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통 유학과 도참설의 한판 대결 6
군신 간에 위계질서가 깨진다니 협박하는 것이냐?
"동향이라 함은 천부당만부당 한 말씀이라 아뢰옵니다.
예로부터(중국을 칭함) 황제는 남면(南面)하여 신하의 알현을 받고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 불변의 원칙입니다.
인왕을 주산으로 하여 궁궐을 동향으로 한다면 제왕과 신하의 질서를 이룰 수 없습니다. 군신(君臣)간의 위계질서가 깨지면 태평성대를 이룰 수 없사옵니다."
정도전의 신념은 단호했다.
군신간의 위계질서가 깨지면 태평성대를 이룰 수 없다는 정도전의 말이 이성계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총애하는 정도전이 아니라면 협박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500여 년을 면면히 이어오던 고려왕조가 망하게 된 원인을 굳이 찾자면 군신간의 신뢰와 위계질서가 깨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성계였다.
당시 조선인의 세계는 중국이었고 명나라가 곧 세계였다.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었다. 오늘날로 표현하면 선진국이었다.
모든 문물과 제도가 그랬다. 정도전의 생각은 세계의 선진국 중국을 따르자는 것이다. 대륙의 새로운 지배자로 떠오른 주원장이 앉아있는 금릉의 궁전이 남향이고 대륙의 역대 왕조가 도읍지로 정한 낙양과 연경의 궁궐이 모두 남향이라는 뜻이다.
"말씀드리기 황공하오나 백악을 주산으로 새로운 도읍지를 정하면 종묘사직이 200년을 넘기지 못할까 염려되옵니다."
이것은 또 웬 날벼락인가?
새로운 왕조를 세세손손 이어가려는데 200년을 버티지 못한다니 이런 망발이 있단 말인가?
왕사가 아니라면 괘씸죄로 다스리고 싶었다.
하지만 무학대사의 혜안은 기막힌 예지력이다. 이로부터 딱 200년 후 1592년 조일전쟁(임진왜란)이 터져 조국의 명운이 백척간두에 걸렸다.
"백악은 백골(白骨)을 의미합니다. 황토현(黃土峴-지금의 광화문 사거리)에서 백악산을 바라보면 산 모양이 비틀어져 있어 왕위 계승이 장자를 비켜갈까 염려스럽고 흰 바위가 (白岩) 튀어나와 골육상쟁(骨肉相爭)이 있을까 두렵사옵니다."
자초 무학대사의 귀신같은 통찰력이다.
백악산 아래 경복궁을 짓고 새 왕국을 건설한 조선왕조가 1910년 패망할 때까지 26명의 임금이 등극하였지만 장자계승은 단 일곱 명뿐, 전체의 26%에 불과하다. 그만큼 뭔가가 뒤틀렸다는 것을 방증한다.
비틀어진 백악,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무학대사는 이성계의 자문에 응하기 위하여 인왕산과 삼각산을 수차례 올랐고 목멱산에 올라 백악산을 정면으로 관찰했었다.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백악산을 보았을 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비극을 잉태한 핏빛 직감이었다.
흙 냄새 맡으며 토굴에서 면벽수행한 동물적인 감각이었다.
백악을 주산으로 하였을 때 권좌를 놓고 형제와 숙질이 피를 흘릴 것만 같았다. 예방은 인왕이라고 확신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백악은 아니라고 말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뿐만 아니다. 왕십리와 답십리 그리고 장한평과 마들평을 답사하여 도읍지 백성들의 식량문제도 점검했었다.
이성계는 머리가 무거워졌다. 정도전은 군신간의 파멸을 거론하고 무학대사는 환란과 골육상쟁을 들고 나오니 모두가 경중을 가리기 어려운 난제였다. 그렇지만 천도 문제는 지체할 수 없었다.
"백악을 주산으로 하고 타락산을 좌청룡, 인왕산을 우백호 삼아 궁궐을 남향으로 앉혔을 때 백악산과 인왕산 사이(현재의 자하문고개)에 바람이 거셀 것 같은데 서운관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성계도 반(半)풍수다.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장수는 반 풍수쟁이다. 수많은 장졸들의 생명을 지키며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공격과 방어로 전투에 승리하려면 풍수지리에 통달해야 한다. 수양제의 30만 대군을 무찌른 고구려 을지문덕장군
의 살수대첩(薩水大捷)이 대표적인 예다.
"협곡에 칼바람이 불어올 것 같습니다."
바람은 중국 바람이다. 통일전쟁을 벌이고 있는 대륙이 안정되면 거센 바람이 불어올 것이라는 것은 예고된 수순이다.
하지만 서운관원은 칼바람의 무게를 계량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 개경에 눌러있고 싶어 하는 기득권 세력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삼각산은 백두산에 맞닿아 있다. 백두산에서 발원한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오던 국토의 등허리가 추가령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단숨에 내달리다 황해바다를 관망하는 곳이 삼각산이다. 삼각산이 품고 있는 곳이 백악산이다.
삼각산을 그윽이 바라보며 호흡을 가다듬은 정도전이 말문을 열었다.
고구려는 요동벌판에서 말 달리며 대륙을 호령했습니다
"대사께서 왜국을 견제하자고 하시었는데 왜놈들이란 우리가 약해졌을 때 날뛰고 우리가 강해졌을 때 스스로 머리를 조아리는 경박스럽고 야만스러운 종족입니다.
왜국은 우리의 적수가 아닙니다. 우리가 나아갈 길은 북녘 땅입니다. 광활한 북녘 땅은 우리의 영토입니다. 고구려는 요동벌판에서 말 달리며 대륙을 호령했습니다."
잔서(殘暑)가 기승을 부리는 8월의 오후, 따가운 폭염 아래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삼각산을 타고 내려오던 바람이 백악산 위에서 한 바탕 회오리 치더니만 가슴을 파고든다.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이다. 상쾌하다. 꽉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정도전의 입에서 요동과 고구려가 튀어나오자 대세는 기울기 시작했다. 일본을 견제하자는 무학대사의 주장이 갑자기 작아 보이기 시작했다.
논리정연하게 거침없이 말을 쏟아내는 정도전의 얼굴도 홍조를 띠었지만 잠자코 듣고 있던 이성계와 무학대사 역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백악산을 바라보며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정도전이 말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