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한 편으로 읽는 詩論┃
구두화분 한 켤레
정 복 선
더는 떠돌지 않으리
구두에 흙 담고 꽃을 심어 대문 밖에 걸었지
섣부른 신발의 항해, 젖은 발과 타는 입술의 별자리들 따라
참을 수 없는 기항과 암초, 폭풍의 암전暗轉
오래 비추이던 불빛이 꺼지고 지구는 한참 늙었어도
흙과 풀이 쌔근쌔근 잠자는 곳
나란히 걸린 뭉그러진 구두에서 작은 꽃 흥얼거리지
마르세유 삼백 년 된 계단과 좁은 골목길
그만, 뛰쳐나가지 마,
떠도는 이들에게 풀꽃시간을 들려주려는 거야
-시집 『변주, 청평의 저쪽』에서
나의 詩論/ 구두화분 한 켤레
물, 불, 바람, 흙을 터뜨리는 발화점, 시
시는 시인이 발화(發話)하는 목소리이다. 그 대상이 우선은 시인 자신이지만, 나아가서는 그대, 그들, 중생 내지 만물에 이르기도 한다. 몸과 맘속에 전생으로부터 쟁여온 어떤 물, 불, 바람, 흙을 씨앗처럼 터뜨리는 발화점(發火點)이 시이다.
시인이 시를 써놓으면, 감나무는 감꽃을 피우고 모란은 모란꽃을 피우듯이, 시는 보이지 않는 세계로부터 보이는 세계로 와서 독자들 앞에 현현(顯現)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은연중에 수사법을 동원하고, 시의 리듬과 은유, 상징 및 이미지 등등을 통해서 개성적인 목소리를 내게 된다.
앞의 시는 신라향가의 10구체를 변용하여 써본 시편들 중 하나이다.
<향가시회>에서는 우리 고유의 시가인 신라향가를 현대적으로 계승하여 <현대향가>라는 이름으로 재해석, 재창조하고자 한다.
고대문학으로부터 신라향가, 고려, 조선, 근대의 모든 문학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정신 속에 면면히 흘러내려온 전통성을 발견하면서, 전통 그대로의 향가의 특성을 재현할 수는 없다 해도, 오늘의 시대성을 반영할 수 있는 주제와 내용을 형상화하여 형식면에서는 향가의 4구체, 8구체, 10구체를 지키려는 실험적 시도를 하고 있는 중이다.
신라향가는 『삼국유사』에서 일연선사가 천지귀신을 감동시키는 시이자 송이라고 했듯이, 집단놀이의 도구로써, 주술적, 불교적, 서정적, 민요적인 특성이 혼재하는 노래이다.
‘구두 한 켤레’는 사람의 일생의 단면을 보여준다. “구두”라는 보통명사가 이 시에서는 한 개인의 삶 내지 특정한 경험에 대한 은유이자 상징이 되는 이유이다.
“더는 떠돌지 않으리”라는 첫 구절은 화자의 다짐이자 천지신명에게 고하는 일종의 주문이다. 얼마나 많은 시공간을 거쳐 왔으면, 지쳐서 더 이상 걷고 싶지 않았으면, 아니, 비록 충분하다고 생각지 않더라도 지나온 날들이 이슬과 같고 번갯불과 같은 것(如露亦如電)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화자는 이어서 그 떠돎의 상징인 “구두”에 정성스레 흙을 담고 꽃을 심는다.
그런 다음, 대문 밖 좌, 우에 한 짝씩 나란히 걸어둔다. 드디어 “구두”의 치열한 항해가 끝나고 “작은 꽃 흥얼거리”는 시공간이 열린다.
사실, 이 “구두”는 섣부르게 청춘의 항해를 시작했기에, “젖은 발”, “타는 입술”이라는 열망과 결핍의 기나긴 역정 속에서 몇 번이나 기항과 난파를 견뎠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 모든 매혹의 별자리들을 좇았던 노마드의 날들 속에서도 절대 잊지 않은 곳이 있다.
오래 기다려주던, 그리움의 불빛이 꺼져버린 늙은 지구, 그러나 언제나 “흙과 풀이 쌔근”대는 그 마지막 항구다. 태초의 신화적, 원형적인 시공간이 재현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 시에서 제시하는 것이다.
아라비안나이트의 모험은 끝이 났다. 신드바드가 영웅적인 스토리를 떠드는 반면, 화자는 속삭인다. “더는 떠돌지 않으리/ 구두에 흙 담고 꽃을 심어 대문 밖에 걸었지”로 시작해서, <구두⤑화분>으로의 변신 과정을 묘사한 후, “그만, 뛰쳐나가지 마,/ 떠도는 이들에게 풀꽃시간을 들려주려는 거야”라고, 자신에게 또 타자에게 주문을 건네는 낙구(落句)로 마무리한다.
더 이상의 떠돎은 이제 자제하고 좌망(坐忘)하라고, 자신에게 다짐하는 동시에 같은 운명에 끄달리는 타인들에게 권고하는 목소리이다.
詩 한 편으로 읽는
1988년 『시대문학』 등단
시집 『변주, 청평의 저쪽』 외
첫댓글 정복선선생님! 수정으로 올리신 글로 수정해서 올렸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제가 올린 글은 삭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