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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중국 강남 고전 원림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예원 답사만 남았습니다. 중국 강남 고전 원림 답사 때 예원을 끝내 동선에 포함시키지 못했음을 크게 아쉬워했었는데, 그래도 두번째 답사에서 드디어 마음먹고 마지막날 오전 반나절 예원을 아낌없이 둘러볼 기회를 잡았습니다^^
* 처음 계획하면서,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게도, 마지막날 오전에, 그 짧은 오전 반나절에, 박물관이랑 예원을 같이 둘러보리라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기도 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후 현명하게도 계획을 지혜롭게(??) 수정하고 수정한 끝에, 이 날 오전 숙소를 떠나 들르게 되는 목적지는 오직, 예원만이 남았습니다...
루이진 호텔에서의 성대한 아침을 마치고, 우리는 여유있게 출발하여, 전날 저녁 식사했던 녹파랑이 위치한 예원상성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버스에서 내려, 큰 찻길, 작은 찻길, 큰 골목길, 작은 골목길을 졸래졸래 가이드 뒤를 쫓아가면서, 벽면에는 몇 개인가, 새 국가 건설의 포스터가 눈에 띄입니다.
뭔가 50년전의 새마을 운동의 기운이 느껴지는, 저 앞의 골목길 위에는 바쁜 일상을 같이 견뎌냈을중국인들의 옷들이 정성스레 널려 있는 빨랫줄이 머리위로 어지러이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그들 매일매일의 일상을 훔쳐보자니, 예전 답사에서 소주(苏州) 예포(艺圃)를 찾아가면서 마주쳤던 그들의 일상도 파노라마처럼 떠올랐고, 마치 상하이 어느 평범한 골목길 체험하는 듯, 색다르지만, 뭔가 낯익은 수십년 전의 우리의 골목길 속을 시간여행하듯 총총걸음으로 빠져나갑니다...
저 앞에는 가이드분의 뒷모습이 힘차게 앞장서고 있습니다^^
예원(豫园)은 상하이시(上海市) 노성(老城) 동북부, 북으로는 복우로(福佑路), 동으로는 안인가(安仁街), 서남쪽은 상해(上海) 노성(老城) 황묘(隍庙)에 접해 있는 강남 고전 원림(江南古典园林)으로 명대(明代) 가정(嘉靖)-만력(万历) 연간에 지어졌으며, 면적은 무려 삼십여 무(亩)에 달합니다.
위 위성사진 가운데 위에 녹색의 공원 바로 아래 왼쪽의 푸릇푸릇한 구역 전부 예원과 예원상성(豫园商城)입니다@@
예원(豫园)의 첫 주인은 사천포정사(四川布政使)를 지낸 반윤단(潘允端, 1506-1581)인데, 1559년에 짓기 시작하여, 가문의 주택이었던 세춘당(世春堂) 서쪽에 있던 몇 뙈기의 채마밭에다가 원림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이십여년간 고심하며 짓기를 계속한 끝에 예원(豫园)을 완성하였습니다. '豫' 자는 평안(平安), 혹은 태평(安泰)이라는 뜻에서 취해 예원(豫园)이라 지었는데, '연로한 부모님을 편안하고 즐겁게 해드린다(豫悦老亲)'에서 뜻을 취했습니다.
전체 칠십여 무(亩)에 달하는 너른 대지에 당대 조경의 대가인 장남원(张南园)이 설계하였는데, 나중에는 직접 시공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당/관/헌/사/정/대/누/각(堂馆轩榭亭台楼阁)을 망라하여 30여채가 들어섰고, 일찌기 동남에서 기이하고 수려하기가 으뜸으로, 동남(东南)의 명원(名园) 중 갑이라 칭했습니다.
원림 내에는 강남 3대 명석(名石)의 하나인 옥영롱(玉玲珑)이 있고, 1853년 소도회(小刀会) 항거의 현장이자 당시 지휘소이기도 했던 점춘당(点春堂)이 있으며, 현재도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성황묘(城隍庙) 및 상점가가 원림 옆에 삥 둘러 밀집해 있습니다.
예원(豫园) 조성 당시의 모습을 약간이라도 엿보는 데 있어, 반윤단(潘允端)이 지은 예원기(豫园记)가 큰 도움이 되어, 여기에 옮겨봅니다^^;; 조금 깁니다@@
潘允端 - 豫园记
반윤단 - 예원기
余舍之西偏,旧有蔬圃数畦。
나의 집 서쪽에 예전에 몇 이랑인가 채소밭이 있었다.
嘉靖己未,下第春官,稍稍聚石凿池,构亭艺竹,垂二十年,屡作屡止,未有成绩。
가정 연간 기미년(1559), 춘관(春官) 과거에 낙방하고, 돌을 모으고 연못을 파고 정자를 짓고 대나무를 심으며 원림을 짓기를 이십년간 조금씩 끊어질 듯 이어졌으나 미처 다 이루지 못했다.
万历丁丑,解蜀藩绶归,一意充拓。
만력 연간 정축년(1577), 촉번(蜀藩)을 물러나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와, 원림을 넓혀 지을 뜻을 품었다.
地加辟者十五,池加凿者十七。每岁耕获,尽为营治之资。
땅을 고르기를 열다섯 군데, 파려고 하는 연못이 열일곱 곳이었는데, 해마다 밭을 갈아, 지을 돈을 댔다.
时奉老亲觞咏其间,而园渐称胜区矣。
그 동안, 때때로 시를 읊으시는 노친께 잔을 올렸고, 원림은 점차 모습을 갖추었다.
园东面架楼数椽,以隔城市之嚣。
원림은 떠들썩한 저자거리와는 동쪽으로 멀찍이 떨어져 있다.
中三楹为门,匾曰“豫园”,取愉悦老亲意也。
입구에 두 칸 문을 달아 '예원(豫园)' 이라 하였으니, 늙으신 부모를 기쁘게 편안하게 모시고자 한 뜻을 취한 것이다.
<중건 후 예원의 모습>
入门西行可数武,复得门曰“渐佳”,西可二十武,折而北,竖一小坊,曰“人境壶天”。
문으로 서쪽으로 들어가 몇 걸음 후 뒤돌아보면, 문 위에 '점가(渐佳)'가 적혀 있고, 스무 걸음 서쪽으로 가다 북쪽을 보면, 작은 건물이 있으니, '인경호천(人境壶天)'이다.
过坊得石梁,穹窿跨水上,梁竟而高墉中陷,石刻四篆字,曰“寰中大快”。
건물 옆 굽은 돌다리 위로 물을 건너면, 경계를 지나 높다란 담장 가운데 파내 네 자를 새기니, '온 우주에 가장 장쾌하다.(寰中大快)'라 하였다.
循墉东西行,得堂曰“玉华”,前临奇石,曰“玉玲珑”,盖石品之甲,相传为宣和漏网,因以名堂。
동서로 담장을 돌아가면, '옥화(玉华)당'이 나오고, 그 앞에 기석(奇石)이 있어 '옥영롱(玉玲珑)'이라 하니, 기석(奇石) 중에서도 으뜸이요, 전하는 말로는 송 휘종의 선화누강(宣和漏网)의 하나였다고 하여, 이로 명성이 자자했다.
堂后轩一楹,朱槛临流,时饵鱼其下,曰“鱼乐”。
집 뒤에 또 집이 있어 붉은 기둥에 물이 임하여, 그 아래엔 때때로 모여드는 물고기에 먹이를 주었으니, '어락(鱼乐)'이라 불렀다.
由轩而西,得廊可十馀武,折而北,有亭翼然覆水面,曰“涵碧”,阁道相属,行者忘其渡水也。
집을 나와 서쪽으로, 복도를 따라 십여 걸음을 가다 북쪽으로 꺾으면, '함벽(涵碧)'이라 불리는 정자가 나타나니 집과 길이 하나가 되어, 문득 물을 건너는 줄 잊게 된다.
自亭折而西,廊可三十武,复得门曰“履祥”,巨石夹峙若关,中藏广庭,纵数仞,衡倍之,甃以石如砥,左右累奇石,隐起作岩峦坡谷状,名花珍木,参差在列。
회랑은 정자에서 서쪽으로 꺾어 서른 걸음 후 다시 문이 나타나니, '이상(履祥)'이라 이름지었는데, 양 옆을 거석으로 쌓아 마치 관문과도 같고, 그 가운데 품은 너른 마당은 높이가 여러 길이요, 가로는 그 몇 배가 되니, 숫돌 모양의 돌을 쌓고, 좌우로는 기석을 겹쳐 쌓아, 은밀히 솟은 모습이 마치 바위산에 골짜기와 언덕과도 같고, 이름난 꽃과 진기한 나무에, 들쭉날쭉 열을 지어 있다.
前距大池,限以石阑,有堂五楹,岿然临之,曰“乐寿堂”,颇擅丹雘雕镂之美。
앞에는 큰 연못이 있는데, 돌로 둘레를 쌓았으며, 네 칸 건물 '낙수당(乐寿堂)'이 물에 면해있어, 자못 붉디 붉은 독수리가 새겨진 듯이 아름답다.
堂之左室曰“充四斋”,由余之名若号而题之,以为弦韦之佩者也。
그 왼쪽 방은 '충서재(充四斋)'라 하여, 나의 어릴 적 호(若号)를 따 지었는데, 서문표(西門豹)와 동안우(董安于,?-BC 496)이 차고 다니며 조심했던 고사를 마음에 새기기 위함이었다.
其右室曰“五可斋”,则以往昔待罪淮漕时,苦于驰驱,有书请于老亲曰:“不肖自维有亲可事,有子可教,有田可耕,何恋恋鸡肋为。”
그 오른쪽 방은 '오가재(五可斋)'라 했는데, 곧 예전 죄를 입어 회하 유배길에 오르던 때, 바삐 재촉하는 통에 고생이 심하여, 청하여 늙으신 부모님께 글을 올리기를, '불초(不肖)하나 부모님 살아계셔 모실 수 있고, 자식이 있어 가르칠 수 있고, 밭이 있어 농사지을 수 있으니, 어찌 미련을 두어 계륵(鸡肋)이 되겠습니까 ?' 하였다.
比丁丑岁首,梦神人赐玉章一方,上书“有山可樵,有泽可渔”,而是月即有解官之命,故合而揭斋焉。
정축년(丁丑岁) 초, 글을 올리길, '산이 있어 장작을 모으고, 못이 있어 낚시를 한다'하였으니, 그 달에 곧 관직을 거두는 명이 있어, 이에 글을 올린 것이다.
嗟嗟! 乐寿堂之构,本以娱奉老亲,而竟以力薄愆期,老亲不及一视其成,实终天恨也。
아아! 낙수당(乐寿堂)을 지은 것은, 본디 늙으신 부모님을 기쁘게 모시고자 함이었으나, 힘은 딸리고, 매번 시간을 못 마추어, 늙으신 부모님이 한 번도 완성을 못 보셨으니, 실로 하늘에 닿을 한이다.
池心有岛横峙,有亭曰“凫佚”。岛之阳峰峦错叠,竹树蔽亏,则南山也。
연못 가운데에 섬이 있어 언덕이 누워 있고, 그 위에 정자가 있어 '부일(凫佚)'이라 불렀다. 섬의 남쪽에는 겹겹이 봉우리가 기웃하고, 온통 대나무로 뒤덮였으니, 곧 남산(南山)이다.
由“五可”而西,南面为“介阁”,东面为“醉月楼”,其下修廊曲折可百余武。
'오가(五可)'에서 서쪽, 남쪽엔 '개각(介阁)'이 있고, 동쪽으론 '취월루(醉月楼)'이 있는데, 그 아래로는 구불구불 회랑을 따라 거의 백여 걸음을 갈 수 있다.
自南而西转而北,有楼三楹曰“征阳”,下为书室,左右图书可静修。
남쪽에서 서쪽으로 옮겨 북쪽에는, 두 칸 누각이 있어 '정양(征阳)'이라 불렀는데, 아래엔 서실이 있어 좌우로 도서가 있고, 고요히 수련할 만 하다.
前累武康石为山,峻嶒秀润,颇惬观赏。
앞으로는 무강석(武康石)을 쌓아 만든 가산이 있어, 치솟고 험준하여 수려하여, 자못 상쾌하게 봐줄 만하다.
登楼西行为阁道,属之层楼,曰“纯阳”,阁最上奉吕仙,以余揽揆,偶同仙降,故老亲命以“征阳”为小字。
'순양(纯阳)'이라 이름의 이층 누각을 올라 서쪽으로 가다보면, 누각 꼭대기는 여선(吕仙)을 모신 듯하여, 몸소 헤아려 보면, 마치 신선과 같이 내려온 듯하니, 이에 연로하신 부모님은 작은 글씨로 '정양(征阳)'이라 이름지으셨다.
中层则祁阳土神之祠,盖老亲守祁州时,梦神手二桂、携二童至曰:“上帝以大夫惠泽潭流,以此为而子。”
윗층은 사양(祁阳) 토신(土神)의 사당인데, 지붕은 연로하신 부모님이 기주(祁州)를 지킬 때 것으로, 몽신(梦神)이 계수나무 두 그루를 쥐고, 아이 둘을 이끌고 와서 이르시길, '대부(大夫)께서 연못을 흐르게 한 은혜를 상제(上帝)께서 아시고, 아들을 내리셨습니다.'라 하였다.
已而诞余兄弟,老亲尝命余兄弟祀之,语具祠记中。
그 때 이미 우리 형제를 낳으셨기 때문에, 연로하신 부모님은 목숨으로 갚아 우리 형제가 제사지내게 되었고, 사당을 갖춰 그 안에 적어두도록 하셨다.
由阁而下为“留春窝”,其南为葡萄架。
그 아래층은 '유춘와(留春窝)'라 불렀는데, 그 남쪽엔 포도 줄기가 얽혀 있다.
循架而西,度短桥,经竹阜,有梅百株,俯以蔽阁,曰“玉茵”。玉茵而东为“关侯祠”。
구불구불 서쪽으로 짧은 다리를 건너 대나무 숲 언덕을 지나면, 매화 백여 그루가 드리워 누각을 가리고 있는데, 옥인(玉茵)이라 부르고, 그 동쪽에는 '관후사(关侯祠)'가 있다.
