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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0장 22-30절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않는도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양 우리라고 할 때 양을 돌보는 목자가 언제나 참된 목자요, 선한 목자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목자가 있는가 하면 거짓된 목자도 있으며, 선한 목자가 있는가 하면 삯꾼도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을 비롯하여 종교지도자들이 거짓된 목자요, 삯꾼이었습니다. 그들은 양의 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 자신이 양의 문으로 출입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양들조차 양의 문으로 인도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저들과 대조적으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자신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양의 문인 자신으로 말미암아 들어가고 나오면서 꼴을 얻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저들은 도둑이요 강도로 도둑질하고 죽이기 위해 왔다면 예수님께서는 양으로 생명을 얻도록 하고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은 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하여 목숨까지 내놓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목숨을 내놓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내놓은 목숨을 취하시기까지 하시는데, 이 모든 것이 누구를 위한 것으로 있느냐? 자기 양들을 위한 것으로 있습니다.
이때 자기 양이란 우리 안에 있는 양 떼만이 아니라 우리 밖에 있는 양 떼까지 포함하는데, 영원한 예정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택자와 유기자 중 택자가 그 대상으로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고 더욱 풍성히 얻게 되는 대상은 결국 영원 전부터 택하신 자들, 그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 본문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우선 22절을 보시면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수전절’이란 성전을 수리한 절기란 뜻으로 좀 더 정확하게는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고 봉헌한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모세 율법에서 이러한 절기를 찾아볼 수 있는가? 구약 성경에서 이러한 절기를 찾아볼 수 있는가? 사실은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짓게 하실 때 봉헌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솔로몬으로 하여금 성전을 짓게 하실 때도 봉헌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내용이 수전절과 관계된 것은 아닙니다.
수전절의 배경은 신구약 중간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맨 처음 솔로몬으로 하여금 성전을 짓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이 성전은 바벨론에 의해 파괴가 되었습니다. 이후 스룹바벨에 의해 파괴된 성전을 재건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다시금 더렵혀지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 사건이 구약과 신약 사이, 즉 신구약 중간사에 있었던 일입니다. 수리아 지역의 왕인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가 예루살렘을 점령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그는 몇 가지 칙령을 내렸는데, 유대인들이 이교도들의 관습을 따르게 하는 일과 성전 안에서 번제를 드리거나 희생제물을 드리는 예식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 등이었습니다. 오히려 성전을 이교의 제단으로 삼아 우상을 세우기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성전이 이방인에 의해 더렵혀졌던 것이 B.C.164년경 유다 마카비가 군사를 일으켜 수리아 군대를 물리치고 성전을 정결케 하였는데,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유대인들은 수전절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이때가 11월과 12월 사이인데, 유대 종교력으로는 9월 정도가 됩니다.
여기서 수전절을 지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등장하는데, 어떤 이들은 지킬 수 없다고 하면서 예수님 역시 수전절을 시키신 것이 아니라 그날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장소로 갔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에스더 9장에 나오는 부림절을 유대인들이 새롭게 정하여 지킨 것처럼 수전절 역시 그러한 날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일들에 대하여 감사하여 그 일들을 해마다 기념하기 위한 날로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날이 성일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수전절을 인정했는지, 인정하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구약의 모든 절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폐해졌다는 것이요,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성전으로 칭하신 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요2:21). 더렵혀진 성전을 정화하고 봉헌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성전의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몸 된 교회인 우리 자신을 더욱 정화하게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수전절에 솔로몬 행각이라는 곳을 거니셨습니다. 23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여기서 솔로몬 행각이라는 곳은 솔로몬 성전의 동편 가장 외곽에 위치한 곳입니다. 행각은 지붕을 덮어 눈이나 비, 뜨거운 햇빛을 피할 수 있게 지은 건물인데, 예수님께서는 수전절에 그곳을 거니셨습니다. 아마도 겨울철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곳이었기 때문으로 추정이 됩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솔로몬 성전은 바벨론에 의해 파괴가 되었습니다. 이후 스룹바벨에 의해 성전이 재건되었지만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더렵혀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룹바벨에 의해 재건된 성전이 로마 장군인 폼페이우스(Pompeius)에 의해 파괴되기도 했습니다. 이때 헤롯이 유대인의 마음을 사기 위해 파괴된 성전을 재건하기도 했는데, 예수님 시대의 성전은 바로 헤롯에 의해 재건된 성전으로 거기에 솔로몬의 행각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었습니다.
