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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36장 1-43절
하나님 밖에 있는 사람들
창세기 36장은 야곱의 형 에서의 자손에 관해 기록한 내용입니다. 그 내용을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에서가 가나안 여인 중 아내 둘을 취할 뿐만 아니라 이스마엘의 딸 중 하나를 취하여 자녀들을 낳았다고 기록합니다(1-5). 여기까지는 가나안에서의 생활이었는데, 이후 가나안을 떠나 세일산이라는 곳으로 갑니다(6-8). 그리고 에서의 족보에 대해 나오는데(9-19), 한 마디로 말하면 외적인 번성함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외에도 세일 땅 주민으로 있던 호리 죽속의 자손도 기록하고 있으며(20-30), 특히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 에돔 땅을 다스리던 왕에 대해서도 기록합니다(31-40). 그리고 마지막에 에서에게서 나온 족장들의 이름을 기록합니다(40-43).
창세기 36장은 한 마디로 에서 자손의 번성과 그들의 영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번성과 영광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는가? 다시 말해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적인 복을 받았지만 그들은 영적인 복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악인의 형통함이 있을지라도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에서와 관련하여 기록된 내용 전후로 야곱 가정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에서와 관련해서는 특별하게 언급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의 족보만을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고 고통도 슬픔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에 대한 기록은 없고 어떤 면에서 그들의 번성만 보여줄 뿐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기록을 볼 때 문제가 있는 것보다는 문제가 없는 쪽을 더 부러워합니다. 번성하는 쪽을 소망하지 문제가 있고 고통이 있고 슬픔이 있는 쪽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부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진노의 그릇을 향한 마지막은 하나님의 진노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한 부분씩 살펴보겠는데, 우선 에서가 세 아내를 취하여 자녀를 낳은 것에 대하여 기록합니다. 1절 이하 5절을 보시면 “에서 곧 에돔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에서가 가나안 여인 중 헷 족속 엘론의 딸 아다와 히위 족속 시브온의 딸인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를 자기 아내로 맞이하고 또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을 맞이하였더니 아다는 엘리바스를 에서에게 낳았고 바스맛은 르우엘을 낳았고 오홀리바마는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를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들들이요 가나안 땅에서 그에게 태어난 자들이더라” 에서의 별명이 에돔인데, 그 뜻은 ‘붉다’입니다. 여기서 에서의 족보가 나오는데, 앞선 내용 속에서도 기록되었지만 에서는 가나안 여인 중에 두 사람을 취하게 됩니다. 창세기 26장 34절에서 그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그런데 여기 보면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다고 기록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름과 다른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 창세기 26장에시 기록한 사람과 오늘 본문 창세기 36장에서 기록한 사람이 다른 사람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에서가 에돔으로 불려 진 것처럼 한 사람이지만 본래 이름 외에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은 결혼 이후 새로운 이름이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혹은 야곱에서 이스라엘이라고 바뀌었듯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창세기 26장에서 언급한 인물과 오늘 본문에서 언급한 인물은 동일 인물로서 다른 이름이 기록되고 있을 뿐입니다.
어쨌든 에서는 가나안의 두 여자를 아내를 맞이했는데, 창세기 26장에서는 그것이 그의 부모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다고 기록합니다(창26:35). 왜냐하면 해당 본문을 살필 때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과 상관없이, 이방신을 섬기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에서의 두드러지는 잘못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생각한 것이 히브리서에서 기록하고 있지만(히12:16), 그가 하나님을 떠나게 된 이유 가운데 한 부분은 바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던 이방 여인과의 결혼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이 부모에게 근심이 될 정도였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들을 통해 자녀를 낳은 것입니다.
이 외에 또 다른 한명과 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입니다. 이 부분은 창세기 28장 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 여기서도 이름이 다르게 기록되어 있지만 다른 인물이 아니라 같은 인물입니다. 그런데 왜 또 다른 한명의 아내를 맞이했느냐 하면 앞서 얻은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창28:8). 그럼 이 결혼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물었는가? 아버지 이삭의 뜻을 물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을 뿐입니다.