出祠东行,高下纡回,为冈为岭,为涧为洞,为壑为梁为滩,不可悉记,各极其趣。
사당을 나와 동쪽으로 가면, 깊이 아래로 굽이돌며 산등성이가 되었다, 고개가 되었다, 산골짜기가 되었다, 동굴이 되었다, 도랑이 되었다, 둑이 되었다, 사주가 되었다, 다 적지 못할 정도이니, 그 모든 뜻이 지극하다.
山半为“山神祠”,祠东有亭北向,曰“挹秀”,挹秀在群峰之坳,下临大池,与乐寿堂相望,山行至此,藉以偃息。
산의 절반은 산신사(山神祠)인데, 그 동쪽에 정자가 북향으로 있어 '읍수(挹秀)'라 불렀는데, '읍수(挹秀)'에는 봉우리 사이에 우묵하니 큰 연못이 있어, 낙수당(乐寿堂)과 마주하였고, 산을 올라 여기에 이르러, 깔고 주저앉아 한 숨을 돌린다.
<초창 때의 예원>
由亭而东,得大石洞,窅窱深觏,几与张公、善卷相衡。
정자 동쪽으로는 대석동(大石洞)이 있는데, 우묵하고 아득히 깊어지니, 장공(张公), 선권(善卷)이 서로 견주듯 한다.
由洞仰出为“大士庵”,东偏禅堂五楹,高僧至止,可以顿锡。
동굴에서 나와 위를 보면 대사암(大士庵)인데, 그 동쪽은 네칸 선당으로 고승이 머무르며 돈석(頓錫) 스님이 되실 법하다.
出庵门,奇峰矗立,若登虬,若戏马,阁云碍月,盖南山最高处,下视溪山亭馆,若御风骑气而俯瞰尘寰,真异境也。
암자 문을 나서면, 기이한 봉우리가 첩첩이 솟아 마치 규룡(虯龍)이 오르는 듯, 말을 희롱하는 듯하고, 누각을 '의월(碍月)'이라 하였으니, 남산 꼭대기를 덮었고, 아래로는 계곡, 산, 정자, 청관이 내려다 보이고, 마치 바람을 다스려 기세에 올라탄 듯, 굽어보면 천하가 티끌같으니, 진실로 기이한 지경이다.
自山径东北下,过“留影亭”,盘旋乱石间。
동북쪽으로 산길을 내려가면 '유영정(留影亭)'이 있는데, 그 아래로는 물살이 어지러이 돌 사이를 거칠게 흐른다.
转而北,得堂三楹,曰“会景”,堂左通“雪窝”,右缀水轩。
북쪽으로 틀면, 두 칸 건물이 나오니, '회경(会景)이라 불렀는데, 왼쪽으로 '설와(雪窝)'로 이어지고, 오른쪽으로는 수헌(水轩)에 닿는다.
出会景,度曲梁,修可四十步,梁竟即向之所谓广庭,而乐寿以南之胜尽于此矣。
회경당을 나와 곡교를 건너 사십 여 걸음 경계를 건너면, '광정(广庭)'으로 향하게 되니, 곧 '낙수(乐寿)'의 남쪽이요, 여기에서 절정에 무르익었다.
乐寿堂之西,构祠三楹,奉高祖而下神主,以便奠享。
낙수당 서쪽으로 두 칸 사당이 있는데, 고조(高祖)를 모시고, 아래에 신주(神主)가 있어, 쉬이 제사를 모신다.
堂后凿方塘,栽菡萏,周以垣,垣后修竹万挺,竹外长渠东西,咸达于前池,舟可绕而泛也。
집 뒤에 네모난 연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주위에는 담을 둘러, 담 뒤로 키큰 대 숲이 아주 빼어나고, 숲 뒤로는 동서로 긴 다리가 놓여 앞의 연못까지 닿으니, 가히 배를 띄워 돌아볼 만 하다.
乐寿堂之东,别为堂三楹,曰“容与”,琴书鼎彝杂陈其间。
낙수당 동쪽으로 두 칸 너비 건물이 떨어져 있어 '용여(容与)'라 불렀는데, 거문고와 책들이 그 안에 번다하게 놓여 있다.
内有楼五楹,曰“颐晚楼”,楼旁庖湢咸备,则余栖息所矣。
네 칸 누각이 있어 '이만루(颐晚楼)'라 부르는데, 주위엔 부엌과 목욕간이 갖춰져 있어, 내가 머물러 쉬는 곳이다.
容与堂东为室,一区居季子云献,便其定省,其堂曰“爱日”,志养也。
그 동쪽은 방인데, 둘째 아들 헌(献)이 살면서 곁에서 편히 나를 봉양하여, '애일(爱日)'이라 불렀는데, 그 뜻을 드높이기 위함이다.
大抵是园不敢自谓辋川、平泉之比,而卉石之适观,堂室之便体,舟楫之沿泛,亦足以送流景而乐馀年矣。
대저 이 원림이 감히 왕유(王維, 699-759)의 망천(辋川), 이덕유(李德裕, 787-850)의 평천(平泉)에 비할 바가 못되지만, 돌과 수목이 그럭저럭 볼 만하고, 나름 집은 편히 지어져, 노를 저어 배가 나아가듯, 흐르는 풍경을 넉넉히 흘러 보내며, 여생을 즐기기에 족하다.
第经营数稔,家业为虚,余虽嗜好成癖,无所于悔,实可为士人殷鉴者,若余子孙,惟永戒前车之辙,无培一土植一木,则善矣。
집을 경영한지 여러 해, 가업은 보잘것 없어지고, 비록 나는 좋아하는 것에 즐기는 일이 버릇이 되어, 후회할 것은 없었으되, 실로 선비의 뼈아픈 교훈이라 할 것이니, 자식, 손자는 나의 전철을 오직 꾸준히 경계하도록 하여, 흙 한 번 돋우고, 나무 한 그루 돋우지 말고, 오직 선에 힘쓸 일이다.
<현재의 예원의 모습>
아침 일찍 들어가서 조금은 한산할 예원 마당을 맘껏 둘러보리라는 기대를 저버리고, 중국인까지 포함해서 모두가 그런 생각에 아침 일찍 발걸음을 서두른다면, 일찍 길을 나선 덕을 못 보고 역시나 무지막지한 인파 속 혼란을 감내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들면서 발길을 서둘렀건만, 막상 아침부터 들른 상점들은 조금은, 그래도 조금 한산하네요^^
하지만, 예원에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인파는 더이상 감당하기 힘들만큼 늘어나 있었고, 입구 앞 구곡교를 바라보며 우리는, 매표 때문에 자리를 떠난 가이드를 기다리면서, 뭔가 주도면밀한 작전이 필요하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가이드의 도움을 받아, 주요 포인트 중 입구에서 가장 안쪽 깊숙이 있는 고희대(古戏台)까지 쑥~ 들어가서 먼저 간략한 설명을 끝내고, 역방향으로 자유롭게 한껏 느긋한 답사를 둘러보며 나오며 아울러 삼박사일의 답사를 마무리하는, 이번 답사에서 꽤 유용한 작전으로 검증된 방식으로 진행해보기로 했습니다...
1601년 반윤단(潘允端)이 죽고, 가문이 쇠미해지면서, 원림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어 점점 황폐해졌고, 명나라 말 즈음에는, 예원(豫园)은 손녀사위 장조림(张肇林)의 소유가 되었습니다만, 이 역시, 얼마안가 다시 쓸쓸해졌습니다.
이윽고 1760년에 접어들어, 뜻있는 지역 유지들이 원림의 훼손을 막기 위해 원림 일대 70여 무를 매입하고, 20여년간에 걸쳐 삼수당(三穗堂), 췌수당(萃秀堂), 연청(莲厅), 치원당(致远堂), 청분당(清芬堂), 득월루(得月楼), 함벽루(涵碧楼), 경루(磬楼), 영설루(呤雪楼), 화신각(花神阁), 청도각(听涛阁), 응휘각(凝晖阁) 등등 수리하고, 점춘당(点春堂), 향설당(香雪堂), 앙산당(仰山堂), 쾌루(快楼), 회회루(回回楼) 등을 새로 짓고, 돌을 새로 쌓는 등 원림을 유지 보수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성황묘(城隍庙) 동쪽에 동원(东园), 즉 지금의 내원(内园)이 이미 있었기 때문에, 그 서쪽에 위치한 예원을 서원(西园)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경(嘉庆) 연간에 이르러서는 더이상 성황묘에서 예원을 관리하기가 어려워지면서, 급기야 도광(道光) 연간 초, 서원은 이십여 공소(公所)에게 불하되었습니다.
1842년 1차 아편전쟁이 발발해, 외국군대가 상해를 침입하면서 예원(豫园)을 강점한 영국군에 의해 크게 훼손되었고, 1853년, 상해(上海) 소도회(小刀会)가 태평천국(太平天国) 군에 내응하던 와중에, 난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청나라 군대가 상해 곳곳을 불지르고 파괴하였는데, 예원(豫园) 역시 막대한 피해를 입어, 점춘당(点春堂), 향설당(香雪堂), 계화청(桂花厅), 득월루(得月楼) 등 주요 전각이 불타 없어졌습니다.
1860년, 태평군이 상해를 침략하자, 만청(满清) 정부는 영불 연합군과 손을 잡았고, 성황묘와 예원에 외국군대가 주둔하면서, 원림의 돌을 파내 진지를 쌓고, 서양식 막사를 짓는 통에, 원림은 원래의 모습을 찾기 힘들어졌습니다.
1875년 후, 어느덧 원림 내에는 상해두미업(上海豆米业), 당업(糖业), 포업(布业) 등 이십여 개의 상점 뿐 만 아니라 공소(公所)까지 들어차 버렸고, 1949년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기까지, 원림 곳곳이 파괴되어, 연못은 마르고, 수목은 시들어, 옛 모습은 거의 찾기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더욱이 일본이 상해를 점령하던 기간에는, 만화루(万花楼) 일대에 유민들까지 대거 몰려들면서, 췌수당(萃秀堂)안에 도대(赌台)를 놓고 도박을 벌이기까지 했으며, 일본군의 폭격에 향설당(香雪堂), 가락헌(可乐轩) 등이 부서지기까지 했습니다.
1956년부터 예원 일대에 흩어져 자리잡고 있던 학교, 상점, 민가들이 대거 이전하였고, 5년간 대대적으로 보수한 끝에, 1961년 일반에 공개되었습니다만, 그럼에도 호심정(湖心亭), 구곡교(九曲桥), 하화지(荷花池)는 예원에 편입되지 못했습니다. 1982년에는 전국 중점 문물 보호 단위로 지정되었습니다.
원래 원림의 정문은 동쪽으로, 바로 반씨 가문의 주택을 마주보고 있었다고 합니다만, 앞서 예원에 편입되지 못한 호심정 일대 쪽으로 청대 양식 대문을 모방하여 새로 만들어, 명대 서화가 왕서등(王樨登)의 글씨로 편액을 달았습니다.
하지만 바삐 들어가는 중에 용장을 보고는 그냥 지나갈 수 없어, 어쩌면 이번 답사에서 다시는 여기에서 단체사진을 담지 못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어, 잠깐 단체사진을 찍자 했습니다^^;;
서둘러 가는 길에 잠깐 지체한 탓에 조금 더 서둘러 내원으로 들어갑니다... 지난 출장때 둘러봤던 그 절경을 주마간산 격으로 지나치며 꼭 챙겨보리라 마음먹으며 날으듯 바삐 걸은 그 끝에는 다리 건너 도원경의 입구라는 '内园' 현판의 문을 두 마리 용이 지키고 있습니다.
막상 도착해보니, 고희대 무대에선 내원을 가득 채운 청중들을 앞에 두고 전통악단의 공연이 한창이네요@@
이렇게 현지 관광객도 많고, 공연도 한창이고 어수선한 상황에서, 차분하게 짧게 하려고 했던 설명은 사실상 힘들듯 하여 어쩔 수 없이, 다시 만날 약속만 한번 더 확인하고, 단체사진을 찍고, 개별적으로 답사를 진행하기로 하면서 우선 이 귀한 공연의 기회를 누리기로 합니다...
젤 마지막에는 라데츠키 행진곡을~~ ㅎㅎ
여기서 간단하게 단체사진을 서둘러 찍고는 다같이 추억을 담으러 제각기 흩어졌습니다^^
내원(内园)은 1709년 지어져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온 청(清) 대의 원중원(园中园)으로 넓이는 2 무(亩) 가량으로 예원 전체에 비하면 아담한 편이며, 50년대말 예원(豫园)을 복원하면서, 내원(内园)과 예원(豫园)을 서로 이어 원중원(园中园)이 되었습니다.
내원(内园) 뒷편 가운데에는 고희대(古戏台)가 있는데, 1888년 좌남조북(坐南朝北)의 형국으로 지어져, “장강 이남에서 가장 오래된 희대(江南第一古戏台)”라고 평합니다.
희대(戏台)는 연극을 공연하는 무대를 가리키는 말인데, 이 곳의 희대는 사방 7미터 넓이에 좌우로 2미터 높이의 기둥이 받쳐져 있고, 대(台) 정면에는 사자(狮子), 봉황(凤凰), 쌍룡희주(双龙戏珠), 그 외 연극 주인공들의 형상이 목조로 장식되어 있는데, 모두 금박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천정은 반구형으로 높여져 있고, 20개 기둥이 교차하고, 22개의 동심원 모양의 가로기둥이 둥글게 받치고 있으며, 사방으로 스물여덟 마리의 금조(金鸟)가 마치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려는 형상으로 장식되어 있고, 그 가운데에는 원형 거울이 있어 무척이나 화려한 무대입니다^^
무대 뒤로는 여섯 짝의 문이 백스테이지와 무대를 공간적으로 나누고 있고, 고희대(古戏台) 양 옆 기둥에는 저명한 희곡 표현예술가 유진비(俞振飞, 1902-1993) 선생의 필적으로 대련이 걸려 있습니다. (만 자세히 글귀를 살펴보지는 못했습니다@@)
天增岁月人增寿,云想衣裳花想容
하늘이 세월을 더하면 사람은 나이를 먹고, 구름같은 치맛자락은 양귀비 꽃 같구나.
