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5:13
[새번역]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NIV]
13.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if the salt loses its saltiness, how can it be made salty again? It is no longer good for anything, except to be thrown out and trampled by men.
세상의 소금
우리는 여기서 산상설교의 새로운 대목으로 들어갑니다. 주님은 3절로부터 12절까지 기독교인의 성격을 묘사하셨습니다. 여가 13절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이 말씀하신 바를 적용하고 계십니다. 지금까지 기독교인이 어떤 사람인가를 살펴보았으나 우리는 이제 기독교인이 그의 사람됨을 어떻게 나타내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또는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인식하였으니 이제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계속해서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고립해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이 세상에 속해 있지는 않으나 그래도 세상 안에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세상과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성경에서 이 두 가지 사실이 함께 따라다니는 것을 보실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정신과 그 전망에 있어 내세적이어야 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기독교인이 세상 밖으로 물러가야 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생활은 필연적으로 사회에서 분리시켜 명상의 생활을 하도록 사는 것이라고 가르친 수도원 제도의 과오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의 어느 곳에서나 부정되고 있는 점이며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본문에서 보다 더 완전히 나타나 있는 것도 없다 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 주님은 그가 이미 말씀하여 오신 것의 함축된 뜻을 도출해 내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은 베드로전서 2장에서 베드로가 이와 똑같은 일을 하고 있음을 주목하실 것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세상의 소금이 되기 위해서 심령이 가난하며, 긍휼하며, 온유하며, 의를 따라 주리며 목마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인의 성격을 살펴보는 것에서부터 하나님의 생각과 목적에 따라 이 세상에서 세상의 기능과 목적을 생각하는 것으로 옮겨갑니다. 환언하면 바로 다음 절들에서 기독교인의 세상에 대한 일반적인 관계를 명백히 보게 됩니다. 오늘 이 세상에서 기독교인의 기능에 대한 이 문제가 교회와 개 교인이 당면하는 가장 긴급한 문제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큰 주제임이 분명하며 여러 면에서 크게 어려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매우 분명히 취급되었습니다. 지금 고찰하는 본절에서 이 주제와 관련해서 전형적인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매우 특색 있는 설명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세상의 상황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10절과 11절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본문은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긴급한 문제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박해를 당하게 될 것이며 세상의 죄가 악화됨에 따라 교회의 박해도 격화될 것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오늘 이것을 이미 겪고 있는 기독교인들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우리의 형편이 어떠하든 우리의 형제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으며, 충고와 교훈으로 그들을 도울 수 있기 위하여 이 문제를 매우 세심하게 살펴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지만 박해의 사실을 떠나서라도 이것이 가장 긴급한 문제가 되는 것은 여기 이 나라에서마저도 지금 발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의 세상과 사회에 대한 관계는 어떻게 되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세상에 발을 붙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물러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활로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떤 조처를 취해야 하는가,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하여 우리 기독교인은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이 문제는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본질적인 문제가 됩니다. 본 절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본문이 세상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는가, 본문이 세상 속의 기독교인에 대해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를 고찰해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이 말씀은 기독교인을 가리키는 말씀일 뿐만 아니라 그가 사는 세상을 한 마디로 암시하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이 말은 기독교적이 아닌 인류를 통틀어서 하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대한 성서의 자세는 무엇이겠습니까? 이 문제에 대한 성서의 교훈은 결코 불분명하지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러 점에서 20세기가 당면한 결정적인 문제, 즉 세계가 이미 알고있는 가장 흥미있는 시대들의 한 시대에 업하고 있습니다. 나는 성경의 진리를 이 시대처럼 증명해 보인 시대가 과거에는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20세기는 비극적인 시대요, 20세기의 삶은 한 때 애호하던 철학을 완전히 부정하고 파기했기 때문에 매우 비극적인 세기가 되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이처럼 많은 것이 기대되던 시대도 없었다 하겠습니다. 소위 19세기 말엽의 이 시대의 사상가들과 철학자들과 지도자들의 예언을 읽어보는 일은 비극이라 하겠습니다. 그들의 안이하고 자신에 찬 낙관주의, 그들이 20세기 황금시대에 기대했던 여러가지 일들을 주목하는 것은 얼마나 서글픈 일입니까? 그것은 모두가 생물학적 의미에서뿐 아니라 철학적인 의미에서도 진화론에 기초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심되는 관념은 인류의 삶이 진화하여 발전하며 향상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한 말들이었습니다. 사람은 동물에서 진화하여 어느 정도의 발전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발전은 사람의 정신과 생각과 전망의 관점에서 더욱 강조되었습니다. 전쟁은 폐지되고 있었고, 질병은 치료되고 있었고, 고생은 개선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마침내는 근절될 것이었습니다. 20세기는 놀라운 한 세기가 될 것이었습니다. 