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7월 21일 백중 기도 4재 지안 큰스님 법문
해마다 통도사는 우란분절을 기해서 선망부모 천도재를 49일 동안 봉행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분위가 새롭습니다. 주지스님도 새로 또 오시어 사중 제반 살림을 보살피고 있고 분위기 쇄신을 해가는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통도사는 불지대찰, 불지종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제가 통도사에서 출가하여 스님이 되어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게 한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듯이 오늘 이 법회에 참석하신 신도들님께서도 통도사 보궁에 다니시면서 통도사에서 참배하고 기도 한다는 것을 제가 통도사에서 출가한 것을 긍지를 느끼듯이 그렇게 느끼시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지금 조상님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기도를 봉행하고 있는데 불교애서는 돌아간 분들의 넋을 靈駕(영가)라 합니다. 靈駕(영가)란 靈魂(영혼)입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魂魄(혼백)이라는 말입니다. 靈駕(영가)란 일종의 존칭어로 靈魂(영혼)이나 魂魄(혼백)이라는 말 보다 돌아가신 분을 더 높여 부르는 말입니다.
諸靈限盡致身亡(제령한진치신망)하니 石火光陰夢一場(석화광음몽일장)이로다 나무아미타불
三魂杳杳歸何處(삼혼묘묘귀하처)인가 七魄茫茫去遠鄕(칠백망망거원향)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예로부터 靈駕(영가)에게 설해주는 4구의 偈頌(게송)법문입니다.
諸靈限盡致身亡(제령한진치신망)
여러 영가들이시여, 당신께서 이 세상에 살아있던 생에 벌써 덧없이 지나갔으니 지금은 죽은 몸(영가)이시니 살아있던 기한이 다되어 이제는 靈駕(영가)가 되셨습니다. 오늘이 聽法(청법) 대중보다 벽에 모셔진 靈駕(영가) 위패가 훨씬 많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과거가 많습니다. 현재 지구상의 인구를 대략 70억 정도가 된다고 하는데, 역사학자들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지구상에 태어났다가 죽어간 사람의 수를 30년 전에 약 600억으로 보았으니 살고 있는 인구의 약 10 배에 달합니다. 그러므로 현재란 항상 과거를 가지고 옵니다. 오늘이 내일이 되면 어제가 되고 내일이 하루 지나면 오늘이 됩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법칙입니다. 모든 중생은 윤회 속에 있으면서 生死가 해가 떠서 지는 것처럼 계속 반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어날 때는 죽어 갈 때를 예약해놓고 태어나고 죽어 갈 때에는 태어날 때를 예약해놓고 죽는 겁니다. 일기생이라는 것이 無常(무상)입니다. 불교는 모든 것을 無常으로 설하는데 현상적으로 말하면 無常(무상)인 것입니다. 無常(무상)은 一期無常(일기무상)과 刹那無常(찰나무상)이 있는데 순간 순간 생각이 일어났다가 없어지는 것을 찰나무상이라고 하고 한 세월이 덧없는 것을 일기무상이라 합니다. 요즘은 100세 시대가 되어 장수의 시대라 하는데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가 일기무상입니다.
石火光陰夢一場(석화광음몽일장)
돌이 부딪쳐서 불꽃이 한 번 번쩍하는 것과 같이 지극히 짧은 한바탕 꿈이로다.
三魂杳杳歸何處(삼혼묘묘귀하처)
魂魄(혼백)에서 魂(혼)은 陽(양)이고 魄(백)은 陰(음)입니다. 이 세상은 전부 陰陽(음양)의 기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해가 陽(양)이라면 달은 陰(음)이 되고, 남자가 해가 陽(양)이라면 여자는 陰(음)이 됩니다. 사람이 죽고 나면 그 영혼도 陰(음)과 陽(양)으로 나누어진다고 합니다. 陰(음)은 30%로 3할이 됩니다. 三魂杳杳은 3할이었던 魂(혼)은 아득한데 어디로 가셨습니까?
七魄茫茫去遠鄕(칠백망망거원향)
7할이었던 魄(백)도 멀고 멀리 고향을 떠나 있도다. 불교에서 말하는 고향이란 自性의 깨달음의 자리입니다.
예로부터 이 四句偈(4구게)를 영가를 위해서 설해 내려왔습니다.