그 중, 뒷 수는 꽤 유명한 시에서 차용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이백(李白, 701-762) - 청평조(清平调)
云想衣裳花想容, 春风拂槛露华浓。
구름 같은 치맛자락은 양귀비 꽃만 같고, 살랑이는 봄바람은 영롱한 이슬만 같아,
若非群玉山头见, 会向瑶台月下逢。
군옥산(群玉山) 마루에서 보이지 않으면, 달빛 아래 요대(瑶台)에서 만나러 갈까 ?
맞은편에는 환운루(还云楼)가 있으며, 그 양쪽으로는 2채의 간랑(看廊)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평민(ㅎㅎ)이라면, 마당에서 주저앉아 연극을 관람했겠지만, 귀빈이라면, 이 곳 환운루(还云楼) 내 귀빈석에 편하게 걸터앉아 관람했겠지요...
사진에는 담지 못했는데, 맞은편 선방 안에는 '幽赏未已'라는 편액이 가로 걸려 있습니다.(라고 하네요.. 기억에는 안 남아 있네요@@)
즉슨, 당대 뿐 만 아니라, 전세대를 대표하는 시인 이백(李白)이 지은 유명한 사륙변려문(四六駢儷文)인, '봄날 밤 도화원(桃花园) 잔치에서 - 서문(春夜宴从弟桃花园序)'의 한 구절입니다... 문장이 하나같이 생생하게 어느 봄날 밤에 펼쳐진 잔치, 시인이 형제들과 어울리며, 술과 시문이 오고가는 풍경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시인은 드넓은 세상, 덧없는 세월, 찰나같은 인생, 보잘것없는 즐거움을 한탄하며, 촛불들고 밤을 긋던(秉烛夜游) 옛사람들을 떠올렸네요^^
李白 - 春夜宴从弟桃花园序
이백 - 봄날 밤, 동생들과 함께 한 도화원 연회 서(序)
夫天地者,万物之逆旅也;光阴者,百代之过客也。
무릇 천지라는 것은 만물이 관련이 있고, 세월이란 영원한 나그네인 법.
而浮生若梦,为欢几何?古人秉烛夜游,良有以也。
그리하여, 인생은 덧없이 꿈만 같으니, 즐거움이라 하여도 얼마 되겠는가 ? 옛사람들이라 촛불 들고 밤놀이 한 것은 과연 까닭이 있었구나 !
况阳春召我以烟景,大块假我以文章。会桃花之芳园,序天伦之乐事。
하물며 봄엔 양기가 넘쳐 아름다운 경치로 나를 부르고, 대자연이야 나에게 문장을 빌려주었으니. 복숭아 꽃 피어나는 동산에 모여 형제(天伦) 간에 즐거웠던 일을 서문(序文)으로 쓰네.
群季俊秀,皆为惠连;吾人咏歌,独惭康乐。
모인 여러 동생들 노래가 모두 빼어나니, 내 노래는 유독 보잘것 없구나.
幽赏未已,高谈转清。开琼筵以坐花,飞羽觞而醉月。
완상은 끝없이 그윽하게 이어지는데, 더더욱 고상하고 맑게 담소하니, 화려하게 열린 잔치, 꽃 사이에 앉으니, 술잔은 이리저리 돌고, 달은 취해버렸네.
不有佳咏,何伸雅怀?如诗不成,罚依金谷酒数。
뛰어난 작품이지 않고서야, 어찌 이 정취를 담겠는가 ? 만약 시를 못 지으면, 석숭(石崇) 금곡(金谷)처럼 벌주 서 말을 마실지니.
그 또다른 맞은 편에는 가이관(可以观)이 있습니다.
가이관(可以观)은 방형소청(方形小厅)으로, 그 옆으로는 용장(龙墙, 위의 용장은 면룡(眠龙)입니다^^)이 있고, 북쪽으로는 '동천복지(洞天福地)', 봉황정(凤凰亭), 남쪽으로는 별유천(别有天), 그 바깥으로는 다섯폭 석비, '중수내원기(重修内园记)'가 진열되어 있습니다. 아쉽지만, 담은 사진이 없네요^^;;; 너무 서둘러 나온 듯@@
郑适 - 赠张珽
정적 - 장정에게 드리는 시
昔为吟风啸月人,今为吟风啸月身。
옛적 겉멋에 바람을 읊고 달에 휘파람불었더니, 지금은 절로 바람을 읊고 달에 휘파람을 부네.
冢坏路边吟啸罢,安知今日又劳神。
무덤가는 길가에서 다 읊고 보니, 귀신들 오늘 또 시달렸을까 ?
예원 가장 으슥한 곳에서 나오는 가장 마지막 건물, 정관(静观)입니다.
청설당(晴雪堂)라고도 불리며, 내원(内园)의 중심 건물로 가산(假山)을 마주하고 있고 동쪽에는 자그마한 연못이 있는데, 정이(程颢)의 '가을 날 우연히 지은 시(秋日偶成)' 두번째 수, 그리고 문징명(文征明)의 소주(苏州) 졸정원(拙政园) 오죽유거정(梧竹幽居亭)의 대련 글귀에서 그 뜻을 따왔다고 합니다...
程颢 - 秋日偶成 二首
정이 - 가을 날 우연히 지은 시 두번째 수
寥寥天气已高秋,更倚凌虚百尺楼。
적막한 가을엔 이미 높아진 하늘, 백 척 솟은 누각에 기대어 있네.
世上利名群蠛蠓,古来兴废几浮沤。
세상의 명리는 날벌레들처럼 모여 있어, 옛부터 흥하고 망하는 것은 다 물거품이라.
退居陋巷颜回乐,不见长安李白愁。
누추한 거리로 물러앉아 편히 안회(颜回)의 즐거움을 누리니, 장안 거리 속 이백(李白)의 시름은 보이지도 않네.
两事到头须有得,我心处处自优游。
머릿속에 두 생각이 뒤섞여도 반드시 얻는 것이 있어, 내 마음은 곳곳을 제멋대로 노니누나.
闲来无事不从容,睡觉东窗日已红。
일없어 한가하니 쫓아다닐 일도 없어, 잠깨보면 동창(东窗)은 이미 붉었구나.
万物静观皆自得,四时佳兴与人同。
조용히 만물을 바라보니 스스로 다 깨닫게 되어, 사계절 아름다운 흥취가 사람과도 같구나.
道通天地有形外,思入风云变态中。
도는 온 천지 형체 없는 곳곳에 다 미치고, 생각은 바람마냥 구름마냥 변덕스레 변하네.
富贵不淫贫贱乐,男儿到此是豪雄。
부귀에 홀리지 않고 가난해도 즐기다보면, 사내가 이런 경지면 영웅호걸이지 않겠는가 ?
文征明 - 苏州 拙政园 梧竹幽居亭
문징명 - 소주 졸정원 오죽유거정
动观流水静观山 爽借清风明借月
거닐며 흐르는 냇물을 보고 머물며 산을 바라보니, 상쾌하니 맑은 바람부는 듯, 밝은 달빛 빌려온 듯,
내원은 다른 예원 영역과는 조금 성격이 달라 보입니다. 환룡교(环龙桥)와 함벽루(涵碧楼)와 내원 정관(静观)사이에 놓여져 있는 넓직한 통로에서 그런 느낌은 더해집니다.
거꾸로 거슬러 둘러보는 길...
환룡교(环龙桥)를 건너 함벽루(涵碧楼)를 지나치면서 우리는 옥화당(玉华堂) 영역으로 들어섭니다... 당장 눈 앞에, 환중대쾌(寰中大快)라고 커다랗게 새겨진 조벽(照墙)이 가로막습니다.
뜻을 알고보면 그 벽 뒤에 까꿍하고 우리를 맞이할 옥영롱에 대해 더 큰 기대를 하게 되네요@@
'환중(寰中)'은 기실 '온 우주(宇内)'를 뜻하니, 온 우주에서 으뜸으로 장쾌하다는 !!!
옛부터 옥영롱(玉玲珑)을 예찬해온 사람들은, 돌을 보며 옥영롱(玉玲珑)을 완상(玩賞)하고, 물을 보며 옥영롱(玉玲珑)을 완상(玩賞)하며, 그리고 담장을 보며 옥영롱(玉玲珑)을 완상(玩賞)하였다 하니, 다음 기회에는 꼭 ! 세 단계로 고조되는 흥취를 가져보고 싶네요^^
원림 조성 당시에는, 여기로 먼저 진입하도록 되어 있었던 듯 하고, 현재 이 구역의 중심건물은 옥화당(玉华堂)이지만, 우리가 보통의 동선으로 나아가다 보면 먼저 만나게 되는 건물은 함벽루입니다. 함벽루(涵碧楼)는 2층 건물로 남목조화루(楠木雕花楼)라고도 불리는데, 연못을 두고 청도각(听涛阁)과 마주보고 있고, 이 건물은 2003년 옛 명청 양식대로 새로 지었다고 합니다.
朱熹 - 即事有懷寄彥輔仲宗二兄二首 其一
주희 - 중형(仲兄) 주언(朱彥), 종형(宗兄) 주보(朱輔)가 들러 회한이 있어 즉흥으로 지은 두 수 중 첫 수
一水方涵碧,千林已變紅。農收爭暖日,老病怯高風。
한 줄기 물가는 푸르게 젖었는데 천 길 숲은 이미 붉었네. 농부는 따뜻한 날 앞다퉈 거두는데 늙고 병든 나는 높은 바람이 겁이 나네.
徙倚非無計,心期莫與同。向來歡會處,離合太匆匆。
한가로이 거닐까 생각못한 바는 아니나, 마음은 기약없이 같이 가네. 저번 연회에 반겨주더니, 만나고 떠나는 일이 어찌 이리 급하였을꼬.
함벽루(涵碧楼)에서 시작하는 적옥수랑(积玉水廊)은 옥화당(玉华堂) 옆을 지나 회경루(会景楼)에까지 이어집니다@@
적옥수랑(积玉水廊)은 회랑 옆 적옥봉(积玉峰)에서 이름을 따왔는데, 길이가 100미터에 달하여, 강남고전원림(江南古典园林)에서 가장 긴 수랑(水廊)의 하나로 손꼽히고, 적옥수랑(积玉水廊)은 옥화당 옆을 스쳐 좌북조남(坐北朝南)의 2층건물, 청도각(听涛阁) 옆까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청도각(听涛阁)의 이름은 황포강이 가까이 있어, 물 흐르는 소리가 마치 웃음소리같았다는 데서 따왔다고 하네요...
적옥(积玉)이란 이름이 곳곳에 붙어 있는데, 이는 진서(晋书) 육기(陆机)전에서, 육기(陆机, 261-303)의 문장을 상찬하면서 썼던 표현을 따왔다고 하네요^^
晋书 卷五十四 列传第二十四 陆机 陆云
진서 권54 열전 제 24 육기, 육운
...
后葛洪著书,称「机文犹玄圃之积玉,无非夜光焉,五河之吐流,泉源如一焉。其弘丽妍赡,英锐漂逸,亦一代之绝乎!」
훗날, 갈홍(葛洪, 281-341)이 글을 써 상찬하길, "육기의 문장은 마치 서왕모(西王母)의 현포(玄圃)에 모아둔 옥과 같고, 어둑한 밤 중에 빛이 나듯 하고, 포말을 일으키며 흘러가는 다섯 줄기 강물이 하나의 샘물에서 솟아 나옴과 같다. 널리 아름다우면서도 아름다이 넓다 할 수 있고, 그 문장은 날카롭게 싹이 트지만 편안하게 흘러가는데, 역시 단 대에 끊어졌음에랴 ! "라고 했다.
...
영화당과 함벽루 서쪽에는 옥영롱(玉玲珑) 서쪽으로 “친옥영롱(衬玉玲珑)”이라 새겨진 원동문(圆洞门)이 있고, 아담한 영역 안에는 장서루와 득월루가 서로 작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습니다. 가까이서 찍은 사진이 없어 다른 분의 사진을 빌려옵니다^^;;
장서루(藏书楼)는 녹양춘사(绿杨春榭), 서화루(书画楼)라고도 불리며, 여기서 상하이(上海)의 저명한 서화가들이 해상화파(海上画派)를 이루어 예원서화선회(豫园书画善会)를 결성하여, 임백년(任伯年), 허곡(虚谷), 오창석(吴昌硕), 고옹(高邕), 포작영(蒲作英), 전혜안(钱慧安) 등이 자주 모여, 작품도 출품하고, 1949년이후에는, 심윤묵(沈尹默)、오호범(吴湖帆), 유해속(刘海粟), 사치유(谢稚柳) 등 상하이(上海)의 저명한 화가들이 예원(豫园)을 여러 차례 들러 서화 소장품을 보며, 서화예술을 배웠다고 하네요...
거슬러 가는 왼쪽에 숨어 있던 득월루(得月楼)를 그냥 지나쳤네요@@ 공부를 위해 기록해둡니다...
득월루(得月楼)는 2층누각이며, 누각 서쪽 옆 가까이 하화지(荷花池)가 있어,북송의 시인이었던 소린(苏麟, 969-1052)의 싯구, “물 가까운 누각에서 먼저 달을 얻는다.(近水楼台先得月)”에서 뜻을 따와 이름지었다고 하네요...
苏麟 - 断句
소린 - 짧은 절구 한 수
近水楼台先得月,向阳花木易逢春。
물에 가까운 누대에서 먼저 달을 얻고, 볕을 향한 꽃나무가 쉬이 봄을 맞이하네.
아래층의 대청(大厅)은 기조당(绮藻堂)인데,
楼台近水,水面风来,水波如绮,藻采纷披
누대 옆에 물이 있어, 수면에 바림이 이니, 여울은 비단같고, 마름풀은 어지러이 흩날리네.
에서 뜻을 따와 명명되었다고 하네요...
장서루 옆에는 듬직한 기암괴석이 셋이나 버티고 있습니다.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이 영역의 주인공은 옥영롱(玉玲珑)입니다.
소주(苏州) 서운봉(瑞云峰), 항주(杭州) 추운봉(绉云峰)과 함께 강남 3대 명봉(名峰)의 하나로 손꼽히는데, 높이 3미터, 폭 1.5미터, 앞뒤로 0.8미터, 무게는 무려 3톤에 달합니다.
