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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9장 14-17절
낡은 것을 새 것으로
오늘 본문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세리 마태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 당시 죄인 취급을 받고 있는 부류 가운데 한 부류가 세리로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를 부르시되, 특별히 마태복음 10장에 의하면 사도로 세우고자 부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부르심이 얼마나 감사한지 마태는 그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잔치에 참여하는 것, 그리고 그곳에서 죄인과 함께 어울리는 것을 매우 못마땅해 했습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의롭다 하는 자들이었고, 의롭다 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죄인들과는 함께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시기 위해 오셨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비유로 말하자면 예수님은 영혼의 의사이시기 때문에 바로 병든 자를 고치시기 위해 오셨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 금식의 문제로 넘어오는데, 14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앞선 사건과 함께 생각해 보자면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있을 때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마가복음에서는 요한의 제자들만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까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막2:18) 누가복음에서도 요한의 제자들과 더불어 바리새인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차이가 있다면 누가복음은 금식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눅5:33).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에서는 이 질문, 즉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누가 하고 있느냐 하면 전후 문맥으로 볼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한 것처럼 표현되고 있습니다.
종합적으로 보자면 마태를 부르신 사건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시비를 걸고 있었는데, 거기에 금식이라는 문제로 인하여 요한의 제자들까지 합세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떻게 해서 그들이 합세하게 되었는지는 상세히 알 수 없으나, 합세한 동기와 관련해서는 바리새인들이 요한의 제자들을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여 금식 문제로 논쟁하게 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은 이 질문이 바리새인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말하는 반면 마태복음은 요한의 제자들이 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앞선 본문을 통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시비를 걸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여전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시비를 걸고 있는 주체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혹 그렇게 보지 않는다 할지라도 다른 복음서는 요한의 제자들과 함께 바리새인들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 본문이 단지 요한의 제자들만의 물음은 분명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오늘 본문은 금식 문제로 시비를 걸게 되는데,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금식을 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비유로 하자면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는 것이 바리새인들의 대표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눅18:12). 바리새인들뿐만 아니라 요한의 제자들 역시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8절에 보면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 종교적인 의미에서 지도자라 할 수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에게 속한 사람들은 자주 금식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들이 “우리는 금식을 하는데,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은 왜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을 때는 어쩌면 그 날이 금식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금식이란 무엇이고, 왜 금식을 하는가? 마태복음 6장 16절 이하의 말씀을 통해 언급한 바가 있지만, 금식이란 일정 기간 동안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래 사람은 음식을 먹어야지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보존해 주셔야 하지만,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의미에서는 그렇게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음식을 끊는다는 것은 자기 생명을 내어놓는 것과 같습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먹어야지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음식에 대하여 그것을 끊음으로 내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은총과 도우심을 구하는 자세가 바로 금식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금식은 종종 기도와 함께 올 때가 있는데, 바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는 의미에서 금식이 있는 것입니다. 철저히 하나님만을 바란다는 그런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구약과 연관해서 보자면 율법을 통해 금식하도록 하는 날이 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 날이 언제냐 하면 7월 10일 대속죄일입니다. 레위기 16장에 보면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라”는 말씀이 있는데(레16:29,31), 이것을 금식의 규례로 정하여 지키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스가랴 8장에서는 네 번의 금식일이 있었다는 것도 증거 하고 있습니다. 19절 말씀인데,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넷째 달의 금식과 다섯째 달의 금식과 일곱째 달의 금식과 열째 달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여기서 4월, 5월, 7월, 10월은 열왕기하 25장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멸망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으로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되었을 때 자기 자신의 죄를 돌아본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이스라엘의 회복을 구한다는 의미에서 금식일이 정해져 있었던 겁니다.
이렇게 볼 때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이 금식한다는 것은 그들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는 의미에서 금식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의미에서 저들이 금식하고 있었는가? 그렇지 않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살펴본 바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외식적인 금식에 대하여 비판하셨습니다. 특히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향하여 비판하실 때 저들은 금식하면서도 슬픈 기색을 보이며,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만든다고 하셨습니다(마6:16). 금식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 그 대상이 되고 있었던 겁니다. 이런 사실은 누가복음 18장의 비유를 통해서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는데, 저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면서도 금식 자체가 그들의 자랑이 되고 있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금식 자체가 공로가 되고 있었던 겁니다.
