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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신데렐라 처럼 비잔틴 제국에서 신분 상승하여 천민층에서 황후까지 오른 “ 테오도라 “
신데렐라는 동화 속에만 있는 게 아니다.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고 우리 주변에도 가끔 존재한다. 고려시대 공녀로 끌려가 원나라 황비가 된 기황후, 폴란드 출신 노예로 오스만 제국의 술탄 슐레이만 1세의 황후가 된 록셀라나 등 아득한 옛날 신데렐라부터 빈민층 출신 여배우에서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가 된 에바 페론 같은 현대의 신데렐라까지. 그중에서도 비잔틴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황후 테오도라는 단연 초특급 신데렐라다.
위 그림은 19세기 프랑스 화가 장 조제프 벵자맹 콩스탕이 그린 테오도라다. 그녀는 오리엔탈풍의 이국적이고 호화로운 보석과 드레스로 우아하게 차리고, 왕족 전용 좌석에 편안한 자세로 기대어 앉아 원형 경기장을 유유히 내려다보고 있다. 눈을 살짝 내리깔고 입을 야무지게 다문 다소 거만한 표정은 그녀가 위엄과 권력이 있는 여왕임을 보여준다.
테오도라를 묘사한 가장 유명한 미술작품은 이탈리아 라벤나의 산 비탈레 성당 모자이크다. 색색의 테세라(tessera: 모자이크 세공에 쓰이는 돌, 유리, 세라믹 등의 작은 조각)의 조화로운 배치가 절묘한 모자이크에 성당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반사되어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하고 신비로운 모습을 드러낸다. 제단 벽에는 그리스도가 천구 위에 앉아 천사들의 보좌를 받고 있고, 그 아래 양쪽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테오도라 황후의 모자이크화가 있다. 왕족의 위상을 나타내는 자주색 망토를 입은 채 주교들과 장군들을 거느린 황제가 빵이 든 성반을 들고 그리스도가 있는 제단 벽을 향하고 있다. 역시 자주색 로브를 걸친 테오도라는 측근에 둘러싸여 성찬용 포도주 잔을 제단으로 옮긴다. 유스티니아누스 맞은편에 묘사된 테오도라의 초상화는 그녀가 황제와 동등한 정치적, 종교적 위상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성인으로 인정하는 반면 그녀와 같은 시대의 역사가는 그녀를 사악한 악녀이자 방탕한 요부로 매도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한때 천민층인 창녀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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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역사적 배경)
천년을 넘게 이어진 동로마 제국, 비잔틴 제국은 그 긴 시간동안 딱 2번의 전성기를 맞게 되는데 첫번째가 제국 초기인 6세기 유스티아누스 황제치세이며 두번째가 제국 중기인 10~12세기에 걸친 마케도니아 왕조 치세였다.
유스티니아누스1세는 서양법의 기본이라는 로마법대전을 만든 황제로 유명한 위인이자 서양사에서 보기 드물게 대단히 공처가였던 황제로도 유명하다.
[황제가 되는 시골 소년]
527년부터 565년까지 38년의 치세 동안 로마 제국의 영토를 넓히고, 여러 가지 제도개혁과 업적을 쌓음으로서 로마제국의 부활을 꿈꾸던 위대한 동로마황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와 그 황후 테오도라...
마케도니아의 타우레시움에서 태어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어렸을 적 이름은 피터였다.
마케도니아 지방의 농부 출신으로 돼지를 키우던 그의 숙부 유스티누스는 10대 시절에 친구 두 명과 함께 야만족의 침입을 피해 콘스탄티노플로 도망쳐 지내다 군대에 입대한다.
군대에서 재능을 인정받아 장군까지 올랐고 나중에 황제 아나스타시우스의 황실 근위대 대장으로 근무하게 된다.
군인보다 종교인, 환관이 더 많았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유일한 군대인 황실 근위대의 위력을 바탕으로 황제가 죽었을 때 환관장 아만티우스의 음모를 뿌리치고 황제로 선출된다.
