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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보배로운 피의 구속
성 경: 베드로전서1:18-25절
우리는 일반적으로 구속이라고 하면 죄를 범한 사람이 수갑에 채워져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이 구속이라는 말은 무엇일까요? 원래 이 말은 전쟁에서 포로가 된 사람을 다른 사람이 값을 대신 지불하고 자유롭게 해 주는 것입니다.
전쟁의 포로가 되고 나면 그 인생은 비극이 됩니다. 이제는 그 주인된 사람의 손에 죽이고 살리는 권한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평생 종이 될 뿐 아니라, 그의 자녀들, 또 그의 자녀들이 계속해서 종이 되어 살아갑니다.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끝입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어찌 보면 개만도 못한 비극적인 인생이 바로 포로인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백제의 계백 장군은 자기의 부인과 자녀를 전쟁포로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자기의 칼로 처리하고 황산벌로 달려갔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알지 못하는 사람이 와서 그 포로의 몸값을 지불해 줌으로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로 예수는 어떻게 우리를 구속하셨는가?
원래 원어 ‘뤼트로오’는 ‘몸값을 지불하고 되찾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사람이 자기가 번 돈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부자라 할지라도 자기가 번 돈은 아까운 것입니다. 그제 우리 두 딸들이 하루 동안 힘들게 아르바이트를 해서 5천 원씩을 벌어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제 아침에 ‘그 돈으로 맛있는 것을 사서 파티하자’라고 했더니 아무도 안 한다고 합니다. 만약에 자기들이 번 돈이 아니라 저의 돈으로 10만 원짜리 파티를 한다고 했으면 환호를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의 것은 아깝고 남의 것은 아깝지 않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전쟁의 포로를 사서 자유를 줄 때 자기의 생명 같은 돈을 지불함으로서 포로를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어떻게 죄와 사망과 마귀와 지옥으로부터 자유케 하시고 구속하셨을까요? 그것은 다른 사람이 하는 것처럼 돈을 지불하시고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를 죄와 사망과 마귀와 지옥과 영원한 형벌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는 것은 바로 목숨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말미암아 구속하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레위기17장 11절에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온 우주와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시기에 돈으로 값을 지불하시고 구속하실 수가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류의 죄는 오직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만이 구속하실 수가 있으셨습니다. 시편49편6-8절에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18,19절에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키시고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기 위해 그의 보배로운 생명의 피를 아낌없이 내어 주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하나님께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하셨던지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우리가 땀방울이 나도록 지은 죄를 위한 생명의 보배로운 피였습니다. 또 빌라도의 뜰에서 우리가 몸으로 지은 모든 죄를 위해서 뼈와 납조각이 6개나 들어 있는 채찍에 40대나 맞으셔서 온몸이 찢기고 파이고, 피투성이가 되셔서 빌라도의 뜰 안을 온통 붉은 피로 적셔 주셨습니다. 또 우리가 머리와 생각으로 지은 교만과 악한 죄를 위해서 탱자나무 같은 가시면류관을 머리에 쓰시고 붉은 선혈의 피를 흘려 주셨습니다. 그 솟아나는 피로 말미암아 눈을 제대로 볼수도 없으셨으며, 골고다로 오르실 때 그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십자가가 누를 때마다 가시면류관을 찔러 온몸에 피가 흘러 내리셨으며 그 피들이 흘러 내려서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던 그 발자욱 발자욱 마다 붉은 피로 적시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두 손과 두 발에 쇠말둑에 박히사 죄인된 우리를 살리시고자 보배로운 피를 흘려 구속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로마 군병이 죽은 예수님의 옆구리의 심장을 찔렀을 때 예수님은 죽으셨지만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새 신을 신기우고, 약속의 반지를 끼우게 하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게 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말입니다.
둘째로 보배로운 피는 어떤 능력이 있을까요?
성경은 말합니다. 고린도전서1장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또 로마서1장 16절에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복음에는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십자가 도의 핵심은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 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복음의 핵심은 바로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에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에는 믿음의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그 피를 믿음으로 영원히 그 죄가 용서함을 받는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히브리서9장 12절에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고 하셨고, 자기를 단 한 번에 드리심으로 영원한 속죄를 완성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는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 피가 우리로 마귀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 죄의 노예가 의에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또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는 믿는 자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죄와 마귀를 이기는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죄로부터 벗어나 의와 생명의 왕노릇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저주가 떠나가고 복을 받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삶에 가난이 떠나가고 운명이 바꾸는 놀라운 기적의 능력이 있습니다. 빌리러 다니는 비굴한 삶이 세계 만민에게 꾸어 주고 나누어 주고 베푸는 능력이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에 있습니다. 지옥 같은 인생이 천국 같은 인생으로 바꾸는 능력이 있습니다. 영원한 형벌을 벗어나 영원한 천국에서 살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는 소망의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는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활로 가는 소망을 갖게 하는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피는 어떤 절망도 이기는 소망의 능력입니다. 어떤 좌절도 이기는 놀라운 능력이 그리스도의 피에 있습니다. 어떤 질병의 고통도 이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모든 불같은 시험을 이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모든 역경도 이기는 능력이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에 있습니다. 자살을 이기는 능력이 바로 그리스도의 피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바라보는 사람은 부활의 소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보는데 지옥은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영원한 유황불 속에서 고통 하는 곳입니다. 자살은 절대로 안 됩니다. 자살을 하면 지옥에 갑니다. 자살은 도적질하고 죽일 뿐만 아니라 멸망케 하려는 마귀가 쓰는 전술입니다.