사실 이런 부분은 우리도 매우 주의해야 될 부분입니다. 금식의 의미를 잘 생각해 본다면 금식 자체가 부정적인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유익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으시기 전 40일 동안 금식하셨습니다. 심지어 교회가 어떤 중요한 결정을 할 때 금식하며 기도했다는 말씀도 있습니다(행13:2, 14:23). 그러나 이런 유익함이 외식주의로 빠질 수 있음에 주의해야 합니다.
금식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모든 형태가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외식에 빠질 수 있고, 예배를 드리면서도 외식에 빠질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그것이 곧 공로인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공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으로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한 예로 기도를 많이 하거나 기도해서 응답을 많이 받으면 기도하는 자가 목에 힘을 주는 경향이 있는데, 철저히 공로주의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함으로 하나님께 더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자기 자신의 우월함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하면서 있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 정죄하는 것, 다 공로주의인 겁니다. 거기다 40일 금식까지 하게 되면 뭔가를 해 낸 것처럼 생각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들은 명함에 40일 금식 한 것에 대하여 프로필로 넣기도 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얼마나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방향과 다른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금식에 관한 질문은 이런 자세와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금식을 하는데,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습니까?” 앞선 본문에서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시비 걸었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먹고 마시는 문제를 다시금 시비 걸고 있는 겁니다. 특히 마태복음에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이 질문을 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 질문과 관련해서는 저들 역시 바리새인과 다르지 않는 정신 가운데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5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신랑으로, 그리고 자신은 그의 친구로 표현한 부분이 있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요3:29) 예수님이 이런 세례 요한의 말을 의식하셨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리고 요한의 제자들이 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말씀하신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자신을 신랑으로 표현하고 있고 그의 제자들을 혼인집 손님들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지금은 신랑과 신랑의 손님들이 함께 혼인잔치를 벌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금식이란 것은 슬퍼하며 애곡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잔치를 벌이고 있는 자리에 슬퍼하고 애곡하는 것이 마땅하냐?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게 된다고도 말씀하십니다. 신랑을 빼앗긴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얼핏 생각해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는 것을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제자들과 함께 하지 못할 때, 다시 말해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난 뒤 승천하심으로 이 땅에 더 이상 계시지 않을 때, 바로 그때를 신랑이 빼앗길 날이라고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매튜 풀 주석에 보면 “지금은 나의 제자들이 애곡할 때가 아니다. 하지만 내가 그들에게서 육신적으로 떠나게 될 때가 곧 올 것인데...”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칼빈 역시 그런 뉘앙스로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으로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동안만이라도 그들을 쉬게 하시고 한가하게 지내도록 하셨다는 정도로 우리는 만족하도록 하자.”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 금식할 것이다. 다시 말해 그때는 슬퍼하며 애곡하는 일이 있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께서 육체적으로 함께 계시지 않는 것이 슬픈 날인가? 예수 그리스도도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은 분명 예수님의 모든 사역을 다 완성하시고 난 뒤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의미인데, 그것이 어떻게 슬퍼하고 애곡하는 금식과 연결될 수 있는가? 물론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그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날의 연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형적으로는 신랑과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슬픈 날이요, 금식해야 될 때라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JS 참조). 특별히 예수님의 제자들의 경우 예수님을 따라 복음을 증거 해야 될 뿐만 아니라, 증인으로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외적으로 어려움 가운데 놓일 수밖에 없다는 측면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으로 볼 때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는 지금은 큰 어려움이 없지만, 그러나 모든 사역을 완성하시고 승천하고 난 뒤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 가운데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슬퍼할만한 때요 금식해야 될 때라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다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육체적으로는 제자들과 함께 계시지 않으시지만, 그리고 복음을 위하여 많은 고난을 당하겠지만, 신성과 인성의 분리할 수 없는 ‘전 그리스도’(totus Christus)께서 저들과 함께 하실 것이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로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의 말씀처럼 성령이 임하셔서 저들을 지도하시며 인도하실 것도 사실로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신랑을 빼앗긴 것처럼 있지만 실제로 빼앗기는 일이 있느냐 하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비유를 들어 좀 더 상세히 설명하시는데, 그것이 16절과 17절입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먼저 17절 마지막 부분에 있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말은 종종 세상 사람들 입에서도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때 사용하는 의미는 과거는 잊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라는 그런 의미에서 사용됩니다. 