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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 요한계시록 강해(55) - 땅에서 올라온 짐승
본 문 : 계시록13 : 9 – 15
계13:9-15절입니다.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작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지난번에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 대해 공부를 했었습니다. 그 바자에서 올라온 짐승은 로마나 바벨론, 바사, 헬라처럼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공동체를 정치적, 물리적인 힘으로 대적하는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마귀의 세력들을 총칭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유형적인 조직이나 세력, 인물로 나타날 뿐 아니라 무형적인 것들, 정신과 철학과 이념과 유행과 시대정신으로 오기도 한다고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그 세력의 정치적이며 물리적인 힘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 세력은 ‘핍박과 미혹’이라는 무기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아닌, 매력적인 이 세상의 힘을 추구하게 하고 결국 허망한 신기루를 좇다가 죽어가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세력인 것을 확인했습니다.
성도들이 그 세력의 공격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무엇이었습니까? 어린양의 피, 그리고 성도들이 전하는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였지요.
성도인 우리는 이 땅의 힘을 가지고 우리를 누르며 우리에게 ‘너희도 억울하면 이런 힘을 키워’라고 미혹하며 핍박하는 그 짐승의 세력에게 사랑과 용서와 인내와 섬김과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이겨야 한다는 것을 함께 확인했습니다.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는 성도들은 지는 것 같고 죽임을 당하는 모습 같지만 그게 바로 사망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비결이었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승리의 비결임을 성경은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핍박과 미혹에 당하지 않고 이 땅의 힘과 보물을 추구하는 대신 하늘에 보물을 쌓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하늘의 보물이 누구인지 아시지요? 요한계시록 21장에 의하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늘의 보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땅에서 그 보물을 잘 닦아서 순전한 빛을 발해야 한다는 것까지 지난번 강해를 통해 공부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8절까지의 말씀이었습니다.
9절을 보시면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으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우리가 앞서 공부한 일곱 교회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났던 구절입니다. 그 말씀은 지금 우리가 배우는 계시록의 말씀들은 귀를 열어주시지 않으면 절대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들려집니다. 그러면서 10절에서 요한은 다시 한 번 지금까지 공부한 ‘성도들의 고난과 핍박의 사실성과 확실성’에 관해 확인도장을 찍습니다. 이제 10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계13:10절입니다.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이 말씀이 어떻게 ‘성도들의 고난과 핍박의 사실성과 확실성’에 관한 이야기인가? 이 말씀은 예레미야서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렘15:2-3절을 여십시오.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망할 자는 사망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지니라 하셨다 하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그들을 네 가지로 벌하리니 곧 죽이는 칼로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으로 할 것이며“
이 예레미야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패역함 앞에서, 반드시 그들을 벌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연한 의지를 나타내신 구절입니다.
렘43:11절을 보지요. “그가 와서 애굽 땅을 치고 죽일 자는 죽이고 사로잡을 자는 사로잡고 칼로 칠자는 칼로 칠 것이라”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애굽이 바벨론에게 정복될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것이니까 반드시 이루어지겠지요? 그리고 이루어졌고요.
요한은 이러한 구절을 인용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환난과 핍박의 필요성과 사실성과 확실성’ 그리고 그 환난의 무게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러한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짐승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환난과 핍박의 최종 결정권자는 사단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허락 하에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10절 말씀은 지금 성도들에게 ‘너희는 분명히 이 세상에서 사로잡히게 되고 칼에 죽게 될 것이다’, 그만큼 고난을 당하게 된다‘고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핍박이 올 때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10절 후반절을 보십시오.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참아라, 믿음으로 이겨라‘가 해답입니다. ’너희가 사로잡히게 되고 칼에 맞아 죽게 될 때 내가 막아 줄게‘가 아닙니다. ’참아라, 믿음으로 이겨내라‘입니다.
당시에는 그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사로잡히고 칼로 맞고 죽기도 했습니다.