명실공히 태호석(太湖石)의 덕목인 추(皱, 주름져 있음), 누(漏, 물이 새어나오도록 틈이 있음), 수(瘦, 여위어 있음), 투(透, 구멍이 뚫어져 있음)의 미학을 여실히 과시하고 있어, 마치 백 개의 구멍에서 샘물이 솟아나오는 듯, 자욱한 안개가 드리운 듯, 명대의 저명한 문인 왕세정(王世贞, 1526-1590)은 '원림 속에 어울려 읊은 시(弇园杂咏)'에서 옥영롱(玉玲珑)을 칭송했습니다.
王世贞 - 弇园杂咏十六首 其十六
왕세정 - 원림 속에 어울려 읊은 시 열 여섯 수 중 마지막 수
玉玲珑 (缭虹)
压尽千峰耸碧空,佳名谁并玉玲珑。
수천 개 봉우리를 누르며 푸르른 창공을 치솟았으니, 아름다운 그 이름이 무엇인가, 옥영롱(玉玲珑)이라 하네.
梵音阁下眠三日,要看缭天吐白虹。
사흘을 범음각(梵音阁) 아래에 잠들었다가, 밖을 내다 보려 하늘을 휘감은 듯 흰 무지개를 토하네.
전하는 얘기로는 송 휘종(徽宗) 조길(赵佶, 1082-1135) 수도 변량(汴梁)에 거대한 원림 간악(艮岳)을 만들고는, 원림을 꾸미고자, 전국에서 명화기석(名花奇石)을 끌어모았는데, 이를 화석강(花石纲)이라 불렀고, 이런저런 이유로 옮겨지지 못한 전국의 명석을 간악유석(艮岳遗石)이라 불렀는데, 옥영롱(玉玲珑)이 그 중 하나라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네요..
옥영롱은 여러 사람 손을 거쳐 명대에 상해(上海) 포동(浦东) 삼림당진(三林塘镇) 출신으로 강서참의(江西参议)를 지냈던 저욱(储昱, 1468-1538)의 사가원림에 있었다가, 만력(万历)연간에 상서(尚书) 반윤단(潘允端)의 동생인 반윤량(潘允亮)이 저욱(储昱)의 사위가 되면서, 훗날 예원(豫园)이 지어지면서, 옥영롱도 예원으로 흘러들어왔다고 하네요.. 전설에 의하면, 돌을 받침과 함께 황포강을 옮겨올 때 돌풍이 불어, 이를 불길하게 여긴 뱃사람들이 무거운 돌들을 버리려 했지만, 웬일인지, 옥영롱은 받침돌과 딱 붙어 떨어지지 않아 무사했다고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옥화당(玉华堂)은 옥영롱(玉玲珑)을 마주하고 있는데, 당시 원림 주인이었던 반윤단(潘允端)의 서재였다고 하구요, 걸려 있는 '옥화(玉华)' 편액은 명(明)대의 서화가 문징명(文征明, 1470-1559)의 묵적을 집자한 것이라는데, 아쉽게도 찍은 사진이 없네요ㅠㅠ
가까이서 찍은 사진이 없어 아쉽지만, 멀리서 눈여겨 보셨다면, '인옥(引玉)' 동문(洞门)을 지나왔었던 것을 뒤돌아봐야 알 수 있었을 터입니다...
알고보면, 우리가 지나온 그 마당에는 온통, 옥화당(玉华堂), 백옥란(白玉兰), 옥영롱(玉玲珑), 적옥봉(积玉峰), 적옥랑(积玉廊)이 자리잡고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습니다...
과연 인옥(引玉)이라 자신있게 명명했을 법합니다...
길게 이어져 왼쪽으로 틀어 옥화당 앞을 지나가는 연못에는 네다섯개의 돌다리가 놓여져 있는데, 그 중 회경루 일대에 놓여 있는 삼곡교(三曲桥)와 유상정(流觞亭)의 풍경은 각별합니다^^
조금 긴 글이긴 하지만, 그 정취를 복기하는 의미에서 이전 난정 후기에서 난정집서(兰亭集序)를 소환합니다...
난정집서(兰亭集序) - 왕희지(王羲之)
永和九年,岁在癸丑,暮春之初,会于会稽山阴之兰亭,修禊事也。
영화구년 계축년 늦은 봄 초순, 회계산(会稽山) 북쪽 난정(兰亭)에서 모였으니, 계(禊)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였다.
群贤毕至,少长咸集。
많은 현인들이 다 왔는데, 젊은이와 연장자들이 모두 모였다.
此地有崇山峻岭,茂林修竹,又有清流激湍,映带左右。
이곳은 높은 산, 험준한 봉우리들, 무성한 숲과 길게 자란 대나무가 있고, 맑은 시냇물과 여울은 정자의 좌우를 띠처럼 둘러싸며 서로 비춘다.
引以为流觞曲水,列坐其次,虽无丝竹管弦之盛,一觞一咏,亦足以畅叙幽情。
끌어들여 굽이쳐 흐르는 시냇물 위에 술잔을 띄우도록 만들어진 물가를 따라 줄지어 둘러 앉으니,비록 거문고나 피리 같은 음악이 있는 성대한 연회는 아닐지라도 술 한 잔 마시고 시 한 수 읊으니 또한 그윽한 감정을 펴기에 족하였다.
是日也,天朗气清,惠风和畅。
이 날, 하늘은 깨끗하고 공기는 맑았으며 바람은 은혜로이 화창하였다.
仰观宇宙之大,俯察品类之盛,所以游目骋怀,足以极视听之娱,信可乐也。
우러러보매 우주는 드넓고, 고개 숙여 살펴보매 만물은 무성하니, 자유로이 눈길 닿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내달리듯 생각하며, 보이고 들리는 지극한 즐거움에 참으로 즐길만 하였다.
夫人之相与,俯仰一世。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우러르고 굽어보며 일생을 살아간다.
或取诸怀抱,悟言一室之内;或因寄所托,放浪形骸之外。
어떤 이는 회포에 취해 방 안에서 벗들과 마주앉아 이야기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마음 가는 바를 따라 육신의 밖을 거리낌없이 뛰놀기도 하네.
虽趣舍万殊,静躁不同,当其欣于所遇,暂得于己,快然自足,不知老之将至;
비록 모두들 취향이 만 가지로 다르고,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다 같지 않으나, 저마다 취향과 맞으면 기뻐하며 잠시나마 득의만만하니, 어느덧 노년이 다가오는 것조차 모르고 지내누나 ;
及其所之既倦,情随事迁,感慨系之矣。
그러다 어느덧 지루해지거나 변해가는 일에 따라 정이 옮겨가게 되면서 여러 감회가 뒤따른다.
向之所欣,俯仰之间,已为陈迹,犹不能不以之兴怀,况修短随化,终期于尽!
지난 즐거움이 찰나에 옛 자취가 되어 버려도, 더더욱 그로 인해 감회가 없을 수 없으니, 하물며 길고 짧은 목숨 모두가 자연의 조화를 따라 마침내 끝에 이르게 되는 데에야 !
古人云,“死生亦大矣。”岂不痛哉!
옛 사람은, “죽고 사는 것은 매우 큰 일이다.”라 하였으니, 이 어찌 애통하지 않겠는가 !
每览昔人兴感之由,若合一契,未尝不临文嗟悼,不能喻之于怀。
옛 사람들의 감회를 느꼈던 까닭을 알게 될 적마다, 내 생각과 하나같이 똑같으니, 옛 문장을 대할 때마다 탄식하고 슬퍼하지 않을 수가 없고, 마음을 달래려고 해도 그리 되지 않는다.
固知一死生为虚诞,齐彭殇为妄作。
죽고 사는 것이 하나라는 것은 진실로 허황된 말이요, 팔백년을 산 팽조(彭祖)나 요절(夭折)한 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 또한 망령된 말임을 알겠다.
后之视今,亦犹今之视昔。
후세에 지금 우리를 보는 것 또한 우리가 옛사람들을 보는 것과 같으리니.
悲夫!故列叙时人,录其所述。
슬프도다 ! 그리하여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의 이름과 지은 시부(诗赋)를 순서대로 적었다.
虽世殊事异,所以兴怀,其致一也。
비록 세대가 바뀌고 세태도 변하여도, 감회를 일으키는 이치는 마찬가지일리니.
后之览者,亦将有感于斯文。
훗날 이 글을 읽는 자 또한, 이 글에 감회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저 유명한 난정서(兰亭序)의 '유상곡수(流觞曲水)'에서 뜻을 취한 만큼, 그 은은하고 그윽한 정취가 일품입니다 !! 걸어도 걸어도 정취는 더더욱 고조되고, 수미쌍관일까요 ?? 난정을 들른 정취를 떠올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네요^^
회경루(会景楼) 일대에서는 아무래도 수경이 압도적이라, 물을 중심으로 앞다투어 담느라 정작 회경루를 제대로 담지 못했네요ㅠㅠ 가히 예원(豫园) 한가운데에 있어 가장 빼어난 조망을 즐길 수 있는 곳이랍니다^^;;;
회경루(会景楼)는 1870년에 지은 이층건물로, 일층은 돈후당(敦厚堂), 이층은 회경루(会景楼)라고 불립니다. 지도를 봐도 삼면에 연못이 두르고 있고, 다리로 저편으로 건너갈 상상으로도 감흥이 고조될 풍경을 선사합니다. 누각에는 아래와 같이 대련이 걸려 있다고 하는데, 직접 보지는 못했네요...
曲槛遥通沧海月;虚檐不隔泖峰云。
굽은 난간은 바다 속 멀리 달까지 아득히 닿았고, 헛처마에 닿은 묘봉(泖峰) 위엔 구름이 이네.
난간 주위를 빙 둘러보면 옆쪽 연못의 아담한 경치, 앞쪽 연못의 장쾌한 전망이 교묘하게 대비된다고 하고, 누각을 오르면 조망도 가능하다는데, 올라갈 수 있었는지는@@
인옥 동문을 거쳐 삼곡교를 건너는 사람들 너머로 완운가산(浣云假山)이 담장 아래 아기자기 쌓여져 있다고 하고, 안휘(安徽) 소호(巢湖)에서 난 호석(湖石)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바삐 지나가는 통에, 어느 가산이었는지 가물가물해서 검색해봤더니, 아래의 사진의 가산을 지칭했던 듯합니다^^;;;
물에 비친 가산(假山)과 하늘에 떠있는 채운(彩云)이 혼연일체가 되어 마치 물 속에 희구름이 씻긴 듯, 구름사이에서 가산을 물들이듯 하여, '완운(浣云)'이라 이름지었다고 하네요.
연못의 다른 끝에는 1959년에 새로 지은 구사헌(九狮轩)이 서있습니다.
넓직하게 조성되어 있는 가운데 연못의 중요한 경관을 구성하는 회경루와 함께 또 다른 경점이 구사헌(九狮轩)인데, 개방형 건물로, 연못에 면하여 그 앞에 월대(月台)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구사(九狮)는 '구세(救世)'와 음이 비슷하여 그 의미를 따왔다 볼 수 있을 듯...
저 멀리 유상정과 삼곡교를 다시 되돌아봅니다.
구사헌 옆으로 길을 빠져나가다 보면 담장 위로는 쌍룡희주(双龙戏珠)가 뒤로 지나가고, 백여년 전 역사 속 현장, 점춘당(点春堂) 구역으로 들어갑니다...
우선 150년 전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담장을 뒤돌아보며 살펴봅니다...
쌍룡희주(双龙戏珠)의 담장 위엔, 육기(陆机, 261-303)의 역작이자 대표적인 문학이론인 '문부(文赋)의 한 구절, “바위는 옥을 감추고도 빛이 나며, 물은 옥을 품고도 시냇물이 어여쁘네.(石韫玉而生辉,水怀珠而川媚)" 에서 따온 '山辉川媚' 네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아래에, 육기(陆机, 261-303)의 작품 사이사이에 소개하는 서첩은 당(唐) 대의 명필 육간지(陸柬之, 585-638)의 육기문부권(陆机文赋卷)입니다...
초당(初唐) 묵적으로는 드물게 잘 보존되어 온 귀중한 묵적이고, 육기(陆机)의 먼 후손이었던 육간지(陸柬之)가 젊은 시절 선조의 필생의 역작, 문부(文賦)를 워낙 감명깊게 읽어 바로 써보았지만, 선배들의 묵적과 비교하여 성에 차지 않아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하구요, 그래서 서예가 무르익을때까지 끊임없이 노력을 거듭하여, 명필의 경지에 이르른 만년에 이르러 다시 한번 문부를 써내려간 것이 바로 이 묵적입니다.. 글이 조금 길지만, 공부삼아 옮겨봅니다...
陆机 - 文赋
육기 - 문부
序
서
余每观才士之所作,窃有以得其用心。夫放言遣辞,良多变矣,妍蚩好恶,可得而言。
나는 매번 선비들이 지었던 글을 볼 때마다, 그 마음씀씀이를 알 수 있었다. 무릇 언어를 구사함에는 확실히 변화가 많은 법으로, 아름다운 것에서 추한 것까지, 좋은 것에서 나쁜 것까지 논할 만하다.
每自属文,尤见其情,恒患意不称物,文不逮意,盖非知之难,能之难也。
특히 매번 나 스스로 글을 지으며 그 정황을 보면, 뜻이 항상 사물을 칭하지 못하고, 글이 그 의미를 제대로 담지 못함을 두려워하였으니, 아마도 알기 어렵기 보다, 능숙하기 어려웠음에랴.
故作文赋,以述先士之盛藻,因论作文之利害所由,佗日殆可谓曲尽其妙。
고로, 부(文赋)를 하나 지어, 이전 선비들의 빼어난 글귀들을 설명하고, 그에 따라 글을 짓는 것의 이롭고 해로운 이유를 논할지니, 훗날 그 모든 미묘함을 빠짐없이 묘사하였다 할 것이다.
至於操斧伐柯,虽取则不远,若夫随手之变,良难以辞逮,盖所能言者,具於此云。
도끼를 쥐고 도끼자루 삼을 나무를 벤다치면, 비록 자루의 길이나 크기로 취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으나, 손이 다룰 때의 변화같은 것은 확실히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우니, 무릇 이 글에 내가 말할 수 있는 바를 낱낱이 다 언급하고자 한다.
伫中区以玄览,颐情志於典坟。遵四时以叹逝,瞻万物而思纷。
먼저, 세상 한 가운데에 오래도록 서 있으며 깊이 살펴보며, 고전(典坟)에서 마음과 뜻을 기른다. 사계절의 변화를 따르다 흘러 지나감을 탄식하게 되니, 만물의 변화를 바라보며 생각이 많아진다.