이처럼 에서는 아내 셋을 두었는데, 그들을 통해 다섯 명의 아들을 얻게 됩니다. 지난 시간 야곱의 아들들에 관하여 살폈지만 야곱은 네 아내를 두었고, 그들을 통해 열 두 명의 아들들을 얻었습니다. 비교해 보자면 시작은 분명 야곱 쪽이 좋습니다. 창대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가정은 고통과 슬픔의 역사가 끊이질 않습니다. 나중에 야곱이 바로 앞에 서서 어떻게 말합니까? 연수에 비해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고백합니다(창47:9). 반면 에서는 야곱에 비해 그렇게 많은 아들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내용 속에서 번성하게 되는 것을 보여주는데, 9절 이하 19절이 그 내용입니다. 특히 여기서는 여러 족장을 언급하는데, 그만큼 번성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을 비교해 보면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창세기 25장 12절 이하 18절에서 이스마엘의 족보를 볼 수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열두 명의 아들을 낳게 되는데, 그들 모두가 지도자로 세워집니다. 그리고 그들이 넓은 땅에 거주하게 되는데,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러 거주하게 됩니다. 반면 이삭은 40세에 리브가와 결혼해서 60세가 되어서야 아들 둘을 낳습니다. 한 마디로 이스마엘 쪽은 외적인 번성함이 있다는 것이고, 이삭 쪽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형통은 외적인 것이 넉넉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36장과 비교되는 것이 창세기 37장에 나오지만 야곱 가정의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 하신다는 것이고, 특별히 요셉의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분명 에서는 유기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번성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스마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25장에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기 때문에 큰 자가 아니라 어린 자가 더 큰 복을 받아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어린 자 쪽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고 기록하는 쪽은 야곱 쪽입니다. 반면 에서는 점점 더 번성하는 것처럼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약속이 잘못되었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내용 속에서 우리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고 할 때 단순히 외적인 복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로마서에서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고 할 때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9:12-13) 그러니까 이 표현 자체가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에 대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어린 자가 더 큰 복을 받는 것으로 있지만, 그 복이 외적인 복의 개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에서에게 외적인 복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외적인 번성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그가 형통한 것처럼 비춰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진정한 복은 거기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부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실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에게 없는 복, 다시 말해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가장 큰 복으로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큰 상급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세상 복이 주어지지 않더라도 기뻐할 수 있고 즐거워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분명 외적으로는 고난이지만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저들이 아니라 우리가 형통한 자인 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권면도 하십니다. 잠언 23장 17절입니다.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즉 성도의 자리는 저들에 대한 부러움이 아니라, 어떤 형편에 있든지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는 쪽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저들을 형통케 하시는가? 하나님은 왜 저들에게 번성함을 주시는가?”하는 질문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 속에서 하나님은 반드시 자신의 선을 나타내시기 때문에 그분만을 경외하는 자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6절 이하 8절은 에서 가정이 가나안을 떠나 세일로 가게 된 배경을 설명합니다.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의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이에 에서 곧 에돔이 세일 산에 거주하니라” 이와 비슷한 내용을 우리는 이미 살핀 적이 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과 롯의 결별입니다(창13장). 다른 점이 있다면 롯의 경우 에서처럼 진노의 그릇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후서 2장에서 롯에 대하여 소돔과 고모라 성 사람과는 구별된 의로운 롯으로 칭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초점을 맞추고 계시기 때문에 아브라함으로부터 롯을 분리시킨 것처럼 야곱에게서 에서를 분리시키는데, 그 방식이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게 하시는 방법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특히 이 과정 가운데 누가 떠나느냐 하면 에서가 떠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약속하신 대상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약속하신 바를 성취하시기 위해서 번성케 하셨을 때, 에서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가나안을 떠나 세일 산으로 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롯이 소돔으로 갈 때 자기가 보기 좋은 곳을 선택하여 간 것처럼, 에서 역시 자기가 볼 때 좋다고 여기는 곳으로 간 것이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대하여 들었을 것이지만, 그는 약속의 땅 자체에 대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가나안 땅에서 사는 것이 자신에게는 불편하였습니다. 자신이 볼 때 좀 더 편하다고 생각하는 곳, 자신이 볼 때 가나안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곳, 바로 그곳으로 옮겼던 겁니다. 믿음으로 바라본 것이 아니라, 육신의 눈을 통해 바라봤을 뿐입니다.
