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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관조의 방법
임현준
―오산하, 「공원의 모양」, 『애지』, 2025년 여름.
―유종인, 「나의 아궁이」, 『애지』, 2025년 여름.
―어향숙, 「다뉴브강」, 『애지』, 2025년 여름.
―문태준, 「눈보라와 종소리」, 『현대문학』, 2025년 5월.
―최서림, 「시의 나라에는」, 『애지』, 2025년 여름.
시의 처음인 관조
시에 목마른 이들은 시적 체험을 이미 겪었거나 지금 겪고 있거나 앞으로 겪고 싶은 자들이다. 이러한 갈망은 어떠한 체험에서든 ‘아름다움’을 맛본 이들의 욕망이다. 그런데 여기서 ‘아름다움’은 보거나 듣기에 즐겁고 좋은 느낌을 가지게 하는 사전적 의미의 것이 아니다. 시적인 ‘아름다움’은 시의 본질과 맞닿은 것으로서 전율하게 하는 무엇, 절망하거나 감동하게 하는 무엇, 세계를 깨고 내면을 뒤집는 그 무엇이다. 여전히 실체를 알 수는 없지만, ‘아름다움’은 예쁘고 멋있고 선한 것뿐 아니라, 기괴하고 무섭고 더럽고 추악한 것에서도 비롯될 수 있다. 심지어 회의적이거나 공허하거나 무미건조한 것에서도 얼마든지 ‘아름다움’을 캐낼 수 있다. 이러한 ‘아름다움’을 우리는 미학(美學)이라 부른다. 미학은 옳고 그름이 아닌, 완성의 정도가 높은지 낮은지가 중요한 철학의 한 영역이다. 근대 미학을 체계화한 이마누엘 칸트도 『판단력비판』에서 ‘아름다움[미학]’에 대해 규정한 적이 있는데, 그 유명한 “형식적인 합목적성, 즉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형식”이 그것이다. 칸트가 사용하는 ‘비판’이라는 말은 ‘한계를 밝힌다’는 뜻으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판단한다’는 의미쯤으로 여기면 된다. 단순하게 말해서, 판단할 수 없는 것은 물(物)자체니까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말할 수 있는 것으로서 저절로 보편을 지향하는[목적 없는] 합목적성 형식에 집중한다. 미학의 ‘아름다움’은 형식이나 형태의 완성도에서 비롯된 것이지, 그것이 선의 표상인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시를 읽을 때 ‘아름다움’을 느끼는 지점은 시의 완성도에 관련된 것이지 시가 담고 있는 선의 표상, 일테면 옳고 그름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시적인 미학은 시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에 대해서 간신히 잡아낼 수 있는 단서는 시의 완성도뿐이다. 그렇다면 시를 시이게 만드는 완성도는 어디에서 오는가. 시의 형식과 언어의 적확과 소리의 운율과 사유의 깊이에서 그 완성도를 찾는 것이 전적으로 맞을 것이다. 이는 시에 대한 보편적이고 타당한 기준인 ‘목적 없는 합목적성’에 부합한다. 나에게도 그렇고 당신에게도 그렇다. 그렇다면 형식과 언어와 운율과 사유는 또 어디에서 오는가. 결국에는 도돌이표와 같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없다. 아니, 모른다. 어쩌면 세계의 시작인 태초부터 이야기해야 할 성질의 거대한 담론이 이 안에 담겨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말로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출처는 알지 못해도 ‘아름다움’이라는 시마(詩魔)가 우리에게 오는 순간까지 당신과 내가 할 수 있는 일, 또는 해야 할 일은 안다. 그것은 관조(觀照)다. 관조하는 것으로부터 시의 구조와 문체와 사유와 운율은 어느새 우리 곁에 와 있고, 시의 깊이는 덩달아 짙어진다. 시에도 원인과 결과가 있다면, 관조라는 질료로 인해 시적 완성도가 결정되어 ‘아름다움’에 이른다고나 할까. 그러니 시라는 본질이 아닌 방법론으로서 관조는 중요하다. 아니, 절실하다.
고통을 직시하는 관조
관조라는 단어가 추상어이기도 하고 예술이나 철학에서 주로 쓰이는 말이어서 사조의 맥락과 쓰는 이의 정황에 따라 개념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거기다 관조라는 말이 지관(止觀)이나 명상(冥想)이나 관망(觀望) 같은 관념어로 무분별하게 혼용되어서 일관된 정의를 내릴 수도 없다. 부처의 관조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조나 노자의 관조 등도 그 가르침에 따라 행동양식이나 태도의 방향성이 조금씩 달라진다. 그럼에도 관조는 ‘조용한 마음으로 대상의 본질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넓은 의미를 공유한다.
우리가 이 시평에서 구하고자 하는 관조는 앞선 종교·철학적 관조에 비하면 거창한 것이 아니다. 김수영의 말을 빌려, 시적인 관조는 ‘온몸’으로 세계의 모든 것을 보고 느끼고 맛보고 즐기는 자세로 ‘밀고 나가는 것’을 말한다. 다만, 그 온몸으로 하는 관조를 이해함에 있어 종교와 철학의 도움을 받으면 조금은 신빙성이 높아진다. 아니, 상상할 수 있는 시적 영역이 넓어진다.
