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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업둥이>의 줄거리:
과부의 헌금과 업둥이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교회사 이천년 동안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 행위의 모델이 되어 온 이 과부의 두 렙돈 헌금! 생활비 전부를 드림으로서 일어나는 결과는 정말로 의외의 것입니다. 과부가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는 순간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는 한 업둥이가 놓여지게 됩니다.
업둥이
(막12:38-44)
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41.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업둥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여러분 다들 아실 거예요, 집 앞에 버려진 아기를 업둥이라고 말합니다.
주로 아이가 없는 집인 것을 알고 그 집 앞에 버려두게 되면, 대부분의 경우는 그 업둥이를 잘 받아들여서 정성껏 키우게 되는 것이 그냥 한국 사람들의 전통이었습니다.
이 업둥이는 보통 갓난아기 이거나 태어난 지 3, 4개월 정도 되는 아기가 제일 많다고 해요.
그런데 몰래 버리기 때문에 아빠가 누구이며, 엄마가 누구이며 어디에 사는 누구 이런 것을 전혀 알 수가 없지요.
간혹 그저 사연만 간단하게 적어둘 수는 있겠습니다마는…
그러니까 정말 문 앞에서 응애응애 하고 울고 있는 아기의 처지를 보자면 천하에 이 아기의 생존에 관한 보장이 제로인 상태입니다.
도대체 이 아기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 참으로 궁금하고 위태롭지 않을 수가 없는 지경이지요, 그냥 포대기에 싸서 버려지는 것이니까.
자! 이러한 업둥이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과부헌금과 내용적으로 아주 깊이 관여가 되어 있습니다.
다 아시는 대로 과부의 헌금, 이 이야기는 2000년 교회사 속에서 헌금행위의 모델이 되는 것으로 칭송되어온 본문입니다.
심지어는 어제 부처님 오신 날을 겨냥해서 쓴 에세이를 하나 읽는 중에도 이 성경의 과부의 헌금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그만큼 유명한 본문입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가 도대체 어떻게 업둥이 이야기로 연결이 될 수 있는가?
참 신비한 본문이에요, 여러분!
너무나 신비로운 뜻이 담겨져 있는 본문인데,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헌금함 앞에 앉아서 헌금하는 모습을 지켜보셨던 모양입니다.
민망하게 왜 그러셨는지 모르겠어요.
성전에 헌금함이 놓여 있는 자리는 여인의 뜰입니다.
그러니까 성전에 번제단이 있고, 유대인 남자의 뜰이 있고, 그 다음에 여자와 아이들, 유대인 여자와 아이들의 뜰이 있고, 이방인의 뜰이 있는데, 여자의 뜰에 놋쇠로 만들어진 헌금함이 13개가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9개는 성전에 쓰여 지는 재정을 위한 헌금이고, 4개는 구제를 위한 헌금함이었는데, 어쨌든 이 헌금함에 헌금을 하는 것이 공개되었던 것 같아요, 누구나 다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부자들이 돈을 넣을 때 한 번에 다 넣지 않고(동전이었으니까) 계속해서 던집니다.
마치 톨게이트에서 동전 던져서 집어 넣듯이 쩡그렁 쩡그렁 소리가 나게 계속 오~랫동안 아마 돈을 던지면서 사람들에게 내가 이렇게 헌금을 많이 한다는 것을 아마 보였던 모양이지요?
그런데 한 과부가 와 가지고는, 누가 볼까 봐 두리번거리며 민망해 하면서 두 렙돈을 집어넣었던 것 같아요.
이 두 렙돈이라는 것은, 아~주 적은 돈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 통용되던 화폐 중에 제일 작은 단위인데, 두 렙돈이 한 고드란트라고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할 때 그 한 앗사리온도 작은 돈으로 말한 거 아닙니까? 그런데 한 앗사리온의 4분의1이 고드란트에요, 1고드란트.
그래서 1고드란트라는 것은, 한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인데, 주석을 보니까 하루 품삯 한 데나리온의 128분의 1에 해당되는 돈이랍니다.
그러니까 일일 노동자 임금을 우리가 십 만원으로 가정했을 때, 한 고드란트라고 하는 돈은 800~900원정도 되는 돈입니다, 800~900원.
그러니까 두 렙돈이라 그러면 그 정도 되는 돈이지요. 800~900원 정도.
