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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이 다윗을 시기함
(사무엘상 18:1~9)
* 본문요약
요나단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다윗과 의형제를 맺고 자기의 겉옷과 군복과 칼과 활과 허리띠를 줍니다. 이후로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의 영혼을 사랑하듯 아끼는 자가 됩니다. 다윗은 사울이 명하는 일을 지혜롭게 잘 해내어 사울의 군대의 장이 됩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고 올 때 이스라엘의 여인들이 온 성읍에서 나와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은 자는 만만이로다”하고 노래합니다. 이 노래를 듣고 사울이 크게 노하여 다윗을 시기하고 의심하여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찬 양 : 276장 (새 510) 하나님의 진리 등대
492장 (새 435) 나의 영원하신 기업
* 본문해설
1.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1~4절)
1)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자,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요나단이
다윗에게 마음이 끌려),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의 생명처럼 사랑하게 됐습니다(자기 목숨을 아끼듯 다윗을 아끼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2) 그 날부터 사울은 다윗을 계속 자기 곁에 머무르게 하고,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기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3)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였으므로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의형제를 맺었으며)
4) 요나단은 자기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서 다윗에게 주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허리띠까지 주었습니다.
-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과 하나가 되어(1절) :
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이 사랑의 마음을 동성애적인 관점으로 이해합니다만, 이것은 본문을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1절과 3절의 사랑은 ‘우정’으로 해석할 수 있는 단어이고, 3절에서 ‘생명같이 사랑했다’는 것은 자기의 영혼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했다는 뜻입니다.
-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기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2절) :
다윗이 사울 곁에서 수금을 연주할 때에는 사울이 상쾌하진 후에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도록 했으나, 이제 다윗이 싸움을 잘하는 용맹한 자임을 알게 된 후에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고, 자기 곁에서 군대를 지휘하는 장군이 되게 한 것.
2. 다윗이 사울의 군대의 장이 됨(5절)
5) 다윗은 사울이 어떤 임무를 주어서 보내든지 맡은 일을 지혜롭게 잘 해냈으므로,
사울이 다윗을 자기 군대의 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러자 온 백성은 물론 사울의 신하들까지도 그 일을 마땅한 일로 여겼습니다.
3. 사울이 다윗을 시기함(6~9절)
6)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고 승리한 이스라엘 군과 함께 돌아올 때에, 이스라엘의 모든
성읍에서 여인들이 나와 소고와 경쇠를 갖고 나와 노래하고 춤추며 사울 왕을 맞았습니다.
7) 여인들이 춤을 추며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사울이 죽인 자는 수천 명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수만 명이로다)”
8) 사울이 그 말을 듣고 몹시 불쾌하여 크게 화를 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다윗에게는 수만 명을 죽인 공을 돌리고 나에게는 고작 수천 명을 죽인 공밖에 돌리지 않으니) 이제 그가 더 얻을 것이 이 나라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9) 그날 이후로 사울은 다윗을 주목하였습니다(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의심하기 시작했
습니다).
-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7절) :
사울에게는 천천이요 다윗에게는 만만을 표현했다고 해서 여인들이 다윗만을 더 추앙한 표현이 아닙니다. 사울과 다윗의 이 이행시(二行詩)는 사울과 다윗의 두 영웅이 수많은 자들을 죽였다는 정도의 의미로 너그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 묵상 point
1. 다윗을 자기의 생명처럼 사랑하는 요나단
다윗이 사울과의 말을 마치자 요나단이 다윗을 따뜻하게 맞이합니다. 이전에 자기의 무기 든 소년과 단 둘이서 블레셋을 공격했던 요나단은, 거인 골리앗을 작은 조약돌 하나로 죽인 다윗을 보고 자기와 같은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신앙이 없는 시대, 하나님의 말씀이 무시되는 그 시대에 이런 자를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입니다. 요나단은 이런 다윗의 경건함과 용기에 감동하여 다윗과 의형제의 언약을 맺습니다.
본문에서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사랑을 ‘자기의 생명처럼 사랑했다’하고 표현하니, 많은 사람들이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을 동성애적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1절과 3절의 사랑은 ‘우정’으로 해석할 수 있는 단어이고, 또한 3절에서 ‘생명같이 사랑했다’는 것은 자기의 영혼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했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동성애자들처럼 서로의 육체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는 시대에 신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끼리 진정한 성도의 교제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과 요나단과 같은 사랑의 모습을 사도행전 2장과 4장의 성도의 교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여 올라가신 후 10일째 되던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충만함을 받은 120명의 성도들에게서 복음을 들은 자들에게 같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도 자기의 것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서로 필요한 자에게 물건을 나누어주는 가족보다도 더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이처럼 요나단도 자기의 모든 것을 다윗에게 주며, 자기의 영혼을 사랑하듯 그렇게 다윗을 사랑한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서로의 영혼을 사랑하는 거룩한 성도의 교제를 나눈 것입니다. 험난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서로 용기를 주고, 격려하면서 자기의 것을 상대에게 아낌없이 주는 그런 사랑, 그런 우정입니다.
● 묵상 :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아무런 조건 없이 그저 상대가 잘 되기만을 바라는 사랑, 영혼을 사랑하며 진정으로 상대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바라는 이런 사랑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을 불경스러운 것으로 오해합니다. 이런 사랑은 오직 성령의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향한 성도들의 무기는 돈이나 권세가 아니라 바로 이런 사랑입니다. 세상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거룩하고 신실한 사랑, 이 사랑으로 무장할 때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피차에 성령 충만한 자가 되어 다윗과 요나단같이, 사도행전의 그 거룩한 성도의 교제와 같이 신령한 친교를 나누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사울의 군대의 장이 된 다윗
바로 그날부터 사울은 다윗을 자기 곁에 있게 하고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다윗은 자기 군대의 장으로 임명합니다. 집에서 양이나 치던 목동이 하루아침에 군대의 최고 사령관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겨우 군대의 장군이나 되게 하려고 골리앗과 싸우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다윗에게 어려움과 고난이 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세우시기 위해 골리앗과 싸우게 하신 것입니다.