운동을 좀 해야겠어
무작정 걸어간 공원의 트랙은
동그라미
모든 길이 이어져 있어
이곳을 걷는 동안
원 안의 사람을 전부 만날 수 있다
당신은 뱅글뱅글 돌며 운다
네가 내 돈 다 떼어먹었잖아
남편이 바람을 폈어
내가 빨리 죽기를 바라잖아
너에게 난 부끄러운,
한없이 부끄러운 사람이잖아
공원은 어디론가 가려는 사람들을
한데 모아둔다
벗어나지 않는 서로를 보며
나뿐만이 아니라는 안심
할 수 있을까?
끝을 알 수 없는 트랙의 끝을 상상하고
서로의 목소리를 끝끝내 모르는 척 하면서
다 들려도 아무것도 안 들리는 것처럼
몸으로 그리는 동그라미
둥근 이해의 끝
끝의 헐떡거림
숨이 턱 끝까지 차도록 뛰고 나면 나오는
거친 숨은 나의 것이 아니게 느껴질 만큼
크고 뚜렷하다
몇 바퀴를 뛰었더라
엉엉 울던 여자가 이제는 웃고 있다
온통 눈물자국인 얼굴 위로 쩍쩍
갈라지는 슬픔 위로
정해진 길이 없는데
약속처럼 한 방향으로만 뛴다
이곳에서라도 탈락되어 있는 것 같은
오늘을 벗어나고 싶지 않은
내일을 묶어두고 싶어
동그라미
사실 이리저리 샛길이 가득한
저쪽으로 가면 지압길
저쪽으로 가면 셔틀콕
저쪽으로 가면 왜가리
그때 거꾸로 달려오는 작은 아이를 위해
구석으로 몸을 비킨다
공원의 모두가 그렇게 한다
아이를 따라 뒤를 돈다
오직 그렇게 해본다
―오산하, 「공원의 모양」, 『애지』, 2025년 여름 호.
관조를 위한 첫걸음은 현실을 직시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불교에서는 현실과 고통을 동의어로 본다. 내가 살아 숨 쉬는 ‘지금 이곳’이라는 현실은 온통 불편하고 아프고 불만스럽고 서러운 것 투성이다. 그러한 고통은 생로병사의 육체를 가진 존재가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4고(苦)와 정신적 측면에서 오는 4고가 합쳐져 8고로 정리된다. 태어남과 늙어감과 병듦과 죽음에 더해, 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지는 고통인 애별리고(愛別離苦)와 원망하고 미워하는 이들과 함께 있어야 하는 고통인 원증회고(怨憎會苦)와 원하고 구하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고통인 구부득고(求不得苦)와 인간의 다섯 가지 조건에서 오는 고통인 오온성고(五蘊盛苦)가 여덟 가지 고통의 카테고리이다. 이렇게 꼼꼼하게 분석된 고통은 숨 막히는 현실 그 자체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고통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탐구를 먼저 해야 하는가. 작은 나라의 왕자였던 어린 고타마 싯다르타가 성 밖 세상이 알고 싶어 동남서북 네 개의 성문으로 나가 세상을 보았다는 것이 사문유관(四門遊觀)이다. 싯다르타는 동문에서는 늙은이의 고통을, 남문에서는 병든 자의 고통을, 서문에서는 죽은 자의 고통을, 북문에서는 수행자의 평온을 보았다고 한다. 이후 출가한 싯다르타는 수행을 통해 고통을 유발하는 모든 욕망을 끊고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려 했다. 그리고 보리수나무 밑에서 명상한 지 7일째 되던 날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한다.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에서 가장 처음으로 한 것은 고통에 대한 직시였다. 싯다르타의 첫 세상 구경은 사문유관이라는 현실 관찰로 시작되었고 거기로부터 직시하게 된 것이 고통이었다. 즉, 현실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는 것이 불교적 관조의 첫걸음이다. 이후 불교의 가르침은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의 원리와 팔정도의 강령으로 더 깊고 심오하지만, 시에 있어서 필요한 관조의 방법론은 8고에 대한 직시, 고통에 대한 직시, 현실에 대한 직시까지면 족하다. 시는 시적 ‘아름다움’의 완성도가 목적지인데, 그 완성의 정도에는 종교와 윤리와 열반과 천국의 완벽함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오산하의 「공원의 모양」은 “공원”이라는 사회와 “모양”이라는 구조를 간파하고 통찰하는 시이다. 오늘날의 현실이 사회라는 유기적 구조물로 이루어져 있다면, “무작정 걸어간 공원의 트랙은/ 동그라미”는 상징으로서 또는 관념으로서 현실의 축소판이 된다. 복잡하고 거대한 현실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축소한 “공원의 트랙”에서는 “모든 길이 이어져 있어/ 이곳을 걷는 동안/ 원 안의 사람을 전부 만날 수 있다”는 사회의 작동 원리가 선연히 보인다. 거기에는 “뱅글뱅글 돌며” 우는 사람과 돈을 떼여서, 바람을 피워서, 미워하고 증오해서 “한없이 부끄러운 사람”들이 “약속처럼 한 방향으로만” 뛰는 정신적 고통이 적나라하게 “한데 모”여 있다. 또 “무작정” 태어난 생(生)과 “뱅글뱅글 돌며” 우는 노(老)와 “헐떡거림”의 병(病)과 “트랙의 끝을 상상”하는 사(死)의 고통도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나’는 “벗어나지 않는 서로를 보며/ 나뿐만이 아니라는 안심”을 하는 미혹한 현대인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이는 “서로의 목소리를 끝끝내 모르는 척” 할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현실, 정확히는 젊은 세대의 출구 없는 사회에 대한 비판적 사유로 읽힐 수도 있겠다.
