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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욱목사
신약, 누가복음 12 : 13 - 21
“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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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오늘은 교회력으로 마지막 주일입니다. 2004년의 교회력은 오늘로서 끝이 나고 다음 주 첫번째 강림절부터는 내년도 교회력이 시작됩니다. 교회력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모형을 본받았고 , 그 안에는 인생의 과정이 상징적으로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자연의 순환이 함께 고려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마지막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마지막은 더 이상 반복이 없다는 것이고 , 더 이상같은 기회가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나간 과거를 총결산하는 시기입니다. 마지막은 총체적이고 결정적인 심판의 때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먼저 인생을 향하여는 삶의 끝을 앞에 두고 인생의 의미와 죽음의 의미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죽은 이들을 생각해 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을 향하여는 구원의 궁극적인 의미를 확인해 보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확인해 보는 시간입니다. 마지막으로 계절적으로는 마지막 결산을 하는 시기입니다.
짐을 덜 때
이 마지막에서 우리가 받는 교훈은 우리가 짐을 덜 때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가을나무처럼 한 꺼풀씩 거추장스런 옷을 벗어버리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겨울 채비에 들어선 듯 거추장스런 옷을 벗는 풀이나 나무들처럼 우리는 지상에서의 삶에 대해 도무지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집착은 탐욕을 낳고 , 탐욕은 존재의 자유를 훼방하는 무거운 짐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 28-3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우리 육체와 영혼이 사는 길은 짐을 아주 벗어버리는 것이 아니고 , 짐을 가볍게 하는 것입니다. 짐을 아주 안 지는 것은 죽음입니다. 사는 날 동안은 짐을 져야 합니다.
짐을 지는 것이 행복입니다. “사람이 그일 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운”(전 5:18) 일입니다. 수고 중에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져야 할 짐이 없다면 불행입니다. 일하고 싶을 때 일자리가 없으면 얼마나 괴롭습니까? 꼭 필요한 짐은 져야 합니다. 한 가정의가장이 가장의 짐을 안 지면 어떻게 됩니까? 한 사람이자기 인생의 짐이 무겁다고 자신의 짐을 안지면 남이라도 그 짐을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짐을 무겁게 하는데만 노력을 합니다. 짐을 가볍게 하고 지금 가진 것으로 즐거움을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짐을 무겁게지는 것은 삶의 짐이 됩니다. 짐이 무거우면 삶의 즐거움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감당할 만한 짐, 기쁨으로 감당할 짐이 필요합니다.
제자의 길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들의 특징은 짐이 가벼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짐을 가볍게 한다는 것은 버릴 줄을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은 아버지와 배와 그물과 가족과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고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눅 9:3). “옷 두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눅 3:11). 옷 한벌이면 족하다는 말씀입니다. 옷이 한벌 더 있으면 이것이 짐이 됩니다. 예수님은 한걸음 더 나가서 극단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마 5:40)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벌 입고 있는 옷 조차도 미련을 가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마지막 소유 , 최저 필수품 조차에도 미련을 갖지 말고 집착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극단적인 말씀을 하셨습니까?
나무들은 춥고 긴 겨울을 나기 위하여 오히려 한 꺼풀씩 옷을 벗습니다. 추운 겨울을 나려면 더 옷을 입어야 할 텐데 옷을 더 벗어버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것이 나무가 사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제아무리 아름다운 단풍 옷이지만 벗어야만 살 수 있습니다. 아름답다고 벗지 않으면 죽습니다. 나무는 그 잎을 벗어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잎을 벗지 않으면 죽고 , 벗으면 삽니다. 잎을 벗어야 다시 부활할 수 있습니다. 벗는 것은 부활의 준비입니다. 우리 인생의 옷을 벗어야 부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어차피 옷을 벗고 알몸으로 갑니다. 그래서 평소에 옷벗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저녁마다 잠자리에 들면서 옷을 벗습니다. 저녁마다 잠자리에 들면서 옷벗는 것이 육신을 감싸는 옷만이 아니라 마음의 옷들, 집착의 옷들을 벗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짐을 가볍게 하는 연습입니다. 스스로 벗는자는 부활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짐을 버린 사람들은 떠날 줄을 압니다.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모르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떠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음의 짐이 없는 사람은 자유합니다. 자유해야만 참순례의 길을 떠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많이 버릴수록 풍성한 열매가 맺힙니다. 우리가 버리지 않으면 열매가 없습니다.