● 묵상 :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닙니다. 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유업으로 얻도록 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일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기 위해 앞으로 우리도 다윗처럼 어려운 일도 당하고 고난이나 시련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이기는 자에게는 영생의 복이 있습니다.
3. 다윗을 시기하는 사울
1) 전쟁마다 승리하는 다윗을 기뻐하는 백성들
사울의 군대의 장이 된 다윗은 사울이 시키는 것을 지혜롭게 잘 하였습니다. 지혜롭게 잘 하였다는 것은, 다윗이 나가는 전투마다 큰 성과를 거두었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전투를 할 때마다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고 승리하고 돌아오자, 이스라엘의 모든 성읍에서 여인들이 나와 소고와 경쇠(삼현금)를 치며 춤추며 노래하면서 기뻐합니다.
이 때 여인들은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하고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여인들이 춤추며 노래한 가사가 사울을 화나게 만들었습니다. 사울에게는 천천만 돌리고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린 것에 화를 낸 것입니다.
2) 여인들의 노래는 사울과 다윗의 두 영웅을 모두 칭송한 것
그러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하고 표현했다고 해서 여인들이 다윗만을 더 추앙한 표현이 아닙니다. 사울과 다윗의 이 이행시(二行詩)는 사울과 다윗의 두 영웅이 수많은 자들을 죽였다는 정도의 의미로 너그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여기에서 ‘천’이나 ‘만’은 수(數)를 비교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그냥 흥에 겨운 표현에 불과한 것입니다. 더구나 다윗이 블레셋을 이기고 이스라엘 군사들과 함께 돌아올 때 그들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 백성들이 환영하며 맞은 사람은 다윗이 아니라 사울이었습니다(6절).
그러므로 사울이 단 몇 분만 마음을 진정하고 다윗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품었다면, 모두가 다 기쁜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만일 사울이 이 노래를 듣고 자기도 기뻐하며 다윗을 축하해주었다면 그 모든 영광이 사울에게로 갔을 것입니다. 만일 그랬더라면 사울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도 있었습니다. 만일 그랬더라면 왕의 자리를 어떨지 몰라도 최소한 지옥의 형벌은 면하는 자는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3) 그러나 ‘천천’과 ‘만만’이라는 숫자에만 마음을 빼앗긴 사울
그러나 사울은 백성들이 자기에게는 천천으로 표현했다는 것에만 마음이 꽂혀서 그 저주의 질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왜곡되게 보는 사울의 비뚤어진 마음은 이 작은 일조차도 격정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하는 것이 됩니다. 사울은 그냥 웃어 넘길만한 일을 엄청난 분노와 증오의 일로 만들어버립니다.
4) 오직 혼자서만 화를 내고 있는 사울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다 춤추며 기뻐하는데 오직 사울 한 사람만 불쾌해하며 심히 진노하였습니다. 마치 예수께서 사람들의 병을 고치시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처럼 사울은 오직 혼자서 다윗의 신실한 모습을 보고 분노합니다.
● 묵상 : 지극히 작은 일에 마음을 빼앗긴 사울
만일 사울이 지금 지옥에서 이때의 일을 추억한다면, 자신이 정말 작은 일에 이토록 진노한 이때의 상황을 어떻게 추억할까요? 그때 화를 내며 다윗을 증오했던 일들이 지금 지옥에 있는 이 순간에도 여전히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이라 여길까요? 그러나 질투와 시기심에 사로잡히면 사울이 스스로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듯 그렇게 자신을 파괴하는 자가 되고 맙니다. 그것이 다윗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이는 일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부나비처럼 그렇게 스스로 자신을 파멸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4. 축복이나 저주는 모두 자기 삶의 결과이다
성경에서 선지자들이 축복이나 심판을 선언할 때, 이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변할 수 없는 최종적인 심판을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가 그 선언을 할 때의 그 사람의 영적인 상황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만일 누구에게 심판을 선언했다면 그때의 그의 삶이 심판을 받을 만한 삶이니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이고, 만일 축복을 선언했다면 그때의 그의 삶이 복 있는 삶이니 그 삶에서 변하지 말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잘 섬기라는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이 멸망을 당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다는 경고의 말씀을 두 번이나 듣고도 그 경고의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천박한 삶에 계속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도 선지자와 어린 사무엘로부터 심판의 선언을 들었으나 단 한 번도 하나님께 회개를 하지 않았으므로 망했고, 가인 역시 하나님께서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을 때 회개하지 않고 변명하여 망한 것처럼, 사울 역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교만과 탐욕의 삶에 계속 머물러 있었기에 망한 것입니다.
● 묵상 :
다윗이 복 있는 자가 된 것은 어느 한두 가지 일로 행운을 잡은 것이 아닙니다. 그가 계속 되는 어려움 속에서도 변함없는 건강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자가 되게 해 주실 것을 구하고 또 구하십시오. 기적은 삶의 결과입니다.
* 기도제목
1. 순간순간의 일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영원한 것을 볼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2. 축복이든 저주이든 삶의 결과라는 것을 기억하고 영이 건강한 신실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