대다수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마침내 생각하지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대중은 교육을 통하여 음주와 음란과 갖은 악을 중단할 것이었습니다. 모든 국가가 이처럼 전쟁으로 치달리는 대신 생각을 하고 대화를 하도록 교육을 받으면 온 세계가 곧 낙원이 될 것이었습니다. 저의 이 말은 그 당시 상황을 풍자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때 사람들은 이 사실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사람들이 이제 마침내 철이 들기 시작했으니까 모든 문제는 법률과 국제회의를 통하여 해결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에 와서 이런 관념을 믿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가르침을 어떤 장소에서 가끔 발견하시게는 되겠지만 이 문제는 이 이상 더 논의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하찮은 것이 되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설교하기 시작했을 때인 오래전에 그리고 이런 유의 일을 공중 앞에서 말하기 시작했을 때는 제가 괴짜요, 비관론자요, 어떤 구식 신학을 신앙하는 사람으로 간주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제일차 대전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 낙관론이 크게 만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제 와서는 모든 사상가들이 이런 관념의 오류를 인정하고, 새 책들이 속속 발간되어 19세기에 만연했던, 발전은 불가피하다는 관념을 폭파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것을 언제나 가르쳐 왔고 주님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것을 완전한 형태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씀은 세상의 부패성을 암시함이 분명합니다. 이 말씀은 오염될 경향과 더럽고 도발적으로 될 성향을 암시합니다. 성경이 세상에 대해 말씀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은 타락하고 사악하고 부정합니다. 세상의 성향은 악하여 전쟁을 일삼습니다. 세상은 썩고 오염되기 쉬운 고기와 같습니다. 세상은 방부제나 예방제에 의해서만 건전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죄와 타락의 결과로 인해 이 세상에서의 삶은 대체로 썩어지는 상태에 들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이 견해만이 인간성을 참되고 올바르게 해석하는 견해입니다. 세상에서의 삶이 향상되는 경향이 있다는 소리와는 거리가 멀며 오히려 그 정반대의 경향이 있다 하겠습니다. 세상은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곪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의 몸에는 악한 병균과 세균과 감염 매체와 유기체가 있으며, 이것들을 방지하지 않으면 질병을 일으킵니다. 이것은 분명코 초보적이며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미래에 대한 전망은 이것으로 확정되어야 합니다. 여러분께서 이 점을 마음속에 유의하신다면 20세기 현재까지 어떤 일이 발생되어 왔는가를 매우 분명히 볼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기독교인이든 지금까지 발생해 온 일로 조금도 놀라선 안된다는 말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성경의 이 견해가 옳다면, 세상의 생활과 자연 속에 이 부패 성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세상이 건전하다고 하는 말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이와 같은 실례가 무수히 많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이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 나타나 있음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온전하게 창조하셨지만 죄가 세상에 들어왔기 때문에 이 악하고 오염적인 요소는 즉시 자태를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창세기 6장을 읽어 보십시오. 그러면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란 말씀을 보시게 됩니다. 불결과 오염이 너무 심하여 하나님께서 홍수를 일으키셔야 했습니다. 그 후에 새 출발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악한 원칙은 여전히 그 정체를 나타내었으며, 거의 상상하기 힘든 죄악으로 더럽혀진 소돔, 고모라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이 변함없이 보여주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이렇게 끈덕진 부패 성향은 언제나 그 정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사고와 계획은 이 원칙의 지배를 받아야 하며 미래에 대한 사고나 계획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품고있는 문제는 '우리의 앞에는 무엇이 있는가'입니다. 분명히, 우리가 이 같은 성서의 이치를 우리의 사고의 중심에 놓지 않고 시작한다면 우리의 예언이 잘못될 것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세상은 부정적이고 사악하고 악랄합니다. 세상에 대한 어떤 낙관론도 철저하게 비성서적일 뿐 아니라 역사에 의해서도 거짓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여기서 본문의 제 이국면으로 접어 들어갑니다. 이것은 더한층 중요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접하고 있는 세상과 그 속에 사는 기독교인에 관하여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본문은 기독교인은 소금과 같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너희, 너희만이 소금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너희가 강조되었으므로 너희만이란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첫째로 팔복을 고찰할 때 우리에게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이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절대 분명합니다. 소금은 그것이 접하고 있는 매체와 본질적으로 다르며, 어떤 의미에서 그 매체와 다름으로써 소금의 모든 자질을 발휘하게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하리요? 아무데도 쓸데없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것'입니다. 바로 이 소금의 특성인 짠맛이 어떤 차이점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큰 매체속의 적은 량의 소금은 즉각 눈에 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일 이 사실을 분명히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직 기독교인은 다른 사람들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소금이 함께 버물려진 고기와 다른 것처럼 기독교인은 다릅니다. 이 외적 차이를 거듭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달라야 할 뿐 아니라 이렇게 다른 것을 영광으로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가 사시던 세상과 명백히 다르셨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분리되고, 특이하고, 눈에 띄는 사람입니다. 그의 속에는 그를 다른 사람과 구분하여 분명하고, 명백하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각자 자신을 검토해 봅시다.
