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도송(悟道頌)
塵勞逈脫事非常(진로형탈사비상) 平仄仄仄仄平平
緊把繩頭做一場(긴파승두주일장) 仄仄平平仄仄平
不是一飜寒徹骨(부시일번한철골) 仄仄仄平平仄仄
爭得梅花撲鼻香(쟁득매화박비향) 平仄平平仄平平
<黃檗禪師>
번뇌를 벗어나는 일이 예삿일이 아니니
승두(話頭)를 단단히 잡고 한바탕 공부할지어다.
추위가 한 번 뼈에 사무치지 않을 것 같으면
어찌 코를 찌르는 매화 향기를 얻을 수 있으리오.
이 게송(偈頌)은 황벽선사(黃檗禪師)의 칠언절구(七言絶句) 측기식(仄起式) 오도송(悟道頌)이다. 압운(押韻)의 상(常)은 거성(去聲) 호통(號統) 운족(韻族)이고, 장(場) 향(香)은 하평성(下平聲) 운족(韻族)이다. 평측(平仄) 운(韻)도 근체시(近體詩)로 보면 맞지않다. 선사(禪師)들의 게송(偈頌)은 근체시(近體詩) 평측(平仄) 운족에는 거의 다가 맞지 않다. 황벽선사(黃檗禪師)는 중국 당(唐)나라 때 백장회해(百丈懷海) 선사의 법을 이은 제자(弟子)이고, 선종(禪宗)에서 아주 큰 고승(高僧)이다. 칠척(七尺) 장신(長身)에 이마가 튀어나와 육주(肉珠)라는 별명도 있고, 임제선사(臨濟禪師)와 거사(居士) 배휴(裴休)도 선사(禪師)의 제자(弟子)다. 황벽선사(黃檗禪師) 이 게송(偈頌)은 치문(緇門)에 나온다. 강원(講院) 사미과(沙彌科) 과목(科目) 중에서 배운다. 진로(塵勞)는 속세(俗世)의 삶을 말한다. 세속의 힘들고 티끌 세상을 벗어나는 길은 보통 예사(例事)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속단(速斷) 결단(決斷)이 필요하다. 결심(決心)이 수반 되야 한다는 말이다. 승두(話頭)를 바짝 밧줄을 잡아끌 듯이 조여 움켜잡고 한바탕 끝장을 봐야 한다는 말이다. 마치 추운 겨울에 뼈속 뼈골까지 도려 깎아내듯이 사무쳐야만 이른 봄에 매화 향기가 코끝을 찌르는 향내를 맡을 수가 있다는 말이다. 출가 수행자도 수행정진(修行精進)을 이렇게 절실하고 간절하게 몸소, 체득(體得)하라는 경책(警責) 게송(偈頌)이다. 황벽선사는 어린 나이에 출가를 했다. 눈 밝은 선지식(善知識)을 찾아다니다가 백장회해(百丈懷海) 선사를 뵙고 물었다. 선사께서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종승(宗乘)을 어떻게 가르쳐서 보입니까? 어린 사미가 묻는 말이 당차고 옹골차다. 백장선사(百丈禪師) 물음을 받고도 대답(對答) 없이 양구(良久)를 하자, 선사께서 그렇게 침묵(沈默)만 지켜서 선사님의 가르침이 뒷, 사람들에게 단절(斷絶)되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백장선사 말이 걸작(傑作)이다. 나는 애초에 나로 네가 그렇게 할 사람으로 봤다. 조사문중(祖師門中)에 사자상승(師資相承) 법연(法緣)은 이렇다. 척하면 척 알아본다. 황벽선사(黃檗禪師)와 백장회해선사(百丈懷海禪師)는 이렇게 해서 스승과 제자 사이가 된다.