그가 제위에 오를때의 전해지는 일화를 보면 황제 아나스타시우스는 말년에 자신의 세 조카들 중에서 한 명을 제위에 앉히기 위해 궁정으로 불러들였는데 저녁 식사에 초대하여 방석 하나에 몰래 ‘황제’라는 글자를 써서 숨겨 놓고 그 자리에 앉는 사람을 다음 황제로 내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막상 세 조카는 아무도 그 자리에 앉지 않았기 때문에 황제는 다음날 아침 맨 처음 자신의 침실로 들어오는 사람을 황제로 정하기로 했는데 마침 그날 제일 먼저 황제의 침실로 들어온 사람이 바로 유스티누스였다고 한다.
농사꾼 출신으로 싸움 밖에 할 줄 없었던 그는 철자도 몰라 미리 준비한 서판에 서명을 할 정도로 무식했다고 황제라는 지위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조카인 플라비우스 페트루스 사바티우스의 도움으로 비교적 안정적으로 통시했고 그 조카를 양자로 삼아 후계를 맡겼다.
그 조카이자 양자가 바로 바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된다.
삼촌 유스티누스는 거의 명목상 황제였을 뿐 실제로 통치는 유스티니아누스가 도맡아 했다.
유스티누스 황제는 526년 건강이 악화되자 일찍부터 통솔력과 정치적 능력을 보였던 조카 유스티니아누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했다.
그리고 527년 그가 죽자 유스티니아누스가 단독으로 동로마 황제가 된다.
[황후가 되는 창녀]
테오도라는 유스티니아누스가 공동황제가 되기 1년 전 525년 운명적으로 테오도라를 만나게 된다.
키프로스 섬 출신인 그녀의 아버지 아카키우스는 콘스탄티노플의 히포드롬 경기장에서 사나운 곰을 조련하는 조련사였고 어머니는 댄서였다.
그에게는 코미토· 테오도라· 아나스타시아라는 딸 셋이 있었다.
미천한 출신인 테오도라는 극장에서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며 뭇사람들의 노리개로 지내던 중 16살 때이던 516년 아프리카 펜타폴리스 지사로 임명된 티루스 출신 에케불루스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4년 동안 살면서 아기도 한명 낳았지만, 쫓겨나서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왔다.
이때 숙부 유스티누스 1세를 대신하여 국정을 도맡고 있던 유스티나우느스가 우연한 기회에 테오도라의 타고난 미모에 반해서 사랑의 포로가 된다.
이민족 출신이지만 정숙했던 숙모 루피키나 황후와 어머니 비길란티아가 반대했으나 테오도라에게 선물 공세를 펴고 환심을 산다.
또한 삼촌인 황제 유스티누스에게 간청하여 원로원 의원은 불명예스러운 직업, 즉 무희나 창부였던 여인과는 결혼할 수 없다는 법을 개정하여 525년 테오도라와 혼인했다.
테오도라의 미모에 대해서는 당시 최고의 장군인 베리사리우스의 부관 겸 비서였던 프로코피우스의 비사에 자세히 소개되는데
‘테오도라는 끼가 넘치고 자유분방하고 음탕한 무희다. 노래나 악기 연주는 형편 없지만 그녀가 펼치는 무언극과 우스꽝스런 몸동작에는 모두들 감탄하고 웃었다’고 나와 있다
수많은 관중들 앞에서 가무를 하고 밤이면 아무 품에나 안기던 천민여성이 고관대작으로부터 공경을 받는 황후가 되었으니 사회적으로 꽤 시끄러웠다.
더 놀라운 것은 그녀에게 내려진 직함인 아우구스타는 단순 황후라고 번역하기엔 힘이 있는, 사실상의 공동 통치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아우구스타라는 자리는 고대 로마 때부터 황제에 준하는 위상이었다.