오산하는 자못 건조해 보이는 시선으로 현실을 가감 없이 직시할 줄 아는 눈을 가졌다. 좋은 시인이 가져야 할 관조의 덕목 중에는 광각의 시야와 본질을 꿰뚫는 시선이 필수이다. 오산하 시인은 사회라는 거대한 구조를 축소해서 보는 넓은 시야를 가진 듯 보이고, “동그라미”의 현실이 작동되는 원리 속에 고통스러운 자아를 발견하는 깊은 혜안을 가진 듯도 보인다. 그리고 시인의 중요한 태도로서 “한 방향으로만” 순환하는 “동그라미”에서 “거꾸로 달려오는 작은 아이를 위해” “몸을 비”키는 절제까지 갖추고 있다. 이를 “몇 바퀴를 뛰었”는지 헤아릴 길 없는 숨 막히는 현실에 대한 무기력이나 절망감으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굳이 “오직 그렇게 해본다”는 마지막 구절을 통해 시인의 절제된 태도를 확인할 수 있게 한다. 고통을 끊어내고 열반에 들기 위한 싯다르타의 첫걸음은 현실 직시였다. 현실을 직시하는 방법은 “오직 그렇게 해”보는 일밖에는 없다. 그리고 “오직 그렇게 해본다”고 할 때는 거기까지가 이 시의 할 일이라는 뜻도 포함된다. 오산하 시인이 아는지 모르는지 의도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지만, 현실을 직시하는 관조만으로도 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나’라는 ‘세계’를 의식하는 관조
봄 아궁이에서 너구리가 나와 눈인사를 한 뒤 숲으로 사라지고
초여름 아궁이엔 산그늘이 들어가 여간내기 나오질 않네
가을 아궁이엔 내 전생의 회오 같은 묵은 재를 끌어내 무우밭에 뿌리고
초겨울 아궁이엔 솔가리를 수북이 넣고 성냥을 그어 팔이 긴 불을 불러내고
한겨울엔 어깨가 쩍 벌어진 참나무 장작을 지펴서
그 회고담 같은 참숯의 눈빛에 눈시울이 덩달아 붉어지고
다시 돌아오는 봄엔 너구리와 오소리에게 달세방을 줄까 고민을 삭이지 못하네
―유종인, 「나의 아궁이」, 『애지』, 2025년 여름 호.
관조하는 방법은 많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식으로 세계의 본질을 깨닫는 방법도 무수할 것이다. 다만, 우리가 그나마 참고하고 적용해 볼 만한 지침서로서의 방법을 찾고자 한다면 경전만큼 좋은 길잡이는 없다. 경전 중 『베다』는 지금까지 인류가 발견한 가장 오래된 문서 중 하나이다. 대략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 아리아인이 인도에 도착할 때 손에 들고 있었던 것이 『베다』였다고 한다. 이 신화적이며 철학적인 방대한 양의 경전은 힌두교와 불교의 뿌리가 되어 인도와 동양에 깊은 영향력을 미쳤다. 특히 『베다』의 부속 경전인 「우파니샤드」는 인도 사상 전체의 정신적 근원을 담고 있는데, 그 세계관은 자연과 신, 사제와 인간이 서로 물고 물리는 인과적인 관계를 이루는 순환적 모형을 구축해 놓는다. 이 순환적 세계관이란, 신은 자연을 움직이고 자연은 인간을 움직이고 인간은 사제를 움직이고 사제는 신을 움직인다는 작동 원리이다. 거기에는 각자의 위치가 있어서 모든 존재는 역할을 다해야 한다. 그래야 우주와 삶이 질서로서 지속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신’이다. 『베다』의 ‘신’은 인격신이 아니라, 우주의 원리인 추상적 실체로서의 ‘범천(梵天)’이다. 서구의 영향을 받은 우리에게 ‘신’은 창조주 또는 인격신으로 이해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창조주보다는 등급이 낮지만 인격신으로서의 신이다. 마블 영화에서 등장하는 초월적 능력자들이나 미신에 기반한 귀신들도 넓은 의미에서 신이다. 그런데 『베다』의 ‘범천’으로서의 신은 ‘궁극의 전체’라는 뜻의 신이다. 우주 전체 혹은 우주의 근본 원리로서의 세계 자체가 신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우파니샤드」에서 형이상학적으로 제시하는 ‘관계성’이다. 전체로서의 ‘세계’는 부분으로서의 ‘자아’와 ‘관계’된다. ‘범천’의 ‘세계’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으로서의 ‘세계’는 ‘자아’인 ‘나’ 안에서 ‘의식’된다. 쉽게 말하면 ‘우주 전체’가 곧 ‘내 마음’의 현상이다. 그러니까 ‘신’적인 존재인 ‘세계’와 ‘나’라는 ‘의식’의 근본 원리가 같다는 말이다. 이를 범아일여(梵我一如)라고 하는데, ‘세계와 나는 오직 하나’라는 뜻이다. 이러한 『베다』를 빌어 시적 관조의 방법을 고안해 보자면, ‘나’라는 ‘우주·세계·자연[범천]’을 들여다보는 시적인 관조도 가능하게 된다. 이는 우리 현대시에서 내공 깊은 시인들이 종종 활용하는 수준 높은 관조의 방법이기도 하다.
