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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의 룰은 깨라고 있다>의 줄거리: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고, 그럼으로써 나 자신을 최고로 사랑하고 그렇게 나 자신을 사랑한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기. 실제로 이 사랑을 하다보면 반드시 나타나는 일이 있다. 이 세상 룰을 깨는 것이다. 이 세상 룰은 이 땅에서 높아지기 위한 것인데 반해 이 세 가지 사랑은 마음이 하늘로 가야만 가능한 것이다.
세상의 룰은 깨라고 있다
(마가복음 12:35~44)
35.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36.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37.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세상의 룰은 깨라고 있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세상의 룰은 깨라고 있다’
본문은 세 가지 사건이 하나의 주제를 통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부분에서는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시는 말씀이 나타나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서기관들을 삼가라는 말씀과 과부의 헌금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앞선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서기관과의 대화에서 제일 크고 첫째 되는 계명에 대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나에 대한 최고의 사랑이며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게 됨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서기관은 예수님의 말씀을 옳게 여겼고 예수님께서는 그가 하나님 나라에 가깝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세상에서 정해놓은 룰은 깨져야만 합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이렇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을 하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세 사건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사건들은 동일한 시간대에 일어난 일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마가는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이 사건들을 간극 없이 연결함으로써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했던 하나님 사랑의 방법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룰을 깨야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사랑은 나를 위한 최고의 사랑이며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문제는 세상의 룰을 깰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의 룰이란 단순히 국가나 사회에서 지켜지고 있는 법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류 전체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세상의 룰이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 그 룰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고 어떻게 깰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서는 먼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인가에 대한 호칭의 문제가 언급됩니다. 35절을 보면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어제 살펴본 칭찬받은 서기관에 이어서 또 다른 서기관들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있습니다. 서기관들은 당시의 모든 신앙적 가르침을 도맡았던 선생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기관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 시편 말씀을 인용하시며 반론하십니다.
시편 110편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언급되고 ‘내 주’라고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적 호칭이 언급됨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인용하시며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칭하고 있으니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일 수는 없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드러내시고자 하신 것은 다윗이 먼저냐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먼저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분이심을 드러내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실 그리스도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서기관들이 믿었던 것처럼 당시 사람들 역시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으로 여겼습니다. 그리스도는 헬라어이고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에서는 그리스도가 허락하실 구원의 문제를 이 땅에 속한 것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계보에서 태어나신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나셨기 때문에 실제로는 육체적인 다윗의 혈통과는 무관하십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으로 부를 때에 구원의 문제는 땅에 국한시켜서 생각하게 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최전성기를 이루었던 왕이기에 다윗의 자손으로써 그리스도가 하실 일이란 당연히 다윗 왕국을 이 땅에서 재현하는 것이라 여겨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구원의 내용은 결코 그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마음의 공백에 하나님을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외부에 계신 하나님이 내게 유익을 주시고 내가 그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하나님 사랑을 위해서는 반드시 만남이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만날 수 없다면 구원이 주어질 수 없습니다.
