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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5.16쿠데타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들이 육사 8기다.
서중석 : 이들이 쿠데타를 모의한 핵심 세력이다. 그중에서도 8명이 핵심인데, 8기가 왜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했느냐. 그것에 관해선 수많은 논문이 거의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 '불우한 하층 출신으로 특권층에 대한 불만이 컸다', 이런 것도 작용했지만 부정부패한 군 상층부에 대한 불만이 참 많았다. 1960년 3.15 부정 선거에 송요찬 육군 참모총장이 적극 개입해 부정 선거를 진두지휘했고 많은 군 수뇌부가 그것에 가담한 건 사실이다. 이런 걸 포함해 상층의 부정부패에 불만이 많았고 이를 거세해야 한다고 봤다. 이걸 실행한 게 바로 정군 운동이다.
그런 것과 결부해 많은 사람이 똑같이 지적하는 것이 있다. 육사 1∼4기는 정규 사관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고 볼 수 없는 사람들이다. 몇 개월짜리들이 많다. 육사 11기가 나중에 12.12쿠데타를 일으킬 때 하는 이야기들이 있지 않나. (육사 최초로 4년제 교육을 받은 11기는 '정규 육사 1기'라고 자부했다. 이는 선배 장교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1955년 11기 임관을 앞두고 육군본부가 '정규 육사 1기 호칭을 쓰지 말라'고 지시하자 11기가 반발하는 일도 일어났다. <편집자>)
하여튼 국방경비대 숫자를 늘리기 위해 많이 뽑아야 했기 때문에 육사 8기를 1200명 넘게 뽑았다. 이 사람들은 이전 기수보다 훈련도 길게(6개월) 받았는데, 어쨌건 이때 진급을 못하고 있었다. 5.16쿠데타가 날 때까지 극소수만 대령 진급을 했고, 좀 괜찮다고 하는 사람들 정도가 중령에 머무르고 있었다.
프레시안 : 요즘과 달리 장군들이 자신들과 비슷한 또래였으니, 시간이 지나도 진급 적체 문제가 쉽게 풀리기 어렵다고 느꼈을 가능성이 높다.
서중석 : 이들에게 큰 불만이었다. 같은 또래에 별(장군)들이 수두룩했다. 별 세 개, 별 두 개, 이런 사람들이 많았다. 무슨 얘기냐 하면 육사 1기부터 7기까지, 8기와 나이 차가 별로 없다. 그리고 미군이 우리 군을 육성할 때 독립군은 처음부터 거의 배제했다. 광복군 출신, 독립군 출신은 소수만 들어와 있었다. 만주군을 포함한 일본군 출신 위세가 하도 커서, 광복군 출신이라는 것도 한때는 숨겨야 했던 참 비극적인 얘기도 있다.
우리 군은 정부와 다른 점이 있다. 헌법에 명백히 대한민국 정부는 임시정부 법통을 이어받은 걸로 돼 있는데 군은 그런 게 없다. 광복군을 이어받았다는 게 안 나온다. 어떤 육사 책에는 군사영어학교가 모태라고도 쓰여 있다. 어쨌든 만주군을 포함한 일본군 출신이 주력이었다.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도 중좌 이상은 거의 쓰지 않았다. 나이 먹은 일본군은 말을 잘 안 들을 수 있지 않나. 그러니까 20대인 대위 이하, 일본군일 때 그런 계급장을 달고 있던 사람들을 군사영어학교에서 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장군들이 굉장히 젊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세상에 어떻게 저런 장군들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군번 1번에서 100번, 주로 군사영어학교를 나온 사람들인데 그 가운데 74명을 조사한 연구가 있다. 언제 준장이 됐는지 봤더니 25~29세 사이가 35명, 47.3퍼센트였다. 20대 후반이 거의 반절을 차지했다. 30~34세가 29명으로 39.2퍼센트다. 양자를 합치면 86퍼센트가 넘는다. 그러니 34세 이하의 군번 1∼100번은 거의 다 준장이 돼버린 것이다. 전 세계에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20대에 장군이 됐지만, (한국 같은 사례는) 어느 역사를 훑어보더라도 전 세계에 별로 없는 일이다.
