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의 길
- 아들에게 쓰는 편지
네가 입사지원하며 쓴 자기 소개서를 보았다. A4 종이 한 장에 왜 건축을 전공하게 되었는지, 잘 설명하였더구나. 대견하고 뿌듯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 마지막 장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아이. 그림이 좋아서 미술학원과 미술관에 보내 달라고 부모를 조르던 아이가 저였습니다. 제가 ‘건축가’로의 꿈을 키운 것은 아버지의 영향입니다. 중동에서 아버지가 부쳐 준 사진에는 빛을 내뿜는 거대한 황토색 건물이 보였습니다. 성채 같은 그 건물 앞에 흰 안전모를 쓰고 서 계신 아버지는 마징가나 슈퍼맨처럼 위대했습니다. ‘열려라 참깨’ 하고 외치면 육중한 문이 열릴 것만 같은 신비한 집, 그런 집을 동경한 저는 망설임 없이 ‘건축’을 지망했고 대학을 졸업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퇴근하면서 네 방에 눈길을 주는 버릇이 생겼다.
“전화 없으면 안 들어온다고 하잖아요.”
네 엄마는 신경 쓰지 말라는 눈치다.
넌 일이 많으면 사무실에서 자는 것이 편하다고 했지만 마음이 개운치 않다.
너의 투병생활을 떠올린다. 세면기 가장자리에 파리똥처럼 묻은 서너 개의 각혈 흔적. 이후로 너는 입원, 투약 그리고 휴학, 복학을 반복하면서 약관의 20대를 소진해 버렸다. 생각하면 할수록 젊음의 그 시간이 아까웠다.
이립而立의 나이에 들어서야 찰거머리 같은 결핵균을 떼어내고 삭정이 같은 종아리에 속살을 채우고 있는 너. 다제내성결핵균. 세상의 병균 중에서 가장 교활하고 질기다는 의사의 말이 과장은 아니었다. 자식노릇 한답시고 성치 않은 몸으로 덥석 직장에 들어간 네가 대견하고 자랑스러웠지만 재발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부터 앞섰다.
첫 월급을 받은 날 무척 낙담해 있었다고 네 엄마가 일러 주었다. 연봉 계약하면서 한 달에 얼마씩이라고 정했는데 막상 백만 원도 채 안 되는 금액을 봉급이라며 받았으니 실망이 여간 했을까. 힘들게 갈고 닦은 학문의 결실치곤 너무 빈약했겠지. 그늘진 너의 표정을 충분히 짐작했다.
얼마 전 신문에 난 기사를 읽었다. 미국에서 본전 못 뽑는 대표적인 세 종류의 직업이 건축사, 박사연구원, 요리사라는 기사. 투자비용에 비해 연봉이 쥐꼬리라며 다른 과목 전공자의 10년 전 연봉을 받기 위해 황금 같은 청춘기를 올인 하는 직업이라는 내용이었다.
건축사의 경우, 석사 논문까지 7년, 다시 현장실무 3년이 되어야 건축사 면허시험자격이 있는데 자격을 딴다 해도 초봉이 3만 4000달러, 선임이 되어도 6만 8000달러라고 했다.
우리라고 해서 별반 다르랴. 2003년 노동부가 밝힌 통계조사를 보면 4년제 대학까지의 총교육비가 1억 1190만 ~ 1억 3071만원 든다는 사실이다. 건축전공자는 졸업이 출발점이다. 졸업 후 5년의 인턴경력을 쌓아야 건축사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있고 자격을 갖춘 후에도 좁디좁은 문을 통과해야 한다. 4 ~ 5%만 지날 수 있는 문이다. 그 문을 나서야 전문가로 대접해 주는데 그렇다 해도 의사나 변호사처럼 눈부신 미래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네가 건축을 선택한 순간 내 운명을 닮도록 예고된 것 같다. 한 때 나도 은행원을 부러워했었다. 네 누나가 태어나던 해 여름이었다. 내가 일하는 건설현장 인근에 은행이 있었다. 스무 살이 채 안 되는, 상고머리에 여드름이 한창인 신입 행원이 창구에서 근무했다.