유종인의 「나의 아궁이」는 자연의 순환적 세계관이 녹아 있는 시이다. 제목 그대로 “나의 아궁이”는 “봄 아궁이”이기도 하고 “초여름 아궁이”이기도 하다. 사계절을 순환하는 “아궁이”는 인격화되어 “너구리”를 품기도 하고 “산그늘로 들어가” 나오지 않기도 한다. 시인 또는 시적 화자 스스로 변화하고 생동하는 우주적 질서로서의 “아궁이”를 오래 관조하면서 “회오 같은 묵은 재를 끌어내 무우밭에 뿌리”기도 하고 “회고담 같은 참숯의 눈빛에 눈시울이 덩달아 붉어지”기도 하면서 종내에는 “돌아오는 봄엔 너구리와 오소리에게 달세방을 줄까 고민을 삭이지 못하”는 일여(一如) 상태의 “아궁이=나”가 된다. ‘세계와 나는 오직 하나’라는 이러한 의식의 관조는 “너구리가 나와 눈인사를” 하고 “솔가리를 수북이 넣고 성냥을 그어 팔이 긴 불을 불러내”는 식으로 ‘자연’과 ‘나’의 관계성을 확인하는 작업을 수행하기도 한다. 이 덤덤하고 순박한 시에 담긴 관조의 깊이는 좋은 시 하나가 세계 전체를 아우를 수 있다는 시적 가능성을 보여준다.
덧없음을 깨닫게 되는 관조
신기하게도 노자가 남긴 오천여 자의 『도덕경(道德經)』도 『베다』·「우파니샤드」와 비슷한 범아일여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인류의 진리란 결국 비슷한 보편성을 향해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도(道)’라는 우주의 진리가 ‘덕(德)’이라는 개인의 내면에 반영되어 ‘자아’ 안에서 우주의 진리를 찾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더불어 혼란한 현실에서 신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떠나고자 했던 측면도 비슷하다. 그러면서도 두 경전 간에는 어떤 차이점이 모호하게나마 있는 것 같다. 노자가 살았던 시대는 삼황오제의 이상적인 시대가 끝나고 춘추전국시대의 혼란과 갈등이 극화되는 때였다. 노자는 혼란과 폭력의 원인을 외부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서 찾고자 했다. 『베다』·「우파니샤드」가 신과 사제와 인간과 자연이라는 순환하는 우주적 본질에서 태어났다면, 『도덕경』은 노자가 살던 혼탁한 시대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가르침과 강령의 차이를 보이지 않을까 한다.
여하튼 『도덕경』은 상편인 「도경」에서 ‘도’의 의미를 설명하는데, ‘도’는 언어로 담을 수 없는 천지의 시원이자 무와 유를 아우르는 우주적인 질서를 의미한다. 하편인 「덕경」은 도에 대한 구체적인 행위와 태도를 제시한다. 노자에게 이상적인 ‘덕’은 인위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도의 이치를 따라 애쓰지 않는 태도이다. 노자의 ‘덕’은 무엇도 애써 쌓지 않고 애써 나누지 않는 ‘무위(無爲)’의 세계를 지향한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무위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나’의 내면에서 ‘우주[道]’를 발견하고 그 질서를 일치시키는 것이 ‘무위’의 참뜻이다. 그러니 우주의 질서인 ‘나’에게 현실의 혼란과 폭력은 덧없음으로 다가온다. 덧없는 현실에서 애쓰는 삶은 부질 없는 것이 된다. 그러니 애쓸 필요가 없다. 우주의 질서에 나의 질서를 맡기면 그만이다. 그렇게 노자는 탈속했다. 이렇게 노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조는 우리에게 시를 관조하는 또 하나의 방법론을 제시해준다.
