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인생
다시 봄인가. 먼 산 아지랑이 아른거리고, 봄을 맞은 나무마다 새 잎이 돋아나고, 벚꽃 잎이 눈처럼 흩날리는 봄날, 강 언덕에 앉아 있으면 까닭도 없이 슬퍼진다.
세월은 어디쯤 와 있는 것일까. 오늘은 며칠인가 헤아려보면서 강변을 거닐다보면 다시금 눈가는 젖어온다. 바람이 분다. 강물이 흘러간다. 저 강물은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다시 바람이 분다.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불어오는 바람은 꽃처럼 향기롭다. 문득 저 옛날 얇은 붓글씨 종이에 꼼꼼하게 적어준 그녀의 편지속 이야기가 아련하다.
성,
바람이 분다. 어두워진 하늘에 빛나는 별빛조차 어루만질 듯 바람이 분다. 먼 옛날의 시골 생각이 난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여 찬 방에서 잠잘 때 뒷산에서 들려오던 바람소리, 나뭇잎이 날리는 소리, 짐승울음소리, 새소리. 그럴 때면 어느 동화 속 이야기를 떠올리며 밤의 소리에 귀 기울이던 생각이 난다. 그때는 고통도 없었고 사랑도 몰랐고 마냥 어린 순수 그 자체였던 시절이었지.
우리는 이제 그 시절 그때로 되돌아 갈 수 없는 것일까. 성과 함께 어린 시절로 돌아가 산과 들을 휘젓고 돌아다닌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바람 부는 밤이면 함께 귀 기울여 바람소리를 듣다보면 성은 어린 시인이 되어 어떤 시상을 떠올릴까. 계집아이처럼 수줍은 눈동자를 굴리며 어두운 등잔불 아래턱을 고이고 생각에 열중할 그대를 생각하니 꼭 껴안아주고 싶은 생각이 드는걸.
전선의 밤은 어떨지 가보고 싶다. 적막한 어둠 속에 바람소리 요란하고, 차가운 밤하늘엔 별빛조차 푸를 텐데 그대는 무엇을 그리며 그 허전한 눈망울을 적셔갈까. 병사들은 외롭고 고독한 환경에 놓여 있으니 모두들 소녀가 되고 시인이 되지 않을까. 고향생각도 나고, 사랑하는 사람들도 생각나서 온 밤을 그리움에 젖겠지.
성,
바람이 사납게 불어댄다. 보고 싶은 그대 생각을 날리려는 듯 그렇게 바람이 분다. 그러나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성은 내 마음에 들어앉아 허공을 맴돌 뿐.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우리 이런 밤에는 서로 생각하자. 우리는 비록 떨어져 있지만 성과 내가 함께 하는 이 시간도 세월이 흐르면 오색으로 채색된 보배 같은 추억이 될 것이며, 사랑의 고뇌와 스산한 모래바람 같은 가슴도 언젠가는 안식을 찾게 되겠지.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힘들어도 온 마음을 다하여 우리의 사랑을 키워가자.
내가 부족하고 또 못났기로서니 성의 사랑을 어찌 마다할까. 내 사랑이 부족하고 또 어리석어도 그대는 알아주리라. 어제 성에게 편지를 쓰고 출근을 할 때 갑자기 모래바람이 이는 것을 보며, 나는 영혼을 저당 잡힌 듯 사랑하는 사람끼리 주고받는 편지내용이 너무 서러워서 울고 말았어. 내 어찌 성을 의심하고 성을 향한 사랑이 무뎌지랴. 나는 그래도 오직 그대를 기다릴 거야. 그러면 성도 나를 더욱 사랑하며 생각해주겠지?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영혼 위에 머물기를 원하는 밤에(79. 9. 28.).
신,
스치우는 바람결이 이마 위에 차다. 어느 괴로운 영혼의 방황이라면 창을 활짝 열고 맞아주고 싶다던 신의 글이 떠오른다.
시인은 내가 아니라 그대인가 보다. 이런 마음은 시인의 뜨거운 영혼이 아니고는 생성될 수 없는 거라고 믿고 있거든. 그 바람이 부럽다. 신의 창문을 흔들고 간 그 바람이, 지나가는 바람도 창을 열고 맞아줄 수 있는 그대이거늘, 내가 찾아가면 더욱 반겨 주리라 믿으니까 행복하다.
오늘도 바람이 분다. 아, 나는 바람보다 세게 신의 창문을 흔들고 싶다(79.10.14.).
며칠 전 나는 아내와 함께 학동공원으로 갔었다. 마침 지는 벚꽃 잎이 산들산들 부는 봄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따사로운 햇빛, 깨끗한 공기, 커다란 정자(亭子)에 앉아 있노라니 새로 돋아난 잎들이 싱그럽기만 하였다. 문득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폴 발레리던가. 정말 살고 싶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봄바람을 타고 봄꽃 향기가 퍼지는 이 한가롭고 평화로운 공원에 앉아 세월을 느끼고 있다 보면 그저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늙어가는 아내의 손을 잡고 이런 조용한 공원 옆에 있는 집에서 살 수 있다면. 그리하여 언젠가는 고사리 같은 아기의 손을 잡고 산책을 하며 강아지가 뛰어노는 공원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떨어지는 꽃잎을 세노라면, 지나온 인생이 아름다웠노라고 말하며 서서히 이별을 준비해도 좋지 않을까.
아내와 나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학동공원에 앉아 있었다. 그저 세월이 이대로 멈추었으면 싶었다. 더도 덜도 말고 이 동네처럼 조용하고 살기 좋은 동네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살아봤으면. 아내와 나는 똑같은 생각을 하면서 공원을 내려와 우리 집을 향해 걸었다.
신사동 고갯마루 횡단보도가 보이자 꿈에서 깨어난 듯 아내가 말했다. 근데 말이지 여보. 나는 이대로도 참 좋아. 지금이 너무 행복해. 우리가 지은 이 집에서 우리 아이들과 함께 사는 지금이 너무 좋아. 그렇게 말하는 아내의 얼굴에 스무 살 시절의 그녀 얼굴이 스쳐갔다. 발그레하면서도 수줍던 그 뺨이 스쳐갔다.
그래. 무엇을 더 바란단 말인가. 그녀가 지금 내 곁에 있는데.
(2019. 4. 16.)
첫댓글
이젠 어느 지역이던
완연한 봄입니다
감성만님의 가곡이야기에
마실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