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라는 말이 없으면
누구에게 그립다고 전하랴
늘 그랬었지요 바람이 불면 나뭇잎보다 내가 먼저 흔들
렸지요
따스한 어둠의 옷을 입고 별은 뜬다고 말하고 싶은 날이
적지는 않았지요
저녁새들 조잘대는 소리에 묻혀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네요
더 멀리 가서 옷깃 세우고 귀 기울이겠습니다
당신이라는 말이 없으면 누구에게, 짧게
이 세상 지나간 사람 한 번씩은 다 한 말로 그립다고 말
전할 수 있겠어요
노래마다 눈물이 묻어 있다
떠나간 사람은 이별을 만들고
다시 만난 사람은 해후를 만든다
눈물은 꽃잎을 만들지 못해도
꽃잎은 눈물을 만드는 날이 있다
사랑은 떠나갈 때 가장 아름다운 것
이별을 흔드는 조그만 손짓은
인간이 만든 가장 아름다운 인사
눈망울과 입술과 표정이 작별을 만들 때
울음은 가장 순수한 발명품
이 표절할 수 없는 의식은
누구의 음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일까
그러기에 노래마다 눈물이 묻어 있다
별까지는 가야 한다
우리 삶이 먼 여정일지라도
걷고 걸어 마침내 하늘까지는 가야 한다
닳은 신발 끝에 노래를 달고
걷고 걸어 마침내 별까지는 가야 한다
우리가 깃든 마을엔 잎새들 푸르고
꽃은 칭찬하지 않아도 향기로 핀다
숲과 나무에 깃들인 삶들은
아무리 노래해도 목쉬지 않는다
사람의 이름이 가슴으로 들어와
마침내 꽃이 되는 걸 아는 데
나는 쉰 해를 보냈다
미움도 보듬으면 노래가 되는 걸 아는 데
나는 반생을 보냈다
나는 너무 오래 햇볕을 만졌다
이제 햇볕을 뒤로하고 어둠 속으로 걸어가
별을 만져야 한다
나뭇잎이 짜 늘인 그늘이 넓어
마침내 그것이 천국이 되는 것을
나는 이제 배워야 한다
먼지의 세간들이 일어서는 골목을 지나
성사가 치러지는 교회를 지나
빛이 쌓이는 사원을 지나
마침내 어둠을 밝히는 별까지는
나는 걸어서 걸어서 가야 한다
나는 생이라는 말을 얼마나 사랑 했던가
내 몸은 낡은 의자처럼 주저앉아 기다렸다
그리움에 발 담그면 병이 된다는 것을
일찍 안 사람은 현명하다
나, 아직도 사람 그리운 병 낫지 않아
낮선 골목 헤맬 때
어깨 때리는 바람소리 귓가에 들린다
별 돋아도 가슴 뛰지 않을 때까지 살 수 있을까
꽃잎 지고 나서 옷깃에 매달아 둘 이름 하나 있다면
아픈 날 지나 아프지 않은 날로 가자
없던 풀들이 새로 돋고
안 보이던 꽃들이 세상을 채운다
아, 나는 생이라는 말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그러나 지상의 모든 것들은 한 번은 생을 떠난다
저 지붕들, 얼마나 하늘로 올라가고 싶었을까
이 흙먼지 밟고 짐승들, 병아리들 다 떠날 때까지
병을 사랑하자, 삶을 사랑하자
그 병조차 떠나고 나면, 우리
무엇으로 밥 먹고 무엇으로 그리워할 수 있느냐
언제 삶이 위기 아닌 적 있었던가
언제 삶이 위기 아닌 적 있었던가
껴입을수록 추워지는 것은 시간과 세월뿐이다
돌의 냉혹, 바람의 칼날, 그것이 삶의 내용이거니
생의 질량 속에 발을 담그면
몸 전체가 잠기는 이 숨 막힘
설탕 한 숱갈의 회유에도 글썽이는 날은
이미 내가 냉혹 앞에 무릎 꿇은 날이다
슬픔이 언제 신음 소릴 낸 적 있었던가
목조계단처럼 쿵쿵거리는, 이미 내 친구가 된 고통들
그러나 결코 위기가 우리를 패망시키지는 못한다
내려칠수록 날카로워지는 대장간의 쇠처럼