부다페스트 어부의 요새로 가는 길에
노란 씀바귀를 본다
고국의 숲 가장자리에서나 보던 풀들이
여기까지 와 있다니
어쩌면 갓털 하나가
바람에 날려 국경을 넘고
날짐승 몸에 붙어 초원을 가로질러,
번식하고 번식하여
이곳에 와 있는 거라면
어부들의 역사는
흰 벽에 기대어 있는 한 포기
꽃대에 지나지 않을까
그들의 오래된 분노
광장에 모인 영웅들
모두 강을 사이에 두고 한들거리는
한 시절만 같아
물 위에 뜬 그림자처럼 덧없어 보인다
밤이 오니 광장 불빛은 점점 흐드러져
관광객조차 홀씨처럼 잠시 머물다 흩어져 간다
어부에게는 딸이 있었고
영웅에게는 이름뿐인 역사가 있었을 것
아비는 끝내 돌아오지 않아
광장의 가브리엘 대천사도
날개를 접지 않았을 것이다
시들 수 없는 꽃 한 송이
흔들리는 줄기 부여잡고
노란 쓴 물 올리고 있다
전쟁의 소용돌이도 이데올로기 거품도
종교의 허상도
씀바귀 쌉싸래한 향에 섞여
바람 속으로 흩어졌으니
다뉴브강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먼 시간을 흘러든 것이다
―어향숙, 「다뉴브강」, 『애지』, 2025년 여름 호.
어향숙의 「다뉴브강」은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유람하는 관광여행 시이다. 여행은 목적에 따라 일이 될 수도 있고 고행이 될 수도 있고 현실도피의 수단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관광여행은 말 그대로 유유자적을 목적으로 한다. 속세를 떠나 아무 속박 없이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고 마음 편히 삶을 즐기는 관광여행은 우습게도 노자의 탈속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어향숙의 시에서 노자의 향이 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노자가 말하는 ‘덕’이 인위적으로 애쓰지 않고 애써 드러내지 않은 채로 거대한 도의 이치를 따르는 것이라 할 때, 「다뉴브강」이 아무것도 애쓰지 않는 제3의 타자[여행객]로서 “먼 시간을 흘러든” “다뉴브강”의 거대한 이치를 관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행이 끝나면 낯선 세계를 탈속하여 귀국하는 예상도 인생의 순리에 대응된다면 더욱 그럴싸해 보인달까.
“부다페스트”는 “전쟁의 소용돌이도 이데올로기 거품도/ 종교의 거품”도 가득한 속세이다. “다뉴브강”을 사이에 두고 서쪽 언덕을 부다(Buda), 동쪽 평야를 페스트(Pest)로 하는 수도 “부다페스트(Budapest)”는 그 갈라져 있던 이름처럼 이념과 정치와 문화와 민족이 서로 갈등하던 역사 현실의 상징 같은 곳이다. “부다페스트”의 정체성 같은 성과 기념비와 조형물들이 여행자에게 들려주는 전설과 역사에는 혼란과 폭력이 서려 있다. 그리고 그 혼란과 폭력의 현실은 인위적인 “분노”를 노래하게 하고 “광장에 모인 영웅들”을 인위적으로 추모하게 만든다. “아비는 끝내 돌아오지 않”는 곳, “어부들의 역사”는 “이름뿐인” 곳, “광장의 가브리엘 대천사도/ 날개를 접지 않”는 곳은 곧 현실로서 무던히 애쓰는 인위적인 결과물인 것이다.
어향숙 시인은 다행히(?) 여행자로서 “부다페스트”의 역사 현실에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관찰자이다. 그 객관적 거리로서의 낯선 시선이 “노란 씀바귀를” 보게 만든다. 여행자로서 드러내지 않고 애쓰지 않는 시인은 “시들 수 없는 꽃 한 송이”가 “노란 쓴 물 올리고 있”는 것을 관조할 수 있다. 거기에 더해 “국경을 넘고/ 날짐승 몸에 붙어 초원을 가로질러,/ 번식하고 번식하여” “고국의 숨 가장자리에서나 보던 풀들이/ 여기까지 와 있다”는 통찰은 낯선 세계의 혼란과 폭력을 ‘나’의 보편적 세계로 대입시키는 데까지 나아가게 한다. 이제 “광장에 모인 영웅들”의 “분노”는 타인의 현실이 아니라, ‘나’의 현실과 관련된다. 그렇지만 이 무위의 여행자에게 “씀바귀 쌉싸래한 향에 섞여 바람 속으로 흩어”지는 “전쟁”과 “이데올로기”와 “종교”는 “먼 시간” 속에서 덧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뉴브강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먼 시간을 흘러든 것이다”라는 사유에는 우주의 질서[道]를 관조하는 ‘나’의 시선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본다”라는 시적 관조를 통해 ‘우주의 질서[道]’와 ‘나의 질서’를 일치시키는 행위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어향숙의 「다뉴브강」은 여행시의 올바른 방향성을 보여준다고 여겨진다. 낯선 곳에서 보편적 진리를 찾아내는 것이 시적으로 재미도 있거니와 울림도 준다. 낯선 곳에 가서 낯선 풍물을 늘어놓는 것은 자기 자랑밖에는 안 될 것이고, 낯선 곳에서 낯선 기분을 낯선 단어로 풀어놓는 것은 어떠한 공감도 일으킬 수 없는 기괴한 호사일 뿐이다. 이색적인 풍경에서 보편적인 삶의 모습을 발견하는 “노란 씀바귀” 같은 시어가 탈속하는 노자 눈에도 선연히 띄었을 것이 분명하다.