본문은 ‘성전 안 솔로몬 행각’이라고 되어 있지만 성전 외곽에 위치한 곳으로 그곳도 성전으로 칭해지고 있었습니다. 이곳을 예수님께서는 거니셨고, 그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에워싸면서 따지듯 공격하게 됩니다. 24절을 보시면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간단히 말하면 지금 유대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전절은 지킵니다. 성전이 더러워 졌을 때 그 성전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 있었고, 또 더럽힌 성전을 깨끗하게 하여 새롭게 하나님께 봉헌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 날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수전절을 지킬 정도입니다. 그러나 성전의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있었지만,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하시는 일들을 보았지만 여전히 그가 그리스도인 줄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수전절이 정결의 의미를 담고 있고 봉헌의 의미를 담고 있지만, 그리스도 없는 정결 그리스도 없는 봉헌이 가능하기라도 한 것처럼 거저 절기만 지키면서 그리스도는 보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 없이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이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확신은 어디에 근거한 것입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할 때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고 하는 확신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드리는 헌금이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확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정성도 있어야 하고, 열심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정성과 열심만 가지고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습니다.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그리스도가 있어야 합니다. 참 하나님이시고 참 사람이신,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정성도 헛되며, 우리의 열심도 헛될 뿐입니다.
그런 그리스도 없이 수전절을 지킨다! 성전을 깨끗하게 한다! 성전을 깨끗하게 하여 봉헌한다! 결코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는 것에 우리의 정성과 열심을 다할 뿐입니다. 한 마디로 헛된 것을 하나님께 드릴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주일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모여 행하는 모든 일 가운데 나타나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 합니다.
다시 24절을 보시면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얼핏 이 말씀만 보면 예수님으로부터 듣지 못해서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비춰지기가 쉽습니다. 그들은 약속된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는 자요, 그리스도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찬 자들로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은 자기 탓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명확하게 말씀하지 않은 탓이라고 비난하듯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저들에게 예수님은 25절의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만 보더라도 7절 “...나는 양의 문이라” 말씀하셨고, 또한 9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한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1절에서는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말씀하실 뿐 아니라, 17절에서는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라고 말씀하실 정도입니다. 말씀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행한 일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셨는데, 그 모든 일을 누구의 이름으로 한 것인가 할 때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한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실제로 목자와 양의 비유를 말씀하기에 앞서 요한복음 9장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게 하셨습니다. 특히 4절에서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니...”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일을 행하셨습니다. 또한 자신을 나타내시되 5절에서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후 이 일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이 믿지 못하자 드러내신 것이 무엇입니까? 39절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요한복음 8장, 7장, 6장 그리고 그 앞에 있는 모든 말씀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그가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한 일을 통해 보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들의 영적 실상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자요,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로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저들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입니다. 믿을 수 있는 바를 제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제공했지만 저들이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악의적으로 대항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6절은 좀 더 깊고 근원적인 말씀을 덧붙이시는데,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가? 왜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가? 왜 저들은 그렇게 마음이 완악한가? 믿을 수 있는 바를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가? 왜 악의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하여 대항하고 있는가? 저들은 그리스도의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목자와 양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양은 참된 목자요 선한 목자의 음성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음성만 듣습니다. 타인의 음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따르지 않습니다. 비유에 대한 해석 부분에서는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고 말씀합니다.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이 안다고 말씀합니다. 물론 우리 안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도 있습니다.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지만, 그래서 믿지 않지만, 때가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게 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를 통틀어 예수님은 내 양으로 칭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내 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나중에라도 믿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데, 왜냐하면 너희는 처음부터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믿을 수 있는가?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양으로 있는 자, 그들이 믿습니다. 지금 양 우리 안에 있는 자가 믿는 자요, 우리 안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도 때가 되면 믿을 자로 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로 설명하자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 그가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때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롬10:17).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되 율법을 통하여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죄인이기에 복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복음, 즉 하나님의 긍휼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여기에 믿음이 있고 여기에 생명의 시작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생명이 시작된 자는 생명의 풍성함으로 나아가는데, 중생 이전 율법이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는 용도로 있었다면 중생된 자에게는 율법이 신앙과 삶의 규범으로 있게 됩니다. 이 규범 안에서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게 됩니다.
이런 모든 내용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듣는 자에게 믿음의 유무를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9장 16절입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믿음이라는 것을 적용해 보면 사람이 원한다고 해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달음박질하는 열심을 가진다고 해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는 믿음을 선물이라고 표현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데,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엡2:8). 사람이 가지고 싶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셔야지 만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이 믿음을 주시는가? 사도행전 13장 48절,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자, 영원 전부터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유기하기로 하셨다고 할 때 선택하신 자, 그들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또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야지 만 믿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지 않은 자들의 경우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논리로 결국 믿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 자의 잘못이 아니라 믿음을 주시지 않은 하나님 잘못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잘못을 행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예정론은 이런 점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교리라고 말하기도 하며, 더 나아가 결국 인간의 선택에 따라 믿음의 유무가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26절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라는 말씀도 사실이고, 또 25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을 따라 유기했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도 사실이요, 그것이 역사 속에서 나타날 때 믿을 수 있는 근거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저들의 불신앙도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유기하기로 하셨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왜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유기하기로 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전혀 말하는 바가 없습니다. 단지 로마서 9장 13절처럼 말할 뿐입니다.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사랑할만해서 사랑한 것이고, 미워할만해서 미워한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9장 1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사람에게 원인이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으로 말미암아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유기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셨다고 해서 하나님께 불의가 있는가? 없습니다. 로마서 9장 14절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즉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유기하셨다고 해서 하나님께 불의가 있는 게 아니란 것입니다.