정리해봅니다. 하나님 사랑은 하나님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가지는 것이 나를 위한 최고의 사랑이고 이웃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로 갈 수 있도록 자녀의 권세를 받은 자가 구원을 실제로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여기는 동안에는 마음은 땅에 묶이게 됩니다. 마음이 땅에 묶여있는 동안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할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면 나를 사랑할 수도 없고 이웃도 사랑할 수 없기에 구원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서기관들은 물론이고 그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대한 막연한 기대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걱정하시며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일수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가 하시는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나는 땅에 있는 중에 하나님과의 만남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땅에 있는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하고 봉사하고 충성하는 것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이 계신 하늘로 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늘로 가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가 하나님 보좌 우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받으시는 분으로 당신을 제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마음의 흐름을 예수님께로 고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의 흐름이 가족이든 사업이든 장사든 세상을 향하고 있는 동안에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고백을 뜻하는 라틴어 크레도(Credo)는 “나는 믿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심장을 꺼내어 드린다는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 나의 마음 전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마음의 흐름을 유지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빠져나가십니다. 그 과정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고 무덤에 묻혔음을 고백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받으십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게 되고 예수님이 소망하신 하늘을 함께 소망하게 됩니다. 또 예수님의 승천에 연합하여 보좌 우편까지 올라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사랑하여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울 때에 온전한 기쁨과 만족이 생겨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나를 최고로 사랑하는 길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나의 마음을 채우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배와 찬양이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 사랑이 곧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이전 설교에서 교회는 전 세계에 단 하나 예수님의 교회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올라가신 하나님의 보좌 우편은 우리 마음이 모여야 할 유일한 예배당입니다. 보좌 우편은 예수님을 진실로 믿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모이는 곳입니다. 이 땅에 있는 건물로써의 예배당은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은 모두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모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자리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이 내 마음으로 들어오시며 하나님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가짐으로써 그 좋으심에 감탄하여 경배와 찬송을 드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누구보다 먼저 보이는 태양이 되시기 때문에 끊임없는 대화가 이루어지고 쉬지 않는 기도가 가능해집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몸이 모이는 장소는 어디든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마음이 어디에 모이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모여야 될 예배당은 바로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입니다. 그 보좌 우편에 올라간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을 가짐으로써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 사랑은 세상 룰과 충돌을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세상의 룰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룰이 적용되는 모습이 38~40절에서 서기관을 통해 나타납니다.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서기관들에 대해 주의를 주신 이유는 서기관들이 세상의 룰을 충실하게 지키던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룰이란 이 땅에서 가능한 높아지고자 하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가치 있는 조건들을 구비해야만 합니다. 권력과 재산과 인기가 이와 같습니다. 이러한 가치들을 토대로 그 위에 올라서게 됩니다. 서기관들은 바로 이러한 세상의 룰을 충실하게 따르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비어있게 만드셨습니다. 그렇기에 삶의 목적은 비어있는 마음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온전히 채우실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땅을 떠나서 가장 높은 하늘 보좌 우편까지 올라가야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타락하여 세상의 가치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가장 높은 곳 하늘로 올라가고자 하는 마음의 속성에 부작용이 생겨 인간세상에서 높은 곳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악에 빠져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좋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시달리고 있는 이 부작용이 바로 세상의 룰입니다. 높아지기 위해 이 세상이 정해놓은 가치들을 많이 모으고자 합니다. 돈을 모으고, 인기를 모으고, 지식을 모으고, 권력 등을 모아서 그 위에 서고자 합니다. 그러면 행복하고 기쁘고 만족하리라 믿는 것이 세상의 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세상의 룰은 깨어져야만 합니다. 마음이 이 세상을 떠나야하기 때문에 세상의 룰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가장 높은 곳 보좌 우편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모여야 할 예배당입니다. 몸이 땅에 있는 지역예배당에 출석하는 것은 구원이나 신앙의 유익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목사로써 목회를 기준으로 볼 때에 이 땅에서의 예배당 모임은 해가 될 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구원을 이루는 과정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면 나를 사랑할 수도 없고 이웃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떠난 삶을 사랑하십니다. 그럴 때에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나타나는 진정한 이웃 사랑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은 세상의 룰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모습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장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장사의 룰은 돈을 많이 버는 것입니다. 돈 버는 것이 마음에서 좋게 여겨지기에 최선을 다해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자 마음에 변화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돈 버는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어졌습니다.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만나고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장사 현장은 돈이 많이 벌리든 벌리지 않든 마음의 기쁨과 만족에 대해서는 상관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이 떠난 장사 현장은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역사하시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장사가 더 잘 될 수도 있고 장사가 안 되어서 문을 닫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결정되는 일일 뿐 마음은 언제나 행복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룰이 깨지는 모습니다.
또 다른 예로 부부관계를 들어보겠습니다. 결혼생활에서 세상의 룰은 서로에게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요구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배우자가 성실하든 불성실하든 마음을 붙이지 않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마음이 각자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늘을 향할 뿐입니다. 세상의 룰은 좋은 배우자이면 마음을 붙이고 나쁜 배우자는 마음에 들게 고치거나 멀리합니다. 내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으면 마음을 보내는 것이고,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다고 여겨지면 고쳐보든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배우자에게 마음이 묶이지 않습니다. 마음은 오직 하늘을 향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이 떠난 부부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나서 온전한 이웃 사랑의 대상으로 삼게 됩니다.
