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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간길-20회차(차갓재~저수령)
글쓴이 : 미스터리
1. 지난 곳/ 시간. 2005. 9/9~9/10.
안생달 마을 (3:35 출발)
~송전탑 (3:55)
~차갓재 (3:57)
~작은 차갓재 (4:12)
묏등바위 앞 갈림길 10여 분 알바.
~묏등바위 (5:05)
~황장산 (5:21), 칼날 능선길 지나,
~안부 (5:42), 옛 산태골 갈림길.
~감투봉 (5:49)
~황장재 (5:57), 문안골-생달리 고개.
~무명봉(985봉) (6:07)
암릉지대
~안부 ->작은 봉 -> 안부 (6:13/6:15/6:19)
~무명봉(1004봉) (6:39)
~치마바위 위 능선 (6:48)
~폐백이재 (7:01), 갈밭골- 삼밭구미골 고개.
~전망봉 (7:18)
~무명봉(928봉) (7:22)
~헬기장 (7:40)
~벌재 (7:48/8:12), 아침 식사.
~산불감시초소 (8:33)
~무명봉(823봉) (8:36)
~돌목재 (8:40), 석항리 갈림길.
~무명봉(1020봉) (9:01/9:13)
~1040봉(옥녀봉?) (9:27)
~문복대(1077) (9:36/9:50)
~작은 안부 (9:54)
~무명봉 (9:58)
~멧고개 (10:10)
~옛 저수재 (10:18), 윗성골-단양 쪽 고개길.
~무명봉(저수령 앞봉) (10;26)
~저수령 (10:32) 총 6시간 57분.
2. 이동 거리.
안생달마을~차갓재 ; 2.0km. ?
~황장산 ; 2.6km.~황장재 ; 0.92km.
~벌재 ; 4.56km.
~저수령 ; 6.06km. 총 16.14km.
(20회차) 16.14km. (3:35/10:32)
안생달 마을 양조장 앞에 도착한다.
개들도 짖지 않고 고요가 마을을 덮고 있다.
일기예보에 ‘비’였으나 오는 길 간간히 뿌렸을 뿐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는다.
오는 길 차 속에서 오그라들 대로 오그라든 다리를 스트레칭한다.
먼 길 걷기 전 스트레칭이 그 날의 산행을 얼마나 편하게 해 주는지는 해 보면 안다.
산에 다니면서 느끼는 일인데 일단 산행시작하기 전, 스트레칭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
마라톤을 하건, 조기 축구를 하건, 골프를 하건, 수영을 하건 대부분의 운동 시작 전에는
몸을 푸는게 일반화되어 있건만 이상하게 산행에서는 스트레칭에 인색하다.
주말 그렇게 사람 많이 몰리는 서울근교 산행에서도 개인이나 단체나 모두 인색하다.
아마도 천천히 오르면서 워밍엎되니 그리하는 것인가 보다.
차갓재를 향하여 출발이다.(3:35)
오솔길 풀과 작은 나무들이 우거졌는데 내렸던 비로 많이 젖어 있다.
얼마 가지 않아 바짓가랑이가 물기와 흙에 젖는다.
물기에 젖은 흙길 비탈은 많이 미끄럽다.
아니 이 길이 이리 된 비탈이었던가?
내려 왔던 길을 다음에 다시 오르려면 언제나 내리막보다는 오르막이 훨씬 가팔라져 있다. 오르기는 힘들고 내리막은 한 순간인 것 같다.
아마 인생길도 山길 같겠지..
드디어 송전탑에 도착한다.(3:55)
어느새 온 몸은 땀으로 젖어 있다.
20분만에 벌써 온 몸이 full가동하니 꽤 효율 좋은 운동법이다.
길은 우향우.
몇 걸음 움직였을까, 안부를 가르는 차갓재에 도착한다.(3:57)
북쪽 차갓마을과 남쪽 생달(산다리)마을을 잇는 고개길이다.
이어지는 숲길을 따라 墓도 지나고 봉우리(816봉)도 하나 넘으니 비탈진 鞍部에서 다시 고갯길과 만난다. 작은차갓재이다.(4:12)
역시 생달마을에서 단양쪽 우멍골을 지나 사기막이 있는 방곡리나, 벌천리 쪽으로 넘나들던 고갯길이다.