구약에는 다윗의 작전 참모장이었던 아히도벨이 배신하고 압살롬에게 갔다가 후새의 전략이 채택되고 자기의 것이 되지 않는 것을 보고 절망하며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 목을 메어 죽었습니다. 시편55편 15절에는 “사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임하며 산 채로 음부에 내려갈지어다 이는 악독이 저희 거처에 있고 저희 가운데 있음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신약에는 예수님의 제자 가롯유다가 은30냥에 팔고 배신하였다가 양심의 가책을 받아 목메어 자살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저가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저에게 좋을 뻔 하였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 다 목메어 목숨을 끊었습니다. 우리나라에 1만 3천명에 가까운 아까운 목숨들이 자살을 하고 있는데 가장 많은 방법이 목을 매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많은 고통과 절망을 만난 사람이 또 있을까요? 그는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힘이 지나도록 감당할 수 없는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나 오직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뢰하며 주님을 소망하며 이길 수 있었다고 고린도후서 1장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절망적이고 힘들고,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모든 것을 이기는 능력이 그리스도의 생명의 피로부터 흘러나와 소망을 갖게 하고 승리하게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12장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모든 고통과 견디기 힘든 목마름과 온몸에 사지가 찢어져 견딜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시고 승리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는 사랑의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21절에는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능력’ ‘소망의 능력’ ‘사랑의 능력’이 있다고 분명히 밝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영원히 항상 있을 것 세 가지가 바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통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는 모든 원수까지 품고 사랑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보배로운 생명의 피를 다 쏟으시면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는 원수들까지 용서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셨고,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등불과 같은 우리를 끄지 아니하셨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우리를 십자가에 달리사 그 보배로운 피로 다 용서하시고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인정을 받으려고 하니까 시험에 듭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누가복음6장에서 “나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을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니라.”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하게 대접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는 사랑의 능력이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으로 굴복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미움을 용서로 이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원수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선하게 접대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는 능력이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만이 가능합니다. 우리를 모욕하며 견딜 수 없게 하는 자를 위해 사랑으로 기도하는 능력이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알아도 능력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성령님은 사랑의 영이십니다. 믿음의 영이십니다. 소망의 영이십니다. 우리가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고 성령님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영혼을 주장하시면 우리의 뱃 속에서부터 보혈의 생수의 강이 흘러나와 우리의 삶 속에 믿음의 역사를 일으키고, 소망의 인내와 사랑의 수고의 능력으로 충만하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셋째로 헛되이 하지 않는 삶을 살게 한다.
고린도후서6장 1절에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히브리서6장 4-6절에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삶
고린도전서5장 7절에 “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고린도전서6장 19,20절에 “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있을 때에 흑인들을 짐승처럼 시장에서 사고팔았습니다. 그런 흑인노예를 불쌍하게 여긴 식물학자가 그를 돈을 주고 사서 “이제 너는 자유인이 되었으니 네가 원하는 곳으로 마음대로 가거라.” 이에 감동한 흑인이 말합니다. “이제는 제가 노예로서가 아니라, 자유인으로서 당신을 주인으로 모시고 평생을 은혜에 보답하며 살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아무리 가라고 해도 자기는 죽어도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해서 집으로 데리고 왔는데 얼마나 정성으로 섬겼는지 모른답니다. 한번은 밀림에 식물을 조사하러 가서 풀을 헤치며 가는데 그만 주인이 맹독성 뱀에 물려 죽어가는데 그 노예는 옷을 찢어 독이 퍼지지 못하도록 묶더니 입으로 독을 빨고, 그 칼로 자기의 살을 조금씩 베어서 그 독을 다 빨아들이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피를 많이 흘리고 독이 퍼져서 죽었습니다. 독뱀에 물렸던 학자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노예가 자기의 살을 베어 독을 빨아들이고 자기가 살아난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시신 앞에서 얼마나 울고 또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 노예는 자기를 해방시켜 준 주인을 위해서 그 생명까지 버리면서도 은혜를 갚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 주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땅끝 금강산 기슭서재에서 도원 송태정 목사(순복음해남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