悲落叶於劲秋,喜柔条於芳春,心懔懔以怀霜,志眇眇而临云。
매서운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잎을 슬퍼하고, 꽃피는 봄에 하늘거리는 가지를 기뻐하며, 마음으로 두려워하고 삼가하니, 서리는 하얗게 서리고, 뜻은 높이높이 구름에 닿는다.
咏世德之骏烈,诵先人之清芬。游文章之林府,嘉丽藻之彬彬。慨投篇而援笔,聊宣之乎斯文。
세상 뛰어나고 아름다운 이의 덕망을 노래하고, 선현의 맑은 향기 그윽한 작품을 외운다. 빼어난 글로 가득한 숲 속을 노닐며, 화려한 글귀가 서로 조화로움을 즐긴다. 이에 서슴없이 책을 옆으로 던져 놓고 붓을 끌어다가, 그 마음을 잠시 이 글에서 풀어보고자 한다.
其始也,皆收视反听,耽思傍讯,精骛八极,心游万仞。
그 처음에는 보고 듣는 것을 두루 둘이켜보며 깊이 생각해보고, 그에 따라 물어보고 답을 구한다면, 정신은 팔방의 끝까지 달려가기도 하고, 마음은 만길 깊이까지 떠돌기도 한다.
其致也,情曈昽而弥鲜,物昭晣而互进。
그러다 보면 그 끝엔 마음이 밝아지며 점점 선명해지니, 함께 사물도 밝게 드러난다.
倾群言之沥液,漱六艺之芳润。浮天渊以安流,濯下泉而潜浸。
많은 책으로부터 한 방울의 글까지 쏟아내고, 향기롭고 윤기나는 고전(六艺)으로 깨끗이 씻는다. 하늘같이 넖은 연못 위에 떠서 평안히 흘러가기도 하고, 깊은 샘에 잠겨 씻어보기도 한다.
於是沈辞怫悦,若游鱼衔钩,而出重渊之深;浮藻联翩,若翰鸟缨缴,而坠曾云之峻。
이처럼 깊이 박혀있던 글귀가 나올 듯 말 듯함은 마치 노닐던 물고기가 낚시바늘을 입에 물고는 깊은 연못에서 튀어나오는 듯하고, 새가 날개를 푸드덕거리듯 글귀가 계속해서 떠오르는 것은 마치 높이 나는 새가 주살의 줄에 감겨 높은 구름에서 가파르게 떨어지듯 한다.
收百世之阙文,采千载之遗韵。谢朝华於已披,启夕秀於未振。
여러 시대 동안 미처 기록되지 못했던 문장을 모으고, 오랜 동안 쓰이지 않았던 싯귀를 채록한다. 이미 쓰였던 중에서도 조정의 화려한 문장은 피하고, 쓰이지 않았던 중에서도 한 웅큼 빼어난 문장을 되새긴다.
观古今於须臾,抚四海於一瞬。然后选义按部,考辞就班。
찰나에 옛 일부터 지금까지 돌이켜보며, 한 순간에 천하를 돌아본다. 그런 다음, 적절히 뜻을 가려 부(部)를 구분하고, 문체를 살펴 반(班)을 고른다.
抱暑者咸叩,怀响者毕弹。或因枝以振叶,或沿波而讨源。
두터운 것은 전부 두드려보고, 울림을 품은 것은 모두 튕겨 본다. 가지로부터 잎을 거두기도 하고, 물결 언저리에서 근원을 찾기도 한다.
或本隐以之显,或求易而得难。或虎变而兽扰,或龙见而鸟澜。
본디 감추어진 뜻이 드러나기도 하고, 쉬운 글귀를 찾다가 어려운 글귀와 마주치기도 함이, 호랑이가 움찔대면 온갖 짐승들이 시끄러워지듯, 용이 나타나면 새들이 흩어지듯 한다.
或妥帖而易施,或岨峿而不安。罄澄心以凝思,眇众虑而为言。
혹은 딱 맞는 문장이 쉬이 나오기도 하지만, 혹은 맞지 않고 어긋나 불안해지기도 한다. 이에, 마음을 비우고 맑게 하여 생각이 맺히면, 많이 견줘보며 헤아렸다가 말로 뱉어본다.
笼天地於形内,挫万物於笔端。始踯躅於燥吻,终流离於濡翰。
천지를 글 속에 집어 넣고, 만물을 붓 끝에 매어 놓는다. 처음에는 입술 마른 마냥 머뭇거려도, 종국에는 담뿍 적신 붓 마냥 흘러나온다.
理扶质以立干,文垂条而结繁。信情貌之不差,故每变而在颜。
이치는 줄기를 정하게 하여 근본을 붙잡고, 문장이 가지를 드리우며 결국에는 무성하게 된다. 실로 감정과 표정이 차이가 없어, 감정이 변할 때마다 얼굴에 나타나게 된다.
思涉乐其必笑,方言哀而已叹。或操觚以率尔,或含毫而邈然。
즐거움에 생각이 미치게 되면 반드시 웃게 되고, 바야흐로 슬픔을 말하다 보면 벌써 한숨짓게 된다. 혹은 술잔을 쥐고도 개의치 않다가도, 혹은 담뿍 담근 붓을 쥐고도 아득하기도 한다.
伊兹事之可乐,固圣贤之所钦。课虚无以责有,叩寂寞而求音。
이렇듯 문장에 힘쓰는 일은 가히 낙이라 할 만하여, 진실로 성현들이 흠모하는 바이다. 공허한 중에 찾아내어 형상을 재촉하고, 적막한 중에 두드려 소리를 얻어낸다.
函绵邈於尺素,吐滂沛乎寸心。言恢之而弥广,思按之而逾深。
단 한 척 흰 솜에서 아득하게 얽혀있고, 단 일 촌의 마음에서 거센 물살이 쏟아져나온다. 말은 넓힐수록 더욱 넓어지고, 생각은 살필수록 더욱 깊어진다.
播芳蕤之馥馥,发青条之森森。粲风飞而猋竖,郁云起乎翰林。
향내나는 꽃을 흩뜨려 농염한 향기로 가득해지듯 하고, 푸르른 가지를 드러내어 더더욱 울창해지듯 한다. 찬연한 바람이 불다 회오리치며 솟구치듯 하고, 성대하게 떨쳐 일어났으니, 한림(翰林)이라 할 수 있다.
体有万殊,物无一量。纷纭挥霍,形难为状。
문체란 만 가지로 달라, 무릇 만물을 한 가지로 가늠할 수 없으니, 번다하고도 어수선하면서도 휘몰아치듯 사라지니, 그 형상을 형용하기가 어렵다.
辞程才以效伎,意司契而为匠。在有无而黾勉,当浅深而不让。
사(辞)는 글 쓰는 재주를 드러냄으로써 재능을 가늠하며, 도로 천하를 다스린다는 뜻으로 궁극에는 장인(匠人)이 된다, 문장을 넣고 빼는 데 힘써 고민하되, 그 의미가 깊고 얕은 정도에 대해서는 양보하는 법이 없다.
虽离方而遯员,期穷形而尽相。故夫夸目者尚奢,惬心者贵当。言穷者无隘,论达者唯旷。
비록 네모나 보이지도 둥글어 보이지도 않을 때에도, 궁극의 모양새를 기대하여 사력을 다해 살펴본다. 고로 무릇 눈을 자랑하는 자는 사치를 숭상하되, 마음이 유쾌한 자는 합당함을 귀히 여긴다. 말로 극에 달한 자는 궁색하지 않은 법이요, 논변이 매끄러운 자는 너그러울 뿐이다.
诗缘情而绮靡,赋体物而浏亮。碑披文以相质,诔缠绵而凄怆。
시(诗)는 정취(情趣)에서 연유하여 비단같이 화려하고, 부(赋)는 만물을 바탕으로 하여 맑고 분명하며, 비(碑)는 문장으로 들추어내어 바탕이 자세히 보이고, 뇌사(誄詞)는 얽힌 솜과 같아 처량하고 슬프다.
铭博约而温润,箴顿挫而清壮。颂优游以彬蔚,论精微而朗畅。奏平彻以闲雅,说炜晔而谲诳。
명(铭)은 두루 간략하게 지으니 온화하며 부드럽고, 잠(箴)은 조아리고 꺾는 말로 지으니 맑고 씩씩하며, 송(颂)은 글이 빛나고 아름다워 떠다니듯 여유로우며, 논(论)은 면밀하고 자세하여 유쾌하면서도 막힘이 없으며, 주(奏)는 규범과 품위을 갖추면서도 기울어짐없이 명확하고. 설(说)은 문장이 밝고 성대하나, 어긋나고 속이기도 한다.
虽区分之在兹,亦禁邪而制放。要辞达而理举,故无取乎冗长。
비록 힘쓰는 바에 따라 나누었지만, 모두가 사악함을 삼가하고 방종하지 않게 절제하고자 하니, 요점은 문장이 매끄러우면서도 이치가 드러나야 하고, 고로 쓸모없이 늘어지는 데서 취하지 않을 일이다.
其为物也多姿,其为体也屡迁。其会意也尚巧,其遣言也贵妍。暨音声之迭代,若五色之相宣。
그 만물의 모습이 제각각이듯, 그 본질 또한 여러번 달라진다. 그 뜻을 이해하려는 데에서 오히려 기교를 부리게 되고, 그 말을 내어놓으면서 아름다움을 중히 여긴다. 소리가 번갈아 이어지며 다다르게 하는 것은, 마치 오색이 서로 밝혀주는 것과 같다.
虽逝止之无常,固崎锜而难便。苟达变而识次,犹开流以纳泉。
비록 가고 멈추는 것이 일정하지 않아, 딱딱하고 삐뚤한 솥마냥 편하지 않겠지만, 만약 변화에 통달하여 차례를 알게 되었을 땐, 가히 물길을 샘으로 끌어와 받는 것과도 같게 된다.
如失机而后会,恒操末以续颠。谬玄黄之袟叙,故淟涊而不鲜。
만약 그 틀을 잃었다가 모으려다가는, 이어보고 뒤집어 봐도 늘 그 끄트머리만 잡게 되고, 우주 만물의 질서와 어긋나게 되어, 그리하여 때가 묻은 듯 땀이 나는 듯 깨끗하지 않다.
或仰逼於先条,或俯侵於后章。或辞害而理比,或言顺而义妨。离之则双美,合之则两伤。
혹 올려보매 앞의 글을 핍박하기도 하고, 내려보매 뒤의 글을 침범하기도 한다. 혹 문장은 거슬려도 이치는 견줄 만하기도 하고, 말은 순조로와도 뜻을 가로막기도 한다. 이 둘을 나누면 서로 아름다워지겠으나, 합치게 되면 서로 상하게 된다.
考殿最於锱铢,定去留於毫芒。苟铨衡之所裁,固应绳其必当。
궁을 지을 때도 으뜸으로 짓고자 하나하나 저울질하여, 터럭이나 가시같은 것을 두고도 고칠지 지나칠지 정하니, 저울질하여 잘라내야 할 것 같으면, 반드시 먹줄에 맞춰 잘라내야 한다.
或文繁理富,而意不指适。极无两致,尽不可益。
혹 문장이 번다하고 이치가 넘쳐나도, 그 뜻이 요체를 가리키지 못한다. 두 끝에 다다를 수는 없으니, 다하였으면 더할 수 없는 일이다.
立片言而居要,乃一篇之警策。虽众辞之有条,必待兹而效绩。
단 몇 마디 말이라도 요체를 담고 있으면, 이내 한 편의 경책(警策)이 된다. 비록 많은 문장마다 조리가 있다해도, 반드시 이 요체를 지녀야만 비로소 성과가 드러나게 된다.
亮功多而累寡,故取足而不易。或藻思绮合,清丽千眠。炳若缛绣,凄若繁弦。
과연 성과는 눈부시고 허물은 적으니, 만족스러우면 바꾸지 않는다. 혹은 겉꾸밈과 생각이 아름답게 맞춰지면, 맑고 고움이 가득해지니, 환하기가 화려한 자수와도 같고, 처연하기가 쉴새없이 튕기는 거문고 소리와도 같게 된다.
必所拟之不殊,乃暗合乎曩篇。虽杼轴於予怀,怵佗人之我先。苟伤廉而愆义,亦虽爱而必捐。
견주어본 바와 분명하게 다르지 않을땐, 곧 어렴풋하게라도 반드시 이전 작품과 일치한다는 뜻이니, 비록 내 품은 뜻에서 글을 구상했더라도, 다른 이의 글이 나보다 먼저 지어졌었는지 두려워하게 된다. 만약 청렴이 훼손되고 의(义)가 어그러질 일이라면, 비록 아끼는 문장이라도 반드시 버려야 한다.
或苕发颖竖,离众绝致。形不可逐,响难为系。块孤立而特峙,非常音之所纬。
혹여 완두 꽃이 피고 이삭이 패이듯, 여타 문장 가운데서도 절묘함에 이르게 된다. 그 형용은 따라잡을 수 없고, 그 울림은 매어놓기가 어렵다. 문장만이 외로이 서 있고 빼어나게 우뚝 솟으니, 평범한 글들과 엮일 수가 없다.
心牢落而无偶,意徘徊而不能揥。石韫玉而山辉,水怀珠而川媚。彼榛楛之勿翦,亦蒙荣於集翠。
마음으론 쓸쓸해보여도 짝지워 줄 것이 없으니, 뜻은 오락가락하고 차마 버리지 못한다. 옥을 감싸고 있는 바위가 있어 산이 빛이 나고, 진주를 품고 있는 물이 있어 시내가 아름다워진다. 저 잡목들을 베어내지 않은 것은, 역시 어둑어둑하니 무성하여 물총새들이 여기 모여들기 때문이다.
缀下里於白雪,吾亦济夫所伟。
격조 높은 '백운(白雪)' 곡과 상스러운 '하리(下里)' 곡를 엮은 것 또한, 그렇게 훌륭하게 어울리도록 엮은 것이다.
或讬言於短韵,对穷迹而孤兴。俯寂寞而无友,仰寥廓而莫承。
혹은 말에 의탁하여 짧게 운을 띄웠는데, 성취가 보잘것없어 보이면, 흥이 식어버린다. 굽어보면 적막하여 벗이 없고, 올려보면 광활하여 이을 것이 없다.
