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구덕 당번
김 선 구
아기구덕! 이것은 옛날 제주 인들이 만들어 낸 생활문화 유산이다. 길이가 두 척 반 정도로 아기를 눕힐 수 있게 만들어진 긴 대바구니이다. 여기에 긴 보릿짚을 채워 넣고 그 위에 아기를 눕히면 쾌적한 요람이 되었다. 이제 와서 되새겨보니 보릿짚의 성긴 틈새로 유통되는 공기가 여름철에는 아기의 땀을 씻어주고, 겨울이면 보온 역할을 했다. 추울 때면 보릿짚 위에 얇은 기저귀를 펴서 아기를 눕히고 다시 기저귀를 덮어주면 아늑한 침상이 되었다. 그 속에서 흥 얼 대는 아기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은 보기만 하여도 얼마나 즐거운 일이었던가! 상상만 하여도 미소가 흐른다.
어머니가 밭에 일하러 갈 때면 아기구덕을 짊어지고 갔다. 밭 한쪽 구석에 그늘을 만들고 아기구덕을 놓으면 나는 그 옆에 앉아서 아기구덕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 리듬에 맞추어 아기가 곤히 잠들곤 하였다. 아기가 울면 어머니가 일하다 말고 닥아 와서 젖을 물리고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아기와의 대면을 통하여 어머니는 힘든 노동의 피로를 잊었을 것이다. 그리고 형제들이 태어나 성장함에 따라 아기구덕 당번은 동생에서 동생으로 이어졌다.
집안에 있을 때는 아버지가 당번일 때도 있었다. 왼손으로 아기구덕을 흔들며 오른손으로 책장을 넘기셨다. 아기가 보채면 흔드는 속도가 빨라지고 그 리듬에 맞추어 글을 읽으셨다. 마치 스님들이 목탁소리에 맞추어 불경을 외우듯이 아버지의 청아한 목소리에 아기는 이내 잠이 들었다. 저녁이면 다시 어머니의 몫이 되었다. 어머니는 한 쪽 발로 아기구덕을 흔들며 양 손으로 바느질을 하셨다. 우리 형제들 모두 이렇게 성장하였다.
막내 동생을 키우고 나자 우리 집의 아기구덕은 불타 없어졌다. 우리 형제 여덟 명을 다 키우고 보니 아기구덕이 한쪽으로 찌그러져서, 잘 못하다가는 엎어져 아기가 낙상되기 십상이었다. 우리 집 아기구덕은 이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대신 스텐으로 제작 된 새로운 형태의 아기구덕이 생겼다. 나의 큰 애가 태어나자 아버지께서 첫 손자를 위하여 특별히 마련해 주었다. 우리 집 애들을 다 키우고 난 다음 아기구덕은 오촌조카 집으로 출장을 보냈다.
많은 세월이 흘렀다. 얼마 전 나에게도 손주가 태어났다. 언 듯 옛날 사용했던 아기구덕이 생각나서 조카에게 연락을 해 보았지만 행방이 묘연하였다. 아쉬운 마음을 안고 손주가 있는 큰 애 집을 방문 하였다. 거기에는 미국산 수입품이라는 아기 요람이 놓여 있었다. 아이를 비스듬하게 누이고 전 후로 흔들도록 만들어졌었다. 보기에 불안하고 흡족하지 못하여 며느리에게 아기구덕 얘기를 했더니 인터넷을 통하여 찾아보자고 한다.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며느리에게도 아기구덕 당번의 전통을 이어주게 되었으니.
나는 위로 누나가 한분 계시고 밑으로 동생들 여섯을 두었다. 누나는 일찍 도회지로 나가 생활하였기 때문에 형제간에 잔정을 나누지 못하였다. 내가 어린 시절을 부모님 곁에서 오래 생활하였기 때문에 형제들에게는 실질적인 맏이였다. 맏이란 괴로운 존재였다. 온갖 심부름을 도맡아 했을 뿐만 아니라 자라나는 동생들을 건사해야 했다. 때로는 동생들에게 사고라도 생기면 내가 대신 처벌 받곤 하였다. 거의 모든 동생들이 나의 등을 거쳐 갔다. 어머니가 밭에 나가면 집에서 애들을 돌보다가 보채면 등에 업고 젖 먹이러 밭을 드나들었다. 적어도 초등학생 시절까지는 이것이 나의 전담업무였던 것 같다.
대학생 때의 일이다. 방학 때가 되어 집에 와보니 아기구덕에 어린애가 눕혀 있었다. 아니 그 나이에 무슨 어린애를 또! 하고 무척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후에 들은 얘기지만 집에 있던 내 동생들도 어머니의 뒤늦은 출산에 당황하고 밉상스런 생각이 들었었단다. 한동안 보는 듯 마는 듯 외면하다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무척 귀엽게 생겼다. 막내 누이동생이었다. 아이를 등에 업고 밖에 나갔더니 길 가던 동내 아주머니들이 한마디씩하고 하고 지나갔다. “든든한 아기업게(제주방언: 아기를 돌보아 주는 하녀) 하나 잘 두었다고”
이제 형제들이 각각 흩어져 제 삶을 살기에 바쁘다. 누나와 막내 동생은 외국에 거주하고, 나와 일곱째는 외지에 나와 있다. 그리고 남자형제 둘하고 자매 둘은 제주에 살고 있다. 요행인지 아기구덕 당번경력이 적은 동생들이 외지에 나가 있는 셈이다. 한 솥 밥을 먹으며 자란 형제의 인연이 어찌 거리를 상관하겠는가! 그러나 형제들이 많다보니 가끔 불협화음의 소리가 들린다. 이제 채찍이 필요하다. 다음에 모이면 애기구덕 당번 경력에 맞추어 군기를 잡아야겠다.(2014. 4. 12)
첫댓글 '아기구덕'에 얽힌 얘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형제가 많은 것이 어쩜 좋은 일이죠? 어렵게 살던 우리네 시절 동생이 많아 힘들었지만 이제는 모두가 부러워할 형제의 인연입니다. 그로 인해 나눔도 베품도 배우며 화목도 협동심도 배우게 되었겠지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육수선드림
글의 내용에 동감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커나고 보니 형제란 많은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때로 속 섞일 경우도 있지만 뒤돌아서면 서로 의지되는 것이 형제가 아닌가 봅니다.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