이어지는 대간길은 간간히 바위들이 나타나는데, 한결같이 우측 남쪽은 가파르게 깎인 바위들이라서 우측 시야는 틔여 있다.
어둠 속이라 보이는 것은 없고 옆쪽 산등성이와 때때로 그 너머로 보이는 마을의 불빛 몇 개가 보일 뿐이다.
생달리 어느 마을의 불빛일 것이다.
어두운 밤, 산길에 들어 앞 산 등성이 너머로 반짝이는 마을 불빛을 보면 따스함이
전해져 온다.
가는 길 한두 군데 잠시 길이 희미할 뿐 진행은 순조롭다.
오늘은 불멸의 선두 손승천님 대신 김영규님이 선두에 섰다.
손승천님은 어둠 속에서 홀로 내닫다 보니 때때로 심한 알바에 고생하는 일이 자주 있어
날밝기까지는 그 의욕을 접어두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오르막길이 내리막으로 바뀌는데 내리막 초입은 길이 선명하더니 갈수록 길은 좁고 계속되는 내리막이다.
어둠 속에서도 산세와 길의 모양새를 점검해 보는데 아무래도 이 건 아니다.
이제는 알바길은 어느만큼 가면 동물적으로 느껴진다.
어디서 길을 잃었나?
길을 찾을 때까지 온 길을 되돌아 간다.
오르막에서 내리막으로 바뀌는 마루에서 우향우 turn해야 했는데 그만 직진을 해 버렸다. 무려 10 여분이나 알바를 해 버린 것이다.
방향을 턴하여 황장산을 향한다. 가파른 오르막이다.
잠시 후 로프가 매어져 있는 암릉을 만난다. 지도에는 묏등바위라 표시되어 있다.(5:05)
계속 암릉구간이 이어진다.
주변의 어두운 산줄기들이 보이는데 그 윤곽이 큰 짐승들의 등줄기 같다.
날이 밝았더라면 주변 산세들의 멋진 모습이 한 눈에 들어 올텐데.. 아쉽다.
이 곳은 암릉 좌우로는 절벽이어서 야간산행에서는 여간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암릉 지나 흙길로 접어드는 순간, 아차!!
앞서 가던 일행이 그대로 언덕 아래로 미끄러진다.(2 주 전에 join한 분)
순간 왼발을 잘못 디뎌 좁은 길 허공을 밟은 것이다.
내려다 보이는 언덕 아래는 직벽에 가까운 낭더러지인데..
다행히도 큰 소나무와 잡목이 막아 2m 아래에 걸쳤기에 망정이지.
10 년 감수하고 황장산 정상에 도착한다.(5:21/5:27)
정상은 넓은 공터인데 숲과 어둠이 막아 경관은 보이지를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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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黃腸山.
이 산의 이름은 문헌(신증동국여지승람, 산경표, 대동여지도)에 한결같이 鵲城山(작성산)으로 기록하고 있다.
산의 북동쪽 능선인 투구봉, 906봉 산줄기 오른쪽 계곡이 문안골인데 이 곳에는 옛 城이 있다. 그 城의 이름이 鵲城이어서 이 곳을 ‘작성산성’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삼국이 겨루던 시절 신라나 고구려의 옛 성에서 시작된 것 같은데 최종 개축은 고려조에 이루어진 것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 醴泉郡 古蹟條에는 공민왕 때 홍건적의 침략으로 왕이 충주로 피난왔는데 그 때 이 성을 ‘鵲將軍’이 쌓았다 해서 ‘작성’이라 한다는 전설을 기록하고 있다.
한편, 俗說에는 이 지역이 신라나 고구려의 변방(가장자리)이라서 ‘갓(邊)+城’인데 ‘갓’이 가치-> 까치(鵲)로 변했다는 말도 있다.
차갓재의 ‘갓’도 갓(邊)이라는 말도 있으니 옛일은 궁금할 뿐이다.
아무튼 작성을 품고 있는 산이라 鵲城山인데 요즈음은 黃腸山이 되었다.
황장산은 문경군지에 이 산을 황장봉산(黃腸封山)이라 칭한데서 비롯되었다 한다.
‘황장’이란 본래 이 산에는 대궐지을 때나 임금님 관을 짤 때, 사찰 지을 때 쓰는 최고의 소나무인 황장목(금강송, 춘양목)의 대표산지였다고 한다.