원인과 결과로서의 관조
실패에 실을 감듯
오늘 눈보라는 종소리를 칭칭 감네
극락사 종소리 울려올 때
그때마다 새벽 종소리를
손 빠르게
희고 긴 실로
실패에 동여서
이빨로 끊어놓네
눈보라는 이 종소리를 풀고 풀어 어디에 쓰려나
저 절 스님의 장삼長衫 해진 소매 끝을 기워서 입히려나
눈보라는
내 추운 백지白紙 위에
슬쩍 가져다 쓰려는 이 시구詩句도
흰 실로 감아놓고 가네
―문태준, 「눈보라와 종소리」, 『현대문학』, 2025년 5월 호.
문태준의 「눈보라와 종소리」는 시가 심상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보여주는 수작이다. 감각들이 지각하는 일차원적인 묘사가 아니라, 감각과 감각이 동시에 다른 차원의 감각으로 전이되고 확산되어 상상되는 공감각의 묘사는 문태준 시인의 시답게 최상의 것이다. 이러한 시인의 관조는 시적 대상이 되는 사물이나 현상을 오래도록 곱씹는 것에서 비롯될 것이다. 오래도록 관찰하고 깊이 생각하고 다시 돌이켜보고 경계를 허물어 반문하는 것에서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나’와 ‘사물·대상·세계’가 만나게 되니까 말이다. 이러한 관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사유 방식과 닮아있다. 그것은 원인과 결과의 논리적 연결이기도 하면서, 질료와 형상의 보편타당한 관계에 대한 이해이기도 하다. 「눈보라와 종소리」에서는 “해진 소매 끝을 기워서 입”는 “스님의 장삼”의 질료[원인]를 “실패에 동여”진 “희고 긴 실”에서 찾는다. “희고 긴 실”의 질료는 “종소리”이고, “종소리”의 질료는 “눈보라”이다. 거꾸로 “종소리”는 “눈보라”의 형상[결과]이 되고, “희고 긴 실”은 “종소리”의 형상이 된다. 당연히 “장삼”은 “실”의 형상이 된다. 이 재미난 질료와 형상의 관계를 가지고 현실 세계의 이데아를 설명했던 건 아리스토텔레스였다.
플라톤은 불멸하는 절대 보편으로서의 이데아가 하늘 너머에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하는 땅 위의 세상에서 이데아를 찾았다. 완전한 세계인 저 너머에 비해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가 상대적으로 가치 절하되고 초라해지는 것이 그는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땅 위의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개체마다 지닌 이데아를 탐구하기 위해 실체·양·질·관계·장소·시간·상태·소유·능동·수동의 열 가지 범주(categories)로 나누어 파악하려고 했다. 그러다 보면 각각의 개체나 현상의 근원을 알 수 있을 것이고, 그 근원들의 궁극적인 근원에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결국 불멸하는 절대 보편의 이데아가 있다는 것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나 매한가지였지만,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의 원리[이데아-더 궁극적인 이데아]를 파악한다는 점에서 철학하는 방법론을 달리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방법론을 형이상학적 사유라고 부르고 거기에서 또 하나의 시적 관조의 방법론을 채택할 수 있다.
현실에 존재하는 것들의 본질들을 통해 근원적인 본질을 탐구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질료’와 ‘형상’으로 사물을 바라본다. ‘질료’는 가능태로서 현실태가 되는 ‘형상’의 원인이 된다. 또한 인과관계의 ‘질료’와 ‘형상’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운동한다. “눈보라-종소리-희고 긴 실-스님의 장삼”의 공감각적 확산에서 ‘질료’가 되는 “눈보라”가 ‘형상’인 “종소리”가 되고, 또 다른 ‘질료’로서 “종소리”는 “희고 긴 실”이라는 ‘형상’으로 운동하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더 따져봐야 하는 지점은 ‘질료’인 가능태가 ‘형상’인 현실태가 되는 운동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는 점이다. 가령, 원인의 원인을 따지면 최초의 질료로서 ‘제1질료’를 발견하게 된다. ‘제1질료’는 최초의 질료로서, 어떠한 형상을 가지지 않고 가능성만을 지닌 질료이면서, 인간의 사고 속에서만 존재하는 순수한 재료이다. 「눈보라와 종소리」에서의 제1질료는 “눈보라”이다. “눈보라”는 ‘형상’인 “스님의 장삼”의 최초의 재료로서, 어떠한 형상을 가지지 않은 가능성의 심상이다. 그렇다. 이 시에서 “눈보라”는 형상도 없이 “종소리”를 가능하게 하고, “종소리”라는 무형의 청각 이미지가 “희고 긴 실”의 시각·촉각 이미지의 가능성이 되게 한다. 결국에는 “스님의 장삼”을 “기워서 입히”는 것도 “눈보라”라는 순수한 재료에서부터 시작된다.
