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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위 유치환(柳致環)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 비정(非情)의 함묵(緘黙)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시어, 시구 풀이] 애련(愛憐) : 가엾이 여겨 정을 베풂 억 년 비정(億年非情) : 영원히 감정이 없음, 영원히 인정이 없음 함묵(緘黙) :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킴, 침묵 원뢰(遠雷) : 멀리서 울리는 우렛소리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 내가 죽어서 다시 환생한다면 무엇보다도 나는 바위가 되련다. 시의 발상을 일으킨 대목이다. 가상적으로 ‘나는 - 바위가 되련다’가 아니라, ‘내 몸이 변신할 수 있다면, 나는 바위가 되어 자아를 구원하겠다’는 속뜻을 지닌 말이다. 따라서 ‘바위’는 의지의 응결체로서, 바위는 무엇보다도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강인함을 표상하고 있다.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 ‘절대로 슬프다거나 가엾어 하거나 하는 감정에 빠지지 아니하고’ 또는 ‘기쁨이나 노여움 등의 감정에도 움직이지 아니하고’의 뜻 2행이 병렬되어 제 5행의 ‘비정(非情)’이 어떤 세계인가를 구체적으로 해설하고 있는 대목이다. ‘애련’과 ‘희로’는 모두 인간적인 나약한 감정을 함축하는 것들인데, 이를 모두 거부하겠다는 것이다.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 머언 원뢰(遠雷) : ‘오직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자연의 섭리에 좇아 오래고도 오랜 냉정심을 굳게 지니는 영원한 침묵만으로 내심(內心)을 안으로 안으로만 억눌러서, 드디어 내 생명이 갖고 있는 모든 애정과 집착을 초극하여 초월해 버리고, 흐르는 구름 따라 먼 원뢰 소리만 울리게 하고’의 뜻. 바위의 세계, 의지의 세계가 어떤 내용인가를 구체적으로 서술한 곳이다. 여기서 ‘구름’과 ‘원뢰’는 바위의 경지에 도달한 시인에게 주어지는 ‘외부적 자극’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핵심이 되는 구절이 ‘비정(非情)의 함묵(緘黙)’인데, 일체의 감정이 개입하지 않은 침묵으로서, 이는 생명도 인간도 태어나기 이전의 원시적 침묵의 세계를 뜻하고 있다. 희로애락의 온갖 감정을 청산하여 원시적 침묵에 살겠다는 것이다. ‘흐르는 구름 / 머언 원뢰(遠雷)’는 지극히 짧은 표현이지만, 짧은 그것을 다시 2행으로 나누어 배치함으로써 시적 긴장을 일단 완화시켜 주고, 자연 섭리만이 지배하는 원초적 세계를 간결하게 보여 준다. 즉 생략과 긴축을 겸한 고도의 기교적 표현을 하고 있으며, 초월적인 달관의 경지를 동양화적인 기법으로 간결하게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 어떤 이상을 가진다 하더라도 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 파멸이 온다 하더라도 비명을 지르거나 불평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는 뜻. 시의 결구로서 꿈이나 파멸도 초극한 바위가 되겠다는 의지를 다시 다짐하고 있다. [핵심 정리] 지은이 : 유치환(柳致環, 1908-1967) 시인. 호는 청마(靑馬). 경남 충무 출생. 생명에의 열애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동양적인 허무의 세계를 추구했고, 또 이러한 허무의 세계를 극복하려는 원시적인 의지도 엿보이는 시 경향을 보였다. 서정주와 더불어 ‘생명파’ 시인으로 불려진다. 대표작으로 ‘깃발’, ‘바위’, ‘생명의 서’, ‘일월’ 등이 있고, 시집으로는 <청마시초>(1939), <생명의 서(書)>(1947), <울릉도>(1948) 등이 있다.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상징적, 의지적 어조 : 단호하고 강렬한 남성적 어조 구성 : 1행 화자의 의지 표명 2-3행 바위의 특성 4-9행 인생의 희로애락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침묵에의 의지 10-끝 비정의 처절한 의지 제재 : 바위 주제 : 현실 초극(超克)의 의지 출전 : <생명의 서(書)> ▶ 작품 해설 이 시는 현실적인 삶의 평안이나 아스라한 꿈을 추구하며 살기보다는 그러한 것을 모두 초극하여 ‘생명도 망각’하고 ‘비정(非情)의 함묵(緘黙)’ 속에 살아 갈 것임을 노래하고 있다. 시가 인간의 아름다운 성정을 노래하는 것이라는 관점에 길들어 온 독자라면 이 시의 강렬함이 낯설게 느껴지기 쉬울 것이다. 관념적인 시어와 ‘흐르는 구름/머언 원뢰(遠雷)’와 같은 구체적 표현을 효과적으로 배치하여 시적 긴장감을 획득하고 있음에 유의하며 읽어야 할 것이다.
의지의 시인이라 불리는 유치환의 특성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는 선언에 이어 표현된 ‘바위’의 바위다운 속성은 사물 그 자체로서의 의미보다는 화자 자신이 견지하고 있는 어떤 의지적 태도를 표상한다. ‘애련’, ‘희로’ 같은 감정이나 ‘비와 바람’으로 표상된 가혹한 시련 속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초탈의 경지를 나타내는 것이 ‘바위’라고 하겠다.
그는 그 시련을 안으로 다스리며 자신을 채찍질하여 더욱 더 의지적인 인간이 될 것을 다짐하고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생명체’가 지닌 모든 약점을 초극하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흐르는 들려오는 한낱 소리에 불과할 뿐 화자의 마음은 바위처럼 동요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바위를 소재로 하여 절대적인 초월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결의를 노래한 작품으로, 그 의지에 걸맞게 단호하고 강인한 남성적 어조가 인상적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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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구한시 올려 주셔서
저의 불방에 모셔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