테오도라는 미천한 자신의 신분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자신을 비판하거나 음해하는 자는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처형했지만, 여성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안들을 창안 했으며, 매춘부들의 재활을 돕는 자선단체도 설립하는 등 천민들에게는 관대한 정책을 펴서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
[남편을 능가한 테오도르의 정치력]
테오도라는 정치에 깊숙이 관여했고 그녀의 정치적 능력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제위에 오른 지 5년만인 532년 1월 10일 콘스탄티노플 히포드롬 경기장에서 벌어진 전차 경주에서 응원단끼리의 응원전이 폭동이 반란으로 확대되어 반란군이 황궁에 몰려들 때 나타났다.
그날 전차 경기가 과열되면서 응원단이 충돌하자 황제는 각 당의 주동자를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고, 이튿날 재경기를 벌이도록 했다.
하지만. 책임자 처형에 불만을 품은 녹색당과 청색당은 서로 합심하여 황제의 중과세 정책에 반대하는 반란으로 확대되어 전황제의 조카인 노인 히파티우스를 새 황제로 옹립하고, 아야소피아 성당을 불 지르고, 그리스어로 Nika를 부르짖으며 궁중을 포위했다.
니카는 ‘이겨라’ 혹은 ‘승리’라는 의미라고 한다.
니카를 외치며 황궁을 포위한 청파와 녹파들은 황제에게 유리한 조건을 이끌어내기 위해 위협을 가했다.
이에 겁을 먹은 유스티아누스는 보물을 챙겨 탈출하려 했지만 테오도라는 단호하게 이를 거부했다.
"폐하 수도를 버리시고 도대체 어디로 가시겠단 말입니까 당신이 수도를 벗어난 순간 당신의 황제가 아니게 되고 저 또한 황후가 아니게 될 것입니다. 수치스럽게 황후의 옷을 벗느니 당당히 자색 황후의 옷을 입고 죽을 것입니다."
당시 아주 가난한 사람들은 아무런 염색 없이 자연적인 섬유 색깔의 옷을 입었지만, 대다수의 평민들은 동물, 식물, 광물 등 주변에서 흔하게 얻을 수 있는 염색 재료를 이용해 옷감에 염색을 했다.
그러나 그 중에 유일하게 예외가 되는 색깔이 바로 ‘자주색’(purple) 계열의 염색이었다.
자주색 염색은 두로(Tyre) 지방에서 독점적으로 행해졌는데 가격도 비싸고 공정도 복잡했다.
두로 사람들은 자주색 염색의 비법을 공개하지 않았고, 두로가 위치한 페니키아 사람들은 당대에 알려진 최고의 염색 ‘달인’이었다.
이들의 국가 이름인 ‘페니키아’ 아(Phoenicia)는 ‘자주색 염료’를 뜻하는 헬라어인데, 국가 이름에서도 나타나듯이 자주색 염색업은 페니키아의 대표적인 국가산업이었다.
자주색 염료는 ‘뿔 고둥’(murex snail)으로 불리는 달팽이의 하부 기관지 선(hypo bronchial gland)에서 극히 소량씩 얻을 수 있었는데, 그나마 두로가 위치한 지중해 해변에서만 잡을 수 있었다.
50cm2의 천을 자주색으로 염색하기 위해서는 일만 마리의 뿔 고둥을 잡아야 할 정도로 귀했다.
뿔 고둥의 자색 염료는 한 번 염색이 되면 색깔을 빼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염색 효과가 강력했으며 로마 시대 황제와 일부 고위층만 자색 옷을 입을 수 있었다.
유스티아누스는 정신을 차렸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는 매제 베리사리우스 장군을 불러 반란을 진압하게 한다. 먼저 황제에 우호적인 청파를 뇌물을 주어 분열시킨 후 곧 정규군이 투입되어 녹당을 잔인하게 진압했다. 청당 또한 환호하며 이를 반겼으나 그 다음의 희생양들은 자신들이 되고 말았다.