근데 문제는 그 800~900원이, 가난한 과부라고 했는데, 이 가난한 과부의 생활비의 전부였다는 겁니다, 그 당시 생활비에 전부였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과부가 생활비 전부를 드렸으므로 부자들이 헌금한 많은 액수보다도 더 많은 것을 하나님께 드린 것이 된다.’
하나님께 더 많은 것을 드렸다고 하는 이상한 예수님의 계산법의 이유가 뭐냐 하면, 생활비를 다 드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생활비를 다 드렸기 때문이다.
자! 그러면 우리의 질문은, 그렇다면 우리도 과부처럼 헌금을 해야 되느냐?
부자들은 그 풍족한 가운데서 헌금을 했어요.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천억 갖고 있는 부자가 일억을 헌금했다고 합시다. 그럼 1000분의 1을 헌금한 거예요.
전부는 천억이에요, 전부를 다 하려면 천억을 해야 됩니다.
근데 퍼센티지로 치면 0.1퍼센트를 헌금한 겁니다.
그렇다면 비율을 따져서 우리도 이렇게 헌금해야 되는 겁니까, 이 과부처럼?
과부는 그가 갖고 있는 유형자산이 그 당시, 800~900원, 900원, 1000원이 전부 다였는데, 그 1000원을 다 드렸어요. 다~ 드렸어요, 다 드렸는데도 1000원이에요.
근데 부자는 1000분의 1밖에 안 드렸어요, 근데 1억이에요.
다시 말하자면 많다는 뜻은 양의 적고 많음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과부의 헌금을 되게 좋아하신다는 얘깁니다.
자, 무슨 뜻이 숨겨져 있을까요? 여러분.
생활비 전부라고 하는 데에 주님께서 악센트를 두십니다, 생활비 전부.
생활비 전부.
이 과부에게 있어서 생활비라고 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남편이 없어요, 다시 말해서 울타리가 없다는 겁니다.
내 생존을 유지해 갈 수 있는 울타리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내 생명을 부지해 갈 수 있는 근거가, 의지처가 없다는 얘깁니다.
그러므로 과부에게 있어서 이 생활비라고 하는 것은, 정말 부자들에게는 껌 값이지마는, 이 과부에게는 자기의 생존을 유지해 갈 수 있는 유일한 의지처가 되는 것이 생활비입니다.
그런데 그 생활비를 전부 다 드려버렸어요.
이 얘기는 과부가 자기의 생존을 유지하겠다는 자기 목숨과 생명을 care하는 마음, 자기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 그것이 바로 생활비에 다 담겨져 있다는 거예요.
지금 자기의 미래를 보존하고, 자기의 생명을 유지하고, 자기의 생존을 정말 이끌어 갈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생활비이기 때문에, 자기의 생존을 염려하는 모든 마음이 다 이 생활비와 묶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었다는 것은 자기 생존을 염려하는 마음 전체를 집어 넣어버린 것과 똑같다는 얘기에요.
자! 자기 생존을 위해서 염려하고 근심하고 돌보고 자기의 미래를 이끌어가야만 하는 생활비에 묶여있는 이 마음이 생활비를 다 드려버렸으니까, 이 마음이 없어져 버린 겁니다.
자기 생존을 보존하고 염려하는 마음까지 다 없어져 버린 거예요.
그러면 이제 과부의 삶, 과부의 생존, 과부의 미래는 남편도 없이 홀로 버려져 있는 이 과부는, 과부자신으로부터도 버려져 버린 겁니다.
이 가난한 과부의 미래, 가난한 과부의 생존은 과부의 자신의 마음으로부터도 버려져 버렸다는 얘기에요.
그러므로 과부와 생활비 전부, 자기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 될 수 있는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어 버렸을 때, 과부는 자기의 생존을 위한 염려하는 마음 자체를 헌금함에 넣어 버린 것이고, 과부의 생존과 미래는 과부자신으로부터도 버려져 버린, 이제는 포대기에 싸서 집 앞에 버려진 업둥이가 되어 버렸다는 얘깁니다.
이 가난한 과부의 미래와, 이 가난한 과부의 생존과 이 가난한 과부의 삶은, 이제 누가 책임집니까?
생활비를 다 드리면서 자기 자신의 삶과 생존과 미래에 대해 염려하는 마음까지도 다 던져 버린, 이 과부의 삶은 업둥이가 되어버렸다는 얘기에요.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돌보지 않아요, 과부 자신도 돌보지 않으니까.