다만 한 가지 질문해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가나안을 떠나 세일로 간 것이 야곱이 있을 때인 것처럼 설명하고 있는데, 창세기 32장에 의하면 야곱이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올 때 이미 에서는 세일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증거합니다(창32:3 참조). 따라서 야곱이 가나안 땅에 거할 때 에서가 세일로 옮긴 것이 맞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는데, 매튜 헨리 주석을 보면 이렇게 설명합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오기 전에(32:3) 에서는 세일에서 아내들의 친척들과 함께 정착하여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삭이 살아 있는 동안에도 에서는 아마도 가나안에 얼마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삭이 죽은 후 아버지의 동산을 분배받고 온전히 세일산으로 물러났으며, 가나안은 야곱에게 맡기었던 것이다.”
정확한 내용은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하나님께서 하나님 안에 있는 자들로부터 하나님 밖에 있는 자들을 분리시키시는데, 그 방법이 양쪽의 소유를 풍부하게 만드셔서 함께 거할 수 없도록 한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위해서 저들의 소유를 풍부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외적으로는 풍부하게 되지만 약속의 땅이 가나안을 떠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약속과는 멀어지도록 만드십니다.
본문의 경우 양쪽 다 풍부해졌기 때문에 마음에 불편함이 없을 수 있지만 악인만 외적으로 번성하고 의인의 경우 외적으로 번성하지 않는 모습이라면 우리는 쉽게 원망과 불평을 쏟아낼 것입니다. 그리고 원망과 불평의 이면에는 저들에 대한 부러움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부러워하기 때문에 저들과 함께 가고자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시금 강조하여 말씀드리지만 악인의 외적인 번성을 부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저들로 하여금 외적으로 번성케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저들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저들에게 주어질 것과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의 외적인 번성함을 부러워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진정으로 주고자 하시는 그것을 소망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9절 이하 19절은 4절과 5절의 반복과 함께 에서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일 산에 있는 에돔 족속의 조상 에서의 족보는 이러하고 그 자손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에서의 아내 아다의 아들은 엘리바스요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아들은 르우엘이며 엘리바스의 아들들은 데만과 오말과 스보와 가담과 그나스요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는 아말렉을 엘리바스에게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내 아다의 자손이며 르우엘의 아들들은 나핫과 세라와 삼마와 미사니 이들은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자손이며 시브온의 손녀 아나의 딸 에서의 아내 오홀리바마의 아들들은 이러하니 그가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를 에서에게 낳았더라 에서 자손 중 족장은 이러하니라 에서의 장자 엘리바스의 자손으로는 데만 족장, 오말 족장, 스보 족장, 그나스 족장과 고라 족장, 가담 족장, 아말렉 족장이니 이들은 에돔 땅에 있는 엘리바스의 족장들이요 이들은 아다의 자손이며 에서의 아들 르우엘의 자손으로는 나핫 족장, 세라 족장, 삼마 족장, 미사 족장이니 이들은 에돔 땅에 있는 르우엘의 족장들이요 이들은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자손이며 에서의 아내인 오홀리바마의 아들들은 여우스 족장, 얄람 족장, 고라 족장이니 이들은 아나의 딸이요 에서의 아내인 오홀리바마로 말미암아 나온 족장들이라 에서 곧 에돔의 자손으로서 족장 된 자들이 이러하였더라” 여기 보면 여러 족장이 나오는데, 그만큼 에서 가문이 번성했다는 것을 알리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20절 이하 30절은 에서가 간 세일 산에 본래 거주하고 있던 자들이 있다는 것을 기록합니다. “그 땅의 주민 호리 족속 세일의 자손은 로단과 소발과 시브온과 아나와 디손과 에셀과 디산이니 이들은 에돔 땅에 있는 세일의 자손 중 호리 족속의 족장들이요 로단의 자녀는 호리와 헤맘과 로단의 누이 딤나요 소발의 자녀는 알완과 마나핫과 에발과 스보와 오남이요 시브온의 자녀는 아야와 아나며 이 아나는 그 아버지 시브온의 나귀를 칠 때에 광야에서 온천을 발견하였고 아나의 자녀는 디손과 오홀리바마니 오홀리바마는 아나의 딸이며 디손의 자녀는 헴단과 에스반과 이드란과 그란이요 에셀의 자녀는 빌한과 사아완과 아간이요 디산의 자녀는 우스와 아란이니 호리 족속의 족장들은 곧 로단 족장, 소발 족장, 시브온 족장, 아나 족장, 디손 족장, 에셀 족장, 디산 족장이라 이들은 그들의 족속들에 따라 세일 땅에 있는 호리 족속의 족장들이었더라” 이런 기록은 에서가 세일 산으로 갔을 때 이미 거주하던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고, 이미 거주하고 있던 자들이 있었지만 거기서 에서가 자리 잡았다는 것은 그들과 혼합되어 마치 한 민족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내용입니다. 