로마서 9장은 좀 더 분명하게 진술합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롬9:18-23)
그러니까 선택과 유기의 원인은 우리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선택과 유기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와 그 능력을 알리시기 위한 대상으로 그들을 두셨다는 것이 성경의 진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은 반드시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원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으로 하자면 그것이 25절입니다. 믿음을 수 있는 바를 제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말씀하셨고, 또 말씀하신 바를 확증하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한 일들이 있었지만, 너희는 그것을 보고 들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불신앙으로 고수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6절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않는다는 이 표현 때문에 불신의 원인을 하나님 탓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을 그렇게 만드신 것은 맞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드신 것에 대해서는 불의함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한 것은 철저히 저들의 완악함 때문입니다. 은혜를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거절한 것은 바로 저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간단히 표현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유기의 원인은 하나님께 있지만, 정죄의 원인은 그들 자신에게 있다.
이 사실을 좀 더 분명하게 알리시기 위해 이제 대조적인 말씀을 하시는데, 27절입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만약 너희가 내 양이라면 내 음성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내 음성을 듣는 자가 아니란 것입니다. 이때 듣는 자가 아니란 것은 들려지지 않아서 듣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들려졌지만 듣지 않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참된 해석도 들려졌고, 율법으로는 구원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복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도 들려졌습니다. 그 복음의 핵심이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것도 들려졌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내 음성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른다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 자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그들을 안다는 데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누가 자기 양인지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으로 가면 오병이어와 관련된 말씀을 하신 후 그 말씀이 어렵다는 이유로 제자 중 여럿이 예수님을 떠나게 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때 열 두 제자에게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 질문에 대하여 사도들은 이렇게 답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요6:68-69) 그러나 12명의 제자에게 묻고 그들로부터 답을 얻었지만 그 중 한 사람은 참된 고백으로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요6:70)
이처럼 예수님은 누가 자기 백성인지, 누가 자기 양 떼인지 아십니다. 아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들에게만 효력 있게 하십니다. 여기에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참된 목자요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만을 따르게 하십니다. 여기에도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이런 성령의 역사는 중생과 함께 거룩하게 하심으로 나타나는데, 내 양이 아닌 자들에게 이런 역사가 있는가? 없습니다. 좀 더 구분하여 말씀드리자면 성령의 외적 역사는 나타날 수 있으나 내적인 역사는 없습니다.
계속해서 28절을 보시면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양 떼라면 그리스도의 음성,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음성,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믿음을 일으켜 그리스도를 따르게 하십니다. 이런 자들은 영생을 보장 받습니다.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영생에 이르기까지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다면 사도 베드로의 경우는 예수님을 부인하기까지 한 사람입니다(마26:70). 맹세하면서 부인하고(마26:72), 또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했습니다(마26:74). 그렇다고 해서 한번 주신 영생을 취소한 바 있는가? 없습니다. 오히려 회개하여 돌이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세우시는데,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난 뒤 베드로에게 찾아가셔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요21:15). 내 양을 치라(요21:16). 내 양을 먹이라(요21:17).
그리스도의 양 떼라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넘어졌고, 다윗도 넘어졌습니다. 방금도 말했지만 사도 베드로도 넘어졌습니다. 그러나 영생을 주신 이상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양 떼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리스도의 손 안에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손 안에 있는 자들을 그리스도로부터 빼앗아 올 수 있는 자가 있는가? 없습니다. 만약 그리스도보다 강한 자라면 빼앗아 올 수 있을지 몰라도, 그리스도보다 강한 자가 있는가? 없습니다.