제가 캐나다에서 목회할 때에 지역에서 은퇴한 원로 장로님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그분들이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골프를 치러 다니시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캐나다에서는 골프가 우리나라처럼 부유한 사람들만의 취미인 것은 아닙니다. 하루 종일 골프를 쳐도 10~15달러 정도인 골프장도 있습니다. 저는 골프를 치지는 않습니다만 장로님들이 골프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는 것을 듣고 있으면서 생각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골프의 절대적 룰은 골프공에 손이나 발을 대어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골프채로만 공을 움직여서 그린 위에 있는 홀에 넣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반드시 손을 대야만 하는 순간도 있습니다. 공을 치다가 빗나가서 숲속으로 떨어지게 되면 집어내서 다시 칩니다. 행여 공을 찾지 못할 경우를 생각해서 아예 여분의 공을 주머니에 넣고 다닙니다. 그런데 이분들에게는 그러한 룰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재미삼아 하는 운동이기 때문에 그린에서도 몇 번 치다가 도저히 공이 안 들어가게 생겼으면 손으로 집어넣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제가 그 말을 듣고 그래도 되느냐고 묻자 장로님께서 “목사님! 우리가 지금 이 나이에 언더파를 목표로 하겠소? 타수를 줄이는 걸 목표로 하겠소? 그런 건 관심 없고 친구들과 만나 맑은 공기 마시면서 걷고 대화하고 끝나면 식사하면 되는 거지.”라고 하셨습니다. 이분들의 목적은 애초에 골프가 아니기에 골프의 절대적 룰이 적용이 되지 않습니다. 골프코스에 있지만 골프의 룰을 깨뜨리며 골프를 즐기는 것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코스의 무법자들이었습니다.
이분들의 모습을 신앙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마음을 보내기를 요청하십니다. 마음을 드리면 예수님께서 그 마음을 하늘로 가져가십니다. 이제 마음이 떠난 삶에 대해서는 세상의 룰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마음을 채울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가능한 높은 자리로 올라가야만 한다는 세상의 룰은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바람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은 살길이 막막한 과부의 재산까지도 취하고자 하였습니다. 가능하면 존경받으려고 하였고, 가능하면 상석에 앉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었더니 예수님이 마음을 하늘로 가지고 가버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 되신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아버지로 채울 수 있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더 이상 비어있는 마음을 채우기 위해 세상의 룰을 따를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골프장의 절대적인 룰은 공을 골프채로만 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사하는 사람의 절대적인 룰이 있다면 이득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룰에 충실하게 따르기에 이득이 많이 남아야 기쁘고 이득이 없으면 걱정하고 슬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음을 가져가셨다면 이러한 룰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득이 많다고 기쁘지도 않고 이득이 없다고 걱정하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습니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에게도 세상은 룰을 강요합니다. 자녀의 진로가 세상의 기준대로 위를 향해야만 형통하다고 여깁니다. 자녀의 진로가 형통해야만 기쁘고 막히면 걱정하고 슬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부모라면 자녀에 대해서도 세상의 룰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마음을 하늘로 올려 보내자 자녀가 세상의 기준에서 형통하든 불통하든 걱정이 되지 않고 감사하기만 합니다.