특히 이 세일 산은 에돔 족속의 땅으로 에서가 세일 산으로 갔을 때 호리 족속에게 동화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호리 족속이 에서에게 동화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데,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에서를 외적으로 번성케 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이것 외에 언급할 수 있는 내용은 24절인데, 시브온의 자녀 중 아나가 자기 아버지 시브온의 나귀를 칠 때에 광야에서 온천을 발견하였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칼빈을 비롯하여 일부 사람들은 온천이 아니라 노새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특히 온천 혹은 노새로 번역하고 있는 히브리어가 다른 곳에서는 전혀 사용되지 않고 여기서만 한번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이 단어가 어떤 뜻인지 애매하다고 하는데, 어떤 번역이든 전체적인 맥락을 방해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칼빈의 경우 노새가 말과 나귀의 교배로 낳은 짐승으로 불필요한 일을 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공연히 여러 다른 종류의 동물을 구별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구별해 놓으신 것이 있는데, 이것과 저것을 섞여 또 다른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혹 온천으로 번역을 하게 되면 그 의미는 세상이 기억할만한 업적이 있었다는 것인데, 그것이 그들의 자랑의 이유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칼빈의 해석을 따르자면 저들은 지금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자로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우리말처럼 일반적인 번역을 따르자면 세상 업적과 같은 것이 지금 저들의 자랑꺼리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 에돔의 왕들을 기록하고 에서에게서 나온 족장들의 이름을 구역과 거처를 따라 기록하는데, 31절 이하 43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리던 왕들은 이러하니라 브올의 아들 벨라가 에돔의 왕이 되었으니 그 도성의 이름은 딘하바며 벨라가 죽고 보스라 사람 세라의 아들 요밥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요밥이 죽고 데만 족속의 땅의 후삼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후삼이 죽고 브닷의 아들 곧 모압 들에서 미디안 족속을 친 하닷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으니 그 도성 이름은 아윗이며 하닷이 죽고 마스레가의 삼라가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삼라가 죽고 유브라데 강변 르호봇의 사울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사울이 죽고 악볼의 아들 바알하난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악볼의 아들 바알하난이 죽고 하달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으니 그 도성 이름은 바우며 그의 아내의 이름은 므헤다벨이니 마드렛의 딸이요 메사합의 손녀더라 에서에게서 나온 족장들의 이름은 그 종족과 거처와 이름을 따라 나누면 이러하니 딤나 족장, 알와 족장, 여뎃 족장, 오홀리바마 족장, 엘라 족장, 비논 족장, 그나스 족장, 데만 족장, 밉살 족장, 막디엘 족장, 이람 족장이라 이들은 그 구역과 거처를 따른 에돔 족장들이며 에돔 족속의 조상은 에서더라” 이미 이스라엘 자손이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에는 왕들이 있었는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상 나라들처럼 왕을 요구할 때 그것을 기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왕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저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는 정신으로 있기 때문입니다(삼상8:7 참조).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이미 에돔 땅에 왕이 있었다는 것은 그런 정신으로 가득 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세상의 유일한 왕이시지만 그들은 그것을 거부하는 정신 아래 있었던 겁니다. 마치 시편 2편의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여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시2:2-3)
여러분, 창세기 36장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에서 곧 에돔의 족보를 보여주고 있지만 단순히 에서의 족보 가운데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만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번성했다는 것, 그들이 땅의 영광을 취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외적인 번성과 영광을 누가 주시는가?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 모든 번성과 축복, 영광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줄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들 스스로가 이룬 것인 줄 압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만하게 됩니다.
