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둘레길...함양구간
새색시 꽃가마 타고 넘던 길
마을과 마을, 사람 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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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높이 솟아올라 만길이나 거대한데
그 산 속에 묻힌 옛 고을 함양이라 이르네
화장사 옛 절터 지나서 엄천으로 가는 길에
푸른 대밭 띳집 있는 곳 거기가 내 고향일세
조선 전기의 정치인이자 문장가인 강희맹(1424~1483)이 읊은 시다. 함양 오도재에서 마천 방향으로 조금 아래 위치한 지리산조망공원 시비에 '내고향'이라는 제목으로 새겨져 있다. 이곳에는 강희맹의 시비 외에도 조선 중기 학자 문동도(1646~1699)의 '지리산'과 구한말 유학자 최익현(1833~1906)의 '천왕봉' 시비 등 지리산을 노래한 옛 문필가들의 시·문비 열다섯 개가 서 있다.
이렇듯 오도재는 시인·묵객들이 지리산으로 가는 길에 잠시 땀을 식히며 산을 노래했던 곳이다. 동행한 함양군 문화관광해설사 전영순씨는 "지리산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동경의 대상이자, 영남사림파의 종조(宗祖)인 김종직을 비롯해 그의 제자 김일손, 유호인, 정여창 등이 찾아 마음을 가다듬었던 곳"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일본의 조선 침략에 항거하다 일흔셋에 세상을 떠난 최익현 선생은 나이 일흔에 천왕봉에 올랐다고 하니 지리산 유람은 선비들에게 요즘말로 하면 '로망'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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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유람'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로망
지리산둘레길 함양 구간을 찾아가는 길은 이렇게 오도재에서부터 시작됐다. 둘레길 구간은 아니지만 '지리산 가는 길'로 이름 붙여진 이 길은 예부터 함양에서 전북 남원으로 가는 지름길이자 백성들의 애환이 서린 길이기도 하다. 옛날 마천골 사람들이 함양 장날 나뭇짐을 지고 넘었던 고갯길이었다. 전남 광양, 경남 남해·하동 지역에서 생산된 소금과 해산물이 벽소령과 장터목을 넘고, 이 고개를 지나 경북과 충청도 지방으로 운송된 육상 교역로였다.
지리산조망공원에서 눈앞에 바라보이는 하봉과 중봉, 천왕봉을 거쳐 제석봉, 벽소령, 형제봉, 삼도봉, 반야봉까지 병풍처럼 펼쳐진 지리산 주요 능선을 조망하고, 공원에 늘어선 시·문비에 새겨진 옛 선인들의 지리산 예찬을 음미한 후 지리산길 함양 구간으로 발길을 옮겼다.
함양 구간은 지리산둘레길 전체 22개 구간 가운데 3코스 인월~금계, 4코스 금계~동강, 5코스 동강~수철 등 3개 구간에 걸쳐 있다. 이 가운데 3코스는 남원, 5코스는 산청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함양 땅을 지나는 거리는 둘레길이 지나가는 다른 4개 시·군에 비해 짧다. 하지만 다른 어느 코스보다 산과 산촌마을의 운치에 흠뻑 빠져들 수 있는 길이다.
어느 곳보다 산길·산촌 운치에 흠뻑 빠지는 길
행정구역이 다르다고 이어지는 길이 다를까마는 사전 계획대로 인월~금계 코스의 등구재에서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등구재는 함양군 마천면 창원리와 남원시 산내면 중황리의 경계에 있다. 함양에서 오도재를 넘어 남원의 산내와 운봉을 이어주는 고개다.
등구재를 좀 쉽게 오르기 위해 남원 쪽 아랫마을인 산내면 상황마을을 택했다. 고갯길을 오르는 길에 잠시 쉬어가기 위해 '등구재 황토방'이라는 간판이 붙은 민박집에 들렀다. 주인 김월영씨가 반갑게 맞으며 오미자차를 권했다. 부산서 자랐다는 김씨는 상황마을에 시집와 30년째 산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멀지 않은 남원 인월이 부모님 고향인데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살았건만 말씨는 완전한 경상도 사투리다. 김씨의 말씨에서 지리산을 한 지붕으로 살아가는 이 지역의 특성이 묻어난다.