실제로 오늘날 보면 많은 부분 구약과 신약, 율법과 복음으로 본문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구약의 틀은 버리고 복음에 걸맞는 틀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그런 해석을 거부합니다. “이것은 결코 헌 옷과 낡은 가죽 부대를 바리새인들에게, 새 포도주와 새 옷감을 복음의 가르침에 비교한 것이 아니다.” 칼빈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매튜 풀 주석도 마찬가지이고, 매튜 헨리 주석도 동일합니다. 전체적인 내용을 구약과 신약, 율법과 복음 이런 식으로 해석하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번역되어 나온 내용만 확인한 것으로서 모든 개혁자들의 해석이 그러한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말씀을 드릴 수 없지만, 정 목사님과 통화하면서 확인한 것에 의하면 칼빈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개혁자들은 오늘 본문에 대하여 구약과 신약 혹은 율법과 복음이라는 방식으로 풀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
따라서 저는 오늘 본문에 대하여 칼빈의 해석을 중심으로 생각하고자 하는데, 일단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비교를 그리스도께서 약하고 미숙한 제자들과, 이들을 거기에 비교하기에는 너무 딱딱한 규율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보면 이 문제는 간단하다.” 그러니까 지금 낡은 옷과 낡은 가죽 부대는 무엇을 가리키고 있느냐 하면 훈련이 덜 된 제자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칼빈은 “그들이 강하지 못하고 단련되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생활 양식을 따르도록 강요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의 상황이 다 같을 수는 없고, 갑에게 효과를 낸 약이 을에게도 효과를 낸다는 법도 없으며, 특별히 연약한 자의 경우 그들이 난폭한 취급으로 찢어지거나 무거운 책임으로 주저앉지 않도록 가볍게 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매튜 풀 주석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먼저 15절 이하 17절 말씀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 설명하는데, 15절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자기 제자들은 아직 금식할 때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 금식하지 않는가? 아직 금식할 때가 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16절, 17절에 대해서는 “자신의 제자들은 회심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점차적으로 순서를 밟아서 경건을 위한 좀 더 혹독한 외적인 훈련으로 나아가야 하고, 그렇게 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특히 16, 17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요지에 대해서도 그리스도께서 두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첫 번째 비유는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일은 결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낡은 옷은 사람이 오랫동안 입어서 그 힘이 약해져 있는 까닭에, 거기에 생베 조각을 붙이면, 생베 조각이 당기는 힘을 감당할 수 없게 되어 찢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두 번째 비유에서도,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오래된 가죽 부대는 오래 사용해서 약해져 있는 까닭에 새 포도주를 감당할 수 없어서 결국 터지게 되고, 포도주는 쏟아지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새 포도주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새 가죽 부대에 넣는다고 말씀하신다.
나의 제자들이 이제 새롭게 회심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내가 그들에게 혹독한 경건의 훈련을 시킨다면, 그들은 낙심해서 그만두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누가가 덧붙인 말씀처럼,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눅5:39). 습관은 대단한 폭군이어서, 사람은 자기가 이전에 습관적으로 해왔던 것들을 갑자기 단번에 끊을 수 없고, 점진적으로만 끊을 수 있을 뿐이다.
매튜 헨리 주석도 동일합니다. 매튜 풀 주석과 마찬가지로 저들의 질문에 대하여 15절과 16절, 17절 두 분으로 나눠서 설명합니다. 왜 금식하지 않는가? 15절을 근거로 “그 의무는 적합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16절과 17절을 근거로 “그들은 그 의무를 행할 만한 충분한 능력을 가지지 못하였다.”고 설명합니다. 16절, 17절에 대한 주석을 좀 더 확인해 보자면,
이것은 두 가지 유사점으로 설명되는데, 그 하나는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것으로서 기운 것이 낡은 옷을 당겨 헤어짐이 더하게 되며(16절), 또한 그 하나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것으로서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지게 된다(17절).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요한이나 바리새인의 고행과 같은 이러한 고행을 견딜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 직접적인 소명을 받았으므로 이러한 엄격함에 익숙하지 않았고 또한 그들에게 적합하지 않았으며 그것에 의해 그들의 다른 일에도 오히려 더 적합하지 않았다.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지금 예수님께서는 낡은 옷, 낡은 가죽 부대를 누구로 비유하고 있느냐 하면 제자들로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낡은 옷과 낡은 가죽 부대와 같아서 찢어지기 쉽고 터지기 쉬운 존재란 것입니다. 이제 막 그리스도를 위하여 부름 받은 자들로서 매우 연약한 자들이란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어떤 모습으로 갖춰지느냐? 낡은 옷이 아니라 새 옷처럼 될 것입니다. 낡은 가죽 부대가 아니라 새 가죽 부대가 될 것입니다. 생베 조각, 즉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베 조각을 붙여도 찢어지지 않을 사람이 될 것이며, 새 포도주를 부어도 터지지 않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찢어지기 쉽고 터지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분명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의사를 필요로 하는 병든 자를 위해서 왔지, 의사가 필요 없는 건강한 자를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완전한 자로 있어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불완전 자로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연약한 자로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훈련이 필요한 자입니다. 그러나 훈련이 필요하다고 할 때 그들의 연약함을 충분히 고려한 것인가? 그리고 저들처럼 형식에 치우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지식에 합당한 내용으로서 갖추고 있는가?