토마토 모종을 심고 어느 정도 자라고 나면 그 잎을 사정없이 따 버려야 합니다. 왠만한 가지도 잘라내어야 합니다. 농사를 잘 모르는 아이들은 깜작 놀라서 “아빠 ! 지금 뭐하세요? 그렇게 다 따면 토마토 나무 죽어요.” 농부는 아이들에게 설명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열매로 가야 될 영양분이 줄기나 잎으로 가버려서 열매를 맺지 않는단다.” 남아있는 줄기와 잎보다 더 많이 잘려나간 가지를 들고 아이들은 안타까와 했지만, 그렇게 쳐 낸 덕분에 나중에 빨간 토마토가 주렁주렁 달립니다. 잎이 무성하고 줄기가 튼튼하다고 다 열매를 잘 맺는 것은 아닙니다. 열매로 가야 될 영양분이 다른 쪽으로 몰리면 보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열매는 부실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나에게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 과감하게 잘라내야 될 무성한 잎이나 줄기는 없는지. 겉보기에 좋으라고 체면과 허영으로 벌려놓은 일을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최대한 단순하게 몇 가지 일에만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성공의 비결입니다. 더구나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우리는 이 세상의 중요하지 않은 것을 잘라내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2장에 한 부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탐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는 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한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여서 속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나님께서 이 부자를 향하여 하시는 첫번째 말씀이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부자에게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부자는 더 이상 시간이 없습니다. 기회가 없습니다. 마지막입니다.
우리는 마지막이 오기 전에, 기회가 아직 있을 때, 하나님을 향해서 살아야 합니다. 전도서는 끝날 이 오기 전에 미리 죽음을 준비하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시간이 있을 때, 이 시간 속에서 미리 영원을 준비하라고 합니다. 더 이상시간 없을 때는 이미 늦었다는 것입니다. 청년의 때, 아직 시간이 있고 기회가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만사가 때가 있습니다. 할 수 있는 때, 가능성이 있는 때 해야 합니다. 배울 때 배워야 한고 , 찬양할 수 있을 때 찬양하고 , 운동할 수 있을 때 운동해야 합니다. 이것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모든 기회가 사라져 버리고 가능성이 없을 때는 기억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창조주를 기억해야 합니다. 내 인생의 일들이 “하나님의 은총적 경륜” 속에서 이루어 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나리오 속에서 내 인생이 이루어 집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순간 순간의 의미를 배워가는 것입니다.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인생의 의미가 창조주의 뜻 속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인생의 종말이 다 약속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생활의 문제, 고통, 늙음, 죽음 등등도 이와 같이 여유있게 받아 들일 수는 없을까요?
전도서 12장 1절 이하의 상징의 의미를 보면, “집을 지키는 자들”은 “팔”을 의미합니다. 즉 팔의 힘이 약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힘 있는 자들”은 “다리”를 의미합니다. 즉 다리의 힘이 약해질 것이며, 몸을 방어하지 못하고 , 척추가 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맷돌질 하는 자들”은 이빨을 의미합니다. 이가 자꾸 빠져서 결국에는 하나도 남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창들”은 “눈”을 의미합니다. 시력이 어두워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좋은 경치도 사람도 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길거리 문들”은 “귀”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귀가 어두워서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한다는 뜻, 좋은 소리도 들을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맷돌소리”는 사람이 늙으면 가늘고 날카롭고 높아지는 목소리를 의미하거나 이가 없기 때문에 음식 씹는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라는 말은 잠을 곤히 자지 못하고 일찍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음악하는 여자들”은 “노래”를 가리키는데, 늙으면 노래가 그치게 되고 또는 귀가 어두워서 노래를 듣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높은 곳을 두려워 할 것이며”는 두려움이 많기 때문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는 머리털이 희어진다는 말입니다.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라는 말은 젊은 시절처럼 활발하게 움직이지 못하며, 옷도 가벼운 옷을 입어야 됩니다. 몸에 무엇을 걸쳐도 무겁게 느껴집니다.