히11:36-38절을 보고 갑니다.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을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문명이 발달하고 지성이 발달해서 그 핍박의 양상이 조금 다른 모습으로 변한 것뿐이지 지금도 똑같이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사로잡고 칼로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그들의 공격을 안 말려 주실까요? 왜 안 말려 주시고 지켜보시면서 ‘인내해라, 믿음을 가져라’고 하실까요?
우리가 기대하는 하나님은 ‘내가 너희들이 병 걸리면 무조건 다 낫게 해줄게, 너희 사업이 어렵니? 내가 일으켜 줄게’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시는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정말 성경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견디라고 하십니다. 참으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스데반이 돌이 맞아 죽을 때 하나님 우편에서 그 모습을 지켜만 보셨습니다. 분명 스데반이 돌에 맞기 전에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내가 보았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켜보고만 계시고 왜 돌에 맞아 죽게 내버려 두십니까? 왜 예수님은 당신의 사도들이 나무 톱에 켜 죽을 때 안 말려 주실까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해 지하 무덤인 카타콤에서 문둥병에 걸려 죽어갈 때 왜 하나님은 그 문둥병을 고쳐 주시지 않고 그냥 죽게 내버려 두십니까? 때론 사자 굴에서 죽어 가는 수많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죽어갈 때 다니엘처럼 구해주지 않으십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진짜 좋은 것을 주시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짜 좋은 것은 무엇일까요?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습니다. 형식상 모세가 앞장을 섰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현현인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그저 좇아갔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앞장서서 끌고 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 도착한 곳이 어디입니까? 홍해입니다. 그 홍해는 폭이 32마일이나 되는 큰 바다입니다. 32마일이면 50㎞가 훨씬 넘습니다. 앞은 그렇게 넓은 망망대해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믹돌 사이에 진을 쳤다고 했습니다. ‘믹돌’이라는 것은 깎아지른 절벽을 말하는 것입니다.
병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절대 그런 곳에 진을 치지 않습니다. 잘못하면 몰살을 당하게 되는 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껏 이스라엘을 이끌어다가 그런 진퇴양난의 곳으로 몰아넣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셔서 가나안으로 인도하기까지 먼저 광야에서,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시며, 왜 성도들은 하나님만 의지하고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광야를 통해 가르치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라진 홍해를 건너갈 때 질퍽한 개펄 같은 바다 밑바닥이 마른 땅이 되었다고 합니다. 50㎞가 넘는 그 바다의 마른 땅을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우리를 애굽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은 바다도 꼼짝 못하게 주관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흥분의 마음을 가라앉기도 전에 홍해를 건너서 신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거기는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사막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왜 그렇게 힘들고 어렵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배가 고팠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만나를 비처럼 내려 주셨습니다. 그 하늘에서 쏟아지는 만나를 보면서 이스라엘은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도 주관하시는구나’ 생각합니다.
또 구름기둥을 좇아 이동합니다. 가다보니 이번에는 물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또 원망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을 치라고 명하십니다. 시78편에 보면 반석에서 물이 강같이 흘러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시78:15-16).
3 00만 명이면 웬만한 광역시 정도의 규모입니다. 그 300만 명의 식수와 용수를 대기 위해서는 작은 시내도 부족합니다. 하나님은 그 목마름 속에서 땅에 강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때 이 땅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성도들은 각자의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성도인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해야 하는 유일한 일은 바로 그 크신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것입니다.
성도로서의 나는 나의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을 떠난 자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회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성도인 우리들에게 주시는 가장 좋은 것이요, 가장 큰 선물인 것입니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에게는 홍해가 열리고 만나가 내리고 반석에서 물이 강같이 흘러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지만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쪼개지심으로 죽어야 할 자들이 그 예수 안에서 죽고 다시 새롭게 살아나게 되는 구속의 사건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만나는 무엇입니까? ‘내가 곧 생명의 떡’,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요6:48, 51)이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반석의 물은 무엇입니까? 출애굽기17장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반석을 치라고 하실 때 먼저 당신 자신이 ‘반석 위에서 네 앞에 설 것이다’(출17: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모세가 그 반석을 칠 때 먼저 맞으신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 반석의 물은 하나님께서 수난을 당하심으로 그 백성들이 목마름에서 해갈이 되는 구속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10:4절에서 ‘그 반석은 곧 예수그리스도시라’고 바울이 이야기 한 것입니다.