프레시안 : 30대 대장도 여럿이었다.
서중석 : 정일권, 만주군관학교를 나와 만주군에서 헌병 대위까지 한 사람이다. 만주군이 자랑하던 총아였다. 이 사람은 33세이던 1950년 육해공 3군 총사령관과 육군 참모총장으로 임명됐다. 별 네 개(대장)를 단 건 37세 때다. 군번 1번으로 유명한 이형근, 이 사람은 34세 때 대장이 됐다. 육군 참모총장이 된 건 36세 때다.
백선엽도 마찬가지다. 최근 김효순 기자의 <간도특설대>에서 백선엽 장군에 대해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새로 밝혀졌다. 하나는 이 사람이 간도 지방 헌병 중위였다는 것이다. 간도특설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헌병 중위였다는 건 중요하다. 헌병 장교가 된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았나. 그리고 이 사람이 시라카와(白川義則, 백천의칙, 시라카와 요시노리)로 창씨개명을 했다고 나온다. 윤봉길 의사가 1932년 거사했을 때 폭탄을 던져 중상을 입혀 죽인 상하이 파견 일본군 사령관(대장), 그러니까 중국 침략을 대표하는 인물이 시라카와다. 이 사람과 같은 이름을 썼다고 김효순 기자의 책에 나온다. 윤봉길 의사 거사와 관련된, 중국 침략의 상징적인 인물 이름이 그런 식으로 나와서 정말 놀랐다. 하여튼 백선엽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대장이 된 사람이다. 정일권이나 이형근보다 먼저 됐는데 그때 나이가 33세다. 야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지 않았나.
진급 적체와 정군 운동, 그리고 하극상 사건
프레시안 : 5.16쿠데타의 주역들도 계급에 비해 젊었다.
서중석 : 5.16쿠데타 후 군사 정권을 쥐락펴락한 사람들을 보면 나이가 아주 어리다. 당시 육군 참모총장 그리고 계엄사령관, 이 두 개가 가장 중요한 직위인데 장도영은 이걸 맡고 있었다. 거기에다 내각 수반과 국방부 장관도 지내게 된다. 이렇게 최고 직위를 다 차지할 때 38세였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에 늦게 들어갔다. 그래서 나이가 아주 많은 편이라 44세였다. 이주일(쿠데타 당시 2군 사령부 참모장)도 박정희처럼 늦게 만주군관학교(1기)에 들어갔다. 43세였다.
그러나 쿠데타 주모자로 얘기되는 김종필은 35세, 똑같이 정보 장교로서 쿠데타를 주도한 김형욱은 36세에 불과했다. 해병대 원로로 돼 있고 최고회의 재정경제위원장을 지내는 김동하 예비역 소장도 41세였다. 김윤근 준장, 해병을 이끌고 온 이 사람도 35세였다. 6관구 참모장으로서 쿠데타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김재춘 대령은 34세밖에 안 됐다. 포병을 이끌고 온 문재준 대령, 이 사람도 35세에 불과했다. 심지어 박종규, 나중에 경호실장을 굉장히 오랫동안 했고 실력자였던 이 사람은 31세로 소령이었다. 쿠데타가 났을 때 박종규와 함께 박정희 옆에 서 있던 차지철 대위는 27세였다.
쿠데타 며칠 후 바로 내각이 출범하는데 장관이 전부 군인이었다. 그 장관들 나이를 보면, 서른서너 살에서 마흔한두 살 사이에 거의 전부가 들어 있었다. 좋게 말하면 세대교체라고 할는지도 모르지만, 엄청나게 젊은 군인들이 국가를 쥐락펴락하게 된 것이다.