여기서 기독교인의 기능을 좀 더 직접 고찰해 보겠습니다. 이 일은 더 어렵고 자주 쟁점이 되고 있습니다. 주께서 첫째로 강조하신 기독교인의 사회에 대한 주요 기능 하나는 순전히 부정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자, 소금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소금은 건강에 유익하며 건강과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소금의 기능을 오해한 견해로 생각됩니다. 소금의 기능은 건강에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부패를 방지하는 것입니다, 소금의 주요 기능은 매체를 보존하는 방부제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고기 한 조각을 예로 들어봅시다. 고기 표면에는 균들이 붙어 있습니다. 이 균들은 짐승으로부터나 대기로부터 온 것이며, 고기를 부패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고기 속에 비벼 넣은 소금의 기능은 부패하기 쉬운 매체를 보존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소금의 주요 기능은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기본 전제임은 확실합니다. 뒤에 가서 보겠지만 우리는 동시에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것이 세상속의 기독교인의 기능일 뿐 아니라, 먼저 이 기능이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결과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특이한 부패 과정을 예방하기로 작정된 세상속의 매체로서 우리들 자신이 이런 방식으로 얼마나 자주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의아스럽게 생각합니다.
소금의 이차적인 기능은 맛을 내는 것, 즉 음식이 맛없는 것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소금의 또 하나의 기능이 분명합니다. 이 면을 고찰해 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러므로 이 진술에 따르면 기독교 없이는 삶이 무미건조한 것입니다. 오늘의 세상이 이것을 증명하지 않습니까? 쾌락광들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사람이 무미건조하고 지겨운 것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러 저러한 쾌락을 향하여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은 삶의 맛 곧 기독교 신앙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이런 쾌락과 재미가 필요 없습니다. 우리의 생활에서 기독교를 떼어버려 보십시오. 우리 삶은 얼마나 무미해지겠습니까? 이것은 특히 사람이 늙거나 임종시에 더욱 그러합니다. 이런 삶은 철저한 정도로 무미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맛의 필요를 느끼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약을 써야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첫째로 기독교인은 무엇보다도 소금으로 작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어떤 방법으로 해야합니까? 여기 본문에서 그 대답을 봅니다. 제가 신약성경의 긍정적 가르침을 우선 여러분에게 제시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한 비판론을 고찰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교회와 기독교인 개개인과를 구별해야 하는데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기독교인은 세상의 일반적 상황, 곧 정치적 경제적 상황과 국제문제와 기타 유사한 문제들에 관한 교회의 선언을 수단으로 해서 소금으로 작용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절대다수는 아니지만, 많은 교회에서는 본문에 대하여 이 같은 해석을 내리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타락하고 전쟁과 국제 정세와 기타 문제들을 논합니다. 기독교인은 세상 형편에 이와같은 논평을 가함으로써 일반적인 방법으로 세상에서 소금의 기능을 다해야 한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제가 보는 바에 의하면 이 견해는 성경을 매우 심각하게 오해한 견해입니다. 저는 이 같은 가르침을 보여주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든 도전하는 바입니다. '아, 하지만 구약의 예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구약시대의 교회는 이스라엘 국가였고 그때에는 교회와 국가 사이에 구별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국가 전체의 생활을 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 교회는 어느 국가나 민족들과 동일시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여러분은 사도 바울이나 그 밖의 다른 사도가 로마제국 정부를 비평하는 것을 볼 수 없으며 그들이 제국 재판소에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는 등의 결의안을 발송한 일을 볼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사실은 신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교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개인적인 의미에서 소금 구실을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기독교인은 그의 개인과 성격을 통하여 그가 접촉하는 모든 영역에서 이렇게 해야 합니다. 점잖지 못한 태도로 함께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예를 들어 봅시다. 그때 갑자기 기독교인 한 사람이 그곳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그의 임재가 그곳에 즉각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가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그곳의 사람들은 그들의 말씨를 조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벌써 소금 구실을 하며 부패와 불결성에 제동을 거는 셈입니다. 