실제로 앞선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시는데, 마태복음 9장 13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앞선 본문에서 저들이 시비를 걸었던 것은 왜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저들은 죄인이고 바리새인 스스로는 의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의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죄인으로 있는 자들을 정죄하는 자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통하여 가르치는 바는 무엇이냐? 그리고 선지자들은 끊임없이 강조한 것은 무엇이냐? 긍휼을 원하는 것이지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제사 자체를 원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제사라는 형식만 있고 제사와 함께 맺어야 할 열매인 긍휼이 없는 것을 원치 않으셨던 겁니다. 율법의 요약으로 이해하자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 또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골자라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제사는 뭐냐? 참된 제사가 아니라 형식적인 제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형식으로서 비판과 정죄를 일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자신은 구별된 자인 것처럼, 자신은 우월한 자인 것처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 내용인가?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들은 죄인들과 식사하는 그것으로만 비판과 정죄를 일삼는 것이 아니라, 식사를 하고 있는 그것으로도 문제를 삼습니다. 우리는 금식을 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우리뿐만 아니라 요한의 제자들도 금식을 하고 있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특별히 마태복음은 이런 질문의 주체를 요한의 제자들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바리새인과 합심해서 긍휼이 아닌, 비판과 정죄를 일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질문에 지금 예수님께서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의 제자들은 너희들이 행하고 있는 것을 행하기에는 아직까지 연약한 자들로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연약할 뿐만 아니라 무엇까지 말씀하시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느냐? 저들의 외식까지도 염두해 두시면서 말씀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다 새로운 피조물입니다(고후5:17). 그러나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해서 더 이상 훈련이 필요 없을 정도로 온전하고 완전한 자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처음부터 온전하고 완전한 자는 없습니다. 아니 이 땅에서는 어느 누구도 온전하고 완전한 자로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땅에서는 온전하고 완전한 자가 되기 위하여 끊임없이 훈련해야 하는 자로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훈련이 처음부터 강한 것으로 적용한다면 과연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있을만한 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심지어 저들이 말하고 있는 금식은 과연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금식의 내용인가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금식이라는 외식만 있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금식의 내용인가 하면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기록한 말씀으로 하자면 경건의 모양만 있지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딤후3:5). 어쩌면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실 때 당시 외식으로만 남아 있는 금식에 대해서도 거절하고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단지 외식적인 금식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 금식을 행할 때가 올 것이고, 그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있고 난 뒤 제자들은 이전과 분명 달라진 모습을 보입니다. 3년이라는 기간 동안 훈련을 받고 받았지만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그 자리에서도 그들의 생각에는 거의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묻는 것이 뭐냐 하면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1:6) 이미 살핀 바 있지만, 육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여전히 꿈꾸고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기에 앞서 누가 예수님의 오른 팔, 왼 팔이 될 것인가를 다투며 시기했었는데,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난 뒤 그리고 승천하시기에 앞서서도 여전히 그들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던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뒤, 그리고 성령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임하셨을 때 그들은 바뀌었습니다. 물론 그때는 온전하고 완전한 자로 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때가 되어야 한다고 할 때 그 때가 바로 성령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임하셨을 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제자들은 낡은 옷과 낡은 가죽 부대와 같은 자로 있다고 할 때 우리 역시 마찬가지란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찢어지기 쉽게 터지기 쉬운 존재란 것입니다. 그러나 훈련을 통하여 찢어지지 않고 터지지 않는 자가 될 것입니다. 다만 훈련이라고 할 때 훈련을 받고 있는 자가 우리이기 때문에 우리의 실력으로 강하게 되는 것처럼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제자들조차 훈련을 받고 있었지만 거의 변화가 없었던 것처럼 우리의 실력이란 훈련을 받는다고 해서 실력이 쌓이고 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럼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훈련 받을 필요가 없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우리를 성숙시키십니다. 