황장목은 껍질은 赤松이며 속은 누런(黃) 송진이 안으로 가득차서 마치 창자(腸)에 영양분이 實하게 차 있는 것 같은 최고의 재목이라 황장목인데 일명, 金剛松, 봉화군 춘양면과 얽힌 사연도 많아 春陽木이라고도 한다.
(춘양목은 대간길 도래기재 지날 때 다시 만나게 될 것임)
또한 封山이란,
나라에서 산림을 보호하거나 임금님의 사냥터를 보호하기 위하여 백성들의 출입이나
훼손치 못하도록 금표(금지 표시)를 세운 산이다.
황장산 북쪽(차갓마을 쪽) 명전리 밭가운데는 숙종 때(1680년) 세운 ‘封山’이라는 돌비석이 아직도 남아 있다.
요즈음 일반 지도에 보면 이 산 이름이 황정산(皇庭山)인데 무슨 유래인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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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산 하산길은 만만치 않다.
칼날능선의 날등을 밟고 이동한다.
이제 동쪽이 밝아 오면서 雲海에 쌓인 주변의 나지막한 산들이 보인다.
여명의 빛은 없어도 이런 새벽의 色은 (빛이 아니라 色이 분명하다) 흰색이다.
‘흰새벽’이란 말이 있었던가?
가던 길 멈추고 많이 많이 눈에 담는다.
산길에서 맞는 새벽, 여명의 빛과 색은 고스란히 잠 안 자고 부지런떤 者들의 몫이다.
품삯을 이런 것으로 받는 것은 그 가격을 가늠할 필요가 없어서 좋다.
같은 품삯을 받되, 각자 자신의 주머니만큼 알아서 가져가게 된다.
칼날등 사이에 흔적도 불분명한 작은 안부 갈림길을 만난다.(5:42)
가파르기가 6~70도는 되는 것 같다.
등산지도에는 안생달쪽 산태골로 내려가는 소로 표시가 되어 있다.
비상탈출 상황이면 모를까, 오랫동안 사람 다닌 자취가 없다.
잠시 오르니 감투봉.(5:49)
감투 모양 같기도 하고 비녀낀 머리 모양 같기도 하다는데..
아랫마을에서 보면 그럴까 그 위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전혀 봉우리의 모양을 가늠할 수 없다.
다만 눈 앞에 펼쳐지는 동로면의 산들과 사이 사이에 자리잡은 아담한 마을들이
아침안개와 운해 속에 떠 있는데 바다 속 섬 같다.
이제 내리막이다.
로프가 매어 있는 곳도 있다.
잠시 후 안부 고갯길, 황장재 도착.(5:57)
생달리와 문안골을 잇는 고갯길이다.
門안골, 門 안쪽에 있는 골자기여서 문안골이다.
작성산성에는 아직도 石城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 중간에 돌로 된 성문틀이 온전히 남아 있다.
문은 없으나 좌우상하 문틀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등산지도에는 ‘석문’이라고 그 위치를
나타내고 있다.
문안골은 이 石門 안 골자기이다.
다시 오르막 길로 오른다.
985봉 지나니(6:07) 바위가 많다.
구간은 암릉구간인데 위험하지는 않고 우측(문경 동로면 쪽)으로 시야가 넓게 틔여 시원한 전망을 감상하면서 간다.
다시 내려서는 안부 지나(6:13), 조그만 봉우리 하나 넘고(6:15). 또 하나 내려서는 안부(6:19),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긴 오르막이다.
드디어 1004봉에 도착한다. 우측은 계속되는 암벽의 절벽에 가까운 구간이다.(6:39)
숲이 없는 곳에서는 전망이 시원하게 틔여 있다.
숲 없는 바위구간에서 우측 경사면을 내려다 보니 아마득한 계곡과 대간길 사이 산등성이 경사면이 흰 바위로 되어 있다. 치마바위다.(6:48)
아마도 인왕산 치마바위와 비슷한 모양이어서 이를 본떠 치마바위가 되었든지 적상산처럼 단풍철 붉은 단풍에 쌓여 치마바위가 되었든지 했을 것이다.
/ 인왕산 치마바위에는 슬픈 스토리가 있다.