기독교인은 그의 생활과 성격과 기타 일반적 품행 때문에, 정체를 드러내는 악을 통제하며 이런 일은 어느 영역, 어느 상황에서나 행하여 집니다. 기독교인은 이것을 가정에서, 그의 일터나 사무실에서, 또는 그가 나타나는 어느 곳에서 사사로운 자격으로서 뿐 아니라, 그가 사는 나라의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과 불신자의 차이가 중요시되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 한쪽 극단에서 다른 편 극단으로 치닫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옳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상태에 개입하는 것은 교회가 임무가 아닙니다. 기독교인은 이런 문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투표를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인은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통제하는 일과는 상관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견해 역시 오류입니다. 기독교인은 한 개인으로서, 국가의 시민으로서 이런 문제들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쉐후츠베리] 백작이나 그와 같은 위인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개개 기독교인으로서 시민으로서 근로법을 제정하는 일에 큰 수고를 했습니다. [윌리엄 윌버훠스]와 그가 노예제도를 폐지한 일과 관련해서 한 일들을 생각해 봅시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한 나라의 시민입니다. 그러므로 시민으로서, 우리의 역할을 하고 이로써 간접적으로 수많은 경우에서 소금 구실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것은 교회가 하는 일과는 매우 다른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묻습니다. '어째서 이렇게 구별을 짓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교회의 기본 임무는 복음을 전하고 설교하는 일입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생각해 봅시다. 즉 만일 오늘의 교회가 시간의 대부분을 공산주의를 비난하는 일에 사용한다면 그 결과는 공산주의자들이 복음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항상 사회의 어떤 특정 북면을 비판하는 것이라면 교회는 그 부면에 대해서 전도의 문을 닫는 것이 됩니다. 이 문제에 대한 신약성경의 견해를 취하면 공산주의자도 다른 사람들과 꼭 같은 모양으로 구원받아야 할 영혼을 갖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온갖 종류 온갖 상태와 계급의 사람들을 복음화하는 것이 복음 전도자로서 교회의 대표로서의 나의 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러한 정치, 사회, 경제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하는 순간 교회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전도의 임무를 방해하고 해치는 셈이 됩니다. 교회가 '아무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한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며, 이렇게 한다면 죄를 짓는 것이 됩니다. 개개인은 한 시민으로서 자기의 역할을 해야 하며 원하는 대로 어느 정당에든 가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이 선택해야 할 문제입니다. 교회 자체로써는 이런 일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복음을 전파하고 이 구원의 메시지를 만인에게 가져다주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공산주의자들이 개심하여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죄와 그 죄의 정체가 드러나는 일에 관심을 가집니다. 죄는 공산주의에서처럼 자본주의자에게서도 가공할 수가 있습니다. 죄는 가난뱅이에게서와 같이 부자에게서도 가공할 수 있습니다. 죄는 그 정체를 모든 계급, 모든 유형, 모든 잡단에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 원칙이 작용하는 또 한 방법은, 교회에서 큰 각성과 개혁이 있을 때마다 전체사회가 그 수익을 거두었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습니다. 위대한 모든 부흥운동의 기록을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키더민스터]에서 [리쳐드 백스터] 휘하에서 일어난 부흥을 봅시다. 교인들이 부흥되었을 뿐 이나라 교회밖의 수많은 사람들이 개심하여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더구나 그곳 사람들의 전체가 영향을 받았고 악과 죄와 비행이 통제를 받았습니다. 이 일은, 이런 비행을 질타하는 교회에 의해서나 정부로 하여금 어떤 법률을 통과시키려고 설득하는 교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기독교 개개인의 영향력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어느 때나 그러했습니다. 이것은 17세기와 18세기에도 같은 모양으로 나타났고 금세기초인 1904-5년에 발생한 부흥에서도 그러했습니다.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이 됨으로써 거의 자동적으로 사회에 영향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과 교회사에서 그 증거를 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개혁과 부흥이 있을 때마다 그 이후에는 사회에까지 이익이 미쳤습니다. 프로테스탄 종교개혁을 보십시오. 