등구재에 다다르자 나무를 베어낸 비탈이 나타난다. 한 쪽 기슭엔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산판 작업용 트럭이 신기해 보인다. 산나물을 재배하기 위한 벌목이라지만 아쉬움이 들었다. 등구재에 오르자 안내판 옆의 패널에 새겨진 '거북등 타고 넘던 고갯길, 등구재'라는 글귀가 눈길을 끈다.
거북등을 닮아 이름 붙여진 등구재.
서쪽 지리산 만복대에 노을이 깔릴 때,
동쪽 법화산 마루엔 달이 떠올라
노을과 달빛이 어우러지는 고갯길이다.
경남 창원마을과 전북 상황마을의 경계가 되고,
인월장 보러가던 길.
새색시가 꽃가마 타고 넘던 길이다.
지금은 이곳을 찾는 이가 드물지만
되살아난 고갯길이 마을과 마을,
그리고 사람을 이어줄 것이다.
시 같기도 하지만, 작가명이나 출처 표시가 없는 것으로 보아 등구재를 설명하는 글로 보인다.
제방길·농로·임도·숲길과 함께 능선·계곡 조망
등구재 아래 마천 쪽 첫 마을인 창원마을은 100여 가구가 살고 있는 제법 큰 산동네다. 마을 이름은 창고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조선시대 마천면 내에서 세금으로 거둔 차나 약초, 곡식을 이 마을 창고에 보관했다가 지게에 지고 오도재를 넘어 함양 쪽으로 날랐다고 한다.
이곳에서 둘레길 3코스와 4코스의 분기점인 금계마을까지는 완만한 내리막인데다 제방길, 농로, 임도, 숲길이 이어진다. 동쪽으로 탁 트인 전망엔 지리산 주능선과 계곡이 굽이굽이 펼쳐진다.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은 이런 분위기와 느낌에 취하는 듯하다.
금계마을 함양군 둘레길안내센터가 있는 옛 의탄초등학교에서 의탄교를 지나면 칠선계곡과 벽송사 입구마을인 의탄마을에 들어선다. 마을 들머리의 수령 600여년 된 느티나무 쉼터에서 마을길을 따라 가면 바로 옆 의중마을이다. 의중마을회관 앞 갈래길에서 용유담을 거쳐 동강으로 가는 둘레길 본선과 서암정사와 벽송사로 이어지는 지선으로 나누어진다.
원응 스님이 자연 암반에 조각한 불상들로 유명한 서암정사는 바위로 이루어진 대방광문, 역시 바위를 깎아 만든 석굴법당 등 천연 암석과 조화를 이룬 건축물과 정원이 아름답다. 얼핏 봐도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대웅전의 단청은 우리나라 최고 장인들의 손길이 거쳤다고 한다.
한국 선불교 최고의 종가로 일컬어지는 벽송사는 경남도 민속자료 2호인 목장승으로 유명하다. 곧게 뻗은 미인송과 도인송도 눈길을 끈다.
세진대서 본 엄천강 굽이는 한 폭의 그림
의중마을에서 왼쪽으로 엄천강을 끼고 동강마을로 가는 둘레길 본선에 접어들면 용유담까지는 한낮에도 어두컴컴할 정도로 하늘이 보이지 않는 활엽수 숲길이다. 요즘 같은 초여름 날씨엔 더위를 식히며 사색하기에 딱 좋은 길이다.
숲 터널을 빠져나오자 아홉 마리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용유담이다. 주변 풍광이 신을 불러들이는 지세여서인지 '용유담할머니'를 비롯한 굿당이 많아 정초엔 사업번창과 승진을 기원하는 사람들이 몰린다고 한다.