때는 1506년, 연산군 12년 연산군의 폭정에 못이긴 박원종, 성희안은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몰아낸다.
그리고는 그 아우 진성대군을 모셔 중종으로 옹립한다.
이 때, 중종의 妃가 연산군의 처남 신수근의 딸이었으니 이들은 반정 중에 신수근을 처단하였다.
자신들이 죽인 신수근의 딸 愼씨가 중전이 되었으니 골때리는 일이었다.
이들은 들고 일어났다.
신수근은 역적인데 그 딸은 중전이 될 수 없다고.
즉위 8일만에 단경왕후 愼씨는 졸지에 신하들에 의해 강제 이혼당하고 宮에서 쫒겨 났다.
마누라 못 잊은 중종은 경회루에 앉아 인왕산 바라보며 한숨짓는 일이 많았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愼씨,
행여나 서방님 눈에 치마라도 보이라고 경회루 내려다 보이는 인왕산 바위자락에
하고한 날 자신의 치마를 걸어 놓고 한많은 일생, 눈물로 살다 갔다.
이 바위, 후세 사람들이 치마바위라 부른다.
이 황장재 위 치마바위에도 누군가 비슷한 전설 하나 남겼음직도 한데 들리는 이야기는 없다.
cf. 엊그제 객지에서 오신 손님이 있어 경복궁에를 갔다.
경회루도 치마바위도 여전한데 恨도 많고 이야기도 많던 사람들은 없다.
500년 전의 愼 妃께서는 문득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중종, 도대체 그는 어떤 남자였을까? 착잡함을 누를 수 없었다. /
긴 내리막길 내려 와 안부 고갯길 폐백이재에 도착한다.(7:01)
고개 오른쪽(남쪽)은 연주패옥의 숨겨진 명당이 있는 갈밭골이고, 좌측(북쪽)은 서 마지기 산삼밭이 있다는 삼밭구미골로 이어진다.
폐백이재는 고도를 크게 떨구지 않아 이어지는 오르막은 가파르지는 않다.
멋진 소나무와 암반이 자리잡고 있는 시원한 전망봉을 만난다.(7:18)
이 곳에서 아침 요기를 하고 갈까 생각했으나 아직 시간이 너무 이른 것 같다.
벌재 내려가기 전 제일 높은 봉우리에서 아침 요기를 하기로 하고 그대로 지난다.
길은 좌향좌, 동쪽으로 향한다.
숲과 풀이 많아 숲속은 습기차다.
다행히 ‘비’온다는 예보가 빗나가 흐리고 습기가 짙을 뿐 비는 오지 않는다.
잠시 후, 928봉에 도착한다.(7:22)
기대와는 달리 숲으로 꽉 막힌 봉이라서 갑갑하다.
그대로 벌재를 향하여 내려간다.
헬기장이 있다.(7:40)
이 곳부터 벌재로 내려가는 하산로는 무척 가파르다.
더구나 젖어 있는 흙길에 가파른 내리막과 절개지 통과는 여간 미끄러운 게 아니다.
上노인네 걸음으로 조심조심 고개마루에 내려선다.
2차선 포장도로 벌재다. (7:48/8:12)
59번 도로가 단양 大岡面과 문경 東魯面을 잇는 고갯길이다.
단양쪽으로 500m쯤 내려가면 황장약수라는 대간꾼들 갈증을 해소해 주는 샘이 있다.
그러나 구지 내려갈 일 없이, 건기가 아니면 이 고갯마루에 작은 계류가 있어 갈증해소는 물론 간단히 세수도 할 수 있다.
이 날도 물이 넉넉하여 세수도 할 수 있었다.
물맛도 시원하고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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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재( 伐峙, 伐嶺)
1. 벌재는 地理書나 歷史책에 언급되어 있는 것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이 고개 주변 사항을 살펴 보면 결코 간단히 넘어갈 고개는 아닌 것 같다.
우선 ‘벌재’의 이름이다.
흔히 ‘벌’이나 ‘밀’ 字가 들어간 고개는 벌(蜜, 蜂)에서 비롯된 고개이름이다.
밀재, 벌목재, 버리미기재.. 모두 벌(蜂)이나 꿀(蜜)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 곳의 벌재는 벌(蜂) 아닌 벌(伐), 즉 征伐이나 討伐과 같은 전쟁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이름이다.