반대로 결과의 결과를 따라가면 궁극의 목적지인 ‘순수형상’을 만나게 된다. ‘순수형상’은 최종 형상으로서, 어떠한 질료도 지니지 않는 궁극의 형상이면서, 모든 질료가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의 목적이 된다. 최종 형상으로서 “스님의 장삼”은 “해진 소매 끝을 기워서 입히려”는 궁극의 목적을 달성한다. “눈보라”가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의 목적에는 “내 추운 백지 위에/ 슬쩍 가져다 쓰려는 이 시구도” 포함된다. 어쩌면 “장삼 해진 소매 끝을 기워서 입히려”는 목적과 “내 추운 백지 위에/ 슬쩍 가져다 쓰려는 이 시구”의 목적 너머에 더 궁극적 목적인 그 무엇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는 질료 없는 순수한 최종 형상을 ‘부동의 동자’나 ‘절대자[신]’로 ‘세계의 영원한 원리’라고 설정한다. 「눈보라와 종소리」의 “장삼”과 “시구” 너머 궁극의 형상이자 목적지인 ‘부동의 동자’는 아마도 문태준 시인이 지향하는 ‘시의 본질’ 그 자체를 가리키고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무리해서 굳이 말해보자면, 시라는 ‘아름다움’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오래 외롭고 오래 춥고 오래 생각하고 오래 관찰하면, 심상이 일어나고 이미지가 생동하고 사물과 사물이 연관되는 궁극의 하나가 ‘나’를 관통하여 한 편의 순수한 시로 온다.”라는, 인과하는 시적 관조의 방법론이 “눈보라”처럼 들리는 것만 같다.
덧붙여, 불교적 소재의 이 시를 이분법적 사고의 원류가 되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 풀이하는 것도 새로운 종류의 비평적 관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조는 사색적인 삶으로서의 행복을 추구하는데, 문태준의 언어가 시적 대상에 어떻게 생명력을 불어넣는지를 분석할 수 있는 재미난 틀이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사실, 이 글에서는 「눈보라와 종소리」의 관조하는 행복과 서정적 시어들을 범주화하여 분석하는 것은 시작도 하지 못했음을 밝힌다.
‘시’라는 존재에 대한 관조
시인의 삶은 녹슬지라도
시인의 시는 녹슬지도 부러지지도 않는다.
시는 말로 만들고 온 생으로 벼린 칼이다.
벌레 먹지 않은 말로 만든 칼이면서 칼집이다.
말로 쌓아 올린 시의 집에는
잘 벼린 칼들이 칼집에 가지런히 꽂혀있다.
―최서림, 「시의 나라에는」, 『애지』, 2025년 여름 호.
수많은 관조의 방법 중에서 마지막으로 볼 것은 ‘나를 죽이는 관조’쯤 되겠다.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관조가 아니라, ‘시의 본질에 목숨 걸고 덤벼드는’ 관조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시인이 시 자체를 바라본다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인식 행위이지만, 내공을 다스리다가 혈이 꼬여버리는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질 수도 있거니와, 관념적인 것을 관념적으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매우 고난한 작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인들의 어두운 여러 면면 중에서 기괴와 괴벽과 망상 같은 것을 종종 목도하기도 하는데, 이는 시적 본질에 대한 시인의 운기조식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위험에도 시인은 시 자체를 관조할 수밖에 없다. ‘시는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 질문 없이는 시를 쓸 수도 읽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뜻밖에도 ‘시의 본질에 목숨 걸고 덤벼드는’ 관조 자체가 시적인 관조의 한 방법론으로써 쓰인 작품들이 여러 지면에서 자주 목격된다.
최서림의 「시의 나라에는」은 시의 본질과 근원과 원리에 대해 직설적으로 정언하는 작품이다. “시는 말로 만들고 온 생으로 벼린 칼”이라는 서늘한 느낌의 시적인 단정은 “녹슬”어 버린 “시인의 삶”과 대비되어 “시”의 낭만적 가치를 드러낸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식의 의지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이를 더 강화시켜 주는 것은 시인이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시어들이다. “녹슬지도 부러지지도” 않는 “벼린 칼”과 “칼이면서 칼집” 같은 시어들은 그 자체로 날카롭고 위협적이고 결연하다. “벌레 먹지 않은 말”은 쇠의 성질을 가지고 있고, 그 쇠는 마치 ‘나’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피의 무기처럼 읽히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공격적이고 파괴적이고 강력한 시적 관념을 누그러뜨리는 대목이 “잘 벼린 칼들이 칼집에 가지런히 꽂혀있다”에서 발견되지만, 여전히 한 시인이 시에 대해 갖는 열망의 날카로움은 잔감으로 마음에 남는다.