이 사실을 좀 더 강조한다는 의미에서 예수님은 29절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그리스도의 양 떼들을 그리스도의 손에 맡기신 분이 누구냐? 성부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성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만물보다 크신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만물보다 크다는 것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란 사실과 함께 창조하신 모든 만물을 친히 다스리는 분이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만물이라고 할 때 인간은 만물의 끝을 보지 못합니다. 지금도 과학자들은 우주를 관찰하고 탐구하지만 끝을 본 자가 없습니다. 뛰어난 망원경을 만들어 과거에 비해 더욱 먼 곳을 볼 수 있게 되었지만 끝을 본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물 안에 계시기도 하시지만 만물 밖에 계시기도 하십니다. 만물 밖에 계시기에 만물을 만드실 수 있으며, 만물 밖에서 만물을 보는 자로 있습니다. 그리고 만물 밖에서 뿐 아니라 만물 안에서 만물을 다스리는 분으로 계십니다. 그런 분의 손으로부터 무엇을 빼앗을 수 있는 자가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 신명기 32장 3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당연히 그분으로부터 모든 만물이 창조되었고, 또한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만물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생사화복의 주인이 누구시냐?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분으로부터 그의 것을 빼앗을 수 있는 피조물이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자, 그 음성을 듣고 따르는 자에게는 영생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영생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영원한 멸망에 이르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요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영원 전부터 택하시되 때가 되어 우리를 불러 그의 소유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한번 그의 소유가 되면 누구도 하나님의 소유된 자를 빼앗아 갈 수 없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소유를 빼앗길 수 없는 분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첫발을 내 디딘 사람은 구원의 길을 걸어가면서 그 길에서 이탈하는 법은 없습니다. 넘어질 수 있고, 잠시 쉬는 것처럼 있을 수는 있지만 영생을 완전히 소유하기까지는 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구원의 길에서 이탈하도록 위협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친히 파수꾼이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남달라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만큼 견고해서도 아닙니다. 결코 부인하지 않겠다고 한 사도 베드로도 그날 밤에 부인할 만큼 연약함이 있었고, 동일하게 우리 역시 연약한 자들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구원을 완성하라고 한다면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구원의 길에서 이탈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견고하게 하시는 이가 누구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중보자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본문 30절을 보시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라고 말씀하시는데, 아버지와 나는 하나로 그의 뜻이 내 뜻이고 그의 능력이 내 능력이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왜 내 양을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가? 만물보다 크신 아버지의 능력이 곧 내 능력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내가 하고자 하는 바가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바요, 내가 나타내고 있는 모든 능력은 곧 아버지께서 나타내고자 하신 능력과 같다는 것입니다. 29절에서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그의 뜻과 다른데 받은 것이 아닙니다. 지난 시간 예수님께서 자발적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고 거기에는 사랑이 전제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수동적으로만 있는 분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위하여 능동적으로 일하시는 분으로 있습니다. 능동적으로 일하시되 성부 하나님과 같은 능력으로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보존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만큼 비례하여 확실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 능력만큼 비례하여 확신을 가진다면 우리는 결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능력은 기껏해야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무한한 능력이 아니라 유한한 능력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만물보다 크십니다. 만물보다 크신 정도가 아니라 한계가 없습니다. 무한한 능력의 소유자이십니다. 그런 분이 우리를 구원의 완성, 영생에 이르도록 하겠다고 하시는데, 누가 그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목자와 양의 비유에서 거짓 목자들을 절도요, 강도, 도둑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들이 주님의 양 떼들을 도둑질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에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말씀하시지만 주님의 손에 있는 양 떼가 우는 사자의 입에 삼켜지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저들에 대하여 경계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7:15)는 말씀으로 경계할 것을 가르치기도 하십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양 떼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따릅니다. 그리고 결코 영생의 길에서 이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기 때문이요, 하나님과 하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솔로몬 행각에서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는 유대인들은 그런 자가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양이 아니란 것입니다. 아니기에 믿지 않습니다. 믿을 수 있는 말씀도 주시고 믿을 수 있는 역사도 나타내셨지만 그리스도의 양이 아니기에,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양이 아니기에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욱 강퍅한 마음으로 대적할 뿐입니다.
오늘 본문 30절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씀하실 때 다음 주에 보게 될 유대인들의 반응은 돌을 들어 치려 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면 밝히 말하라고 한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뜻이 전혀 무엇인지 모르고 자기들 생각에는 신성모독이라는 죄목으로 그렇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무엇을 나타내는가? 그들의 강퍅함을 나타낼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강퍅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양 떼가 아님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양 떼임을 증명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연히 그리스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간혹 목회자들 가운데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칼 바르트가 한 유명한 말입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고, 신문을 통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한 이해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세상에 대하여 가르쳐주는 바가 없다면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성경이 세상에 대하여 가르쳐주지 않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한 손에 성경을, 한 손에 신문을 든다고 할 때 사람의 본성을 어디로 흘러가는가? 하나님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맞춰 가는 데로 흘러갑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소리에 음성을 기울이고, 저 소리에 음성을 기울여서는 안 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음성만을 따라야 합니다. 그 음성 안에만 생명이 있고, 그 음성 안에만 영생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다른 음성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그의 음성에만 있습니다. 오늘날로 하자면 신구약 성경 66권,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 있습니다. 그 음성만을 따르는 성도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양 떼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