전체가 그 영향을 받은 것을 즉각 발견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청교도 개혁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저는 청교도들이 통과시킨 법률을 가리켜 말함이 아니고 그들의 일반적 양태를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유능한 사학자들 대다수가, 18세기 말 프랑스에 있었던 것과 같은 혁명에서 이 나라를 구한 것은 부흥운동 이외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다는데 의견이 일치합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의 직접적 참여에 의한 것이 아니라 대다수 개인들이 기독교인이 되고 전보다 더 훌륭한 기독교인의 삶을 살고 보다 높은 전망을 지녔기 때문이었습니다. 정세 전체가 영향을 받았고, 19세기에 통과된 큰 법률들은 이 나라에 그토록 많은 개개 기독교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현재의 사회상과 세계상은 이 원칙에 대한 완전한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지난 50여 년 동안 교회가 그 이전 수백 년 전부를 합친 것보다 정치와 사회와 경제문제에 대하여 더 직접 주의를 기울였다는 것은 사실일 것 같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의 사회 적응에 관한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실제적 적용에 크게 관심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아무도 이것을 논박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 결과는 우리가 50여 년 전부다 휠씬 더 음란한 사회에서 살고있다는 것이며, 악과 불법과 무법이 판을 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행할 때 성경의 방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행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여러 원칙을 적용함으로써 이 일들을 직접 해내려 애를 쓰더라도 그렇게 할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요 문제거리는 기독교인들이 너무 적다는 것과 기독교인인 우리들이 충분히 소금구실을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공격적인 것을 의마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참된 의미의 기독교인을 말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어떤 방에 들어갈 때 사람들이 즉각 그들의 말씨와 그들의 화제가 우리가 거기 있음으로 해서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통탄스럽게도 이점에서 실패하고 있습니다. 참된 성도만이 그의 영향력을 발산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영향력은 그가 있는 어느 집단에서나 스며들어 있습니다. 문제는 소금이 수많은 경우에서 그 맛을 잃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그래야 하는대로, '성도'가 되지못함으로 우리의 동료들을 통제하고 있지 못한 형편입니다. 교회가 전쟁과 정치와 기타 주요 문제들을 관하여 선언문들을 발표하긴 하지만 일반 시민들은 영향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여러분이 참 기독교인을 고용하고 있고 그가 구원을 받아 성령으로 변화 받은 사람이라면 그는 그 주변에 있는 다른 뭇사람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우리가 이 같은 시대에 세상에서 소금 구실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이 방법뿐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기독교 개개인이 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세포 침투의 원칙입니다. 이것은 그저 소량의 소금만으로 큰 덩어리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소금의 본질 때문에 소금은 어쨌든 모든 것 속으로 스며 들어갑니다. 이것은 이 같은 시대에 우리에 대한 큰 소명이 됩니다. 우리의 삶을 살펴봅시다. 이 세상의 사회를 살펴봅시다. 썩은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각계 계층에 스며있는 부패를 보십시오. 이 가공할 이혼율과 별거를 보시고 삶의 신성함에 대한 이 짓궂은 농담을 보시며, 음주와 좀도둑질의 증가를 보십시오. 여러분들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법률을 통과시킴으로써 이 문제들을 처리할 수 없음은 분명합니다. 신문기사들은 이 문제들에 손을 대는 것 같지 않습니다. 부패와 불결과 악취와 악과 비열을 통제할 개개 기독교인들이 증가하지 않고는 아무 일도 치루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소속한 사회에서 이 부패과정을 통제해야 합니다. 그제야 온 덩어리, 전체가 보존될 것입니다.
원컨대 하나님께서, 우리들 각자가 이 단순한 명제에 비추어 자신을 검토해 볼 수 있는 은혜를 내리시옵소서. 오늘의 사회에 대한 소망은 개개 기독교인들의 수가 증가해야 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이 일에 몰두하여, 그 분야 이외 문제들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게 합시다. 개개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이 소금의 본질이 그의 속에 있음과, 그가 기독교인임으로 해서 사회에 대한 저지와 통제와 방부제가 되어 사회를 말할 수 없는 불결에서 보호하며, 사회가 암흑시대로 화하지 않도록 보존하게 됨을 분명하게 합시다.
감리교 부흥 이전의 런던에서의 삶은 그 당시와 그 이후에 기록된 책에서 볼 수 있듯 음주와 비행과 음란으로 인해 거의 상상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때로 다시 돌아가게 될 위험은 없겠습니까? 전 세대가 눈에 띄게 내리 딛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을 방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여러분과 저와 우리 같은 기독교인들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은혜를 우리에게 내리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속에 은사를 불일 듯 일으키시어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처럼 접촉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