왜 그랬을까?
5~6 세기 경, 이 곳은 신라와 고구려의 첨예한 국경이었다.
그 증거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으니 벌재의 남북으로 이어지는 가까운 곳에는 3개의 古城이 지금도 남아 있다.
고개 남쪽 老姑城 , 북쪽에 鵲城과 獨樂城이 그것이다.
계립령과 죽령이 대로였다면 이 길은 군사도로로서 중요한 의미를 띄고 있었던 것이다.
신라가 백두대간을 넘어 단양을 정복했던 진흥왕 시절, 아마도 주력부대는 이 고개를
넘지 않았을까.
단양의 赤城山城에는 그 시절 단양정복을 기리는 진흥왕의 비석이 1978년 발견되어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시절, 잃은 땅을 되찾으려고 고구려의 바보 온달, 온달장군은 이 지역으로 출전하게 되고 그 이야기가 소설의 소재가 되어 후세에 전해지게 된다.)
또 하나 벌재가 지니고 있는 파우어는 이 고개 이름에서 비롯된 지명들일 것이다.
丹陽의 옛지명 赤城은 벌재의 漢譯이라는 주장이 강하다.
벌(赤)+재(城) -> 赤城 -> 赤山 -> 丹山 ->丹陽.
적성, 적산, 단산,, 단성 이들 단양의 옛지명은 모두 벌재에서 나온 이름이라 하니 벌재는 단양의 시작이다.
지금이야 서울을 중심으로 생각하니 이해가 안되겠으나 신라 때는 경주를 중심으로 생각했을 터이니 문경에서 벌재 넘어 시작되는 고장이 단양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문경에서 벌재로 올라오는 마을이 적성리이며, 단양으로 접어들어 시작되는
개울이 ‘벌내(伐川)’, 그 곳 마을이 벌천리이며 이를 아우르고 있는 큰 고장이 丹城面이다. 벌재는 단양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2. 이 고개에서 단양쪽으로 내려가면 방곡마을이 있다.
이곳은 도예마을이다.
도예라 하면 흔히 청자, 백자를 연상하지만 이 곳은 사기을 만드는 도요마을이다.
우리 어려서 쓰던 허연 색깔의 막사발. 밥사발, 막걸리사발, 김치사발..
게 중에서도 압권은, 생각나시는지?
안방 윗목에 덩그런히 자리하고 있던 허연 사기요강.
제법 운치 있게 치장한 놈은 아마도 牧丹꽃이었던가..
구도도 잘 안 맞는 그런 꽃을 파란 색으로 그려 넣었었다.
화강암이 풍화되어 생긴 잔 가루성분이 흙에 섞여야 이런 사기의 원료가 된다고 하고
게다가 소나무 넉넉했던 대간 기슭에서 베어 온 소나무로 가마에 불을 지펴야 좋은 사기가 나왔다 한다.
아직도 그 명맥이 고개 아랫마을에 남아 있으니 언젠가 한 번은 들려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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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 전 이 고개를 사이에 두고 수 십년 동안 싸웠을 그 시절 고구려군과 신라군의 격렬했을 전장이었음도 잊은 채 무심한 이 땅의 후배들은 고갯마루에 앉아 김밥을 먹는다.
한 줄은 모자라고 두 줄은 벅차다.
미련하지만 멀쩡한 음식 쓰레기 만들기 뭣해서 꾸역꾸역 먹는다.
‘어머니는 말하셨지, 미련떨지 말라고..’
역시나 배가 빵빵하다.
배 두두리며 앞 봉을 향하여 출발.(8:12)
꽤 힘들고 몸이 무겁다.
산불감시초소가 있다.(8:33)
잠시 후 823봉 도착.(8:36) 저수재가 625m이니 식후에 200m를 오른 것이다.
땀 식히라고 길은 고도를 낮춘다.
안부 희미한 고갯길과 만난다. 돌목재이다.(8:40)
石項里(돌목마을)에서 오르는 고개라서 돌목고개가 되었나 보다.
이제는 옛고개의 흔적만 있을 뿐 이용하는 이들은 없는 것 같다.
이제부터 오늘 산행의 마지막 구간이 될 문복대와 그 연봉들을 오를 때이다.