동강마을로 가는 도중 세동마을에서 벽송사 지선구간으로 잠시 발길을 돌렸다. 용유담에서 바라본 마적송을 보기위해서다. 마적송은 수령 400여년에 높이 20여m,둘레 2.6m에 이르는 큰 소나무다. 마적사로 가던 옛 사람들이 지나던 길에 마음과 몸을 씻었다는 세진대의 넓은 바위 위에 걸터앉은 소나무의 모습이 기이하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엄천강 굽이와 용유담, 법화산의 전경은 한 폭의 그림 같다.
세동마을에서 둘레길 4코스와 5코스 분기점인 동강마을까지는 가는 도중에 송문교를 조금 지나 엄천강 굽이에 세종의 서자 한남군의 유배지였다는 새우섬이 있다. 한남군은 어머니 혜빈 양씨와 함께 단종복위운동을 꾀하다 세조에 의해 역모로 몰려 어머니는 죽음을 당하고 자신은 이곳에 유배됐다가 서른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비운의 왕자다.
김종직의 기행문 「유두류록」 생각한다
새우섬을 보면서 산길로 접어들어 운서마을 고개를 넘으면 엄천강 양쪽으로 넓게 펼쳐지는 들판과 함께 강 오른쪽에 동강마을, 건너편에 동호마을이 나타난다. 동강마을에는 함양군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600여년의 팽나무와 느티나무숲이 있어 길손들이 쉬어가기에 좋다.
이 느티나무숲이 김종직 선생의 지리산 기행문 유두류록((遊頭流錄)에 나오는 '화엄'이라고 한다. 건너편 동호마을은 엄천사와 김종직 선생이 조성한 관영차밭이 있던 곳이다.
그러고 보니, 지나온 지리산둘레길 함양구간은 김종직 선생이 지리산 여행에서 첫날과 둘째 날, 마지막 날 거쳐 간 길과 많이 겹쳐 있다. 유두류록은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있던 마흔 두 살 때(1472년) 그의 제자 조위·유호인·한인효 등과 함께 음력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5일간 지리산을 여행하고 쓴 기행문이다. 기행문에 나타나는 지명으로 보아 김종직 일행은 함양에서 출발해 중봉과 천왕봉, 세석고원, 영신사를 거쳐 마천으로 돌아왔다. 김종직은 이 기행문에서 금계·의탄마을이 있는 마천면 지역을 무릉도원에 비유하기도 했다.
'8월 14일 덕봉사의 중 해공이 와서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고 한백원이 따라나섰다. 드디어 엄천을 지나서 화엄에서 쉬는데 중 법종이 뒤따라왔다. 그에게 길을 물으니 자못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역시 길을 안내하도록 하였다. (중략) 골짜기와 숲이 맑고 깊숙하여 벌써 아름다운 경치를 짐작할 수 있었다. 골짜기 동쪽은 산등성이지만 그렇게 험준하진 않았다. 서쪽은 지세가 점점 낮아져 20리 길을 걸으면 의탄촌(지금의 마천면 의탄리)에 이른다. 만약 닭과 개, 소를 끌고 이곳에 들어와 나무를 쳐내고 밭을 개간한 뒤 서속, 기장, 삼, 콩 등을 심고 살면 저 무릉도원도 이보다 나을 것이 없을 것이다. 나는 막대로 시냇돌을 두들기다가 극기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아, 언제나 그대와 더불어 숨어 이곳에서 놀아볼거나'하고 바위에 낀 이끼를 긁어내게 하고 그 위에 이름을 썼다. (중략) 8월 18일 드디어 우리 일행은 험한 곳을 모두 내려왔다. 중 해공은 군자사로 가고, 법종은 묘정사로 갔다. 태허와 극기, 백원은 용유담으로 갔다. 나는 둥그점을 넘어 지름길로 관사에 돌아왔다' - 김양식이 지은 〈지리산에 가련다〉에 나오는 「유두류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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