하여튼 여기서 많은 사람이 지적하는 것은, 육사 8기와 나이가 비슷한 이들이 장군도 되고 그럴 때 육사 8기는 진급이 안 됐다는 것이다. 또 육사 8기는 아주 두터운 층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육사 8기가 쿠데타에 앞장설 수 있었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프레시안 : 육사 8기는 쿠데타 전 정군 운동을 주도했다.
서중석 : 정군 운동은 육사 8기를 중심으로 일어난다. 1960년 5월 8일 김형욱, 길재호, 김종필 등 8기생 중령 8명이 유명한 '정군 건의 연판장을 제출하자', 여기에 합의하면서 시작된다. 이 사람들은 체포됐는데, 물러나라는 정군 운동의 첫 번째 대상이던 송요찬 참모총장의 훈시를 받고 석방됐다. 그러고 나서 송요찬은 바로 사임했다. 더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서 일단락된 게 아니라, 민주당 정권이 1960년 8월 23일 출범하자 또 바로 정군 운동을 벌였다. 8월 29일 정군 대상으로 8기생들이 손꼽던 최영희가 연합참모본부 총장으로 임명됐다. 지금의 합참의장 비슷한 건데 아무런 실권이 없었다. 이 사람 초청으로 미국 국방성 군사원조계획국장인 윌리스턴 파머 대장이 한국에 왔는데, 한국을 떠나면서 '젊은 장교들이 무엄하게 하극상 비슷한 걸 벌이고 있다'는 정군 반대 성명을 냈다.
(파머는 9월 20일 "한국군은 젊은 장교들의 선동으로 고위 지휘관들이 사소한 문제로 인해 불안에 사로잡힌 인상"이라면서 "유능한 장성들에게 압력을 가해 예편하게 하는 일은 없어져야 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다음 날 미군 태평양 지구 지상군 사령관도 "한국의 정군은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편집자>)
이것에 8기생을 중심으로 한 중령들이 반발했다. 중령 16명이 최영희 총장을 방문해 성명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면서 '당신 사퇴하라', 이렇게 나왔다. 이 사람들은 징계위원회에 회부됐고, 나중에 김종필과 석정선 두 중령은 예편됐다(하극상 사건).
정군 위해 쿠데타? 권력욕과 진급 문제가 직접적 요인
프레시안 : 이 과정에서 육사 8기는 쿠데타를 결의했다. 일각에서는 평화적인 정군 시도가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력을 동원해 '혁명'(쿠데타)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도 나온다.
서중석 : 9월 10일, 그러니까 장면 정권 출범 18일 후였다. 김종필을 비롯한 이들이 현석호 국방부 장관을 면담하러 갔는데 현 장관이 마침 자리에 없었다. 그날 밤 충무장이란 데서 김종필, 김형욱 등 9명이 모였다. 자료에 따라 조금 다르게 나오는 데도 있긴 한데, 어쨌건 이 사람들이 쿠데타를 결의해버렸다. 총무 김종필, 정보 김형욱, 인사 오치성 이런 식으로 자기들끼리 쿠데타 부서까지 정했다.
이게 명분이 있는 건가. 나중에 쿠데타 권력은 '장면 정부가 무능하고 부패했다', 이런 소리를 하면서 쿠데타 명분으로 그걸 강조했다. 아, 장면 정부가 무능하고 부패한 걸 알려면 그래도 몇 달은 지나야 하는 것 아닌가. 18일밖에 안 된 정부를 뒤집어엎으려는 모의를 했다는 건 도대체가 말이 안 된다.
'정군이 안 돼서 쿠데타를 했다', 이렇게 주장할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것도 말이 안 되는 것이, 장면 정부가 정군에 찬동했다. 그전에 선거에서 군이 부정부패한 짓을 하는 걸 많이 봤고, 자유당 선거 자금의 가장 큰 몫이 군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돈이 없던 때여서 선거 자금을 갹출할 데가 별로 없었다. 제일 큰 건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많이 받는 군이었다. 장면 정부도 그걸 모르지 않았고 '군이 문제다', 이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장면 정부는 출범하면서 두 가지를 추진했다. 하나는 감군, 또 하나는 정군이었다. 장면 측은 20만 감군 계획을 갖고 있었고 1960년 7.29선거 때 감군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런데 그게 장면 정부가 출범할 무렵 '10만 명 정도 감군', 그 직후엔 '5만 명 정도 감군'으로 팍팍 줄어들었다.
