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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42편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분깃이시라
시편 142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이 시는 다윗의 삶의 정황과 깊이 연결된 시입니다. 시의 제목에서 나와 있는 것처럼 그가 동굴 속에 피해 숨어 있을 때 지은 탄원의 기도시입니다. 어느 굴이라고 특정한 것은 없지만, 그는 아둘람 굴이나 엔게디 동굴에서 숨어 지낸 기록이 성경에 나옵니다. 그가 숨어 다닌 유다 광야 특히 엔게디 지역은 수많은 바위들로 널려진 황야이고, 그 곳에는 사람이 숨을 만한 자연 동굴들이 수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 모든 동굴을 다 탐사하지 못할 만큼 많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추적을 피하여 이러한 동굴 이곳 저곳을 옮겨다니면서 자기의 생명을 보존하느라 늘 불안한 밤낮을 10여 년을 보냈습니다. 그가 겪은 고통과 두려움과 슬픔과 낙심과 불안, 사람에 대한 배신감과 불신 등은 그의 심령 속에 큰 상처와 부담으로 다가왔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훗날 이스라엘 왕이 되어 그 많은 백성들의 목자가 되어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고 그들의 한숨과 고통을 덜어주는 그리스도의 예표로서 섬겼습니다. 그 모든 비결은 무엇일까요? 엄청난 고난으로 일그러질 것이 거의 분명한 상황에서 그는 어떻게 그 모든 고난 중에 그의 영혼과 마음과 정신과 감정이 더 깊은 긍휼과 자비와 사랑으로 배여있을 수 있으며, 균형있는 정신과 깊은 지혜를 가지며 포용력과 관대함을 가지는 동시에 공의로움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이것은 하나의 신비입니다. 그 신비의 비밀은 오늘 시편에 일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편을 통하여 우리 모두 삶에 다가오는 고난의 의미를 다시 한번 알아가는 시간이 되기 원하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 속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배우기 원합니다.
다윗은 1절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소리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원문에 보면, ‘여호와께’를 두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는 강조의 반복입니다. 그는 깊은 굴속에 숨어 있을 때, 심히 절박한 위험과 고독 속에 있을 때에 오직 하나님께 그 마음을 향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거듭 거듭 바라보는 것, 이것이 다윗이 행한 평생의 노력입니다. 시편 16:8에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라고 한 것처럼, 우리 모두 항상 하나님 얼굴 앞에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1절에 또 한 가지 반복하여 기록된 말씀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소리내어’입니다. 원문대로라면 이 단어가 거듭 맨 처음 나옵니다. ‘내 목소리로’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목소리를 내어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목소리를 내어 기도할 때, 처음에 ‘부르짖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르짖는다’는 말은 곤경에 처한 사람이 애절하게 부르짖는다는 뜻을 담은 단어입니다. 또한 후반절에 ‘간구하는도다’라는 말은 ‘애걸한다’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요셉이 구덩이에 던져졌을 때 자기 형들에게 자기를 살려달라고 애걸한다고 할 때에 쓰인 단어입니다(창 42:21). 그 때 얼마나 애걸하며 살기 등등하여 자기를 죽이려고 드는 냉정한 형들에게 자기를 살려달라고 요셉이 얼마나 애걸했을까요? 은 20량에 노예상인에게 자기를 팔아넘길 때에 얼마나 울면서 형들에게 애걸했을까요? 바로 그런 애타는 마음으로 다윗은 그 깊은 굴속 캄캄한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애걸하며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2절은 다윗의 기도의 내용이 나옵니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토로한다’는 단어는 제단에 포도주를 쏟듯이, 피를 쏟듯이, 붓는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기도 속에 자기의 원통함을 하나님 앞에 물을 쏟듯이 쏟아놓습니다. 또한 자기의 괴로움을 하나님 앞에 ‘진술한다’고 하였는데, ‘진술한다’는 단어는 그 앞에 ‘펼쳐놓는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당하는 마음에 괴로움과 슬픔과 아픔을 하나님 앞에 다 쏟아놓으며, 자기가 당하는 괴로움과 환난을 하나님의 눈앞에 환히 보이듯이 하나씩 다 기도로써 펼쳐놓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원통함과 그 쓰라린 괴로움을 혼자 담아놓지 않습니다. 사울 왕에게 당하는 그 미움, 그 신하들에게 받는 오해와 비웃음과 살해의 두려움들을 하나님 앞에 다 쏟아놓음으로써 다윗의 영혼과 정신과 마음은 터질듯한 숨통이 트이고, 막힐 듯한 호흡이 차분해집니다. 그리하여 그 많은 고난의 세월을 지나면서 다윗이 살아남을 수 있었고 견딜 수 있었고 내면의 상처를 극복할 수 있었고 성숙해질 수 있는 토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고난 중에 다윗을 본받으십시오. 사람에게 당하는 고통,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무게, 고난의 두려움, 미래에 대한 불안의 무거움 압박을 사람의 힘으로나 결심으로나 위로가지고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것들을 자주 다 쏟아놓으십시오.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괴로움의 문제들을 그분 눈앞에 다 펼쳐 보여드리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 문제들을 떠안도록 맡기십시오. 그리할 때 여러분은 인생의 고난의 수레바퀴 밑에서 건져질 것입니다.
