, 꽃물 진 노을까지
끝없이 밀고 가는
간만큼 또 멀어지는
꼭 한 번 돌아보리라
숨이 멎는
먼 기적
-「화본역」전문, (『고요한 둘레』)
이 시는 두 수의 연시조로서 시조의 응축, 절제미를 잘 나타내었다. 첫째 수에서 ‘기차’와 함께 수많은 기억들이 떠오르는 것을 “끓어올라” 한마디 속에 다 담았으며, “길어진 목덜미에/ 기다린 시간 앉고”라며 시간을 의인화하여 묘미를 살리고 있다. 그 기다린 시간 속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와 추억들이 있을 것인가. 그래서 담쟁이의 ‘넝쿨 탑’처럼 끝이 없는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처리하여 시적 긴장감을 높혔다. 둘째 수에서는 드디어 기차가 움직이며 아름다운 화천도 따라오고, 꽃물 진 노을까지 따라오던 과거의 추억이 아름답게 떠오른다. 어릴 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로 한 말은 자연 속에서 살아본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그 뜻을 알 수 있다. 자연과 거리가 먼 아파트 문화속의 추억과 정서는 매우 다를 것이며, 어쩌면 더 삭막할 것이다. 그 옛날의 기적을 떠올리며 그것은 “꼭 한 번 돌아보리라”며 기적에 감정이입하여 처리하고 있다. 이것도 감정노출을 자제하여 시의 응축력을 높힌 것이다.
이밖에도 「무섬의 여자」, 「봄밤」, 「석류」, 「코스모스」등 수준 높은 두 시집 곳곳에 보이고 있어 첫 시집보다 더욱 격조 높고 절제되며 구체적 형상화로 더 탄력있고 단아한 시조의 길을 걷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1. 천 년의 미소
2016년 10월에 펴낸 김미정 시인의 제2시집『더듬이를 세우다』를 읽고서 첫 시집과 함께 그 동안에 꾸준히 이어오는 시 정신이 무엇이며, 또 어떻게 변모되어 왔는가에 초점을 두면서 대강을 살펴보았다.
그동안 치열한 창작을 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서정시의 본령에 충실하여 서경과 서정을 적절히 짜되 적절한 비유로써 시조의 미학인 응축, 절제의 탄탄한 구성력으로 높은 시적 성취를 이루었다. 행간에 담긴 뜻이 크게 울려서 현대시조의 전범이 될 만한 작품들이 많았다.
김미정 시인이 시를 쓴다는 것은 ‘나를 찾아 떠나는 길’로 화해와 조화인 화엄의 길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역사적 소재와 여행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 두 시집의 공통점이나 갈수록 좀더 시야를 넓히고 구체화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현실에 좀더 관심을 가지고 구체적인 묘사를 통하여 공감의 폭을 넓히고 있었다.
“머릿속엔 사라져도/ 가슴 안에 남아서// 천년을 넘어서도/ 지워지지 않는 얼굴// 두툼한 광대뼈 아래/ 살짝 들린 입꼬리 보라// 새겨진 기억 층층/ 그 오랜 설레임에// 하찮게 버려져도/ 변하지 않는 미소// 수막새, 얼굴무늬를 따라/ 햇살이 일렁인다.”(「천년을 넘어」전문, 『더듬이를 세우다』)라고 하였듯이 두 권의 시집 또한 “천년을 넘어서도/ 지워지지 않는 얼굴”로 남아 있을 것이다. 또한 “하찮게 버려져도/ 변하지 않는 미소”처럼 어떠한 감정들이 다가오더라도 시인의 변함없는 미소로 승화시키듯이 작품에서도 시적으로 승화되어 감동을 주는 작품들이 계속 이어지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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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평론 잘 감상햇습니다.
게으름뱅이 저에게 많은 교훈을 주셨습니다.
평론집은 안 내시나요?
아이고 눈고 건강 챙기셔야 하는데...괜히 긴 글 올려서 피로하게 만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