프레시안 : 장면 정부의 감군 시도는 용두사미로 끝난다.
서중석 : 감군을 생각한 제일 큰 이유는 '군 자체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이것도 문제였지만 경제 개발과도 관련이 있었다. '미국 원조의 대부분이 군으로 들어가니 군을 대폭 줄여 그 재원을 경제 개발 자금으로 돌려야겠다', 장면 정부는 이렇게 생각했다.
밥줄이 걸린 군이 반대하는 건 당연한데, 미국이 반대하면 장면 정권으로선 꼼짝 못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미국이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래서 감군 규모가 5만으로 줄었다가 그것도 또 줄어서 1960년 12월 27일 중사에서 대령까지 직업 군인 1534명의 전역식을 치르는 정도로 일단락을 지었다.
이것 하나 줄이는데도 서울에서 거부 소동이 나고 그랬다. 120명이 '생활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그때는 군인 생활 보장이 안 되던 때였다. 이런 걸 잘해놓은 건 박정희 정권이다. 박정희 정권은 생활 보장을 포함해 군인들 대우를 잘해줬다. 하여튼 장면 정부가 감군 노력은 하려 했지만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이 돼버렸다.
프레시안 : 장면 정부는 정군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
서중석 : 정군도 처음엔 상당히 의욕적으로 했다. 그래서 육군 참모총장에 누굴 앉혔냐 하면 청렴하고 강직하기로 세상에서 '누가 봐도 그 사람이다' 할 인물인 최경록 장군을 딱 앉혔다. 정군을 적극 지지하는 사람이니까 앉혀놨는데, 최경록 장군은 미국하고 정면으로 붙기 시작했다. 내가 알기로 우리 군 역사상 지금까지 장성 중에서 미국하고 맞붙은 건 이 사람 하나다. 그래서 민족주의 장군이라고 불린다.
파머가 정군 반대 성명을 내니까, 최경록 참모총장이 바로 "이는 명백히 주권 국가에 대한 내정 간섭이다", 이렇게 나왔다. 지금 보면 당연한 소리다. 그런데 그 당시 많던 친일파는 꿈도 못 꾸는 이야기였다. 하여튼 파머 대장의 담화에 최 총장은 한 걸음 더 나가버렸다. '사대주의 사상에 젖은 일부 몰지각한 장교들이 연명책을 위해 파머에게 정보를 잘못 제공했기 때문에 이런 얘기가 나왔다', 이러면서 수뇌부 전체를 걸고넘어진 것이다. 참 대단하다. 그러면서 '이와 같은 몰지각한 장교들을 단호히 축출하겠다', 이렇게 나왔다. 그러자 매그루더 주한 미군 사령관이 '파머 대장과 내 생각은 똑같다'며 이걸 또 반박하고 나섰다. (매그루더가 9월 22일 "건설적인 충고는 미국의 의무"라며 파머를 지지하자, 최경록은 "자리를 걸고 정군하겠다"고 받아쳤다. <편집자>) 이러니 최경록 장군이 참모총장을 오래 해 먹기는 틀린 것이다.
그러니까 '정군을 안 하기 때문에 장면 정권을 축출하겠다', 이것도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물론 장면 정권은 미국이 반발하니까 나중에 꼬리를 내렸지만, 그때는 쿠데타 준비가 상당히 진척돼 있을 때였다. 정군 문제는 쿠데타 명분이 전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 사람들의 권력욕, 진급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 이런 현실적인 문제가 가장 직접적인 요인이 아니었느냐, 그렇게 볼 수밖에 없다.