매질은 따가울수록 생을 단련시키는 채찍이 된다
이것은 결코 수식이 아니니
고통이 끼니라고 말하는 나를 욕하지 말라
누군들 근심의 힘으로 밥 먹고
수심의 디딤돌을 딛고 생을 건너간다
아무도 보료 위에 누워 위기를 말하지 말라
위기의 삶만이 꽃피는 삶이므로
생가
이곳에 오면
서쪽 길이 잘 보인다
무너진 다릿목도 보이고
다릿목에서 죽은
물새의 꿈도 보인다
백 년 전에 핀
안개꽃이 보이고
동구 밖에 묻힌
흰 달빛도 보인다
이곳에 오면
늙은 느티나무의 생애가
보이고
서쪽 길이 잘 보이고
가을에 우는 새의
그리움이 잘 보인다
가을 우체국
외롭지 않으려고 길들은 우체국을 세워놓았다
누군가가 배달해 놓은 가을이 우체국 앞에 머물 때
사람들은 저마다 수신인이 되어
가을을 받는다
우체국에 쌓이는 가을 엽서
머묾이 아름다운 발목들
은행나무 노란 그늘이 우체국을 물들이고
더운 마음에 굽혀 노랗거나 붉어진 시간들
춤지 않으려고 우체통이 빨간 옷을 입고 있다
우체통마다 나비처럼 떨어지는 엽서들
지상의 가장 더운 어휘들이 살을 맞댄다
가을의 말이 은행잎처럼 쌓이는
가을 엽서에는 주소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은 시월에 죽는다
시월은 반짝이는 유리조각으로 내 발등을 찌른다
아픈 사람이 더 아프고 울던 벌레가 더 길게 운다
시월엔 처음 밟는 길이 오래전에 온 길 같고
나에겐 익숙한 작별들이 한 번 더 이별의 손을 흔든다
노랑 양산을 펴들고 있는 저 은행나무에게도
푸름은 연애였을 것이다
초록으로는 다 말 못한 사연
마침내 붉게 붉게 태우고 싶을 것이다
아무도 귀뚜라미의 충고를 귀담아듣지 않을 때
벌레 울음 아니면 누가 한 해를 돌 틈에 끼워둘 것인가
유독 나에게만 버람하는 가을엔 핏줄이 다 보이는 시를 읽고
정맥을 끊어 백지에 시를 쓴다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시월에 죽는다
사람의 이름이 향기이다
아름다운 내일을 기다리기에
사람들은 슬픔을 참고 견딘다
아름다운 내일이 있기에
풀잎이 들판에 초록으로 피어나고
향기로운 내일이 있기에
새들은 하늘에 노래를 심는다
사람이 사람 생각하는 마음 만큼
이 세상 아름다운 것은 없다
아름다운 사람의 이름이 노래가 되고
향기로운 사람의 얼굴이 꽃이 된다
이름 부를 사람 있기에
이 세상 넉넉하고
그리워할 사람 있기에
우리 삶 부유하다
민들레 꽃씨
날아가 닿는 곳 어디든 거기가 너의 주소다
조심 많은 봄이 어머니처럼 벗어준 단발머리를 하고
푸른 강물을 건너는 들판의 막내둥이 꽃이여
너의 생일은 순금의 오전
너의 본적은 햇빛 많은 초록 풀밭이다
달려가도 잡을 수 없던 어린 날의 희망
열다섯 처음 써 본 연서 같은 꽃이여
너의 영혼 앞에서 누가 짐짓 슬픔을 말할 수 있느냐
고요함과 부드러움이 세상을 이기는 힘인 것을
지향도 목표도 없이 떠나는 너는
가장 큰 자유를 지닌 풀밭 위의 나그네
보오얀 몸빛, 버선 신은 한국 여인의 모시적삼 같은 꽃이여
너는 이 지상의 가장 깨끗한 영혼
공중을 날아가도 몸이 음표인
땅 위의 가장 아름다운 소녀들
따뜻한 책
행간을 지나온 말들이 밥처럼 따뜻하다
한마디 말이 한 그릇 밥이 될 때
마음의 쌀 씻는 소리가 세상을 씻는다
글자들의 숨 쉬는 소리가 피 속을 지날 때
글자들은 제 뼈를 녹여 마음의 단백이 된다
서서 읽는 사람아
내가 의자가 되어줄 게 내 위에 앉아라
우리 눈이 닿을 때까지 참고 기다린 글자들
말들이 마음의 건반 위를 뛰어 다니는 것은