사람의 몸(肉身)이란 부모를 의지해서 태어났다가 한 생애를 다하면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가를 달리 말할 때 생각에서 생겨난 몸(意生身)이라 합니다. 意生身(의생신)은 불교에서 주로 쓰는 意成身(의성신)과 같은 말입니다. 영가는 意成身(의성신)으로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생각으로 먼들어진 몸이 있다는 겁니다. 생각으로 만들어진 몸의 예를 들면 사람이 잠을 자다가 꿈을 꾸게 되는데 夢中意識에서 보는 내 몸이 意成身(의성신)입니다. 사후에도 영가의 意成身(의성신)이 사후세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불교에서는 이야기하며 영가들도 중생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살아있을 때에도 중생이고 죽고 나서도 중생이라 합니다. 달리 말하면 귀신도 중생이라는 겁니다. 죽은 중생인 영가는 천도한다고 하고 살아있는 사람은 제도한다고 합니다. 영가를 천도하는 것을 <華嚴經(화엄경)>에서는 여러 가지 회향으로 설명하는데 ‘중생회향’이라 말합니다. 유교적인 측면으로 볼 때에는 조상인 부모를 천도하는 것은 孝行(효행)으로 조상에 대한 효를 실천하는 것이고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효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영가천도를 불교에서는 아주 소중한 佛事라 여깁니다. 영가를 천도하는 것이 ‘중생회향’이고 이것을 <華嚴經(화엄경)>에서는 ‘보살행’으로 설명하고 생사 윤회를 해탈시키는 방법이라 말합니다.
사람이 일생동안 살아가는 것이 계획입니다. 중국 宋(송)나라 때 朱新仲 (주신중)이라는 학자가 인생 五計論(오계론)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인간이 한평생 살아가면서 다섯 가지의 계획을 올바로 세워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첫째는 生計(생계)입니다. 먹고 사는 계획입니다. 직업에 대한 계획과 준비입니다. 生計(생계)가 있어야 살아가는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둘째는 身計(신계)라고 합니다. 건강을 위한 관리와 계획입니다. 여기에는 정신건강도 포함됩니다. 몸을 너무 가혹하게 해서도 안되고 방일한 상태로 두어도 안됩니다.
셋째는 家計(가계)입니다. 집안을 잘 다스려야하는 것입니다. 부부 관계, 부모 자식 관계, 형제 관계가 화합이 잘 되고 친척들까지도 인화가 잘 되어야 합니다. 통도사 주지스님은 인화를 잘 도모합니다. 승가가 대중 사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승가를 화합승이라 표현하는데 그것이 家計(가계)이니 절도 ‘절집안’이라 하는 이유입니다. 집안이 편안하고 화목해야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한 솥밥을 먹는 식구 뿐 아니라 친척들까지, 이웃과의 관계까지도 家計(가계)입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계획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老計(노계)입니다. 늙음에 대한 계획 - 노후관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라마다 노년층을 국가관리 차원에서 하는 老計(노계)와 개인 차원의 老計(노계)가 있습니다.
송나라 '소강절(1011∼1077 : 안락선생)'의 시 ‘求名少日慕宣聖(구명소일모선성) 이름(명예)을 구하던 젊은 날에는 선성(공자)를 사모하다가, 怕死老年親釋迦(파사노년친석가)죽음이 두려워진 노년에는 석가가 친해졌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불교를 믿는 것은 아주 훌륭한 老計(노계)입니다, 염불을 한다든지, 이런 재에 참석한다는지, 절에 다닌다든지, 진언을 하는 것, 참선하는 것 등의 수행이 아주 좋은 노후 계획입니다. 영가 천도도 老計(노계)에 해당됩니다.
다섯 번째는 死計(사계)라고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은 죽음을 계획해야 한다는 겁니다.
곽산경통 선사가 있었습니다. 위앙종을 창시한 위산영우, 앙산혜적 스님이 있는데 앙산혜적 스님 밑에서 공부하였는데 주장자로 네 번을 맞고서 깨달았다는 분으로 산 밑으로 길을 가는데 장작더미가 쌓여있었습니다. 거기에 불을 지피고 스스로 火葬(화장)을 했습니다.
부산의 신도분 중에 노보살님께서 지장전 기도를 하고 나오는데 눈에 눈물이 가득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죽을 때가 가까워 지장보살 기도를 하는데 두 가지 소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죽을 때 고통 없이 편안하게 죽게 해달라는 것과 둘째는 내가 죽어도 내가 낳은 아들 딸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한다는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노보살님이 앉아서 염불하다가 앉은 채로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안병욱 교수님에 의하면 주신중(朱新仲)의 인생 오계론(五計論)이 우리나라에 영향을 주면서 조선 중기에 전통 선비층을 중심으로 어떻게 해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맞을 수 있느냐는 사계(死計) 문화가 번져 있었으며. 이 유행으로 나타난 것이 이른바 ‘다섯 가지 없앰(五滅) 곧 오멸(五滅)’이라는 노후철학이 생겨났다 합니다.