쿠데타에 꽂힌 박정희…총으로 시작해 총으로 끝났다
프레시안 : 쿠데타를 결의한 육사 8기는 박정희 장군을 지도자로 추대한다. 박정희는 그 이전부터 쿠데타에 관심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중석 : 쿠데타 주모자들은 1960년 11월 9일 신당동에 있던 박정희 집에 모여 '박정희를 지도자로 모시고 계획을 진전시키자', 이렇게 합의를 봤다. 이제 박정희가 등장하는 것이다. 박정희가 그전부터 쿠데타를 여러 번 생각했다고 써놓은 글이 참 많다. 그 부분에 대해서도 조금 생각은 해야 할 것 같다.
1952년 7월 이종찬 육군 참모총장이 교체됐다. 그때 박정희는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차장으로 이종찬 밑에 있었는데, 이종찬에게 편지를 썼다. '각하께서 결단을 내릴 것을 기대했는데 이제 떠나는군요', 이런 식으로 썼다. 그런 걸 보면 박정희란 사람이 쿠데타에 관심이 많았다는 건 사실이다.
어느 글에서든 쿠데타 시작은 이용문 준장과 관련해 이야기가 나온다. 이용문 준장은 이종찬이 1951년 참모총장이 된 후 육군본부 정보국장으로 기용한 사람이다. (1952년 이종찬이 해임될 때 이용문은 작전교육국장으로서 박정희의 직속상관이었다. <편집자>) 일본 육사 50기로, '정일권이나 백선엽이 만주군에서 날렸다면 이용문은 일본군에서 제일 잘나갔다. 대단한 선망의 대상이 됐었다. 한국인으로 이렇게 잘나가기가 어렵다', 이런 얘기를 듣던 사람이다.
프레시안 : 이용문의 큰아들이 이건개 전 의원이다. 박정희 정권 때인 1966년 검사가 된 이 전 의원은 얼마 후 청와대 비서관으로 발탁되고, 30세이던 1971년에는 최연소 서울시경국장이 됐다. 이 전 의원은 2012년 대선 때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가 박근혜 후보 지지 의사를 밝히고 사퇴해 눈길을 끌었다.
서중석 : 박정희가 존경했다고 할까, 추앙한 사람으로 이용문하고 이종찬 이 두 사람을 꼽고 있다. 이용문은 1952년 5월 10일경 장면 국무총리의 비서실장이던 선우종원한테 쿠데타를 제의했다고 한다. (장면은 그 직전인 1952년 4월 국무총리에서 해임됐다. <편집자>) '장 박사를 대통령으로 추대하자'는 것이었다. 이승만 박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선우종원이 물어보니까, 이용문이 '죽여야지'라고 대답한 것으로 돼 있다.
당시 '이승만을 축출하고 장면을 모시자'며 장면을 추대하려 한 다른 세력도 국회 내에 있었다. 상당히 유력한 세력이 많았다. 초대 주미 대사였던 장면을 미국이 키워준다고도 생각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서 자신이 대통령으로 선출될 것 같지 않으니까 직선제로 헌법을 바꾸려고 땃벌떼, 백골단, 민중자결단 같은 걸 동원했다. 그러자 전쟁을 수행하던 미 8군 사령관 제임스 밴플리트도 이 대통령한테 한때는 좀 비판적이고 그랬다. 밴플리트와 이승만은 나중에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된다. 하여튼 '이 쿠데타는 이종찬 참모총장이 알고 있었고 밴플리트의 묵계도 받아뒀다', 이렇게 선우종원의 글에는 나와 있는데 이게 어느 정도 맞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5월 25일 드디어 계엄령이 부산 등에 선포된다. 그때 이종찬은 부산에 군대를 보내라는 대통령의 명령을 거부했다. 그때부터 이종찬의 명성이 높아진다. 지금까지도 우리 군에서 제일 존경받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 않나. 정치 개입을 적극 반대한 사람이다. 어쨌건 그러면서 할 수 없이 이승만이 원용덕 헌병사령관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이때 부산의 계엄령을 무효화하기 위해 병력을 파견하는 것을 이용문 쪽에서 추진했다고 한다. 그런데 결국은 미국이 동의하지 않고 해서 구상 단계에서 끝났다고 돼 있다. 이때 박정희는 이용문에게 적극 협력해 쿠데타에 가담하려 했을 것이라고 다들 본다. 이게 첫 번째 쿠데타와 관련된 얘기다.