세계의 잠을 깨우는 언어의 발자국 소리다
엽록처럼 살아있는 예지들이
책 밖으로 뛰어나와 불빛이 된다
글자들은 늘 신생을 꿈꾼다
마음의 쟁반에 담기는 한 알 비타민의 말들
책이라는 말이 세상을 가꾼다
좋은 날이 오면
좋은 날이 오면 아름다운 서정시 한 편 쓰리라
바라보기도 눈부신 좋은 날이 마침내 오기만 하면
네 맘 내 맘 모두 출렁이는 강물이 되는
기쁜 서정시 한 편 쓰고야 말리라
그때가 되면, 끝없는 회의의 글을 읽고
번민의 숟가락 들지 않아도 되리라
돌 별 하늘 꽃나무만 노래해도 되리라
피 노호 상처 고통을 맑은 물에 헹궈
얼굴 맑은 누이 이름처럼 불러도 되리라
금빛 날을 짜서 만든 찬란한 한낮처럼
오래가는 메아리처럼, 즐거운 추억처럼
루비 호박 에메랄드 사파이어처럼
잠을 밀어내는 젊은 날의 약속처럼
아, 좋은 날이 오면 잊었던 노래 한 구절
들 가운데서 불러보리라
이름 부르기조차 설레는 좋은 날이
대문과 지붕 위에 빛으로 덮이기만 하면
하행선
삶의 노래는 작게 불러야 크게 들립니다
상춧단 씻는 물이 맑아서 새들은 놀을 물고 둥지로 돌아오고
나생이 잎이 돋아 두엄 밭이 향기롭습니다
지은 죄도 씻고 씻으면 아카시아 꽃처럼 희게 빛납니다
먹은 쌀과 쑥갓 잎도 제 하나 목숨일 때
열매를 먹고 뿌리를 자르는 일 죄 아니겠습니까
기차도 서지 않는 간이역 지나며
오늘도 죄 한 겹 벗어 창밖으로 던집니다
몸 하나가 땅이고 하늘인 사람들은
땀방울이 집이고 밥이지만 삶은 천장이 너무 높아
그들은 삶을 큰소리로 말하지 않습니다
이제 기운 자리가 너무 커서 더 기울 수도 없는 삶을
인생이라 이름 부르며 온돌 위에 눕힙니다
급히 지난 마을과 능선들은
기억 속에서는 불빛이고 잊혀지면 이슬입니다
마흔 살의 동화
먹고 사는 일 걱정되지 않으면
나는 부는 바람 따라 길 떠나겠네
가다가 찔레꽃 향기라도 스며오면
들판이든지 진흙땅이든지
그 자리에 서까래 없는 띠 집을 짓겠네
거기에서 어쩌다 아지랑이 같은 여자 만나면
그 여자와 푸성귀 같은 사랑 나누겠네
푸성귀 같은 사랑 익어서
보름이고 한 달이고 같이 잠들면
나는 햇볕 아래 풀씨 같은 아이 하나 얻겠네
먹고 사는 일 걱정되지 않으면
나는 내 가진 부질없는 이름, 부질없는 조바심,
흔들리는 의자, 아피트 문과 복도마다 사용되는
다섯 개의 열쇠를 버리겠네
발은 수챗물의 담겨도 머리는 하늘을 향해
노래하겠네
슬픔이며 외로움이며를 말하지 않는
놀 아래 울음 남기고 죽은 노루는 아름답네
수노루 만나면 등성이에서라도 새끼 배고
젖은 아랫도리 말리지 않고도
푸른 잎 속에 스스로 뼈를 묻는
산노루 되어 나는 살겠네
도라지꽃처럼
무슨 사닥다리 놓아 너의 눈물 끝의
푸른 강에 닿을 수 있으랴
금 간 돌 위에 꽃 한 송이 피고
봄에서 가을까지 트이지 않는 길 위로
강물보다 낮은 소리로
비비새는 울면서 제 길을 갔다
제 슬픔에 져 내리는 꽃잎의 무게에도
이제 옷섶이 무거워지는 날들이 온다
밤새 가슴을 쥐어뜯던 말 한마디를
부끄럽게 너의 섬돌 위에 올려놓으려
도라지꽃처럼 파랗게 멍든 새벽길 간다
달빛에도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 한 올
부질없는 말 한 마디로 엮어
너에게 띄우며
봄길과 동행하다
움 돋는 풀잎 외에도
오늘 저 들판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꽃 피는 일 외에도 오늘 저 산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종일 풀잎들은 초록의 생각에 빠져있다
