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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證言) - 김인주(金仁珠) - 파란중첩의 생애 - 3. 온갖 고난을 딛고 1 우리는 ‘신궁(神宮) 앞 만수대(萬壽臺) 밑의 백중한의원(百中漢醫院)에 용한 의원이 있다’라는 말을 듣고 원필씨를 통해 모셔 와서 약을 복용케 하였더니 점점 차도가 있어 회복하셨다. 선생님은 누워 계시다가도 식구들을 붙잡고 말씀하셨다. 2 선생님께서는 무더위에도 피서도 하지 않으시고 엄동설한에도 더운 방에 눕지도 않으시며 오직 인류의 구원만을 위해 기도와 정성으로 나날을 쌓으시던 그때였다. 3 선생님께서 대동보안서에서 나오신 후 내가 핍박을 받고 있을 때 복실이라는 아이를 통해 몇 번씩 편지를 보내 주셨다. “인주씨, 모든 십자가를 이겨 나가시오. 하늘은 보다 더 크신 사랑과 복을 주시기 위해서 시련을 주시는 것이라오. 인주씨의 고생하는 것을 보실 때 하늘인들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소. 그러나 어차피 가야 할 복귀의 길이기에 모른 채 외면하시는 하늘의 심정을 살피시오” 하는 내용이었다. 4 또 내가 집을 나와서 3년 동안 봉사 활동을 하며 숨어 살다가 집에 들어갔을 때 쇠사슬로 다리를 묶어 출입을 막았다. 그때 선생님께서 구옥수씨 편에 편지를 보내 주셨다. 지혜롭게 부친의 마음을 다스려 나오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하늘은 나에게 어떤 시련도 넘어갈 수 있도록 격려를 해 주시고 힘을 주셨다. 5 하루는 선생님과 종화 형님, 그리고 나와 셋이서 모란봉에 기도드리러 간 일이 있다. 모란봉에 올라가면 평양시내가 다 보인다. 그 밑엔 을밀대(乙密臺)가 있는데 그 산줄기에 “‘에덴궁’을 지을 자리다”라고 계시를 받아서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선생님께서는 “그곳이 터가 좋아 성전을 지을까 생각해 본 일이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6 내가 세 살 된 혜자를 안고 선생님께 가면 항상 혜자를 무릎에 앉혀 놓으시고 구구단(九九段)을 외우게 하셨다. 혜자는 2X2=4부터 7단, 8단에 와서 몇 개씩 막히고는 줄줄 다 외웠다. 그것이 기특하여 늘 가면 구구단을 외우게 하시고 기뻐하셨다. 7 또 선생님은 금식을 얼마나 하셨는지 모른다. 며칠 금식, 또 며칠 금식. 그때가 금식 기간이셨는지 모른다. 나는 그때 부모들의 핍박을 심하게 받았다. 내가 매를 맞는 날이면 선생님께서 ‘인주네 집 가보라’라고 식구들을 보내셨다. 어떤 때는 매를 맞다가도 밖을 내다보면 식구가 서 있기도 했다. 그러면 매가 아프지도 않았다. 때리는 사람만 속이 타고 힘이 들어 했다. 8 그렇게 핍박하고도 밖을 못 나가게 하여 나는 혜영(惠英)이 해산 후 식구들이 보고 싶었지만 앞 뒤 대문을 잠그고 부엌문까지 쇠로 잠가 놓아서 나갈 수가 없었다. 식구가 보고 싶어 바람이 센 겨울인데도 대문 틈으로 ‘식구가 혹시 지나가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눈 한번 깜빡 않고 기약도 없는 기다림을 기다리기 한두 번이 아니었다. 9 매를 맞는 날이면 하늘 천군천사가 흰옷을 입고 내려와서 주악을 울리고 좋은 노래와 춤으로 나를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가르쳐 주셨다. 하루는 “너를 핍박하는 장로가 반신불수가 된다”라고 계시가 내리기에 나의 부친이 나를 선생님께 못 가게 하므로 반신불수가 되는 줄 알고 “아버지 나 때문에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했더니 “그래 너희 아버지를 반신불수 된다는 그런 곳에 무엇하러 다니느냐, 안 다니면 너희 아버지 반신불수 되지 않을 것 아니냐” 하면서 역사를 하셨다. 10 그러더니 우리 아버지께 “인주 교회가지 못 하게 하라”라고 늘 와서 수군거리던 장로가 반신불수가 되었다. 