그러나 성숙시킨다고 할 때 그 주체가 누구냐 하는 것을 분명히 아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그 주체로 계시다는 겁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예수님 살아 계실 때도 그들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자로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9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왜냐하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 때문입니다. 그래서 추수할 수 있는 자들을 세우십니다. 마태복음 10장으로 넘어가시면 그런 의미에서 12제자가 있는 겁니다. 그러나 그들이 천국 복음을 전파할 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요한복음 4장 35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요4:35-38) 본문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지는 않겠지만 추수할 때가 되어 추수할 일꾼을 부르십니다. 뿌리는 자가 있고 거두는 자가 있다고 할 때 지금 제자들이 부름 받고 있는 것은 거두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너희는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는 자와 같다는 데 있습니다. 물론 추수하는 것, 거두는 것도 노력을 요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노력을 헛되다고 말씀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참된 주체가 누군가 하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분명히 알리는 말씀이 고린도전서 3장에 나타나는데, 5절부터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3:5-7) 여기 보면 바울 자신을 심은 자로, 아볼로는 물을 준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노력이 들어간 부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어떤 고백을 하느냐?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무치 무와 같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면서 고백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이것을 고린도전서 4장에서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7절을 보시면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그러니까 노력한 모든 것은 노력한 것조차 받아서 한 것이란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력했다고 해서 그것을 자랑할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이런 측면에서도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모든 사고는 그들 스스로의 노력을 자랑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영혼의 의사로 오셨고,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특별히 그 동일한 일을 행하도록 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세웠는데, 그들은 어떤 자들인가? 지금은 연약한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훈련을 통해 강한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주의해야 될 것은 훈련 자체를 통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훈련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 비로소 연약함을 벗고 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무엇과 같은가?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행전의 말씀으로 하자면 성령이 임하셔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는 어떠했습니까? 3년 동안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난 뒤 승천하시는 자리에서까지 그들의 생각은 변화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때문에 누가 역사하셔야만 하는가? 하나님이 역사하셔야만 하는 겁니다.
이것은 제자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도 동일합니다. 연약함이 있고 연약한 만큼 찢어지기 쉽고 터지기 쉬운 존재이지만, 그런 우리를 강하게 하시기 위해서 훈련하십니다. 에베소서 말씀처럼 너희를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게 하기 위하여 부르셨기 때문에(엡1:4) 거룩하고 흠이 없는 방향으로서 훈련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훈련하실 때 연약한 자가 받을 수 없는 것을 훈련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바로 이런 시험을 통하여 좀 더 강한 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그때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도 잊지 마셔야 합니다. 훈련받으면 무조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자들이 강하게 되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한번 이겨냈다고 해서 이겨낸 것으로 강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과 보호가 없다면 동일한 어려움이 닥쳐오게 될 때 한번 이겼다고 해서 또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래서 낡은 옷과 같은 존재요, 낡은 가죽 부대와 같은 자인 겁니다. 연약한 자들이요, 건강하지 못한 자, 죄인인 것입니다. 바로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셔서 바꾸시는 겁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낡은 옷, 낡은 가죽 부대와 같습니다. 아니 그것이 익숙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새 옷과 새 가죽 부대로 만드실 것입니다. 죄인을 불러 의인으로 세우기 위해 오셨고, 병든 자를 고쳐 건강한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낡으면 버리는 것이 세상 원리 속에서는 일반적이지만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십니다(사42:3). 오히려 낡은 것을 새 것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물을 가지고 포도주로 만드신 것처럼 근본적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그러나 때가 있습니다. 한번에 완전히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이라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하나님 홀로 그 일을 행하시는 분이심을 우리에게 증거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게 있는 것 중 받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아는 자로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자로 서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의 것이 없기 때문에 내게 있는 것으로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긍휼로 기다려줄 수 있는 자로서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