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 坐井傍 요한四章六節 又七章卅七-八節
此時日熱而午正 思水之時. 主長道旅行 身甚疲勞, 亦欲思飮之時也. 此光景描寫 世人之疲勞 甚渴 無人慰藉 而七節又言 欲汲水之沙女又來 与主相遇. 此時主以人間的經驗 示之. 逐高在 吾等之上位 而下降爲人 嘗盡人間之苦 況而救之.
佛有四願 不老, 不死, 不生, 不病也. 果如所願乎? 主踏破人間之險路, 又免人之重負 而來井之生水卽自己. 又如七章己言 來我者 永不渴勝有生水如江. 主曰 人渴卽來我云. 今沙婦甚渴 主欲給生水 而要證人. 故招爾夫來 此克服其良心 而与之也.
婦始服, 雖易五夫 渴症如前. 人欲得想牛 彼馬往 不擇叛北而行 猶不滿意. 以余經驗言之 儒敎佛敎檀君敎 無不見之. 如空鳥之無定處甚 覺大樹 始定矣. 主先曰, 飮我爾先以水獻我 我能救爾. 如持餠而來 飢渴慕義者福. 此使知級生水者 爲誰也?
給生水者 非爾五夫也, 卽基督也. 五夫之心 五夫之財 不能慰爾, 惟基督慰爾也. 人之心灵 神之所造 而肖神 故在世之物及人 不能慰之. 今基督在井傍 自己爲井之生水 而任意給之. 沙婦渴於愛 而求之 五夫不能慰.
何人能慰乎? 猶人以祖上爲慰. 雅各能給井 而不能給生水, 不知主大於雅各. 此時沙人拜於山 猶人拜於京, 不相往來. 此婦渴於人類之愛. 主曰, 勿論何處 可拜上帝, 天國無夫婦, 無人種, 無差別, 愛已耳. 愛是生水. 婦不來井 何能遇生水之主乎? 婦欲汲水而來井, 人欲聞道而來堂. 不欲聞道 而欲以他意來者 皆欲飮而來者也. 敎會不知欲飮者 只看外貌而待 故敎會終已紛亂矣.
沙婦所求之水 非用於洗, 非用於浴, 非用於液, 但爲食 而求其不便卽 生病. 主之水 外皆不便 易爲生病, 渴於愛者 渴於義者 渴於恩者 皆來主. 主在井傍 今世何人非沙婦乎? 爲汲水而來 得飮永生之水.
262. 우물곁에 앉으심 / 요한복음 4:6, 7:37-38
이때는 해가 뜨거운 한낮이라 물이 생각날 때입니다. 주님께서는 먼 길을 여행하시어 몸이 심히 피로하셨을 것이니, 역시 물을 마시고자 할 때였습니다. 이 광경은 세상 사람들이 피로하고 심히 목마른데 아무도 위로하고 도와주는 이가 없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7절에서 말하기를 사마리아 여자가 물 길러 또 와서 주님과 만났다고 합니다. 이때에 주님께서는 인간의 경험을 제시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위의 높은 데서 인간을 위하여 내려오셔서 일찍이 인간의 고난을 다 경험하시고 더욱이 구원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불교에는 네 가지 소원이 있으니 늙지 않고, 죽지 않고, 태어나지 않고, 병나지 않는 것인데, 과연 이같이 소원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인간의 험한 길을 끝까지 돌파하시고,또 인간의 무거운 짐을 벗겨주시려고 자기 자신이 되는 생명수 우물가로 오셨습니다. 또 7장에서 말씀하신 것 같이 “내게 오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생수가 강과 같이 넘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이 목마르면 내게 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사마리아 여인이 심하게 목말라 있으니 주님께서 생수를 주시고 사람들에게 증거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셨으니 이는 그 양심을 극복하고서 생수를 주시려는 것입니다.
부인은 자복하기 시작했으니,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꿨을지라도 갈증은 여전하였습니다. 사람이 만일 소를 얻고자 하는데 말이 간다면 택하지 않고 돌아서 갈 것이니 오히려 그 뜻이 불만족할 것입니다. 제 경험으로 말하면 유교, 불교, 단군교(檀君敎)에서 그 원하는 바를 발견하지를 못했습니다. 마치 공중에 나는 새들처럼 거처할 곳이 없어 고생하는데 큰 나무를 발견하면 거기 거처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인에게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마시도록 네가 먼저 내게 물을 주었으나 내가 능히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떡을 가지고 와서 의(義)를 위해 주리고 목마른 자를 축복하심과 같습니다. 이렇게 생수를 주시는 분을 알게 하시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입니까?
생수를 주는 자는 너의 다섯 남편들이 아니라, 곧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다섯 남편의 마음, 다섯 남편의 재산이 너를 위로해 주지 못하였으나, 오직 그리스도만이 너를 위로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심령은 하나님이 지으신바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세상의 물질과 인간은 위로를 줄 수가 없습니다. 지금 그리스도는 우물가에서 자기가 생수(生水)의 우물이 되셔서 마음대로 그것을 주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사랑에 목말라서 그것을 구하였으나 다섯 남편들이 위로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위로할 수 있습니까? 유대인들은 조상이 위로가 된다하고, 야곱은 이 우물을 줄 수 있었지만 생수를 공급할 수는 없었으니, 주님이 야곱보다 크시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이때에 사마리아인들은 산에서 예배를 하였고 유대인들은 서울[예루살렘]에서 예배하였는데, 서로 왕래하지 않았습니다. 이 부인은 인류의 사랑에 목말랐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느 곳에서든지 물론하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고, 천국은 부부나 인종에 차별이 없으며 사랑뿐입니다. 사랑이 바로 이 생수입니다. 부인이 우물에 오지 않았다면 어찌 생수의 주님을 만날 수가 있었겠습니까? 부인이 물 길러 우물에 왔고, 인간은 진리를 들으러 예배당에 옵니다. 진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으나 다른 사람의 뜻으로 왔다고 해도 모두가 다 마시러 온 사람들입니다. 교회가 목말라 마시러 온 자를 모르고 단지 외모로 대하는 때문에 교회는 마침내 분란하고 맙니다.
사마리아 부인이 물을 구한 것은 세수하는데 쓰려는 것이 아니고, 목욕하는데 쓰려는 것도 아니며, 액체로 사용하려는 것도 아니라 다만 먹기 위함이었으나 그것을 얻는 데 따른 불편함은 병을 얻을 지경이었습니다. 주님의 생수도 겉으로는 다 불편하고 병을 얻기가 쉽지만 사랑에 목마른 자와 의에 목마른 자와 은혜에 목마른 자는 다 주님께로 옵니다. 주님이 우물가에 계시니 지금 세상에 그 누가 사마리아 부인이 아니겠습니까? 물 길러 오면 영생의 물을 마시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