첫째가 멸재(滅財)로 재물을 없애고 가라는 것입니다.
둘째가 멸원(滅怨)으로 원망, 남을 미워하는 생각을 없애라는 것입니다. 남과 사이가 나빴던 앙금을 풀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울산 동축사 도암스님께서 며느리를 미워하는 시어머니에게 며느리가 부처님이라고 생각하고 큰 절을 하라고 했었습니다. 그리고는 진짜로 절을 했냐고 자꾸 확인을 하며 다그치니 그 시어머니가 “내가 다니는 절 스님이 시켜서 이리 한다.”며 며느리에게 절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스님께 와서 자기가 이렇게 절을 했노라 하니 스님께서 큰 소리 치며 절을 해서는 안되고 부처님께 하듯 공손하게 절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가서 공손하게 절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며느리가 와서 절을 하며 “앞으로 제가 잘못한 것 전부 반성하고 고치겠으니 오늘은 제 방에 오지 마세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게 실화입니다. 이것이 멸원(滅怨)으로 미운 감정을 품고 죽으면 안됩니다.
셋째가 멸채(滅債)로 남에게 진 물질적 정신적 빚을 없애라는 일입니다.
넷째가 멸정(滅情)으로 정을 없애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끊기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 정이라는 것이 굉장히 지독한 것입니다. 집착된 정은 없애야 합니다. 참선 수행하는 스님들 사이에서는 ‘無心(무심)이 道’라고 합니다. 자식 결혼도 못시켰는데 어떻게 죽느냐고 하는데 죽을 때 눈을 편안하게 죽으려면 정을 버려 멀리서 생각해야 합니다.
다섯째가 멸망(滅亡)인데 불교적인 말입니다. 사망한다는 생각을 없애라는 것입니다. 몸이 죽는 것은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大乘涅槃經(대승열반경)>에 보면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 독사까지도 슬퍼했다고 할 정도로 온 대중들이 슬퍼서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죽지 않는다.” 육신이 죽는 것은 죽는 것이 아닙니다. <大乘涅槃經(대승열반경)>에는「금강신품」이라는 품이 있는데 金剛身(금강신) - 부서지지 않는 몸이라는 겁니다. 몸이 죽는 것은 달이 지는 것과 같다는 비유를 들어놓은 품이 있습니다. 「월유품」에 달이 져도 달 자체가 보이지 않을 뿐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도 “이승에서 저승 간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죽어서 가족들이 보지 못하지만 다른 곳에 살고있다고 생각하면 죽음이 편안하게 맞아진다는 겁니다.
인생에 五計(오계)와 五滅(오멸)이 있다는 것을 부처님 법문이라 여기시고
항상 새로운 신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판단의 기준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善惡의 판단으로 선하냐 악하냐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둘째, 有無 판단으로 있느냐 없느냐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셋째, 苦樂 판단으로 행복하냐 불행하냐는 판단입니다.
불교에서는 항상 잘되는 방향으로 말합니다. 선업을 닦으라 하고 선근 심으라고 합니다. 공덕을 성취하라는 겁니다.
업덩어리는 짐으로, 악업은 짐이고 선업은 베로 비유한 경이 있습니다. <밀란다왕문경>에는 ‘비록 작은 돌이라도 배에 싣지 않으면 물속에 잠겨버리지만 수백 수레분의 바위라도 배에 실으면 물위에 뜨듯 착한 행위는 이 배와 같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선업의 배에 비유하고 악업은 돌에 비유하여 배가 강을 건널 수 있듯이 선업이 악업보다 많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한 번 잘 쓰면 세 가지 판단 기준이 좋은 쪽으로 갑니다, 여러분 기도 회향 잘 마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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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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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스님 말씀이 너무 좋아서요
저는 그냥 말씀을 적은 것 뿌ㅡㄴ인데요 뭘~ _()_
항상 좋은 글 너무 감사합니다 마음 공부 열심히 하고있습니다 ()()()
저는 그냥 스님 말씀이 너무 좋아서 박아쓰기만 한건데요~~~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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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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