“정욕이 그치리니”는 육체적 정신적 욕구를 잃어 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집”은 “무덤”을 말합니다.
여러 가지 상징으로 명맥이 끊어지고 목숨이 다하여 시체가 무덤 속에 들어가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죽는 것이 허무하게 죽습니다. 여러분, 머리 속에 그림을 한번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금 등잔을 맨 은줄이 끊어져서 금 등잔이 아래로 떨어져 깨집니다. 또한 물이 가득 찬 항아리를 우물에서 끌어 올릴 때, 도르래가 떨어져서 항아리가 여지없이 깨집니다. 전도자는 생명이 끊어지는 것을 비유로 묘사합니다. 사람의 생명은 금으로 만든 등잔처럼 귀중한 것이지만, 반면에 항아리처럼 깨어지기 쉬운 것입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고 궁극적이라는 사실 앞에 전도자는 항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사람의 본질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세상적 기원이고 (흙), 다른 하나는 신적 기원(신 , 영)입니다.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법칙입니다.
여러분 피라미드를 보십시오.
죽은 미이라를 그 큰 돌 무더기 안에 넣어 두어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저의 가족이 피라미드 안을 관광한 적이 있습니다. 피라미드 안의 좁은 미로를 땀을 흘리면서 머리도 못들고 30분을 들어 갔습니다. 가장 안 쪽의 방에 돌로 된 석곽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 석곽은 물론 비어있었습니다. 피라미드 속을 본 경험도 허무하지만, 그것을 보려고 들어갔던 우리의 노력도 허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대한 탐닉과 집착이 있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벌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을 짓고 우상화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 성전을 부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솔로몬 왕국을 강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방 왕권처럼 왕 개인의 절대적 권력이 되자 하나님은 그 권력을 심판하셨습니다.
기독교가 사회에서 지배 이념이 될 때, 하나님은 그 종교를 심판하십니다. 교회가 사회의중심부에서 권력자의 자리에 설 때, 하나님은 그 교회의 권력을 심판하십니다. 인간들은 무엇인가를 가졌다 하면 문제가 시작됩니다.
수도자 부부
한 쌍의 부부가 남다른 각오로 세속의 생활을 접고 간절한 염원을 품고 성지로 순례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길을 가는 도중에 앞서 걷던 남편은 우연히 아름다운 다이아몬드가 땅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그는 자기 아내가 보면 욕심이 생길 거라는 생각이 들어 다이아몬드를 얼른 땅 속에 묻으려 했습니다. 그 때 아내가 쫓아와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남편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얼버무렸습니다.
하지만 눈치 빠른 아내는 미쳐 땅에 묻히지 못한 채 번쩍이는 다이아몬드를 보고 남편의 속내를 다 꿰뚫고 있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다이아몬드와 먼지를 구별한다면 왜 속세를 버리셨죠 ?”
이 이야기는 인간이 물질의 속박을 벗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말해줍니다. 자발적으로 속세를 버리고 영적 순례를 떠난 사람이라면 더 이상 다이아몬드와 먼지를 분별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분별이 남아 있는 것은 물질에 대한 애착이 아직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물질에 대한 애착을 넘어선 이에게는 다이아몬드도 먼지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속세에 몸 붙여 살면서 다이아몬드를 먼지로 볼 수 있는 시력(視力)을 어떻게 지닐 수 있습니까? 물욕에 눈먼 자가 어떻게 그것이 덧없는 것임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을 뜰 수 있을까요? 정말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을 생각하면 눈이 떠집니다. 여러분 임종의 자리에서는 진리가 보입니다. 죽음 앞에서 보석과 먼지는 구별이 없습니다.
우리는 집착을 버리고 우리에게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우리에게 아직 시간이 있을 때, 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것에 대한 감사와 누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집착과는 다릅니다. 누림입니다. 감사입니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전 9:9). 즉 현재의 관계 속에서 기쁨을 누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더 좋은 친구를 만들면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까? 우리는 더 많이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더 좋은 사람, 더 행복한 사람, 더 진실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까? 우리 인생이 끝나기 전에 무엇을 기억해야 합니까?
인생의 끝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생의 허무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