그런데, 어디에 버려진 겁니까?
과부가 자기의 생존을 염려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생활비를 다~ 헌금함에, 성전에 있는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마음이 없어져 버리면서 이 여인의 삶, 이 과부의 미래, 이 과부의 생존이 하나님의 집에 버려진 업둥이가 되어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업둥이 할 때 이 ‘업’이라는 말이 무슨 얘기인지 아십니까?
많은 분들이, ‘업어서 데려와서 키운다’ 뭐 이런 ‘업’인줄 알아요.
업는다는 동사의 앞 음절을 딴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래요.
이 ‘업’이라는 말은, 집안의 재산을 늘려주는 상서로운 존재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속담 중에 ‘업족제비 비행기 탔다’ 이런 말이 있어요.
‘업족제비 비행기 탔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족제비가 어떤 집안에 땅 속에 살고 있으면서 이 집안이 물질적으로 잘~ 됐습니다, 아주 번성했습니다.
그런데 업족제비가 비행기를 타고 가버렸습니다.
이제 집안에 재물이 말라버리기 시작하는 액운이 끼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업둥이라는 말에는, 버려져 있는 이 아기를 데려다 키울 때, 이 집안이 크~게 재물의 번성을 누릴 것이라고 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는 겁니다.
자! 이 과부가, 자기 자신의 삶, 이 땅 위에서 자기 자신의 삶과 자기 자신의 존재, 자기 자신의 미래까지도 자기 마음으로부터 버려 버렸습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느라고.
그래서 성전의 업둥이가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이 과부의 삶을 업둥이로 떠맡아야 돼요.
이때 어떤 마음으로 맡으시겠습니까?
정성스럽게 맡는다는 얘기에요, 이 과부의 삶을.
업둥이가 돼버린, 이 지상에서의 과부의 삶, 과부의 마음조차도 자기의 그 과부의 삶을 돌보지 않고 있는, 이런 업둥이가 되어버린.
왜? 과부 자신의 삶을 염려하는 그 마음을 하나님께 생활비와 묶어서 드려버렸기 때문에 업둥이가 되어버린 이 과부의 삶을, 이 과부의 미래를 하나님께서 정성스럽게, 당신의 능력과 지혜와 사랑을 다 들여서 키워 가시고 이끌어가시게 될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그냥, 그냥 헌금을 드렸다는 얘기가 아니라는 얘기에요.
‘생활비 전부를 드렸다’, 생활비 전부라는 말에 힘을 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는 얘깁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업둥이가 될까요?
앞에 서기관들의 외식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긴~ 옷을, 발에 끌리는 긴 옷을, 땅에 끌리는 긴 옷을 입고 다니고, 시장에서 문안 받기를 좋아하고 하는 이런 서기관들 외식하는 자들 이들을 조심하라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여러분, 외식이 성경에서는 어떤 뜻이라고요?
바리새인의 외식, 서기관의 외식?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얘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얘기하는데, 진짜 그 마음에는 오늘 본문에 나온 대로 39절에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이라는 말이 나와요.
‘원하는’,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좋아하는’ 좋아한다, 영어로 ‘like’에요.
그러므로 하나님을 말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고, 이들이 좋아하는 건 따로 있더라는 얘기에요.
하나님을 이야기 하는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얻기 위한 방편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멋진 설교를 하고 멋진 가르침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기 속마음으로 진짜 하나님이 좋아서 ‘이렇게 좋은 분이다’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돈이 좋은데, 윗자리에 앉는 게 좋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게 좋은데, 그것을 얻는 방편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으로 삼은 것이라는 거예요.
이게 바로 위선이고 외식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과부가 성전에 자기의 생활비에 묶인 마음, 다시 말해서 자기의 생존을 염려해야 되는 마음자체를 아예 다 하나님께 드려버린 이유는, 자기 스스로가 이 지구 위에서 앞으로 전개될 자기 인생의 미래를 하나님 앞에 업둥이로 바치려고 한 의도 때문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을 좋아해서. 서기관들은 이러이러한 것들을 좋아했다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부는 하나님이 좋아서 자기의 삶보다, 자기의 인생의 미래보다, 자기의 생존보다도 하나님이 더 좋아서 하나님께 자기 생존에 쓰여 져야 될 생활비를 다 드려버린 겁니다.