성도로서의 여러분들은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믹돌 사이 홍해 앞에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해 계십니까? 그런데 홍해가 갈라지지 않으십니까? 배고프십니까? 목마르십니까? 여러분의 삶의 반석에서 물이 솟아오르지 않습니까? 나름대로 열심히 주님을 섬겨왔는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야기된 가시와 엉겅퀴 속에서 고난을 받게 되어 있는 자들이었지만 이스라엘이 믹돌 사이에서, 신 광야에서, 목마름 속에서 하나님에 의해 건져진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건져 올려 진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이지만 때로는 그 환난과 고난의 시간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선물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성도인 우리는 이 땅에서 고난과 핍박을 통해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는 사로잡히게 되고 칼에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칼마저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칼이고, 그 사로잡힘도 우리 주님의 사랑 안에 있는 사로잡힘입니다.
롬8:35절을 펴십시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분명 성도들도 칼을 맞습니다. 환난과 곤고와 핍박에 던져집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내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그리스도의 사랑 아래서 이유 있는 환난을 당하고, 이유 있는 핍박을 당하고, 이유 있는 기근을 당하고, 이유 있는 칼에 맞는 것입니다.
시139:17-18절을 찾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
위의 본문을 좀 더 원어에 가깝게 번역하면, ‘하나님, 하나님의 생각은 어찌 그리 깊고 심오한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도저히 이해를 하거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고 심오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제가 힘이 들어, 잠을 자다가 깨어보니 그때도 주님은 주무시지 않고 저를 지켜보고 계셨네요’라는 뜻입니다.
삶이 너무 힘들고 고단해서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나보다’라고 울다 지쳐 잠이 들었는데 깨어 보니 하나님은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나를 가만히 지켜보고 계시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자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아버지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의 더러운 피를 완전히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혈연적, 법적 자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요1:12절을 보지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여기서 ‘자녀’(τέκνον=child)은 혈연적 자녀를 말하는 단어입니다.
갈3:26절도 보지요. “너희가 믿으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여기서 ‘아들’(υἱός=son)sms 법적인 자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인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혈연적으로나 법적으로나 완벽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견뎌내고 잘 참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계속해서 11절을 보겠습니다.
계13:11절입니다.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11절부터는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에 관한 묘사입니다.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새끼 양 같습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첫째 짐승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패러디 했었는데, 땅에서 올라온 짐승도 어린양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짐승은 용처럼 말을 합니다. 그리고 12절을 보시면 그가 무엇을 숭배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계13:12절을 펴세요.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그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처음 짐승,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경배하게 하는 자입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하나님이 아닌 이 땅의 보물을 추구하게 만드는 그 세력을 추종하게 만드는 이 땅에서 올라온 짐승의 정체는 계시록 19장과 20장에 가면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계19:20절입니다.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계20:10절입니다.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그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경배하게 하는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의 정체가 뭡니까? 바로 거짓 선지자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이란 잘못된 가르침으로 세상을 미혹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시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어둠의 세력의 맨 꼭대기에는 용(옛 뱀, 사단마귀)이 있습니다. 그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게 권세와 힘을 주어 세상을 핍박하고 미혹합니다. 그리고 그 사단마귀의 세력을 추종하고 경배하게 만드는데 일조를 하고 있는 자들이 바로 땅에서 올라온 짐승인데 그들이 거짓 선지자들, 즉 다른 종교, 철학, 거짓 가르침을 퍼뜨리는 자들, 가짜 신학자들, 가짜 목사들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공동체 안으로 들어온 거짓 선지자들을 잘 구별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공부하면서 확인한 것이 있지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은 항상 하나님이 아닌 다른 좋은 것들을 보여주며 그것들 속에서 평안과 행복을 찾으라고 미혹해 왔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공동체 안에서 ‘환난과 고난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순교의 정신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을 섬기고 순종해야 한다’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이용해서 이 땅의 힘과 보물을 얻게 해주고, 예수님을 이용해서 이 땅에서 면류관을 얻게 해주고, 예수를 이용해서 이 땅에서 면류관을 얻게 해 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자들은 전부 땅에서 올라온 짐승들인 것입니다.
