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본성적으로 죄를 짓고자 합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따라서 죄를 짓습니다. 그래서 죄의 문제는 사는 동안 해결하지 못할 것입니다. 죽을 때에야 비로소 죄가 그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예수께서 성취하신 구속의 은혜가 우리안에 있고 역사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죄의 본성만이 아니라 새로운 본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이 새롭게 일으키시는 마음으로 죄를 미워하고 죄와 싸우고자 하며 실제로 죄를 극복하고 이기는 능력과 힘을 부여 받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본성은 반드시 자신의 죄를 참되게 회개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복음을 선포하셨을 때 많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완전히 죄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죄를 짓지만 이제 더는 그 죄를 사랑하고 따르지 않습니다. 죄를 미워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삶을 파괴하는 강력한 죄에 대해 이전에 하지 못했던 은혜와 능력으로 싸웁니다. 죄는 다 하나님 앞에서 가증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죄가 꼭같은 수준으로 악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죄는 다른 죄에 비해 훨씬 악하고 파괴적입니다. 예수님께 돌아왔던 세리와 죄인들 창녀들은 이전의 삶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그 파괴적인 죄들을 절대 간과하지 않았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이 돌에 맞아 죽을 처지가 되었을 때 예수님은 그녀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서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38년 된 병자에게도 더 심한 병이 생기지 않도록 죄를 짓지 말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죄와 싸우는 것을 뜻합니다. 만약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여전히 죄 가운데 산다면 그는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고 현저히 욕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체 중에 죄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개인적으로 죄에서 떠날 것을 권하고 그렇지 않으면 두 세사람이 가서 권하고 그래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그렇게 했는데도 듣지 않는다면 이방인과 같이 여기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의와 함께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생각할 때 의를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동시에 의를 생각할 때 사랑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최고로 표현된 곳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사랑만도 아니고 의만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의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일어난 죄의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5:1,2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도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신자라고 하면서 파괴적인 악한 죄가 지속되고 반복된다면 그에게 구원은 없습니다. 그것을 같은 신자로서 용서할 권한도 없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건 그를 영원히 죽도록 버려두는 것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죄를 지은 자를 미워해서도 안되지만 그 죄를 간과하고 우리 맘대로 용서할 권한도 없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도록 권면해야 하고 그렇게 돌이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대로 순종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