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항상 기뻐하라(恒喜)
데살로니가전서 5:16
상동교회(尙洞 1929.8.2)
이태원교회(梨院 1929.9.8)
參考聖經
我行其所悅. 요한八章 三十九節. 無信則不能悅主, 히十一章六節.
活祭則悅, 로十五章一節. 在肉不能悅主, 롬八章八節.
守誡則爾喜充溢, 요한十五章十一節. 爾憂反爲樂, 요한十六章二十節.
以我名求之則得樂, 요한十六章二十四節. 是我喜者, 太三章끝.
新郞之喜, 요한 三章 二十九節.
夫喜生於快, 快生於得, 得生於信, 此吾信者之生涯也. 吾等得此四者而後, 能入境域也. 接於心有樂, 施於事有濟, 環境不能撓奪, 何物能易其偉大乎? 今日吾朝鮮人, 於此四者一無近似, 說此殆如擊空然. 此但在下而言, 不能望上故也. 保羅曰望在上不復望下, 以是故也. 主最善最高最美, 信者展望庶幾近之. 古人云 仙鄕不離房亦以此也. 雲晴則喜, 雲閉則悲, 此人間之常態, 彼碧空之星在雲之上, 晴雨不關哀樂不變. 雲收雨過 何關於碧空也? 人在高嶺之上, 而經夜下嶺, 嶺下之人言昨夜雷雨疾作矣. 在嶺之上不知雷雨, 在嶺之下始知雷雨也. 信者之胸中, 當如此確證. 見喜輒喜, 見悲輒悲, 此普通人間之常態. 佛云黃葉止兒啼, 黃葉卽黃金, 黃金能止世人之悲乎? 吾等當如猶大人之未來觀, 猶人只今猶望메시아, 毫不落心, 可謂信之模楷,加密山之片雲. 或以爲無望, 或以爲有望. 雲將爲雨理也. 必有將有雨之日也. 朝鮮人太半望虛, 車京錫(普天敎主)卽位說, 鄭道靈之說, 皆是荊棘之葡, 蒺藜之無花果, 如是望虛則漸入悲哀, 淚不可勝抆矣. 所喜者於何處求得乎? 我欲有喜則先當悅主可也. 主與我偕者我行其所悅也. 요한 八章 二十九, 我不說主, 主不能偕我, 孟子曰妻子好合, 父母其安樂之, 妻子不合, 父母常有憾慽之憂矣. 吾家庭和合, 敎會和合, 主悅而偕之. 若紛爭不止則主已遠去. 如有不平則合家祈禱, 互相自反, 主更悅之. 欲如是悅主而無信, 則히十一章六節, 不能悅主.子不信父之言. 而自爲放蕩, 浪費金錢, 擅行賭博, 父安得以悅之也? 父雖惡能予子善物, 而不予甄石, 爲父而欲子善, 子當信之. 元述不從父訓, 父怒而上疏欲斬, 元述懼逃, 後父死元述欲歸, 其母又推不納, 此元述不信其父而擅行違之也. 故信父然後能悅其父. 主嘗謂阿伯拉罕, 曰汝信我乎?曰信. 主悅而義之, 故無信不能悅主也. 獻活祭則, 롬十二章一節, 能悅主也. 人能知此身之爲祭物, 省視自己有過乎, 有誤乎, 如祭祀省祭物, 有玷乎, 有瑕乎, 有玷瑕則不能爲祭物也. 如是省察欲使無過, 然後主悅而納之, 主不悅納, 心常憂懼. 吾之肉欲不能悅主, 吾可作而探人, 或在肉或在神, 互相不容, 在肉不能悅主, 롬八章八節, 肉如水神如火, 雖有信心常看俗書, 常從不信者. 信心冷如氷, 故從惡如崩, 從善如登, 如溺水者從淺至深, 身不能自由. 故曰肉之思死亡也. 守誡則喜常充溢也. 요한十五章十一節, 顔子之不改其樂何也? 常守善道故也. 故主曰爾勿憂, 守我誡云. 喜樂生於赦宥, 又生於希望. 無此兩者則有悲哀也. 赦宥與希望生於何處也? 其方皆在誡命中, 故守誡有喜樂也. 故世人雖逼迫勿憂, 憂反爲樂, 요한十六章二十節, 逼迫多則生練達, 信如金鉄, 鍊之又鍊, 益生光彩, 光乃榮光也. 信之光發于家庭及社會, 其樂何如也.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信之光如是遠及, 人皆樂取焉. 且如是得樂非偶然而成, 乃以祈禱而成也. 故主曰以我名求之則得樂, 요한十六章二十四節, 王不信他人之名, 惟信其子之名, 사울왕欲殺大圍, 而其子요나단爲大圍請王, 王赦之, 主名爲大, 以其名祈禱, 每每蒙恩, 人不能知之, 而我獨知之. 其樂果何如也? 如是者主亦喜之, 我亦有喜. 主洗禮時自天有聲曰是我喜者也. 馬太三章末節, 主爲神之寵兒也, 於地上達天國破地獄, 其功偉大故神悅之, 至後主日. 又逢新郞擧家歡喜形言, 未來地上必有大昏之日, 無淚無病無罪, 稚子與獅子同處, 劍戟化爲農器, 是地上天國也. 豈不樂哉!
