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통신 39> 모슬포의 슬픈 과거 (하)
문 창 재
^정신병으로 천명을 살지 못 한 사람만이 군대에서 배가 고팠던 건 아니다. 전시에는 말할 것도 없고, 10년 20년 후에 병영생활을 한 사람들 뇌리에도 그것은 똑같이 박힌 공통의 경험이다. 군대가 아니어도 그렇다. 하숙집 아주머니만 보아도 배가 고팠던 경험을 가진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도망치듯 쫓겨 간 급조훈련소 사정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 아닌가.
^날씨 탓으로 뱃길이 막히는 것만이 급식난의 원인은 아니었다. 군량의 절대량이 부족했다. 초기에는 하루 500명 정도가 입소하고 그만한 인원이 훈련을 마치고 전선으로 떠나갔다. 그러나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입소 장병수가 하루 2,000명으론 늘었지만, 식량 조달은 수요를 따르지 못 하였다. 정부와 육군본부에 하소연해도 개선되지 않았다.
^훈련소장 이응준 장군은 궁리 끝에 자급자족의 길을 찾았다. 훈련소 주변 땅을 활용해 호박농사를 시작한 것이다. 구덩이를 파고 씨를 뿌린 뒤 인분거름을 주는 간단한 영농법이어서 손쉽게 많은 호박을 거두었다. 그것으로 죽을 쑤어 장병들을 먹였다. 죽이라도 배불리 먹은 훈련병들 얼굴에 웃음기가 살아났다.
^입성과 신발 사정도 비슷했다. 훈련복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아 초기 훈련병들에게는 미군작업복이 지급되었다. 몸에 맞을 리가 없었다. 서로 사이즈를 바꾸어 보아도 체격이 작은 사람은 바지단과 소매를 걷어 입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나마 여벌이 없어 곧 해어졌다. 기워 입는 재주를 가진 사람도 있었지만, 대개는 헐렁한 누더기를 그대로 걸치고 살았다.
^신발도 마찬가지였다. 큰 신발에 헝겊조각을 뭉쳐 넣고 신었다. 출소할 때는 군화가 지급되었지만 발 사이즈에 맞는 것이 얻어걸리는 행운을 바랄 수는 없었다.
^그런 포로행색이었지만 건빵이 나오는 날은 즐거웠다. 먹을 것이라는 게 사람의 기분을 그렇게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모두가 실감하였다. 건빵 봉지 속에 별사탕이 들어가기 시작한 뒤로는 한층 즐거움이 커졌다. 단 것을 요구하는 인체생리에 착안한 백선엽 참모총장 아이디어였다.
^물 부족으로 인한 고통은 제1훈련소 출신 모두가 겪은 일이다. 화산섬 제주에는 내도 강도 없어 물 구경이 어렵다. 심할 때는 일주일씩 세수를 못 하였다. 그러다가 한바탕 소나기가 내리는 날은 웅덩이 물과 도랑물에 몸을 씻었다. 태풍이나 폭풍우 철이면 묵은 빨래도 하고 벼락치기 목욕도 가능하였다.
^훈련병들을 괴롭히는 또 하나의 적은 전염병이었다. 먹는 게 부실하고 위생이 불결해 식중독 사고가 많았다. 영양실조가 심한 사람들이 주로 피해를 입었다. 장질부사 이질 같은 돌림병에 걸려 병원에 실려 갔다가 돌아오지 못 하는 사람도 많았다.
^배고프고 고달프고 불편해도 모여서 노는 일은 언제나 신나는 법. 특히 상품과 상금이 두둑이 걸린 체육대회나 영내오락회 같은 행사 입상자는 생일을 만난 기분이었다. 모두가 골고루 즐거운 시간은 역시 위문공연 날이었다. 좋아하는 가수가 사회에서 즐겨 부르던 노래를 부를 때면 다들 몸통이 들썩거렸다.
^제1훈련소는 뒷날 유행가 명곡이 된 ‘삼다도 소식’의 산실이었다. 당시 국방부 정훈국 직속 문예중대 2중대장이었던 작곡가 박시춘 선생이 제1훈련소 군예대장이 되어 제주도에 머물 때, 작사가 유 호 선생도 군예대 소속이었다. 1947년 럭키레코드사를 운영하던 박시춘이 문예부장 유 호의 가사에 곡을 붙여 크게 히트한 ‘신라의 달밤’ 이래, 두 사람은 늘 붙어 다니는 사이였다. 서울중앙방송국(지금의 KBS) 편성과 직원 신분으로 극본을 쓰다가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가 되어, 박시춘 경음악단과 인연을 맺은 것이 단짝의 출발이었다.