베리사리우스 장군이 지휘하는 군대는 반란군들을 히포드롬 경기장으로 몰아넣고 무차별 살육했다. 로마제국 최대의 반란으로 기록되는 니카의 반란 때 처형된 반란군만 3만 명에 이르렀다.
이후 이 모든 사태에 대한 비난도 테오도라가 감수했다.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 백성들은 그녀가 음란하고 방탕하다고 욕을 했고 이후 콘스탄티노플에 전염병까지 퍼지자 그녀에 대한 분노로 하늘이 내린 천벌이라 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녀는 이런 비난에도 아랑곳 않고 유스티니아누스의 정책을 굳건히 지지했으며 이에따라 황제는 로마제국의 고토수복 정책 등 굵직한 정복사업을 꾸준히 추진할 수 있었다.
유스티아누스는 이후 강화된 권력으로 여러가지 사업을 벌였다.
먼저 로마법 대전을 편찬했고 현재까지도 이스탄불에 남아있는 당대 최고의 건축물 중 하나인 성 소피아 대성당을 완성했다.
그의 손아래 동서인 벨리사리우스 장군은 탁월한 지략과 전술로 반달제국을 멸망시켰고 이탈리아 반도에 상륙해 한 전투에서 4000명의 군대로 4만명의 게르만족을 격파하기도 하였다.
환관이자 장군인 나르세스는 환관답지 않게 과감하고 전략,전술에 능해 벨리사리우스가 페르시아 전선으로 소환되자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되어 동고트 왕국을 멸망시키고 그 외의 다른전투에서도 압도적인 위력으로 게르만군을 격파하였다.
게르만 족에게 점령당했던 이탈리아 본토와 카르타고를 포함한 북아프리카를 수복하여, 브리타니아(영국), 갈리아(프랑스), 히스파니아(스페인)을 제외한 서로마 제국의 영토을 다시 수복한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의존도가 컸던 유스티니아누스의 정치력은 그녀가 암으로 먼저 죽고나서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그녀가 죽고 난 후 병까지 걸린 유스티니아누스는 병석에서 홀로 통치를 할 수밖에 없었고 방만한 재정운영과 미뤄둔 정책들에 의한 부작용으로 제국은 심각하게 병들었다. 공공사업에 대한 임금체불이 심해지자 병사들의 불만도 크게 높아졌고 결국 제국의 안정을 크게 해치며 쓸쓸히 죽어갔다.
[빛에 가려진 그림자]
정사는 치적을 야사는 치부를 건드리는 것이 일반적인 역사 스토리이듯이 당시 황실 사관이던 프로코피우스는 <건축론>에서 황제의 빛나는 건축 치적을, <전쟁사>에서는 황제의 명장 벨리사리우스의 활약을 생생히 묘사했으나 공식 역사서와 별개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테오도라 황후의 추악한 욕망, 우둔함과 교활함, 낯뜨거운 사생활도 낱낱이 기록했다.
책에 묘사된 유스티니아누스는 그 자신이 법인 동시에 무법의 화신이었다.
제국 시민들의 재산을 닥치는 대로 강탈했고, 로마를 침략하는 훈족은 돈으로 구슬렸다. 돈맛을 본 훈족은 잊을 만하면 변경에 출몰했다. 반면 정복한 땅의 사람들은 거의 몰살했다.
그는 “누군가 리비아에서만 500만명이 죽었다고 말한다면, 필자의 생각에는 진짜 사망자 수의 절반 밖에” 안 됐다고 생각했다.
황제는 눈에 드는 여자를 침대로 끌어들이는 데 거침이 없었다.
극장 매춘부 출신의 황후도 “쾌락의 세계에서 패배하는 법이 없었다.” 비잔틴제국은 황제 사후로도 900년을 버텼지만, 제국의 위엄과 기상은 이때 이미 한풀 꺾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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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링크허용중 일부 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