譬偏弦之独张,含清唱而靡应。或寄辞於瘁音,徒靡言而弗华。
비유하자면 현을 하나 튕겨 홀로 울려봐도, 맑은 노래를 담았으되 호응하는 가락이 없다 할 것이다. 혹은 사(辞)를 빌려 병든 소리를 낸다면, 단지 말만 화려할 뿐, 빛이 나지 않는다.
混妍蚩而成体,累良质而为瑕。象下管之偏疾,故虽应而不和。
곱고 추한 것들이 한데 섞여 하나가 되었다면, 아름다웠던 바탕이 더러워져 허물이 된다. 당하(堂下)에서 울리는 피리소리가 치우치는 형상이라, 호응한다 해도 어울리지 못한다.
或遗理以存异,徒寻虚以逐微。言寡情而鲜爱,辞浮漂而不归。
혹은 이치는 빠뜨리고 괴이함을 남기며, 공허함만을 찾고 미묘함만을 쫓는다. 말은 정취(情趣)가 빈약하고 인정(人情)이 드물고, 사(辞)는 떠다니다가 제자리로 오지 못한다.
犹弦么而徽急,故虽和而不悲。或奔放以谐合,务嘈囋而妖冶。
마치 현이 짧으면 소리는 아름다워도 급해져, 비록 조화로와도 구슬프지 못하다. 혹은 문장마다 화합하며 자유로이 내달리다가도, 요란스레 떠들다가 요염하게 꾸미려 든다.
徒悦目而偶俗,固高声而曲下。寤防露与桑间,又虽悲而不雅。
다만 눈요기는 되어 속된 것과 짝이 되니, 단연코 소리만 크지 노래는 볼품없다. 방로(防露)나 상간(桑间) 같은 망국의 노래를 들으면, 또한 비통하지만 우아한 맛이 없다.
或清虚以婉约,每除烦而去滥。阙大羹之遗味,同朱弦之清汜。
혹은 완곡하면서도 간략하면서 맑고 깨끗하며, 매양 번잡함을 피하면서 넘치는 말은 빼버린다. 대갱(大羹) 국물 맛에 여운이 모자란 것은, 주현(朱弦) 튕기는 소리가 맑아도 겉도는 것과 매한가지다.
虽一唱而三叹,固既雅而不艳。
비록 한 사람의 노래에 세 사람이 탄식하였으니, 단연코 이미 우아하다 하겠으나 아름답다 할 수 없겠다.
若夫丰约之裁,俯仰之形。因宜适变,曲有微情。
만약 대저 글을 풀을지 묶을지 고치거나, 올려보거나 내려다 보는 형세에서, 그로 인해 마땅히 속히 바뀌어야, 곡에 미묘한 정취가 담기게 된다.
或言拙而喻巧,或理朴而辞轻。或袭故而弥新,或沿浊而更清。
혹은 말이 서툴하여도 비유는 교묘하기도 하고, 혹은 이치를 깨우치면서도 문장이 가볍기도 한다. 혹은 관습(慣習)에 얽매었음에도 새로움이 가득하고, 혹은 탁류(浊流)에 머물렀어도 다시금 맑아지기도 한다.
或览之而必察,或研之而后精。譬犹舞者赴节以投袂,歌者应弦而遣声。
혹은 훑어만 봐도 반드시 드러나기도 하고, 혹은 깊이 갈고 닦은 후에야 밝아지기도 한다. 비유컨대, 춤추는 이가 박자에 맞추어 소매를 떨치는 것과, 노래하는 이가 현 튕기는 소리에 호응하여 소리를 내는 것과 같다.
是盖轮扁所不得言,故亦非华说之所能精。普辞条与文律,良余膺之所服。
이는 수레 장인 윤편(轮扁)이라도 말하지 못할 일이요, 고로 화려한 언사만으로 능히 밝힐 수가 없다. 조리있는 글귀와 문장의 운률(韻律)을 넓히고자 하는 것이, 진실로 내가 가슴 속에 품은 뜻이다.
练世情之常尤,识前修之所淑。虽浚发於巧心,或受欠於拙目。
세상사의 일상적인 허물을 익히면서, 선현의 맑은 모습을 찾아내야 한다. 비록 공교로운 마음에 심오한 문장으로 밝히고자 해도, 혹은 졸렬한 안목에 하품거리가 되기도 한다.
彼琼敷与玉藻,若中原之有菽。同橐龠之罔穷,与天地乎并育。
저와 같이 구슬처럼 펼쳐진 짜임새는, 마치 들판이 콩으로 그득한 듯하니, 풀무에 끊임없이 바람을 불어넣는 것과 한가지로, 천지와 더불어 키워나갈 일이다.
虽纷蔼於此世,嗟不盈於予掬。患挈瓶之屡空,病昌言之难属。
비록 이 세상에 화려한 글들이 차고 넘치지만, 아! 손 한 움큼에도 차지 않는다. 밑천이 자주 바닥나곤 하는 겨우 호리병만한 재주를 근심하고, 유창하게 짓기 어려움을 괴로워한다.
故踸踔於短垣,放庸音以足曲。恒遗恨以终篇,岂怀盈而自足。
고로 낮은 턱에도 절룩거리다가, 볼품없는 소리로 곡을 짓고 만다. 항상 책을 마무리할 때마다 한이 남으니, 어찌 이정도면 만족스럽다 하겠는가.
惧蒙尘於叩缶,顾取笑乎鸣玉。若夫应感之会,通塞之纪。来不可遏,去不可止。
두드리던 장구에 먼지가 수북하니 낡아, 옥(玉)같이 맑은 소리에게 웃음거리가 될까 두렵다. 혹은 무릇 호응이 된다 느껴지더라도, 변방을 오가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오면 막을 수 없고, 가면 붙들 수 없다.
藏若景灭,行犹响起。方天机之骏利,夫何纷而不理。
마치 햇빛이 구름에 가려지듯 숨어버리다가, 마치 소리가 울려나오 듯 흘러나온다. 무릇 하늘의 뜻이란 날랜 준마(駿馬)와도 같으니, 대저 어찌 어지러이 하면서 깨달을 수 있겠는가.
思风发於胸臆,言泉流於唇齿。纷威蕤以馺鹓,唯毫素之所拟。
생각은 가슴 속으로부터 바람처럼 불어나오고, 말은 이와 입술 사이에서 샘솟아 흐른다. 원추(鹓鶵)가 분주하게 유빈(蕤賓) 음을 위세있게 흐트렸다 하나, 오직 붓 끝으로 헤아릴 바이다.
文徽徽以溢目,音泠泠而盈耳。
문장은 아름다워 눈에 가득하고, 소리는 맑아서 귀에 가득하다.
及其六情底滞,志往神留。兀若枯木,豁若涸流。
이내 육정(六情)마저 바닥부터 막히고, 뜻은 떠나고자 하여도 정신은 머물러 있으니, 꼼짝 않은 모습이 고목과도 같고, 비어 있는 모습이 말라버린 시내와도 같다.
揽营魂以探赜,顿精爽於自求。理翳翳而愈伏,思乙乙其若抽。
넋을 다잡으며 깊이 탐구함에 있어, 스스로 이치를 구하여 정령(精爽)을 가지런히 한다. 이치는 어둑어둑하여 더욱더 숨어버리고, 생각을 말하는 것 또한 마치 억지로 뽑아내는 듯하다.
是以或竭情而多悔,或率意而寡尤。虽兹物之在我,非余力之所戮。
이로써 마음의 생각을 다하여도 그 후회가 크기도 하고, 뜻을 따라갔는데 그 과실이 적기도 하다. 비록 이 모든 일이 나에게 달려있지만, 내 힘으로 저지른 것도 아니다.
故时抚空怀而自惋,吾未识夫开塞之所由。
고로 때때로 공연히 어루만지며 달래기도 하다가, 스스로 한탄하기도 하지만, 대저 생각이 트이고 막히는 이유를 나는 아직 모르겠다.
伊兹文之为用,固众理之所因。恢万里而无阂,通亿载而为津。
여기서 문장이 소용이 되니, 단연코 많은 이치가 여기에서 연유한다. 막힘 없이 만리를 넓히고, 억 년을 오가는 인연이 된다.
俯贻则於来叶,仰观象乎古人。济文武於将坠,宣风声於不泯。
굽어 보면 후세에 글 쓰는 법칙을 물려주고, 올려 보면 선현에게서 법도를 본받는다. 혹여 주 문왕과 무왕의 도가 무너지려 할 때 그 도를 돕고, 멸하여 없어지지 않도록 가르침을 널리 편다.
涂无远而不弥,理无微而弗纶。
길은 멀어도 두루 닿는 법이며, 이치는 미세하여도 촘촘히 다스리지 법이다.
配霑润於云雨,象变化乎鬼神。被金石而德广,流管弦而日新。
하늘에서 비가 내려 젖어들 듯 골고루 나눠지고, 그 형상은 귀신마냥 변화무쌍하다. 종(鐘) 소리, 경(磬) 소리가 퍼지듯, 덕성도 넓어지고, 피리 부는 소리, 현 튕기는 소리가 퍼지듯, 나날이 새로와진다.
옥을 거쳐 들어온 이 공간의 주인공은 봄을 부르는(点春) 점춘당(点春堂)으로 정면 다섯칸의 당당한 규모의 대청(大厅) 건물로, 그 뒤편으로는 임지수각(临池水阁)의 모양을 띠고 있습니다.
점춘당(点春堂)이란 이 시적인 이름은, 송대 시인이었던 소동파(苏东坡)의 사(词) '戚氏·玉龟山(척산·옥구산)'에 나온 “물총새가 봄의 아름다움을 부르네(翠点春妍)”에서 뜻을 따왔다고 합니다.
苏轼 - 戚氏·玉龟山
소식 - 척씨·옥구산
玉龟山。东皇灵姥统群仙。绛阙岧峣,翠房深迥,倚霏烟。
옥구산이여, 동황(东皇) 영모(灵姥) 여러 신선을 거느렸으니, 강궐(绛阙)은 높이 솟았고, 깊고 깊은 비취빛 방을 휘돌아, 기이한 안개가 자욱하네.
幽閒。志萧然。金城千里锁婵娟。当时穆满巡狩,翠华曾到海西边。
그윽하고도 한가하여라. 그 뜻은 쓸쓸하고, 금성(金城) 천리 사슬은 어여쁘니, 순수(巡狩) 길에는 화목함이 가득하여, 천자의 가마(翠华)는 일찌기 서쪽 바닷가까지 다다랐네.
风露明霁,鲸波极目,势浮舆盖方圆。正迢迢丽日,玄圃清寂,琼草芊绵。
이슬도 바람에 맑게 개고, 고래도 눈닿는 데까지 파도를 바라보느니, 그 기세에 네모진 수레 덮개가 펄럭이네. 마침 화창한 날까지는 아득한데, 밭은 어둑어둑 맑고 고요하느니, 구슬 같은 풀은 우거진 솜털같구나.
争解绣勒香鞯。鸾辂驻跸,八马戏芝田。瑶池近、画楼隐隐,翠鸟翩翩。
수놓은 굴레와 향내나는 안갑을 앞다퉈 풀며 수레가 잠시 멈추었더니, 말들은 풀밭을 여기저기 희롱하네. 가까이엔 옥빛 연못, 그림같은 누각이 숨어 있고, 물총새는 여기저기 펄럭이네.
肆华筵。间作脆管鸣弦。宛若帝所钧天。稚颜皓齿,绿发方瞳,圆极、恬淡高妍。
잔치가 화려하게 벌어져 피리 불고 현을 튕기니. 이 안은 완연히 천제가 계신 하늘이로다. 어린 얼굴 하얀 이, 푸른 머리에 네모진 눈동자, 둥근 안장에 사심없이 담백하니, 고귀하고도 어여쁘구나.
尽倒琼壶酒,献金鼎药,固大椿年。
옥으로 된 술병을 기울여 술을 따라내고, 금솥에 약풀을 넣으며, 모두가 장수하기를 기원하네.
缥缈飞琼妙舞,命双成、奏曲醉留连,云璈韵响泻寒泉。
아득히 휘날리는 구슬들이 오묘하게 춤추고, 두 모습이 되는 듯, 들리는 곡조에 취해 떠나지 못하니, 운오(雲璈) 울림은 마치 차가운 샘물 쏟아지는듯 하구나.
浩歌畅饮,斜月低河汉。渐绮霞、天际红深浅。动归思、回首尘寰。
성대한 노래에 통쾌하게 마시며, 달은 비스듬히 한수(汉水)를 굽어보고, 노을은 아름답게 점점 진해지니, 마침내 하늘은 울긋불긋, 꿈틀대는 집 생각에, 머리를 돌려보니 속세로구나.
烂漫游、玉辇东还。杏花风、数里响鸣鞭。望长安路,依稀柳色,翠点春妍。
흐드러지게 흐르던 옥연(玉辇)은 동쪽으로 돌아가고, 살구꽃 실어오는 바람과, 몇 리 밖에서 울려오는 채찍소리. 장안 거리 바라보니, 어렴풋한 버들빛에, 물촘새는 아름다이 봄에 불을 붙이네.
명청(明清)시기, 이 공간은 원림과 더불어 곤곡(昆曲)을 즐기는 무대로도 애호받았다고 하는데, 실제로 당시 문인 명사들이 여기 점춘당(点春堂)에 모여 좋아하는 연극 대목을 고르고, 저마다 좋아하는 배우를 모셔와 연극을 즐겼으니, '봄을 불을 붙이는(点春)' 의미와도 상통했을 그런 시절이라 넉넉히 짐작됩니다.
점춘당(点春堂)은 청(清) 도광(道光) 초인 1820년에 처음 지어졌는데, 복건(福建) 출신 화당양화(花糖洋货) 상인들이 제사나 회의하던 장소로도 쓰여, 그 당시에는 화당공서(花糖公墅)라고도 불렸고, 소도회(小刀会)가 봉기했을 때는, 성북지휘부(城北指挥部)가 있던 곳으로, 소도회(小刀会) 우두머리 중 하나면서, 태평천국(太平天国) 총리정교초토좌원수(统理政教招讨左元帅)였던 진하림(陈阿林)이 머무르며 정무를 보기도 해서, 이때는 또다른 이름인 점춘당공관(点春堂公馆)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너무 서둘러 발길을 재촉했는지, 점춘당을 둘러보는 이 순간, 남은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남았네요^^;;; 조금 호흡을 가다듬고, 조금 더 여유를 갖고 둘러볼 마음이 생깁니다.