황벽선사는 어머니와의 인연이 남다르게 애절하다. 황벽선사 어머니는 성씨가 사씨(謝氏)였다. 그녀는 열다섯에 황벽의 아버지를 만나 결혼을 했으나 스물 한살이 되로록 아들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아들을 낳고 싶어서 황벽 산 암자에 가서 불공을 드리고 그 인연으로 아들을 낳았다. 황벽산(黃檗山)에서 기도(祈禱)하고 낳다고 해서 산 이름을 따서 황벽(黃檗)이라 이름을 지었다. 황벽은 부모님의 사랑의 덕으로 잘 자랐다. 그런데 아버지가 땔나무를 시장에 팔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낭떨어지에 그만 떨어져 죽고 말았다. 명랑했던 황벽이 아버지가 죽고 없자 동네 친구들은 아버지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그렇지 못한 자신의 형편에 우울증(憂鬱症)에 빠졌다. 황벽은 동네 이웃집에 놀러 갔다가 강아지를 훔쳐 왔다. 훔치는 행위에 대해서 죄책감(罪責感)을 느끼지 못하고 점점 재미를 붙여서 더 많은 것을 훔쳐왔다. 황벽의 도벽(盜癖)이 길어지자 꼬리가 잡혀서 동네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게 되자 황벽의 어머니는 이웃집 주인들에게 물건값을 다 변상을 하고 용서를 빌었다. 자식의 도벽(盜癖)을 바로 잡기 위해서 아들을 앉혀 놓고 꾸짖어 말했다. 훔치는 행위는 세 가지가 있다. 어떤 것이 세 가지인지 너는 아느냐? 모릅니다. 말씀하여 주소서! 그래 말해 주마, 첫째는 작은 것을 훔치는 것이니, 네가 지금까지 이웃집에서 일상에 필요한 가축이나 일상에 필요한 물건들이다. 둘째는 큰 것을 훔치는 것이다, 나라를 훔치는 것으로 한 나라의 통치자(統治者)가 되는 것이다. 셋째는 천하(天下)를 훔치는 것이니, 모두를 버림이니라. 작은 것을 훔치면 양심(良心)이 좀먹는 것이요, 큰 것을 훔치면 백성(百姓)을 도탄(塗炭)에 빠트리거나 잘 살게 될ᅟ것인데, 이는 모두 세간적(世間的)인 것이지만, 천하(天下)를 훔치는 것은 온갖 중생(衆生)을 윤회(輪迴)에서 건짐이니라. 모두를 버릴 때 모든 것을 얻는 것이니, 아들 황벽아! 너는 어떤 것을 선택해서 실행하고 싶느냐? 무릎을 끓고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던 황벽(黃檗)은 입을 열었다. 소자(小子)는 세 번째 천하(天下)를 훔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어니님의 말씀에 따라 다른 두 가지는 절대로 하지 않겠습니다. 하오나 어머님! 나는 본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 아들의 묻는 말을 듣고 사씨(謝氏)가 말했다. 마음에 욕심(慾心)을 버려야 하느니라. 욕심(慾心)은 모든 것의 화근(禍根)이니라. 그 후로 황벽의 도벽(盜癖)은 없어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집안 물건을 남에게 다 갖다 주는 버릇이 생겼다. 집안 살림살이가 하나도 남아 남지를 못할 정도로 다 갖다가 주어버렸다. 어머니 사씨(謝氏)는 황벽(黃檗)을 앉혀 놓고 또 말했다. 황벽아! 버리는데도 세 가지가 있느니라. 첫째는 물건을 버리는 것이요, 둘째는 육친(肉親)을 버리는 것이요, 셋째는 마음의 탐욕(貪慾)을 버리는 것이다. 물건을 버리는 것은 누구나 할 수가 있다, 육친(肉親)을 버리고 출가(出家) 수행(修行)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출가 수행하기는 쉽되 마음속 탐욕(貪慾)을 버리기는 더욱 어렵다. 너는 이 세 가지 중에 어떤 것을 버리고 싶느냐? 황벽은 세 번째 버림을 실천하고 싶다고 하고 고향을 떠나 황벽산에 들어가서 출가(出家)를 했다. 황벽선사는 삭발(削髮) 득도(得度) 후에 백장회해선사를 만나 입실(入室)을 허락(許諾)받게 된다.