3절 상반절을 읽겠습니다.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여기서 ‘영’은 ‘루아흐’로서 사람의 가장 깊은 자아를 가리킵니다. 영혼보다 더 깊은 개념으로 다윗은 이 영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다윗의 아픔은 너무 깊어서 그의 ‘영’까지도 짓뭉개지듯, 찢겨지듯 상할 위기를 만났다고 고백합니다. 그렇게 깊이 깨어지는 고통 속에서 그는 한 가지 기도 속에 큰 확신이 주어지며 위로를 받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라고 고백한 대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모든 길을 다 알고 계시고 보고 계시고 지켜주신다는 확신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길’이라는 단어로 쓰인 ‘나티브’라는 단어는 ‘하나님이 정하신 길’(사 42:6)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인생 전체에 대한 목적을 갖고 계시고, 그가 가는 길을 이미 하나님께서 정해놓고 계십니다.
잠언 19:2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시편 37:23,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비록 지금 너무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 처해 있고 인간적인 눈으로는 비전이 없고 고통과 좌절과 절망만이 가로놓여 있는 것 같지만, 다윗은 기도하는 중에 이 길 끝에는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그 계획과 목적을 이루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길, 사명의 길, 승리의 길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깊은 고통이 여러분의 영혼 깊은 영까지 깨뜨려서 상하게 할 즈음일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며 그를 바라십시오. 주께서 다윗의 길을 정하시고 그 앞길을 인도하시고 그로 끝내 승리하게 하신 것처럼, 여러분의 발걸음을 눈물 골짜기를 지나게 하실 것이요 반드시 골짜기 너머 더 크고 놀라운 은혜의 세계로 이끌어가실 것입니다.
3절 하반절부터 4절까지 읽읍시다.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오른쪽을 살펴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
다윗의 도망치는 모든 동선은 이미 그의 원수들도 어느 정도 다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윗이 지날 만한 곳에 은밀한 함정을 파놓고 다윗이 빠져들게 만들고자 시도합니다. 다윗은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매순간을 겪으면서 자기를 돕는 자를 찾아봅니다. 그는 ‘오른쪽을 살펴보소서’라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오른쪽’이란 전쟁 중에 적들이 노리는 쪽입니다. 적들은 항상 칼을 든 오른쪽을 공격합니다. 그래서 오른쪽에 나를 지켜줄 자가 있으면 큰 힘이 되는데, 그는 하나님께 자기의 오른쪽을 살펴보시라고 청합니다. 그런데 다윗의 오른쪽에 누가 있습니까? 다윗이 아는 자가 없습니다. ‘안다’라는 단어의 속뜻은 ‘알아준다, 존경한다, 호감을 갖다’라는 뜻입니다. 즉 다윗 주변에는 그를 알아주고 호감을 가지고 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또 그의 피난처도 없습니다. 그가 도망을 치려고 숨을 만한 곳도 다 적들이 미리 탐지하고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어서 피난처가 하나도 없습니다. 또한 그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습니다. 그를 주의 깊게 찾으며 사랑하며 아껴줄 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없다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반복될 만큼 다윗은 지금 고립무원의 처지에 있습니다. 사울의 큰 아들 요나단만 그를 멀리서 돕고자 하는 마음은 있으나 움짝달짝 못하는 신세요 다윗은 지금 자기 동족 유다 지파사람들마저 기피 인물입니다. 하룻밤만 집에 숨겨주고 쉬었다 가면 되겠냐고 문을 두드리면 다 문전박대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외롭고 괴로운 처지는 우리 주님이 당하신 처지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자기의 그런 괴롭고 외로운 처지를 표현하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
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런 외로움과 배신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편지를 쓸 당시의 로마 감옥에서 그는 이렇게 써보냅니다.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빌 2:20,21)
그의 마지막 순교 직전에도 그런 처지는 더 심해졌습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딤후 4:16)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여러분의 삶에 친한 이들이 다 떠나고 아무도 곁에 없는 처지가 되고 배신을 당하고 혼자서 외로움을 감내해야 할 때가 온다고 하더라도 그 일로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구주가 그 일을 당하셨고 바울 선생도 당하셨고 다윗도 당하셨고 사무엘도 당하였고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다 당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일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인생의 여정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시련의 골짜기의 필수코스인 줄 알고 넉넉히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이겨나가길 바랍니다
다윗은 그런 처지에서 이렇게 여겨나갑니다.