부패가 극에 달했던 19세기 중엽, 상해 일대를 휘몰아쳤던 태평천국의 난과 소도회, 그 역사의 회오리바람은 바로 여기 점춘당 일대에 여실히 상처와 족적을 남겼습니다... 당시 소도회의 봉기가 실패하면서, 심각한 피해를 입었던 점춘당(点春堂)은 1868년부터 4년에 걸쳐 대대적으로 중수하였습니다.
현재의 건물 안에는 만청(晚清) 화가 임백년(任伯年, 1840-1895)이 그린 거대한 그림, '관검도(观剑图)'가 걸려 있고, 그림 양쪽에는 저명한 서법가 심윤묵(沈尹默, 1883-1971)의 글씨로 “담력은 곤궁한 이 땅을 감싸고, 그 마음은 순수하고 맑게 머문다네.(胆量包空廓,心源留粹精)”가 걸려 있고, 당시 봉기에 사용했던 무기도 전시되어 있기도 합니다. 위의 글귀는 황정견의 싯귀에서 따온 것입니다...
黄庭坚 - 次韵答宗汝为初夏见寄 (1083년)
황정견 - 종여(宗汝)에게 초여름에 보러 들르겠다 답하며 차운(次韵)함
官蛙无时休,不知忧复乐。夕晖半规黄,冉冉纳暮壑。
관가의 개구리는 쉴 틈이 없는데, 근심도 없이 즐겁기만 하여라. 저녁이라 해는 반쯤 저물어 누렇게 빛나고, 기웃기웃 저녁 개울을 보내네.
鸟栖松陨花,风下竹解箨。南箕与北斗,磊磊贯缨络。
새는 소나무에 깃들어 꽃을 떨구고, 죽순 껍질은 바람에 이리저리 나부끼니, 남기(南箕)와 북두(北斗) 별자리는, 돌무더기 꿰어 영락(缨络)을 매단 듯.
怀我邻邦友,贤义本不薄。箕斗常相望,江含雾冥漠。
내 이웃나라 벗은 화났어도, 어질고 의로운 바탕은 어쩌지 못하네. 기성(箕星)과 두성(斗星)은 서로 무심히 바라보니, 안개를 품은 강 너머는 아득히 멀구나.
忽烹双鲤鱼,中有初夏作。诗词清照眼,明月丽珠箔。
문득 잉어 두마리 삶았네, 초여름이었었네. 시사(诗词)가 맑게 비친 눈동자, 밝은 달빛에 영롱하게 빛나는 구슬 발.
閒出句崛奇,芙蕖依绿蒻。雄辨简色空,韩卢逐东郭。
한가하니 떠오른 글귀는 우뚝하니 기이하고, 연꽃이 푸른 부들에 의지하듯, 웅변을 토하는 편지의 빛이 바래니, 명견 한로(韩卢)는 동쪽 변방으로 쫓아갔었다지.
终篇谈不二,自脱世缠缚。此道久陆沉,喜公勤博约。
한 편을 끝냈더니 이야기와 다르지 않은데, 속세의 속박에서 스스로 벗어나네. 오랫동안 이 길은 물에 잠겼고, 희공(喜公)은 부지런히도 두루 약속하네.
盈笼惠石芝,乌皮剥猿玃。野人烹嘉蔬,回首葵苋恶。
대롱 가득 담은 은혜로운 석지(石芝) 버섯, 새는 원숭이를 물어뜯네. 농부는 나물을 삶아, 돌아보니 아욱밭이 흉년이네.
劝盐殊未工,追呼联纆索。闻君欲课最,岂有不龟药。
후렴을 권해도 끝내 부르지 않고는, 불러서 이어진 노끈을 찾네. 임금이 모조리 매기고자 하심을 듣고는, 어찌 거북 약이 있을 수 있겠나.
我民六万户,过半客栖泊。棘端可沐猴,且愿观其削。
우리 백성 육만 호(户), 반 넘게는 손님 되어 머물 뿐이네. 가시 끝같은 목후(沐猴), 또한 꺾이기를 바랄 뿐이네.
官符昼夜下,朝播责暮穫。射利者谁其,登陇弯繁弱。
관부(官符)가 주야로, 아침에 씨뿌리곤, 저녁에 거두라고 책망하네. 이익을 쫓는 자 그 누군가, 고개에 올라 번약(繁弱) 활을 당기네.
昨闻数邦贡,曲礼赋三错。恭惟廊庙上,献纳及新瘼。
어제 여러 나라에 바친 공납을 들으니, 의례의 문장이 세 번이나 어긋나, 삼가 생각하여 사당 복도에서, 헌납하니 이내 다시 굶는다네.
绣衣城南来,免冠谢公怍。归乘下泽车,绝意麒麟阁。
수놓은 옷 입고 성남(城南)으로 와, 갓을 푸니 사공(谢公)이 부끄러워하네. 돌아가 못 아래 수레에 오르니, 기린각(麒麟阁)의 뜻을 끊었다네.
田园蒙帝力,仰以万寿酢。公材横太阿,越砥敛霜锷。
논밭(田园)은 임금의 은혜를 입었으니, 술을 마시며 만수무강을 기원하네. 언덕에는 관가의 자재가 태산같이 가로쌓여 있고, 월지(越砥) 숫돌로 서리같은 칼날을 거두네.
智囊无遗漏,胆量包空廓。行当治状闻,雄飞上碧落。
꾀 주머니는 남김없이 새버리고, 배짱은 공허하게 흩어지네. 다니며 치적을 들으며, 푸른 하늘 위로 힘차게 날아오르네.
我材甚不长,有地愧槃礴。平陆非距心,滕薛困公绰。
내 재주야 특출나지 않아, 다리도 못 뻗을 땅 밖에 없네. 이 땅엔 맘이 머물지 않으니, 공작(公绰)도 등국(滕國), 설국(薛國)에서 힘들었었다네.
看人取卿相,妄意亦馋嚼。终不作湘累,憔悴吟杜若。
사람 중에 재상을 얻었더니, 역시 그 뜻을 잊고 게걸스레 탐하네. 끝내는 굴원(湘累)에 못 미쳐, 초라하게 두약(杜若)을 부르네.
一心思倾写,何时叩扃钥。
생각 하나 기울여 옮기느니, 언제쯤이나 빗장이 풀릴까 ?
黄庭坚 - 次韵子真会灵源庙池亭 (1078년)
황정견 - 아들 진(真)이 영원묘(灵源庙) 지정(池亭)에 들러 지은 시에 차운(次韵)함
系马著堤柳,置酒临魏城。人贤心故乐,地旷眼为明。
둑 버드나무에 말을 매고, 술병 놓고 위성(魏城)에 앉았네. 백성은 어진 마음에 즐거워하고, 휑한 대지에 눈이 맑아지네.
十年风烟散,邂逅集此亭。悲欢更世故,谈话及平生。
십년 바람에 연기는 흩어지고, 우연히 이 정자에 모여들었구나. 슬프고 기쁜 일이야 세상사이니, 이야기 나누자니 평생을 잇겠구나.
折腰督邮前,勉强不见情。世味曾淡薄,心源留粹精。
허리 숙여 서찰 앞을 살펴보다가, 그 정한을 차마 못보겠네. 세상 사는 맛이야 갈수록 별 맛 없지만, 마음만은 순수하게 머무르네.
晴云有高意,阔水无湍声。谁言王安丰,定识阮东平。
구름 개어 뜻은 높아가고, 너른 강물 여울 소리도 사라지네. 누가 왕융(王戎)을 말하겠으며, 완적(阮籍)의 동평부(东平赋)를 알까 ?
그 앞 연못 한가운데에는 연극의 무대로 제격인 봉무난음(凤舞鸾吟) 혹은 타창대(打唱台)가 있는데, 건물의 네 기둥에는 사계절의 경관을 묘사한 대련이 걸려 있습니다
연못을 사이에 두고 화후당(和煦堂)이 점춘당(点春堂)과 마주보고 있는데,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다 하여 '和煦'라고 명명되었다고 하구요, 건물 안에는 두순학(杜荀鹤, 846-904)의 춘궁원(春宫怨)의 한 구절, '风暖鸟声碎 日高花影重'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만, 딱히 사진이 없습니다@@
杜荀鹤 - 春宫怨
두순학 - 봄날 궁녀의 원망
早被婵娟误,欲妆临镜慵。
일찌기 성은을 입었던 탓일까, 이젠 화장에도 소홀해지네.
承恩不在貌,教妾若为容。
성은은 자태에 있지 않으니, 어찌 꾸며야 할지 가르쳐주옵소서.
风暖鸟声碎,日高花影重。
따뜻한 바람에 지저귀는 새소리, 높아가는 햇볕에 짙어가는 꽃 그림자.
年年越溪女,相忆采芙蓉。
해마다 옛 고향 친구들, 재잘대며 연꽃따던 모습이 떠오르네.
점춘당(点春堂) 동남쪽에 쌓은 호석가산(湖石假山) 포운암(抱云岩) 위에는 쾌루(快楼)가 세워져 있는데, 실상은 위층이 쾌루(快楼), 아래층이 연상각(延爽阁)입니다.
내원으로 가면서, 잠깐 들러다가 다시 돌아보는 천운룡장(穿云龙墙)입니다... 정말 다시 봐도 장관이네요^^;;
점춘당(点春堂) 서쪽 담장 위에 있는데, 용머리는 점토 소상으로 만들어졌고, 몸통과 비늘은 기와로 표현했습니다. 원림 내에는 이 곳 말고도, 대가산(大假山) 뒷편의 와룡(卧龙/伏龙), 화후당(和煦堂) 서쪽의 쌍룡희주(双龙戏珠), 그리고 내원(内园) 안 가이관(可以观) 앞의 면룡(眠龙/睡龙) 등 다섯 마리가 표현되어 있지만, 한 곳에 두 마리를 한꺼번에 만들어, 전체는 네 곳이라, 규제를 피했다는 @@
이제 우리는 점점 예원의 북쪽 끄트머리에 다다릅니다. 바로, 그 서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또다른 걸음의 미학, 복랑(复廊)을 품고 있는 만화루(万花楼) 영역에 접어듭니다. 사실 앞서 경험했던 회경루 앞의 광대한 연못을 먼저 보았던 터라, 이 곳의 아담하고 좁은 연못은 별스럽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막상 다다른 풍경은 전혀 왜소하지 않습니다@@
만화루(万花楼)는 주위로 회랑이 둘러싸고 있고, 옆에는 취죽(翠竹)이 심어져 있는데, 원래 이 자리에 화신각(花神阁)이 있었고, 아편전쟁으로 원림이 크게 훼손된 후, 1842년 서원(西园)을 새로 조성하면서 중건되어 잠깐 신척당(神尺堂)으로 불리기도 했구요, 그 이름은 '만화심처(万花深处)'의 뜻에서 따왔다고 하네요..
张炎 - 木兰花慢 丹谷园
장염(1248-1320) - 목란화만 단곡원
万花深处隐,安一点、世尘无。步翠麓幽寻,白云自在,流水萦纡。
곳곳에 온갖 꽃들이 깊이 숨어 있어, 세속의 티끌 한 점 묻지 않았네. 비취빛 언덕 오르며 그윽한 정취 떠올리니, 흰 구름은 절로 와 있고, 물은 굽이 돌아 흐르네.
携歌缓游细赏,倩何人、重写辋川图。迟日香生草木,淡风声和琴书。
노래 부르다 느긋하게 거닐다 자세히 완상하다 보니, 사람에게 청하여, 다시 왕유의 망천(辋川) 그림 그려달랠까 ? 해는 더디고 풀과 나무엔 향기가 솟아나니, 맑은 바람 소리는 거문고와 책 읽는 소리와 어울리네.
安居。歌引巾车。童放鹤、我知鱼。看静里闲中,醒来醉後,乐意偏殊。
편안히 앉아, 노래하며 수레를 불렀더니, 아이는 학을 놓아주고, 나는 물고기와 사귀네. 한가하니 조용히 마을을 쳐다보면, 취기가 가시며, 즐거움이 각별해지네.
桃源带春去远,有园林、如此更何如。回首丹光满谷,恍然却是蓬壶。
무릉도원 휘감던 봄은 멀리 가니, 이 같은 풍경 언제 다시 볼까 ? 뒤돌아보니 계곡엔 붉은 빛이 가득하고, 문득 깨달으니 여기가 봉래산이네.
건물 안에는 두 쌍의 대련이 걸려 있습니다만, 막상 서두르다보니, 들러보지는 못했네요@@ 공부를 위해 아래에 기록해둡니다^^
郑燮 - 对联
정섭 - 대련
春风放胆来梳柳;夜雨瞒人去润花。
봄바람이 용감하게 버들잎 빗겨내고, 밤비가 몰래 내려 꽃을 적시네.
그 바깥쪽 양쪽 기둥에도 대련이~~ ^^
桂馥兰芬水流山静;花开柳媚日朗风清。
고요한 산 속 흐르는 물엔 계수나무 꽃, 난 꽃 향이 배었고, 꽃 피고 버들은 흔들흔들, 햇빛은 낭랑하고 바람은 깨끗하여라.
원래 이 구역을 보통의 동선으로 통과하자면, 만화루 이전에 어락사-회심불원정-복랑-양의헌/역방-만화루의 순으로 둘러보게 되기 쉬웠겠지만, 지금 우리는 그 반대방향으로 거슬러 살펴보고 있는 중이라, 순서가 뒤죽박죽입니다^^;;;
만화루 서쪽에는 역방(亦舫)이라 하여 선방(船舫) 양식의 건물이 있습니다만, 아쉽게도 제대로 담은 사진이 없네요@@ 죄송~ 그 안에도 대련이 걸려 있습니다. 유독 대련을 꼼꼼히 해석해보고 싶으네요^^;;;
以船为室何妨小;与石订交不碍奇。
배에 방을 두었으니 어찌 좁다 하겠는가, 돌을 곁에 두고 사귀니 거리낌없고 기특하구나.
이 구역을 동서로 관통하고 있는 복랑(复廊)은 회심불원정에서 양의헌까지 잇고 있는데, 가는 길, 오는 길 두 복도가 서로 붙어 있고, 그 사이 벽에는 창이 몇 개인가 뚫려 있습니다...