참고성경(參考聖經)
나는 그가 기뻐할 일을 행한다 (요한복음 8:39)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 하나니 (히브리서 11:6)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活祭)로 드리라 (로마서 12:1)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로마서 8:8)
내 계명을 지키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15:11-12)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요한복음 16:20)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면 기쁨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16:24)
이는 내 기뻐하는 자라 (마태복음 3: 끝)
신랑의 기쁨 (요한복음 3:29)
대개 기쁨은 즐거움에서 나오고, 즐거움은 만족할 때 생기며, 만족함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이것이 우리 신자들의 생애입니다. 우리가 이 네 가지를 얻은 뒤에 믿음의 경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마음에 접하여 즐거움이 있고 일에 응용하여 성취되게 되면, 환경이 그것을 흔들어 빼앗을 수 없게 되니 어떤 것으로 그 위대함과 바꿀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 조선 사람은 이 네 가지에 하나도 근사한 것이 없습니다. 이는 마치 허공을 치는 것과 같습니다. 아래에 있게 되면 위를 바라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위를 바라보고, 내려다보지 말라’고 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주님은 최선, 최고, 최미(最美)한 분이시니 신자들이 뜻을 펴서 바라보면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신선의 세계도 방 안에 있다’라고 한 것도 이러한 의미입니다.
구름이 개면 기뻐하고, 구름이 끼면 슬퍼하는 것이 사람의 일반적인 태도입니다. 저 푸른 하늘에 별들은 구름 위에 있습니다. 날이 개든지 비가 오든지 관계하지 않는 것처럼 슬퍼하든지 기뻐한다고 변하지 않습니다. 구름이 개고 비가 오는 것이 저 푸른 하늘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사람이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갔다가 밤을 새운 뒤에 내려오면 산 아래 사람들이 지난밤에 천둥치고 비가 왔다고 합니다. 곧 산 위에서는 번개와 비바람이 치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산 아래 와서 비로소 비가 온 사실을 알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신자의 가슴 속에도 마땅히 이와 같은 확증이 있습니다. 기쁜 일을 보면 기뻐하고, 슬픈 일을 보면 슬퍼합니다. 이것이 보통 인간의 상태입니다. 불교에서 말하기를 ‘황엽(黃葉. 돈)은 우는 어린 아이도 그치게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황엽은 바로 황금을 말합니다. 황금이 사람들의 슬픔을 능히 그치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마땅히 유대인의 미래관(未來觀)과 같이 해야 합니다. 유대인은 오로지 메시아를 바라며 조금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가히 신앙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갈멜산에 조각구름이 뜨면 어떤 이는 비가 오기를 바랄 수 없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비가 오기를 바랄 수 있다고 합니다. 구름이 비가 되는 이치이니 반드시 비가 오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조선 사람의 태반은 헛된 것을 바랍니다. 보천교주(普天敎主) 차경석(車京錫)이 천자가 된다는 설, 계룡산 정도령(鄭道靈)이 새 나라를 세운다는 설 등은 모두 헛된 이야기로 가시떨기에서 포도를 얻는 것과 같고, 찔레넝쿨에서 무화과를 따려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헛된 일을 바라게 되면 점점 슬픔으로 빠져 들어가서 흘러나오는 눈물을 그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어디서 기쁜 일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기뻐지고 싶으면 먼저 주님을 기쁘게 하여야 합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는 것은 내가 주님의 기뻐하는 일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29. 내가 주님을 기쁘게 하지 않으면 주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않습니다. 맹자는 ‘아내와 자식들과 화합하여야 부모가 기쁘고 편안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처자가 화합하지 못하면 부모는 늘 얼굴을 펴지 못하고 근심에 싸여 있게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 가정이 화합하고, 우리 교회가 화합하면 주님께서 기쁘게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고, 만일 분쟁이 그치지 않으면 주님은 멀리 떠나가십니다. 그러므로 불평이 생기면, 온 집안이 기도하여 서로 회개하면 주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기쁘게 하고도 믿음이 없으면 주님을 기쁘게 할 수가 없습니다. (히브리서 11:6). 아들이 아버지의 말을 믿지 않고 방탕하여 금전을 낭비하고 도박을 하게 되면 아버지가 어떻게 기뻐하겠습니까?