프레시안 : 두 번째 쿠데타 이야기는 4월혁명이 일어난 1960년에 나온다.
서중석 : 이때는 박정희가 직접 쿠데타 일선에 나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0년 1월 송요찬 참모총장이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이라는 상당히 좋은 자리로 박정희를 보내준다. 박정희는 송요찬 총장의 덕을 많이 본 걸로 여러 군데에 나온다.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오면서 박정희 소장은 포항의 해병 제1상륙사단장인 김동하 소장, 안동의 제36사단장 윤태일 준장, 그리고 유원식 대령 등 여러 사람을 만나 거사를 논의하고 군 동원 계획도 세웠다고 그런다.
이 쿠데타는 4.19가 나서 중지했다고 돼 있는데, 설령 4월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도저히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 이 사람들이 세웠다는 계획표만 보면 그런 판단이 든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이 동원하겠다던 군이 부산, 포항, 안동, 이렇게 기본적으로 영남에 있었다. 서울에서는 최주종 준장, 유원식 대령 이런 사람들이 책임지기로 하고 김종필 회고에 따르면 김종필은 결사대를 조직해 활약하기로 했다고 돼 있다. (1962년 4월 25일 <동아일보>는 이때 김종필 중령의 임무가 서울에 있는 '동지'들과 협력해 요인(要人) 처리를 담당하는 것이었다고 보도했다. <편집자>)
다시 말하면 서울에선 실질적인 군 동원 계획을 안 세운 것이다. 김종필이 결사대를 한다고 해도 그게 얼마나 활약을 했겠는가. 한국에서는 모든 중요한 것이 서울에서 결정된다. 영남에서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해봤자, 서울에서 지시 내려가면 그거 다 끝나는 거다. 그래서 송요찬 총장이 도미하면 5월 8일 거사하기로 했다고 하지만, 그러다 4.19 나서 중지했다고 하지만, 난 이 계획대로라면 도저히 현실성을 찾기가 어렵다고 본다.
허술한 보안, 소수의 병력, 그럼에도 나라 움켜쥔 쿠데타군
프레시안 : 박정희는 쿠데타 준비 과정에서 어떤 활동을 했나.
서중석 : 1960년 11월 신당동 집에서 쿠데타 지도자로 추대되고 이에 앞장서기로 하면서 박정희는 장경순, 한웅진, 채명신, 이주일, 최홍희 장군 등을 포섭한다. 그런데 박정희의 최대 공로는 장도영에게 접근한 데 있다.
박정희가 제일 은혜를 많이 입은 게 장도영인데, 장도영이 1961년 2월 참모총장이 돼버렸다. 그런 장도영으로 하여금 애매하게 이중적 태도를 취하게끔 만들었다. 장도영이 쿠데타를 직접 지원한 건 아니지만 애매한 태도를 갖게 하는 데는 박정희가 가까운 사람이었다는 게 작용했다. 장도영이 2군 사령관일 때 박정희는 바로 그 부사령관으로 있었다. 박정희가 제일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참모총장이 쿠데타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을 수 있는 건데, 그 참모총장이 양다리를 걸치게 해놨다는 점에선 박정희의 공로가 아주 크다고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1961년 들어 박정희 세력은 쿠데타에 박차를 가한다. 한 방에 나라를 뒤집는 쿠데타를 빼놓고는 박정희의 인생을 설명할 수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박정희는 1930년대 군국주의 성향 일본 장교들의 쿠데타를 우호적으로 바라봤고, 권력도 쿠데타로 잡은 것은 물론 집권 후에도 친위 쿠데타(1972년 유신 쿠데타)를 일으켰다. 총으로 시작해 총으로 끝난 정권의 절대 권력자답다.