양의헌(两宜轩)은 면산대수(面山对水)의 입지로 서있는데, 명대 시인 범경문(范景文, 1587-1644)의 “观山观水两相宜”의 정취를 따와, 양의헌(两宜轩)이라 이름지었습니다.
范景文 - 湖上晚归
범경문 - 호수 위로 느즈막히 돌아오며
登山泛水两相宜,船后轻舆更使随。
언덕을 오르고 시냇물 거슬러오니 서로 어울리는지, 다시금 배 뒤로 수레가 가볍게 따라오네.
一径晴岚深见寺,千寻悬瀑下通陂。
한 줄기 맑은 바람 깊은 산 속 절간 바라보니, 천 길 폭포가 매달려 아래로 연못으로 이어지네.
鸟迷树影归林乱,云恋湖阴入岫迟。
새는 나무 그림자를 헤매다 어지러이 숲 속으로 돌아가고, 호수 그늘 떠올리며, 느즈막히 굴에 깃드누나.
欲向空潭延月色,穿桥夜坐放生池。
양의헌 안에는 다음과 같은 대련이 걸려 있다는데, 역시 눈여겨보질 못했네요@@
皇甫冉 - 秋日東郊
황보염 - 가을날 동쪽 교외에서
閑看秋水心無事,臥對寒松手自栽。廬岳高僧留偈別,茅山道士寄書來。
한가로운 가을날 강물 거리낌없이 바라보며, 추운 날 누워자란 소나무 손수 가꾼 것이라네. 여산(廬岳)의 고승 머물다 갔고, 모산(茅山)의 도사 편지를 부쳐 오네.
燕知社日辭巢去,菊爲重陽冒雨開。淺薄將何稱獻納,臨岐終日自遲迴。
제비는 추사일(秋社日)을 알아 둥지 버리고 가버리고, 국화는 중양(重陽) 날, 비를 무릅쓰고 피어나네. 아직도 소양이 얕으니 장차 어찌 현인이 받아줄까 ? 종일 기산(岐山)에 머무르다 절로 느즈막히 돌아오네.
劉禹錫 - 和僕射牛相公見示長句
유우석 - 종이 소를 쏜 일로 상공(相公)이 보여준 장구(長句)에 올린 창화(唱和) 시
靜得天和興自濃,不緣宦達性靈慵。大鵬六月有閑意,仙鶴千年無躁容。
고요히 하늘의 조화에 절로 흥겨워지고, 입신(立身)에 매이지 않으니 마음이 게을러지네. 대붕(大鵬)은 유월에 한가롭고자 하고, 선학(仙鶴)은 쳔년동안 조급해하질 않네.
流輩盡來多歎息,官班高後少過從。唯應加築露臺上,賸見終南雲外峰。
또래 동무 몰려와 크게 탄식하며, 영달하고도 남은 게 없다하네. 끄덕이곤 새로 지은 노대(露臺)를 보니, 그너머 종남산(終南山)엔 구름이 드리우네.
복랑(复廊)의 끄트머리에는, 그야말로 아담하기 그지없는 어락사(鱼乐榭)가, 기둥사이로 아래에 길고 좁은 연못을 담고 있습니다. 그 아래에 헤엄치는 물고기를 바라보며, 그 옆으로 꽃담의 아래쪽 반원동문(半圆洞门)과 누창(漏窗) 너머 소계(小溪)를 찾아봅니다...
그 안에는 왼쪽 대련에 '호간(濠间)'이 걸려 있어서, 어락사(鱼乐榭)의 뜻을 더해줍니다.
庄子 - 秋水
장자 - 추수
“惠子曰:‘子非鱼,安知鱼乐?’庄子曰:‘子非我,安知我不知鱼之乐?’”
혜자 말씀하시길, '그대는 물고기도 아닌데, 물고기의 즐거움을 어찌 아는가 ?'
장자 말씀하시길, '그대는 내가 아닌데,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른다는 것을 어찌 아는가 ?
그 안에는 그 뜻과 상통하는 영련(楹联)이 같이 걸려 있다고 합니다^^;; 못 봤습니다@@
鱼乐人亦乐;水清心也清。
물고기가 즐거이 노니니, 사람도 즐거워하고, 물이 맑으니, 마음도 맑아지네.
이제 복랑(复廊)을 살펴봅니다. 마침 이 곳을 둘러보고 있는 호걸님과 김민수님과 같이 스케치해보며, 또 추억을 담아봅니다^^
공간으로는 중간에 담장으로 분리되어, 양쪽 모두 복도를 따라 교행할 수 있고, 또 벽을 따라 서로 다른 창이 나 있어, 각각 반대쪽 복도 너머가 조망됩니다. 그 서쪽에는 방정(方亭)이 있는데, “会心不远”이 걸려 있습니다.
世说新语 - 言语
세설신어 - 언어
简文入华林园,顾谓左右曰:“会心处,不必在远。翳然林水,便自有濠、濮闲想也。觉鸟兽禽鱼,自来亲人。”
진 간문제가 화림원에 들어가, 좌우를 둘러보며 말하길, "마음에 드는 곳이 반드시 멀리 있는 건 아니다. 수풀과 물가에 은둔하여, 곧 복수(濮水)에서 한가로이 관어(观鱼) 중에 어느덧, 노니는 날짐승, 들짐승, 물고기들을 바라보다 저절로 사람에 다가오는 것을 깨달으면 되는 것이다."
드디어 입구까지 거의 다다랐습니다^^
이 영역의 중심건물은 삼수당입니다만, 지금 거꾸로 거슬러 걷고 있는 마당에 먼저 마주친 건물은 췌수당(萃秀堂)입니다.
췌수당(萃秀堂)은 1760년 지어졌고, 대가산(大假山) 북쪽 언덕 너머에 숨어 있는데, 건물 안에서 정면의 대가산(大假山)을 조망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고, 현재는 상점이 들어서 있습니다만, 19세기말 이곳저곳에 공소가 들어찼을 당시에도 두병업공소(豆饼业公所)의 판공화동업취회(办公和同业聚会)가 있기도 했습니다.
췌수당(萃秀堂) 자리에 원래는 성황묘(城隍庙) 안에서도 상당히 큰 규모의 누각과 정청이 있었고, 귀빈을 맞이하던 장소였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다가 마주치는 대가산(大假山)은 조금은 지친 속에 그닥 새롭지 않은 풍경처럼 평가절하될 법도 하지만, 기실 보통의 동선에서는 가장 먼저 마주치는 절경입니다...
절강(浙江) 무강(武康) 황석(黄石)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높이 14미터에 달하고, 명(明)대의 저명한 첩산(叠山) 대가 장남양(张南阳, 1517-1596)이 남겼다고 하는 유일한 유물이기도 합니다. 예원기(豫园记)에서도 반윤단(潘允端)은 대가산(大假山)를 “峻颇惬观赏”이라 평한 바 있습니다.
지금 입구쪽으로 가는 길에서 삼수당보다 먼저 만나는 건물은 1층이 앙산당(仰山堂), 2층은 권우루(卷雨楼)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앙산당(仰山堂)은 바로 연못 건너 이 가산을 완상하고자 지어졌는데, 북쪽으로 회랑과 난간이 있으며, 건물 안에는 진(晋) 왕희지(王羲之, 307-365)의 난정서(兰亭序)에서 유래하는 “이 곳에서 숭산준령이 내다보인다.(此地有崇山峻岭)”의 문구를 딴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2층 권우루(卷雨楼)의 이름은 초당(初唐) 시인 왕발(王勃, 650-676)의 시 '등왕각(滕王阁)' 중, “珠帘暮卷西山雨”로부터 따왔습니다.
王勃 - 滕王阁
왕발 - 등왕각
滕王高阁临江渚,佩玉鸣鸾罢歌舞。
등왕(滕王)의 높은 누각 강가에 있으니, 패옥과 방울 소리, 가무도 끝이 났구나.
画栋朝飞南浦云,珠帘暮捲西山雨。
아침 마룻대 위엔 남포의 구름 날아다니고, 붉은 발 걷은 너머 저녁 서산에 비가 내리네.
闲云潭影日悠悠,物换星移几度秋。
한가로이 구름 흐르다 연못 위로 그림자 드리우고, 세월이 흘러 만물은 바뀌고 몇 번이나 가을을 보냈구나.
阁中帝子今何在,槛外长江空自流。
이 누각 속 주인은 지금 어디 있는고 ? 난간 너머 장강만 부질없이 흐르네.
앙산당과 등을 맞대고 삼수당(三穗堂)이 있습니다. 드디어 여기까지 거슬러 왔더니, 시간도 꽤 남았습니다@@ 너무 서둘렀네요ㅠㅠ 아마도 입구부터 찬찬히 둘러봤다면, 이 건물이 먼저 눈에 뜨였을 터...
명나라 때 이 자리에는 낙수당(乐寿堂)이 있었다고 하고, 1760년, 서원(西园)을 다시 지을 때 삼수당(三穗堂)이 지어졌습니다.
높이 9미터 높이의 당당한 건물로, 내원 즉 동원과 비교하여, 현재의 서원 원림의 중심적인 건물이구요, 이후 청(清)대에는, 관부(官府)에서 주최하는 연회나, 지방 문인들의 회합이 여기에서 자주 개최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름도 이런 연회에서 참석하는 관리들의 환심을 살만한 이름, 풍년의 징조를 의미하는 삼수(三穗)라고 지었습니다.^^
내부에는 자그마치 편액이 세 개나 걸려 있습니다. '城市山林', '经始灵台', '三穗堂' 중에서 '经始灵台'는 아마도 시경에서 따온 듯^^;; 지금이야 이 곳이 바로 세계 제일의 번화가라, 그야말로 '성시산림(城市山林)'에 걸맞는 입지의 예원이지만, 예원을 조성하여 즐겼던 명 대의 반원단이 거닐었던 저자거리는 자그마한 촌락에 불과했을 듯합니다^^
诗经/大雅 - 灵台
시경/대아 - 영대
经始灵台,经之营之。庶民攻之,不日成之。
영령한 누대를 짓기 시작하여, 재어보고 다져오아, 백성들이 거들었더니, 며칠 만에 우뚝 섰구나.
经始勿亟,庶民子来。王在灵囿,麀鹿攸伏。
급히 서둘지 말라 하셨건만, 백성들은 아비 돕듯 모였다네. 임금이 영유(灵囿)에 계시니, 암수 사슴이 엎드려 노니누나.
麀鹿濯濯,白鸟翯翯。王在灵沼,于牣鱼跃。
그 두 사슴 토실토실, 백조는 희디 희구나.임금께서 영소(灵沼)에 계시니, 아아, 물고기가 가득 뛰노누나.
虡业维枞,贲鼓维镛。于论鼓钟,于乐辟廱。
종과 경을 매달다가, 큰 북과 큰 종을 달았구나. 아아, 질서있는 종소리, 아아, 임금의 학교까지 즐겁구나.
于论鼓钟,于乐辟廱。鼍鼓逢逢,矇瞍奏公。
아아, 질서있는 종소리, 아아, 임금의 학교까지 즐겁구나. 둥둥 악어 북을 울리며, 악사들이 연주한다네.
막상 바삐 삼수당까지 훑고 와보니, 시간이 그래도 꽤 남아 있습니다@@ 좀 전에 지나쳤던 풍경을 다시 되새김질하면서, 약속시간까지 내원 입구에서 보기로 했던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연신 시계를 들여다봤습니다^^
다행히 모두들 시간에 거의 딱 맞춰 기다리고 계셨네요~ 제가 오히려 조금은 늦었던 듯@@ 그렇게 우리는 후문쪽으로 나와 다시 예원상성 번화가를 헤집고 되돌아나와, 다시 큰 거리에 나와서 버스를 탔습니다. 무사히 남록절리에서의 점심식사 예약을 완수하기 위해@@
남록‧절리(南麓‧浙里, Le Patio et La Famille)는 2017년 이래, 올해까지 삼 년 연속, 미슐랭 원스타에 빛나는 맛집으로 맛나는 항저우 지방 요리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꼭 와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고집하다보니, 동선이 꼬였고, 이미 잡아버린 숙소가 피보팅으로 동선을 헝크러뜨리기 시작해서, 결국 예원 옆에서 저녁먹고, 시내 한참 들어가 호텔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에 다시 예원으로 나와 예원 둘러보고는, 다시 숙소 근처 식당, 이 곳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는 슬픈 얘기가@@
자세한 메뉴에 대해서는 추후 추가하기로 하고, 일단 기록해둡니다^^ 여튼 맛있었다는~~
葱香野石笋
自制蓝莓酱山葯
野米盆栽色拉
养生秋葵
香辣浸花螺
陈醋海蜇
老汪虾油拼
寶塔千層肉
金华馒头
鲜腐竹酸汤煮肥牛
爆炒牛肝菌
笋壳鱼
笋干火瞳老鸭汤
油爆河虾
高山豆苗
陈皮红豆沙
五香牛肉
腐皮黃鱼卷
米饭
여튼, 바삐 귀국길을 재촉하지 않도록 오전 일정을 나름 여유있게 잡아, 예원을 무사히 답사한 우리는, 미슐랭 레스토랑에서의 맛있는 점심식사 후, 푸동 공항으로 내달렸습니다. 다시 여기에서 두 시간을 날아가면, 시차 때문에 한 시간 여 후의 인천으로 도착합니다^^;;
이륙하기 전, 삼박사일 간의 강행군을 함께 해온 장용 가이드 분과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고, 쉽지 않았을 여정을 사고없이 능숙한 운전으로 우리를 실어다준 기사분께도 감사의 박수를 전해드리고, 그렇게 아쉽지만, 알찬 나흘을 마무리하며,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많이들 아쉬움과 보람이 교차하는 나흘을 쉴새없이 달려, 드디어 무사히, 큰 사고 없이 마무리했네요... 모두들 수고많으셨구요, 후기가 많이 늦어 한 해 가까이 전 추억을 반추하려니, 뭔가 가물가물하니 어렴풋이 드러나는 잔상을 부여잡느라 애먹었지만, 그래도 방울방울 추억이 아름답게 채색되는 느낌도 드네요^^;;
모두들 감사했구요, 또 한 해 보람찬 답사를 북경으로 또 무사히 다녀올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