김영규님이 고삐를 조인다.
산행 중 한 구간은 땀에 흠뻑 젖어야 직성이 풀리는 산꾼 고유의 버릇이 나온다.
자, 돌격 앞으로!
땀에 흥건히 젖고 숨도 가쁜데.. 드디어 1020봉.(9:01/9:13)
이제부터는 큰 오르막, 내리막은 없다.
비교적 평탄한 능선길을 따라 다음 봉으로 이동해 간다.
그런데 사람이라곤 산행 내내 우리밖에 없는 산길에 누군가가 앞길을 막는다.
순간, 뭔 산적?
반가운 얼굴 손승천님이다.
문복대까지 갔다가 심심하여 마중 나온 길이다. 역시나 縮地다.
잠시 후, 1040봉 도착.(9:27)
어느 등산지도에는 문봉재로 기록하고 있고, 어느 지도에는 옥녀봉으로 기록하고 있다.
문헌기록이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이 지역 산악회가 최고봉인 다음에 도착할 1077봉에 문복대라는 정상석을 세워 놓았으니 이 곳을 옥녀봉으로 기록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이윽고 편안한 능선길 지나 황장산 이후 최고봉인 1077m 門福臺에 도착한다.(9:36/9:50)
문경 산들모임산악회가 세워 놓은 아담한 정상석이 우리를 반긴다.
이 산 아랫마을 석항리 사람들은 이 산을 ‘운봉산’ ‘문봉재’라 부른다 한다.
산을 재라 부르는 이유는 1020봉부터 문복대 지나 다음 무명봉까지 고도가 비슷한 봉우리만 해도 네 개나 되고, 작은 오름과 내림도 몇 번 있다 보니 그 사이 잘룩한
부분을 ‘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문복대 전후에는 잘룩한 안부가 있어 이 길로 오르내렸기에 그 곳을 문봉재라 부른 것이라 한다.
이제 내리막이다.
작은 안부 지나(9:54) 무명봉으로 오른다.(9:58)
1000m 넘는 고지로서는 오늘의 마지막 봉우리이다.
이후 길은 평탄하게 떨어진다.
안부를 지나는 옛고개길과 만난다.
이제는 넘을 사람도 없고 이름도 잊혀져 가는 멧고개이다.(10:10)
여기서 작은 봉우리 하나 넘는다.
흙길 넓은 고갯길이 나타난다. 옛저수재이다.(10:18)
석항리의 윗성골에서 단양쪽으로 넘나들던 길이다.
(풀숲에 누군가가 이 고개를 ‘장구재’로 적어 놓았다. 그러나 장구재는 이 곳이 아니라
문복대에서 서북으로 뻗어 나간 능선 상에 ‘선미봉- 수리봉- 황정산- 도락산’이 있는데
장구재는 문복대와 선미봉 사이 안부를 넘는 고개라 한다. )
오늘의 마지막 무명봉을 향해 오른다.
짧은 산행에 아쉬움이 남아 절로 힘이 생긴다.
저수령이 내려다 보이는 무명봉에 도착한다.(10:26)
이 봉우리를 경계로 문경과 예천이 나뉘어진다.
청화산부터 오랜 동안 함께 했던 문경이여, 안녕!
이제부터는 예천군 용두리이다.
아마도 용두리 사람들은 이 봉우리와 이어서 남으로 벋어나간 능선을 ‘용두산’이라 부르는 것 같다.
하산하기를 잠시 927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2차선 포장도로 저수령에 도착한다.(10:32) 도로는 그지없이 한가롭다.
우측(남쪽)은 예천, 좌측(북쪽)은 변함없이 단양이다.
단양쪽에는 한우로 유명한 소백산 목장이 있다.
고개에는 유래를 적은 비석을 세워 놓았다. 여기에 옮긴다.
/ 저수령(低首嶺)이라는 이름은,
지금의 도로가 개설되기 이전에는 험난한 산속의 오솔길로 경사가 급하여
지나다니는 길손의 머리가 저절로 숙여진다는 뜻으로 불리워졌다고도 하고,
한편으로는 저수령에서 은풍곡까지 피난길로 많이 이용되어 왔는데
이 고개를 넘는 외적(外敵)들은 모두 목이 잘려 죽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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