최서림 시인이 「시의 나라에는」에서 보여주는 풍경은 시의 ‘아름다움’에 목숨을 건 전쟁터의 모습이다. 이 시를 읽을 때 주의해야 할 부분은, ‘시의 본질에 목숨 걸고 덤벼드는’ 태도는 시인마다 제각각이며 어느 하나의 방법론만 존재한다는 생각 자체가 폭력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시의 나라에는」은 오직 ‘최서림 시인만의 시적 태도’임을 우리는 참고만 하면 된다. 사실, 이러한 시인 자신의 시적 갈망에 대한 관조는 일반 독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시는 시를 쓰고자 하는 당신이나 나 같은 특수한 독자인 경우에만 효용성이 있다. 우리는 시가 지향하는 ‘아름다움’이 시인의 신념을 강제하거나 교조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시마다 지닌 시적 완성도에 있음을 숙지하고 있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한 편의 시에 웬만해서는 휘둘리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시는 시라는 관념을 관조하는 시인을 다시 한번 관조하는 메타 관조의 시로서 완성도가 높다. 그렇기 때문에 메타 관조, 관조에 대한 관조의 측면에서 우리는 「시의 나라에는」을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최서림’이라는 개별 시인 자체를 염두에 두고 이 시를 읽으면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불가지론적 질문에 답하는 여러 답안 중 하나의 사례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말로 쌓아 올린 시의 집”에 사는 시적 화자 ‘최서림 시인’은 결국 모든 시인이 던지는 본질적이며 근원적인 질문에 대해 이렇게 온힘을 다해, 온몸을 써서 발버둥치고 있다는 것! 우리는 그 시적 자세만 목도하면 된다. 그리고 거기서 시적 에너지만 뽑아먹으면 그만이다.
관조 이후에
시 자체에 대한 갈망이 관조의 한 방법론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재미있는 현상이지만, 여전히 시라는 것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막막하기만 하다. 시는 무엇이고 무슨 쓸모가 있고 왜 즐거운 것인지 의문을 가질수록 불가지론이라는 허방에 빠질 뿐이다. 수많은 시인과 작가와 비평가들이 시라는 본질과 드잡이를 할 때마다 가상으로서 시마는 그 정체를 내빼고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그러다 문득, 살 좀 빼려고 걷던 공원 트랙의 동그라미에서, 겨우내 침묵을 지키던 아궁이를 뒤적거리면서, 먼 타국의 낯선 곳에서 노란 꽃대를 올리는 씀바귀에서, 눈보라 치는 쓸쓸한 절간의 종소리에서, 시를 열망하는 ‘나’를 인식하는 유체일탈에서, 혹은 마음도 의지도 상황도 혼탁한 무방비 상태로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정신으로부터 시는 불현듯 온다. 어렴풋한 환영으로 실체를 슬며시 드러내거나 맡아지거나 떠올려지거나 느껴진다. 여전히 무엇이고 어떤 쓸모고 왜 환희에 찬 것인지 선명히 알 수는 없지만, 어렴풋한 대로 시인은 전율하게 되고 감동하게 되고 세계가 깨어지는 충격을 받게 된다. 그 찰나의 순간도 기다려 주지 않고 성미 급한 시마는 진작에 자리를 떠나간 뒤일 터이지만, 전율과 충격이 떠나간 자리를 애석해하며 시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떠듬떠듬 떠올리려 안간힘을 쓰는 시인은 곧 알게 된다. 시적 순간은 의외로 곳곳에 산재해 있음을, 생활과 일상과 주변 곳곳에 시마가 맺혀 있음을, 그 시마를 우리는 눈여겨보지 않았음을, 보았다 하더라도 오래 보지 않았고 마음의 눈으로 보지 못했음을 알게 된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알았다 해도, 시라는 물(物)자체에 대해 우리는 인식할 수 없는 불가지론에서 또다시 허우적거릴 것이다. 반드시 그럴 것이다.
우리는 서두에서, 시의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형식과 언어와 운율과 사유는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한 불가지론적 질문에 ‘다만 관조밖에는 길이 없다’의 방법론으로 현문우답했다. 이 글이 끝나가는 동안에도 ‘시는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한 가설 또는 합의 또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 보편적인 방법론은 관조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라는 나태주의 시가 함의하는 미학은 ‘예쁨’에 대한 귀여운 서정 너머 “오래 보아야” 한다는 시적 정언명령의 차원을 지칭하고 있는지 모른다. 물론 “오래” 보는 것은 관조의 한 방법이다. 깊게도 보아야 하고 에둘러도 보아야 하고 삐딱하게도 보아야 한다. 볼 수 있는 온갖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보아야” 한다는 것도 시각(視覺)의 일차원적인 의미가 아니라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의 다섯 감각을 총동원해서 보아야 한다. 거기에다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나’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 등을 죄다 쏟아부어야 한다. 육체와 감각과 심상과 의지와 의식을 종합해서 “보아야” 하는 것이 관조이다. 그러한 관조여야 미학의 ‘아름다움’에 닿게 되고 그래야 시의 본질이 무엇이고 무슨 쓸모이고 왜 즐거운 것인지를 아련하게라도 느끼게 될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