이제 하나님 손에, 이 과부의 미래, 과부의 삶이 업둥이로 얹혀 지게 된다는 얘기에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이 과부의 헌금을 따라서 헌금하며 살 수가 있습니까?
이제 퍼센티지를 계산을 해야 됩니까? 아니에요 그거 아니에요.
십자가의 길이에요.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으면, 과부의 헌금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무슨 얘깁니까?
우리가 십자가를 붙잡는 이유는 내 죄 사함을 받기 위한 게 아니라 그랬어요.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이 좋다는 사실을 믿는 겁니다.
서기관들이 사람들에게 문안 받고 잔치자리에서 상석에 앉는 걸 좋아한다, 이 좋아하는 것, 상석에 앉는 것보다 하나님이 더 좋다, ‘내가 이 지구상에서 이 몸을 입고 있는 동안에, 이 몸을 입고 있는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그 어떠한 경사스러운 일보다도 하나님이 더 좋다’라는 걸 믿고, 내 마음을 하나님께 다 보내기를 원하는 것, 그래서 십자가를 붙잡는 겁니다.
과부가 생활비를 몽땅 다 헌금함에 넣는 마음은, 십자가에서 내 마음이 이제는 이 세상에서의 나의 삶을 더 이상은 돌보지 않겠다, 내 미래에 대해서는 내 마음을 조금도 쓰지 않겠다는 얘깁니다.
미래를 내 마음으로 붙잡고(내 인생의 미래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과부의 헌금의 태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좋기 때문에 내가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내게 일어날 수 있는 그 어떤 좋은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께 지금 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것을 믿고, 십자가를 붙잡고 이 세상 이 몸으로 이끌어져야 될 삶, 이 몸으로 이끌어져야 될 미래에 대해서 죽어버리는 겁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다 드리기 위해서.
이게 바로 두 렙돈을 드린 과부 헌금에 담겨진 뜻이라는 거예요.
과부의 마음이라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께 다 드리고 싶었던 겁니다.
왜? 과부인 자기의 인생의 미래에서 일어날 수 있는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하나님보다 더 좋을 순 없기 때문에, 이쪽을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생활비를 유보해 두고 보존해 두기 보다는, 하나님이 더 좋으니까 하나님께 마음을 다 드리느라고 생활비를 다 드려버린 겁니다.
이렇게 십자가에서 내 인생과 내 미래와 내 생존에 관해 염려하는 마음전체를 다 하나님께 드려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내 미래, 내 인생에 대해선 죽어버리는 거예요, 내 마음이.
죽고 하나님을 향해서만 다 살아버리는 겁니다.
이때 나 자신도 돌보지 않는 나의 삶과 나의 미래, 더 이상 나도 돌보지 않아요.
바로 십자가에서 그렇게 내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드려질 때, 과부의 헌금함에 마음이 드려질 때 성전의 업둥이가 되었던 것처럼, 십자가에서 그렇게 드려질 때 내 인생과 내 미래는 심지어는 내게 지금 현재 들어와 있는 돈까지도, 재물까지도 다 하나님의 손에 주어지는 업둥이가 된다는 얘깁니다.
그 업둥이가 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헌금을 하라 하신만큼 하면 되는 거지요.
돈으로 내는 헌금자체를 이 과부의 헌금에서 퍼센티지를 계산해서 내려고 하라는 그 뜻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이 본문의 뜻이.
마음을 십자가를 통해서 다 드리는 것이 과부의 헌금의 마음입니다.
그렇게 다 마음을 드리고 나면, 내 마음조차도 더 이상은 돌보지 않는 버려진 내 인생은, 하나님 앞에 놓여 진 업둥이로서, 하나님께서 손에 붙잡고 정성껏 이끌어 가실 것이고, 내 마음은 내 마음대로, 앞에 얘기한 대로 성령 안에서, 왜냐 하면 십자가에서 나를 다~ 내 마음을 드리는, 하나님께로 드리는 그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니까,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느끼고 보고 만나면서 행복을 누리면 된다는 얘깁니다.
내 마음은 하나님께 드려져서 십자가를 통하여 하늘의 평강을 누리고, 내 노후의 이 인생은 하나님께 업둥이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기르시고 이끄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사건이 내게도 재연될 수 있게 하여 주셔서, 내 마음은 하나님께 드려지므로 하늘의 평강가운데 거하게 하시며, 내 몸의 생존과 삶과 미래는 하나님에게 업둥이로 드려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