아버지가 악하여도 자식에게는 착하고 좋은 물건을 주고, 조악한 나쁜 돌은 주지 않습니다. 아버지로서 자식은 잘 되게 하려면 마땅히 자식을 믿어야 합니다. 신라시대 원술(元述)은 아버지 김유신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아서, 그 아버지는 화가 치밀어 임금에게 글을 올리고 죽이려 하였습니다. 원술이 두려워 도망을 갔습니다. 그 뒤에 아버지가 죽어서 원술이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였을 때, 어머니가 그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이는 원술이 그 아버지를 믿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명령을 어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를 믿은 연후에라야 아버지를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네가 나를 믿느냐?’하였더니, ‘예, 믿습니다.’라고 하자 주님이 기뻐하여 그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주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산 제물로 드리면 주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1).
사람은 자신의 몸이 제물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 허물이 있는가, 그릇된 곳이 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제사를 드릴 때 제물에 흠이 있는지 살펴보아, 이지러지거나 흠집이 있으면 제물로 쓸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을 살펴보아 허물이 없도록 하여야 주께서 기쁘게 받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기쁘게 받으시지 않게 되면 마음엔 근심과 두려움이 있게 됩니다.
나의 육신이 주님을 기쁘게 하려고 하지 않으면 나는 다른 사람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육신에 있든지 영에 있든지 서로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육신에 머물러 있게 되면 주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로마서 8:8). 육신은 물과 같고, 정신은 불과 같습니다. 비록 믿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나, 늘 속된 글을 보고, 믿지 않는 자를 따르게 되면 믿는 마음은 얼음처럼 차가워집니다. 그러므로 악한 일을 따르면 무너지게 되고, 착한 일을 따르면 하늘에 올라가는 것과 같이 됩니다. 마치 물에 빠진 자는 얕은 곳에서 깊은 쪽으로 빠져 들어가며 자신의 몸이 자유스럽게 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면 기쁨이 충만하여 넘치게 됩니다.(요한복음 15:11). 공자의 수제자 안자(顔子)가 가난 속에서도 그 기쁨을 그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좋은 도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너는 근심하지 말고 내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은 죄를 용서하는 데서 생겨나며, 또 희망에서 생겨납니다. 이 두 가지가 없으면 슬픔이 있습니다.
죄를 용서하는 일과 희망은 어느 곳에서 나옵니까? 그 방법은 모두 계명(誡命) 가운데 있습니다. 계명을 지키면 기쁨과 즐거움을 얻게 됩니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핍박을 받아도 근심하지 아니 하면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됩니다.(요한복음 16:20). 핍박이 많으면 단련 되어 통달하게 됩니다. 신앙은 쇠붙이 같아서 담금질하고 또 담금질하면 더욱 광채가 나타납니다. 광채는 바로 영광입니다.
신앙의 광채는 가정과 사회에서 시작되게 되니 그 기쁨이 어떠하겠습니까? 공자가 말한바 ‘먼 곳에서 찾아오는 벗이 있으니, 이 또한 즐겁지 않은가?’라고 한 말과 같이 믿음의 빛이 이와 같이 멀리서부터 비치게 되면 사람들은 모두 기쁘게 그 빛을 취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기쁨을 얻는 것은 우연히 되는 일이 아닙니다. 기도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께서는 ‘나의 이름으로 구하면 기쁨을 얻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요한복음 16:24).
왕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믿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식의 이름을 믿었는데,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자 그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위하여 왕에게 청하여 다윗을 놓아주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은 크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많은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알 수 없고 나만 홀로 그것을 알게 된다면 그 기쁨이 과연 어떻겠습니까? 이렇게 하는 사람은 주님도 기뻐하시고 나도 역시 기뻐하게 됩니다.
주님이 세례를 줄 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이는 내가 기뻐하는 자라’ 하였습니다.(마태복음 3:끝). 주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지옥을 깨부수었으니 그 공이 위대하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신 것입니다.
그 뒤 주일에 이르러 또 신랑을 만나 온 집안이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장차 세상은 눈물과 병과 죄가 없게 되고, 어린 아이와 사자가 함께 살며, 칼이나 창 같은 무기는 녹여서 농기구를 만들게 되는 것을 말하셨으니, 이 어찌 지상의 천국으로써 기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