실제로 에돔에 대하여 기록한 오바댜를 보면 저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오바댜 1장 3절입니다.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바위 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즉 그들이 거주하던 지역은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자신들을 끌어내릴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지리적으로 좋은 위치에 있었고, 또한 그곳에서 견고한 요새를 지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힘인 양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큰 교만이 있습니다. 방금도 말했지만 그들이 가지게 되었던 모든 외적인 번성과 축복, 그리고 그들이 가지게 된 모든 영광이 누구로부터 말미암았느냐?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습니다. 그리고 에서와 그들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보고 듣는 자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에서가 하나님을 버리고 그 스스로 선택하여 아내를 취하고 가나안을 떠나 세일 산으로 간 것처럼 그들의 자손들 역시 에서와 같은 길을 걸어갔습니다.
물론 에돔의 모든 족속이 다 구원에서 제외 되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 할지라도 영적 이스라엘이 아닌 자가 있는 것처럼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자기 백성을 삼으시는 경우들도 있기 때문에 세세하게 말하자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구원에서 제외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요나를 통해 니느웨에 대한 심판을 알리실 때 그들 가운데 회개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하나님께서는 나훔 선지자를 통하여 니느웨의 심판을 알리셨는데, 구약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가운데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선택의 상징인 것처럼 에돔은 유기의 상징인데, 왜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느냐? 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느냐? 그들 스스로 하나님을 떠난 교만이 그들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의 번성이 분명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잘됨도 있습니다. 심지어 왕들을 소개하면서 이 땅에서의 영광도 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았는가? 전혀 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버리고 그들 스스로 살아가려고 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 알아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지금은 번성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 누구도 자신을 끌어내리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하듯 말할 수도 있습니다. 교만하게 큰 소리 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밖에 있는 자들의 마지막은 멸망 외에는 없습니다. 오바댜 1장 4절을 통해 말씀하시는 바가 그것입니다.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에서와 에돔의 번성을 부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높음을 마음에 두어서도 안 됩니다. 땅의 영광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상관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우리가 찾고 구해야 할 것은 이 땅의 영광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나라는 결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것으로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18장 36절에서 말씀하신 바가 그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자들,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자기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 때문에 우리가 소모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영광을 위해 살면 우리 역시 그 영광 안에서 영광스러워지게 됩니다. 때문에 이 땅에서 고난의 연속이요, 슬픔의 연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런 성도의 삶이 형통한 삶일 줄 아시고,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해야 할 것입니다. 연약함이 나타나고 죄악 된 모습이 나타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면 하늘 소망을 가지고 우리의 본향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