요일4:3-4절을 보겠습니다.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이 땅에서 육신으로 오신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 자들을 ‘적그리스도’라 합니다.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가 정말 하나님이시라면, 그리고 그가 정말 메시아라면 그는 이 땅에 그렇게 초라하게 와서는 안 된다‘, 이것이 예수를 부이하는 것입니다. 결국 뭡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들이라면 예수는 힘 있는 자로 왔어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 힘의 논리를 앞세우는 자들이 바로 적그리스도들인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는 벌써 요한시대에 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2천년 역사동안 꾸진히 있어 왔고, 앞으로도 올 것입니다.
그 모든 자들과 그들의 사상과 철학과 가르침이 모두 적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제 적그리스도가 등장할까? 그가 도대체 누구일까? 이런 것이 관심을 두지 마십시오. 궁금해 하지도 마십시오.
대부분 교회들이 그렇게 생각하니까 나도 그 누구들처럼 그 적그리스도가 누구이며 그가 언제 등장할까? 이게 그렇게 궁금하세요?
그 적그리스도가 등장하면 7년 대환난이 오고 종말이 온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때 쯤 바싹 신앙생활 열심히 해서 주님의 눈도장을 찍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사람들을 미혹하는지 볼까요?
계13:13-15절을 펴십시오.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큰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그들은 큰 이적을 갖고 나옵니다. 심지어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강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상을 만들게 시키고 그 우상에게 생기를 줍니다.
여기서 ‘생기’(πνευμα)는 ‘성령’, ‘호흡’, ‘영혼’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흉내 내는 것입니까? 성령 하나님을 흉내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령이 얼마나 오해되고 있고 곡해되어지고 있습니까? 성령, 그러면 기적이나 치유, 거품 물고 쓰러지는 것, 이런 것들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목사들이 성령 집회랍시고 사람들을 모아 놓고 쓰러뜨리고 거품 물게 하고 통곡하게 만들고 합니까?
정말 성령님이 그런 것이나 하시는 분이십니까? 성령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의 진의를 깨닫게 해 주시러 오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우리의 가는 길을 조명해 주러 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분이 우리에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요16:8) 깨닫게 해 주시러 오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죄가 뭔지, 의가 뭔지, 심판이 뭔지 설명은 안 해주고 그저 기적 같은 신앙생활만 가르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땅에서 올라온 짐승들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 정말 진지하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읽어보셨습니까? 한 번도 읽지 않으신 분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예배당에 와서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우리가 믿는 대상에 대해 자세히 설명이 되어 있는 이 성경을 한 번도 안 읽어보고 지금 내가 무언가를 믿고 있다고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들도 강단 위에 서 있는 목사가 어떤 기적을 일으켜 줄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기적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은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살후2:9-10절을 보지요.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직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기적을 좇아다니는 자들은 멸망하는 자들, 구원을 얻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성경은 이렇게 정확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막13:22-23절도 보고가지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너희는 삼가라(turn your eyes)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너희는 삼가라’ 즉 ‘너희는 기적이 있는 곳에 가지 말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물론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의 분이십니다.