선풍기도 귀한 그 시절, 에어컨 바람을 쐬러 가끔 은행에 갔는데 우연히 그의 급료가 얼마인지 알게 되었다. 그 애송이의 봉급이 오만 원 받는 나보다 무려 네 배나 많다는 사실. 뿐 아니라 별별 수당에 양복까지 무료로 지급 받는다는 말을 들었다. 수긍하기 힘든 엄청난 차이였다. 수요일 오후면 하얀 셔츠복장으로 테니스를 하던 그들, 땡볕에 종일토록 노출되어 까맣게 거슬린 내 얼굴과 팔뚝.
학력이나 경력, 나이, 군 복무, 근무 환경, 근무시간, 일의 강도, 테크닉, 어느 것을 비교해도 왜 내가 그만 못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허탈감을 넘어 분노의 감정마저 솟구쳤다.
소주잔을 엄청 비우게 했던 그때의 가슴앓이는 지금에도 감정이 생생하다. 학창 시절 기고만장했던 기개와 자부심이 짚나라미에 걸쳐진 해삼처럼 녹아 흐물거렸고 자탄의 늪에서 괴로워했던,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의 세계가 선진국과 후진국의 층계보다 차이 졌던 그 때가 기억난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자. 아들아!
건축이 다른 직업과 본전이나 따지고 경제적 수입으로 키 재기 할 그런 직업이던가. 창을 내다보면 먼저 눈에 띠는 것이 건축물이다. 어디를 가던 건물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그 장소를 연상하는 중심에는 거의 건축물이 있다. 건축이 여러 사람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연을 신의 작품이라 한다면 그 대칭축에 인간이 신을 흉내 낸 창작 중 가장 가까운 형태가 건축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니. 세계 7대 불가사의나 근대에 꼽는 불가사의의 대부분이 건축물임을 상기한다면 내 말에 동의하겠지.
지금으로부터 2300여 년 전에 로마인은 길을 닦고 다리를 놓고, 수돗물이 흐르는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었다. 프랑스 님의 퐁 뒤 가르의 수도교를 보면 숙연한 느낌마저 인다.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을까.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의 현장이다. 그래도 당시 기술자들은 견고함, 편리함, 아름다움(firmitas,utilitas,venustas)을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세월이 흐른 지금의 건축가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아름답고 쓰기 좋고 튼튼한 집을 완성했을 때 건축가의 기쁨은 집 주인의 만족에 비할 수 없이 크고 진하다. 거대한 조형물이 자신의 감각으로 창조되었을 때의 희열, 건축가만이 누리는 행복이 아닐까. 네가 혼신의 열정으로 선 하나를 긋고 수천, 수만의 고뇌 끝에 한 공간을 창출한다면 이 세상 건축물 중 최상이라는 파르테논 신전보다 아름답고 멋진 건물이 탄생할 것이다.
초조해 하지 마라. 지독한 시절은 지난 투병 10년으로 끝났다. 바램이 있다면 건축가 알바 알토* 같이 가구까지 설계하는 디자인 센스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자연을 닮은 자작나무 파이미오의자며 핀란드의 호수를 그려 냈다는 유리병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감각이 살아 꿈틀거린다.
꿈을 현실로 만드는, 그래서 사차원의 미래세계까지 예측하며 공간을 꾸미는 건축가란 직업만큼 매력적인 직업이 또 있을까. 자부해도 좋다. 아들아. 내일도 태양이 뜬다. 분명히 뜬다.
*알바알토: Alvar Aalto(1898-1976) 핀란드 건축가 공예가. 파이미오결핵요양원,비푸리도서관,빌라마이레아,무라찰로 실험주택 외 다수 건축물 설계. 영국 엘리자베스2세로부터 건축부문 금메달 수상. 핀란드 우표 지폐에 그의 초상화 등장.
첫댓글 건축가에게 건축을 전공하는 아들이 있다면 그 자체가 성공과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내 자신이 대물림 해줄만한 이력이 없기때문에 더윽 그렇게 느낍니다.
내 장남도 비슷한 병력이 있었으나 쉽게 극복했고, 성장 과정에서 내가 먼저 발견못한 죄 책감을 항상 갖고 있지요.
송암도 .... 먼저 발견 못했다고 죄책감까지야. 하느님의 섭리로 압니다. 제가 종교를 갖고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