황벽선사가 백장선사 문하에서 수행 정진할 때 어머니 사씨(謝氏)가 민현에서 홍주까지 천 오백리 길을 찾아왔으나 어머니를 만나지 않았다. 사씨는 아들을 보고 싶은 마음에서 절 밖 일주문(一株門) 밖에다가 움막을 치고 아들을 보조자 하였으나 한달이 지나도 끝내 아들이 나타나지 않자, 아들에게 편지 한 통을 남겨둔 채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편지 내용은 황벽스님! 내가 너를 찾아 왕복 삼천리 길을 걷고 또 걸은 것은 너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 위함도 아니요, 너를 데려가려고 함도 아니다, 그런 마음이 애미에게 있었다면 너에게 출가를 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황벽스님! 어미의 마음이 이토록 간절함을 보여줌 외에는 다름이 아니라, 부디 열심히 정진하라, 네가 집을 나올 때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깨달음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어미가 자식 생각하는 마음처럼, 부처님 잊지말고 화두를 챙긴다면 깨달음은 속히 이룰 것이다. 할 말은 많지만 어미가 자식에 대한 마음을 글로 다 할수 있으랴!부디 진중하고 진중할, 어미로부터,, 편지 내용으로 보면 황벽선사 어머니는 선사의 면모다. 황벽스님은 천리길을 찾아온 어머니를 만나지 않는 것은 수행자의 자만 교만이다. 수행자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만나지 못하는가? 어머니를 보면 마음이 흔들려서 일까? 아니면 무어란 말인가? 그토록 아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사무쳐서 눈물짓다가 사씨(謝氏) 부인은 눈이 멀고 말았다. 사씨는 아들을 한번만 이라고 보고 싶은 마음에서 대의강(大義江) 나루터에 조그만한 집을 지어놓고 오고 가는 손님들의 발을 씻겨 주었다고 한다. 아들 황벽 선사를 혹시나 만날까 하는 염원에서다. 황벽선사는 어릴 때 사고로 다쳐서 발가락 하나가 없었다. 발을 씻겨주다 보면 발가락이 없는 사람은 자기 아들 황벽임을 알아보기 위해서다. 모정(母情)이란 이런 것이다. 마침 황벽선사도 그 나루터에 가게 되었다. 발을 씻겨 주는 사람은 어머니인 것을 알았다. 황벽선사 차례가 되어 어머니 앞에 앉았다, 스님께서도 발을 내놓으십시오, 어머니는 왼발을 깨끗하게 씻겨주었다. 오른발도 내놓으십시오, 황벽선사 핑계를 됐다. 오른발은 종기가 나서 씻을 수가 없습니다. 말을 마치자 어머니 손을 잡고 잘 사십시오, 말을 남기고 배를 탔다. 마을 사람들이 와서 방금 발을 씻겨준 스님이 아들이라고 말을 전해주자, 뭐라구요? 아들 황벽 스님이라고요? 황벽아! 황벽아! 하면서 애절하게 아들을 부르면서 강가로 가다가 그만 물에 빠져서 물살에 빨려들 어가다가 죽고 말았다. 황벽선사는 배를 타고 가다가 어머니가 물에 빠저 죽은 것을 보았다. 황벽선사는 나루터로 다시 돌아와서 어머니를 화장하고 장례를 치뤘다. 황벽선사 자료에 보면 어머니가 극락정토에 가는 것으로 나온다. 살아생전에 눈이 멀도록 보고 싶은 아들 만나 한 풀어주는 것이, 정말 수행에 장애가 되는가? 어려웠나? 아쉬움이 남는다. 모정에 냉혹한 수행자 마음이 꼭 옳은 길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수행자는 세속 인연과 단절함이 수행자의 미덕으로 미화되는 것을 화옹은 옳지 않다고 본다. 아들 보고 싶은 마음에 눈이 멀도록 한 그 독한 마음으로 수행을 해서 얻어지는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사생(四生)의 자부(慈父)가 되겠는가? 이다. 화옹의 불교관(佛敎觀)은 어머니가 그토록 아들을 간절하게 보고 싶다고 한다면 매일 공양을 지어서 올리고 모시고 살겠다. 여여법당 화옹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