5절 말씀 함께 읽읍시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철저한 고독의 순간에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하기를, “하나님만이 나의 피난처십니다. 하나님만이 살아 있는 이 땅에서 나의 몫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디에도 나를 반길 친구 없고 어디에도 내 몸 숨겨질 집이 없어도 하나님은 친히 우리의 변함없는 친구가 되어주십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친구가 되어주십니다. 그는 내가 떨며 불안의 밤을 지샐 때 친히 피난처가 되어주사 평안히 잠을 지새워줄 집이 되어주십니다. 그뿐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이 세상의 재물, 이 세상의 부동산, 이 세상의 후손들, 이 세상의 칭찬과 명예를 자기의 기업으로 여길지 몰라도, 하나님의 사람은 이 땅에서 가장 큰 기업을 하나님으로 삼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모든 것이요 그의 가장 큰 재산이요 그의 모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어도 빼앗겨도 도둑질당해도 하나님 한분만이면 족합니다.
다윗의 이 고백은 그 심령 깊은 곳에 그 큰 두려움, 슬픔, 고통, 분노, 불안, 공허감들을 다 내몰아냅니다. 그는 이제 아무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겁나지 않습니다. 그를 억누르는 모든 무게들이 하나도 무겁게 않습니다. 그는 이제 6절 이하에서, 담대히 구원을 요청하며 확신에 찬 힘있는 기도를 굴속에서 드립니다.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내사 주의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의 부르짖음을 들을 줄 믿습니다. 비록 자기는 아무 힘도 없고 적들은 매우 강하여 그를 압박할 줄 알지만, 그는 마치 깊은 토굴 감옥에 갇힌 죄수처럼 아무런 소망이 없는 듯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토굴 감옥 같은 상황에서 그를 구원해낼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자기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에 감사하게 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를 이 곤경에서 구원할 뿐 아니라 나아가 하나님께서 자기를 그 이상으로 넉넉히 영화롭게 할 줄 믿습니다. ‘주께서 나에게 갚아주시리니’라는 말씀에, ‘갚아주다’라는 단어는 ‘가말’이라는 단어인데, ‘후대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시편 116:7 말씀에,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라고 한 그 단어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이 깊은 곤경에서 건져주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그를 넉넉히 대접하여 기쁨과 평안과 영광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이 다윗의 기도 속에 나타난 확신은 현실이 되었습니까? 아니 되었습니까? 되었습니다.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예언적 축복처럼,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된 친구들이 그 주변에 가득 둘러싸고 그를 축복하며 하나님께 함께 찬양하는 영광스런 날이 이루어졌습니다.
실로 그 오른쪽에 그를 알아주는 이 하나 없고, 그의 피난처도 하나 없고, 그를 돌봐줄 이 하나도 없던 그가 기도 속에 이 놀라운 미래를 확신할 수 있었고, 그 확신은 후일 현실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다윗은 고난의 사람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을 깊이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그에게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청소년기부터 시작된 숱한 고난의 길을 통과했습니다. 고난은 그를 힘들게 했습니다. 그 영이 깨어지고 그 혼도 불안하고 그 삶은 척박했습니다. 사막과 같이 외롭고 깊은 토굴 감옥처럼 그가 처한 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 길고 긴 고난 속에서 그는 망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견뎌낼 수 있었고 더 강해졌고 더 성숙해졌고 더 눈물과 사랑의 감수성이 깊어졌고 더 많은 사람들으 품고 섬기는 목자가 되어갔습니다. 가장 고난이 깊었으나 승리한 다윗은 훗날에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 고난의 사람입니다. 사도들도 고난의 사람입니다.
고난은 참으로 심오한 것입니다. 우리 삶에 고난이 있습니다. 때로는 그 고난이 아담의 원죄로 인한 불가피한 고난일 수 있고, 때로는 우리의 자범죄로 인한 채찍일 수도 있고, 때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남겨두신 고난일 수 있으나(골로새서 1:24), 그 어떤 것이든간에 고난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다 궁극적으로 복이 됩니다. 고난이 깊고 클수록 그만큼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갈 기회가 됩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붙들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붙드십시오. 오, 성도여 고난을 사랑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더 깊어지고 넓어지고 성숙해지고 강해지고 더 부드러워지고 더 낮은 자들을 품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더 주님 닮아가게 할 것입니다. 그러한 고난 속에서 다윗이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피난처 삼은 것처럼, 하나님 한분만을 이 땅의 삶속에서 유일한 분깃으로 삼은 것처럼 여러분 역시 그러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