서중석 : 1961년 3월 들어 구체화된다. 장도영을 포섭하려고 박정희가 접근하는 건 주로 그 이후다. 4월 7일에 가면 4.19 날로 확정했다고 그 사람들이 쓴 자료에 나온다. '4.19 1년을 맞아 데모가 많이 일어나면 폭동으로 연결될 것이고, 이때 정부는 제대로 진압을 못할 것이니 군대를 풀면 자신들이 진압을 명목으로 서울을 장악한다', 이렇게 돼 있다.
쿠데타 세력의 일원이던 이종태의 회고록 같은 걸 보면, 이종태 대령이 시위를 선동하려고 학생들을 그렇게 쑤시고 다녔다고 한다. 학생들 쪽에서도 그런 기록이 나온다. '우리한테 데모하라고 여러 사람이 쑤시고 다녔다.' 한두 사람이 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다 알다시피 4.19 1주년에 대학생들은 침묵시위를 한다. 쿠데타가 일어날 것 같은데 그것에 빌미를 줘서는 안 된다고 해서 조용히 선언문만 발표하고 간단한 침묵시위를 하는 걸로 끝냈다.
그런데 4.19 때까지만 하더라도 과연 제대로 쿠데타 계획이 섰느냐? 이건 잘 알 수가 없다. 그 후 날짜를 5월 12일로 다시 잡았다. 이때는 이종태 대령이 부주의하게 어떤 중령한테 얘기했는데, 이 사람이 서울 지구 방첩대장에게 밀고를 해버렸다. 이게 육군 방첩대장에게 보고돼서 참모총장한테 갔다. 그런데 참모총장이 그 선에서 끝내버렸다. 더 올라가지 않았다. 어쨌건 '이건 안 되겠다', 이래서 일단 중단했다. 그러면서 5월 16일 오전 3시를 거사일로 잡았다.
프레시안 : 군대를 움직이기 직전 또 정보가 새면서 쿠데타 세력은 다시 위기를 맞는다.
서중석 : 거사를 몇 시간 앞둔 5월 15일 저녁, 30사단의 두 대령이 배신하고 사단장인 이상국 준장한테 밀고를 해버렸다.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기로에서) 박정희 소장이 자정 무렵 김재춘 참모장이 기다리고 있는 6관구 사령부에 들어갔다. 김재춘 회고록에 자세히 나오지 않나. 그런데 그 회고록에는 '(박정희가) 머뭇거렸다', 이렇게 나온다. 어쨌든 '거사를 하자'고 결단을 내린다. 그래서 군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봉화 작전이라고 하는데, 제일 먼저 노량진에서 용산으로 나 있는 한강 인도교에서 해병대가 헌병대와 맞붙는다. 그게 5월 16일 오전 2시가 조금 못 됐을 때다. 오전 2시쯤 장도영 참모총장이 장면 총리한테 '피신하라'고 했다. 장 총리가 허겁지겁 피신했는데, 어떤 데에는 그게 군 행동대가 오기 10분 전이라고 쓰여 있고 다른 데에는 15분 전이라고 쓰여 있다. 오전 3시 30분경, 쿠데타군이 육군본부를 드디어 점령한 걸로 돼 있다. 오전 4시 30분경, KBS 라디오에서 '혁명 공약'이 방송된다.
이때 동원된 병력은 자료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나지만 해병대 1000명, 포병단 1000명, 공수단 500여 명, 육군 1000여 명 해서 3600명이라는 설이 강하다. 3400명이라는 설도 있다. 어느 쪽이든 3000명이 약간 넘었는데, 군대 숫자로만 따지면 정말 적다고 얘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