골프장의 장로님들이 타수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함께 걷고 대화하고 식사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꼈듯이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함에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 보좌 우편이라는 하늘예배당에 모이게 될 때에 세상이 정해놓은 룰은 깨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가져서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 동안에 이 땅의 삶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시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 내게 주어진 것들을 통해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 시작됩니다. 이러한 삶에서 이 세상의 룰을 따라 잘되고 못되는 것은 따지거나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이와 관련하여 41~44절에서 과부의 헌금에 대한 말씀이 나타납니다. 부자들은 가지고 있는 것에서 일부를 냈지만 과부는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부자는 일부를 냈어도 액수가 컸지만 과부가 가진 전부는 액수가 적었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을 믿을 때에 삶을 전부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하늘로 이끄십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 바쳐지게 됩니다. 연금이 유일한 수입이라면 정말 소중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그 연금을 어디에 바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마음 안에 있던 연금을 마음 바깥으로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훌륭한 자녀를 둔 부모가 있습니다. 공부도 잘하고 취직도 잘했고 결혼상대도 이상적인 사람을 데려왔습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자녀가 아깝고 좋아서 마음에 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가짐으로는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마음은 결코 하늘로 올라갈 수가 없기에 하나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고 나를 사랑할 수도 없으며 이웃 사랑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 그 훌륭한 자녀를 호적에서 파버리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마음 바깥으로 내놓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과부의 헌금이 가르쳐주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룰은 소중하고 귀중한 가치들을 마음에 담는 것입니다. 갖고 있는 것들은 더 불리고 못 가진 것은 어떻게든 가져야 한다는 것이 세상의 룰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의 룰에 충실했던 서기관들은 과부의 재산이라도 삼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과부는 이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재산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예수님께 마음을 드리기 위해서는 마음 안에 세상을 티끌만큼도 담아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 과부는 하나님을 갖기에 부자에 비해 유리한 지점에 있었습니다. 마음 안에 담겨있는 대상의 가치가 작으면 작을수록 빼내기도 쉽기 때문입니다. 재산은 많을수록 좋다고 여기는 세상의 룰이 존재하는 가운데 우리가 가진 작은 재산을 마음에서 빼내는 것과 재벌이 막대한 재산을 마음에서 빼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세상의 가치를 다 빼버린 마음을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이끄십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있는 소유를 과부처럼 다 밖으로 내놓을 수 있도록 주어진 은혜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아깝게 여겨지는 세상의 가치들이 담기게 됩니다. 주어져 있는 것들 중에 아까운 것들이 담기고, 당장은 없으나 앞으로 갖고 싶어 하는 가치들이 담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대상이든 마음에 담고 있는 상태에서는 마음이 하늘로 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면 나 자신을 사랑할 수도 없으며 이웃사랑도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구원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세상 것을 아까워하고 좋아하여 마음에 담은 내가 통째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무덤을 지나야만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빠져나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소망하는 자리가 부활의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나님을 소망하는 자들의 마음을 보좌 우편까지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마치 캥거루가 새끼를 주머니에 담듯이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에 담겨서 하나님을 마주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들어오셨던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도 들어오시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룰은 우리 마음의 부작용으로 인해 생겨났습니다. 하늘까지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자 하는 마음이 세상을 향하게 되자 세상에서 높은 곳을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이 부작용이 모든 사람에게 일어남으로 인해서 세상의 룰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높아지기 위해서는 좋다고 여겨지는 가치를 긁어모아 그 위에 서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 룰을 깨뜨리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세상에서 높아지려는 룰, 세상에서 많은 가치를 획득하여 그 토대 위에 서려는 룰, 세상 것이 잘 되어서 기뻐하려는 룰을 깨뜨리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세상의 룰대로 일이 잘되어도 기뻐하지 않고 일이 안 풀려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으로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얻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룰은 이 세상에서 높아지라고 요청합니다. 이 세상의 가치를 많이 가지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세상의 룰을 깨뜨리며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골프장의 장로님들이 다른 목적을 가졌을 때 골프의 대원칙을 깨뜨렸던 것과 같습니다. 장사의 목적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가져야 할 마음은 어떻게 세상의 룰을 따라 높은 곳에 앉게 하느냐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 앞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고 이웃으로써의 자녀에 대한 사랑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세상의 룰을 깨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를 바라보되 지속적으로 바라봄으로써 내 마음 안에 이 세상 것들이 티끌만큼도 들어오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마음은 예수님 따라 하늘로 올라가 보좌 우편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게 하시고 내 마음이 떠난 빈자리로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셔서 이웃을 사랑함이 이루어지는 놀라운 구원의 삶을 살며 철저하게 이 세상의 룰을 깨뜨리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