^“제주도 온 기념으로 노래 한 곡 떨어뜨리고 가자.” 박시춘의 제안을 유 호가 흔쾌히 받아들여 탄생한 것이 ‘삼다도 소식’이다, 당시의 국민가수 황금심이 불렀으니 히트는 물어볼 것도 없는 일이었다. ‘제주도 넓은 벌에 바람소리 굳세이니’로 시작되는 제1훈련소 노래는 군 당국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모슬포는 육군과만 인연을 맺은 것이 아니다. 해병대 공군과도 깊은 인연이 있으니 3군과 두루 관계를 맺은 땅이다. 특히 해병대에게는 제주도가 제2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1949년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350명의 병력으로 출발한 해병대는 그해 12월 본부를 모슬포로 옮겼다. 해병3,4기생이 전원 제주도 출신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들은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해 수도 서울 탈환에 큰 공을 세웠다.
^공군과도 연이 있다면 놀라는 사람이 많다.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27일 모슬포에 공군기지대가 창설된 것을 계기로, 공군사관학교도 잠시 이곳에 둥지 틀었었다. 1·4 후퇴로 전 국토가 언제 6·25 초기처럼 급박하게 될지 모를 상황이 되자, 국방부는 안전한 모슬포로 사관학교를 옮겼다. 1951년 1월이었다.
^국방부는 비교적 교지가 넓고 교사가 좋은 대정국민학교를 징발, 공군사관학교를 이전하도록 조치했다. 이곳에서 사관학교 과정을 수료한 사람은 1,073명이었다. 정규과정을 크게 생략한 임시양성 방침에 따른 조치였다. 육군이 다급할 때 3주 교육으로 신병을 양성한 것처럼.
^공군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87년 대정초등학교 교정에 공사 훈적비를 세웠고, 95년에는 대정초등학교와 결연을 맺고 장학금을 주어 보라매 후보를 양성하고 있다.
^모슬포가 3군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일제의 중요 군사시설이 이곳에 집중되었던 탓이다. 일제 군부는 중일전쟁 때 중국 본토폭격 임무를 수행한 전투기의 귀착지로 모슬포를 이용하였다. 당시의 전투기는 항속거리가 짧아 나가사키 현 오무라(大村) 비행장을 출발한 폭격기는 이곳에서 급유를 받지 않고는 기지로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경위로 생겨난 것이 모슬포 알뜨르 비행장이었다. 광활한 농지를 수용당하고 기지건설에 강제 동원된 현지주민의 피해는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비행장 안에 만든 전투기 격납고 20개는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슬픈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처음에는 중간 경유지로 건설한 비행장이었지만, 작전상의 효율성을 이유로 중일전쟁 중 아예 오무라 비행대 일부가 모슬포로 옮겨왔다. 알뜨르 비행장 인근에 ‘대촌(大村)부락’이라는 마을이 생긴 경위다. 지금은 대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중요한 군사기지를 방어하기 위하여 일제는 모슬포 일대를 요새로 만들었다. 전쟁 말기 미군이 상륙할 것에 대비한다고 남쪽 해안에 있는 섯알 오름 꼭대기에 대공포 기지를 만들고, 오름 중턱에 길이 1,200m가 넘는 동굴진지를 팠다. 탄약고 지하벙커 같은 시설을 만드는 작업에 거의 전 도민이 동원되었다.
^보통학교만 나오면 남자는 전원이 징용대상이었다. 암반을 뚫어 갱도를 만들고, 자갈을 부수어 콘크리트 자재를 생산하고 운반하는 일이 모두 도민들 몫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시설물이 6·25 전쟁 중 예비검속에 걸린 무고한 도민들을 처형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도내 피검속자 일부인 252명을 이곳 탄약고 구덩이에 줄 세워 총살한 것이다. 내가 죽을 묘혈을 스스로 판 꼴이었다.
^그 직전에는 4·3 사건이라는 광풍이 온 제주도를 휩쓸었다. 일제에게 당하고, 내 나라 군경에게 당하고도 그 아픔을 발설도 하지 못 한 세월이 수십 년이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제주도는 ‘평화의 섬’으로 지정되었다. 이제 더는 고난과 슬픔의 땅이 되지 않도록 다짐하자고 정부가 나선 것이다.
^엊그제로 4·3 사건 70주년이 지났다. 전국에서 추념행사가 잇달았다. 제주도가 얼마나 슬픈 땅인지도 널리 알려졌다. 이제 남은 것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상대의 생각을 존중함으로써, 오랜 상처를 치유할 상생의 정신이 이 땅에 깃들게 하는 일이다. (2018, 4,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