그때는 우리도 한 번쯤
그리움을 그리워해 볼 일이다
마을 밖으로 달려나온 어린 길 위에
네 이름도 한 번 쓸 일이다
길을 데리고 그리움을 마중하다 보면
세상이 한 번은 저물고
한 번은 밝아오는 이유를 안다
이런 나절엔 바람의 발길에 끝없이
짓밟혀라도 보았으면
꽃들이 함께 피어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로
편지를 보내는 것이다
그 꽃의 언어로 편지를 쓰고
나도 너를 찾아
봄길과 동행하고 싶다
봄 속에서 길 잃고
봄 속에서 깨어나고 싶다
저물어 그리워지는 것들
나는 이 세상을 스무 번 사랑하고
스무 번 미워했다
누군들 헌옷이 된 생을
다림질하고 싶지 않은 사람 있으랴
유독 나한테만 칭얼대는 생
돌멩이는 더 작아지고 싶어서 몸을 구르고
새들은 나뭇잎의 건반을 두드리며
귀소한다
오늘도 나는 내가 데리고 가야 할 하루를 세수시키고
햇빛에 잘 말린 옷을 갈아입힌다
어둠이 나무 그림자를 끌고 산 뒤로 사라질 때
저녁밥 짓는 사람의 맨발이 아름답다
개울물이 필통여는 소리를 내면
갑자기 부엌들이 소란해진다
나는 저녁만큼 어두워져서는 안 된다
남은 날 나는 또 한 번 세상을 미워할는지
아니면 어제보다 더 사랑할는지
첫댓글 움돋는 나무는 나를 황홀하게 한다...
이기철시인과 함께하는 2월 재능목요시낭송회
회원님의 많은 참여와 홍보 부탁드립니다^^*
3월 재능목요시낭송회는
후레지아 향으로 가득찬 저녁
밤이였으면 좋겠습니다^^
우경희 행사부장님께서 '저물어 그리워지는 것들' 신청하셨습니다.
앞으로 4분 신청 더 받고 마감할까 합니다.
어서 신청하셔서 아름다운 저녁 시와 함께 해요.
교육부장님 수고많으십니다
3월의 봄밤을 시향으로 가득 채워지기를 기대합니다^^
혹 위의 시 외의 시를 신청하신 분은 낭송시의 정확한 원본을 메일로 보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violet9395@hanmail.net
'눈물' 호산고 학생들과 합송을 해 보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학생들이 확정되면 여기에 명단을 올리겠습니다.
호산고 2학년 김경린, 박진아, 허성호, 저 이렇게 네명이 합송합니다.
낭송 순서는 가급적 뒤쪽으로 배치해 주세요.
수업이 늦게 마치는 관계로....
귀한 시간 제자들과 추억 쌓아가는 선생님은 행복하시겠습니다^^
'사람의 이름이 향기하다'로 읽어 보겠습니다^^
후레지아 향 소리로 듣고 싶습니다^^
교육부장님... 수고가 많으십니다.
'열하를 향하여' 신청합니다.
멋진 낭송 환영합니다^^
정지홍 선생님, 배경자 선생님, 그리고 부회장님 신청 감사합니다. 감동적인 낭송 기대합니다.
앞으로 낭송 신청하실 분은 위에 등재된 시 중에서 선정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늘 애써시고 수고 많으세요
이기철 시인님의 청량제 같은 귀한 시들, 내 비공개 홈피로 옮겨가서 실컷 보고 싶습니다.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수고 많으십니다. '작은 이름 하나라도' 신청할게요.
이번 기회에 좋은 시 한 편 외우고 싶어 위에 등재된 시는 아니지만 선정했어요.
양해해 주실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