그런데 사단도 거짓 선지자를 통해서 병도 고치고 기적을 일으킵니다. 저는 치유사역을 하는 승려들의 치유의 현장을 본 적이 있고, 이슬람 선지자들의 치유사역을 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치유란 기독교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곧 기독교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인들이 어떤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어떤 것이 사단이 하는 일인지 구별할 수 있습니까?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 가고 계신다면 왜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기적이 있는 곳에는 가지 말라’하시고 ‘이런 것은 내가 하는 기적이고 저런 건 사단이 하는 기적이다’고 구별법을 가르쳐 주시지 않으셨겠습니까?
물론 주님께서 이 땅에서 공생애 동안 병 고치는 사역과 죽은 자를 살리시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근본적인 이유는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기적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임을,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임을 증명하는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이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주어진 믿음이라는 선물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고,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 될 수 없는 것들이 믿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기적이 없어도 전혀 동요 없이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소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아야 하고 들어야 하는 것들은 전부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 우리에게 기적이 필요합니까? 기적이 필요하다는 것은 난 아직 믿음이 없어서, 보지 않고는 못 믿겠다는 것 아닙니까? 기적은 사람을 바꾸지 못합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잘 아시겠지요? 부자와 나사로가 죽어서 나사로가 죽어서 천국에 부자는 지옥에 갔습니다. 부자가 너무 괴로워서 아브라함에게 부탁을 합니다.
눅16:27-31절입니다. “이르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 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이르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나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모세와 선지자 즉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는 자들은 아무리 기적이 일어나도, 죽은 조상이 무덤을 열고 살아 나와도, 절대 믿지 못한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기적론‘입니다.
기적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그 기적을 일으킨 사람과 그 기적 자체를 숭배하지 절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로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는 사람이 먼저 보입니다.
목사가 안수해서 여러분의 사업을 기적처럼 회생시켜주면 안수해준 그 목사가 먼저 보이고 감사하게 되지 하나님은 나중입니다.
오늘날도 거짓 선지자들이 이 세상 권세 잡은 자의 세력을 추종하도록, 힘과 이 땅의 보물을 추종하도록 강대상에서 기적을 동원하며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분별해 내셔야 합니다. 다른 것은 보지 마십시오. 누가 얼마나 큰 교회를 하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베스트셀러를 썼는지 그런 것으로 진위를 가리려 하지 마십시오.
사단은 언제나 광명한 천사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에 근거해서 성경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을 단호하게 배격하십시오.
목사라고 다 하나님이 세운 종이라고 생각하시면 큰 오산입니다. 분명 이렇게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추종하게 만드는 땅에서 올라온 짐승,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십시오.
마7:21-23절을 보겠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가짜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중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그런 기적을 쫓아다니지 말고 여러분들은 ‘내 병을 고쳐 주시지 않아도, 내 사업이 회복되지 않아도, 내 자식이 기적처럼 좋은 대학에 합격하지 못해도’ 여전히 그 하나님만으로 평안하고, 그 하나님만으로 행복한 진짜 그리스도인들이 되십시오. 절대 평안은 이 땅의 것으로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평안은 오직 하늘로부터만 오는 것입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평화가 어디서 옵니까? 금고에서, 건강에서입니까? 아니요.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 땅의 것으로 평화를 가장한 ‘평안’을 추구하게 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속임수에 속지 마시고 하늘의 평화를 추구하게 하십시오.
그 진정한 평안을 세상에 선물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로부터 평안을 선물 받은 그리스도인들뿐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복 있는 자여, 그대 이름은 화평케 하는 자이니라’ 이게 바로 성도로서의 우리입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평안을 얻으려고 하십니까? 오직 예수 안에서만 평안이 있습니다. 짐승이 지금 여러분을 사로잡고 끌고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칼로 마구 후려치고 있지는 않는지요?
그들은 이 땅의 것으로 우리를 괴롭게 만들려고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바라보며, 하늘이 주는 평안 속에서 웃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됩시다. 힘내십시오.
지금이 끝이 아닙니다. 영원의 작은 시작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모두 힘내십시오.
첫댓글 계시록 강해55^
수고하심~감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