또 박씨 어머님의 영감님은 선생님을 그렇게도 욕하더니 그날로 세상을 뜨고 우리를 괴롭히던 평양 각 교회 장로들은 국군이 이북으로 진격하는 통에 내무서원들에 의해 구덩이 속에서 총살 당했다. 11 그 후 선생님은 경찰국에 다시 구속되어 모진 고문과 재판까지 받게 되었다. 판결할 때 나는 혜영이를 해산한 후여서 억지로 재판소에 갔더니 선생님께서 종화 형님과 같이 재판을 받으러 나오셨는데도 “산후에 나왔다”라고 염려하시며 ‘집에 돌아가라’라고 목으로 자꾸 신호를 하시어 재판을 못 보고 돌아왔다. 12 그날 오후가 되어 선생님께서는 사회질서 문란 형의로 5년형을 언도받으셨다. 종화 형님은 1년형을 받았다. 선생님이 평양 감옥에 계시면 우리들이 면회 갈까 봐 그랬는지 흥남감옥으로 이감시켰다. 13 그때 흥남감옥엔 원덕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전날 밤 꿈에 돌아가신 부친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내일이면 하늘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한 분 들어오신다. 나는 그분에게 감히 인사도 못 드린다. 나를 따라오라” 하더니 세 계단 올라가 절하고 또 세 계단 올라가 절하며 그 계단을 다 올라가서야 큰 절하는 것을 보여주며 “이 분에겐 감히 그 앞에 가서 절도 못 한다” 하였다. 14 “마음의 준비가 없이는 얼굴도 들고 못 볼 터이니 그리 알고 너 있는 감방에 들어오시면 잘 모셔라” 하고 부친이 사라지더라는 것이다. 다음날 선생님께서 감방에 들어가시니 원덕이라는 사람이 정성껏 모시고 좋은 자리를 마련해 드리면서 꿈 얘기를 하더라는 것이다. 15 선생님은 흥남감옥에서 비료 가마니 묶어내는 일을 하셨다. 옥씨 어머님이 미숫가루를 만들어 가지고 면회가면 그 미숫가루를 절대 혼자 안 잡수시고 식사 후 그릇에 개어 떡을 해서는 죄수들에게 다 나누어 주셨고 감옥에서 나오신 다음 옥씨 어머님 댁에 갔더니 선생님께서는 “내가 감옥에서 조금 남겨 평양의 식구들 주려고 가지고 왔다” 하시면서 미숫가루를 개어 떡을 해 주시며 먹으라고 주셨다. 16 흥남감옥에서 그같이 고생을 하시면서 2년 8개월을 옥중생활하셨는데 국군이 이북으로 입성하게 되자 빨갱이들은 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다 죽이고 도망가는데 처음엔 무기수부터 차례차례로 내다 죽였다. 낮에는 그날 밤 끌려갈 죄수를 차에 태워서 데리고 나가 구덩이를 파게 하고 다시 데리고 왔다가는 밤이 되면 다 나오라 하여 낮에 파 놓은 구덩이에 들어가게 하고 총살시켰다고 한다. 17 김원덕씨는 낮에 구덩이를 파고 저녁에 불려 나가 총살을 당했다. 그런데 한참 후 의식을 차려보니 총에 맞은 것까지는 생각나는데 그 후론 모르겠더라는 것이다. 그때 자기는 물 위에 엎어져 있었는데 그것은 물이 아니라 피였다. 18 그래 겨우 죽은 시체 가운데서 나오려고 하니 손에 묶인 밧줄 때문에 일어설 수도 없고 다리 부분에 총을 맞아서 나올 수가 없어서 한참 생각하니 감방에 안경 쓴 죄수가 있는 것을 알고 시체를 뒤져서 안경을 찾아내서 입으로 깨물어 가지고 그 안경 유리로 묶인 줄을 끊고 살아났다고 선생님 탄신일에 대구에 와서 그가 말했다. 19 선생님께서는 감옥의 간수들이 다 피난 간 후 밖으로 나오니 폭격이 비 쏟아지듯 하는데 하늘에서 말씀이 있기를 ‘아무 곳이나 선생님 중심하고 직경 12미터 이내는 폭격을 피하도록 할 터이니 어느 곳이나 좌정하라’ 하여 감옥에서 나온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파편 하나 안 맞고 살아남게 했는데 말 안 들은 사람들은 많이 폭격에 죽었다. 20 선생님은 감옥에 같이 있던 박정화씨를 평양에서 만나셨다. 다리가 부러져 친척도 다 버리고 피난 갔는데, 선생님은 원필씨와 같이 자전거에 태워 가지고 별별 쓰라린 고생을 하면서 피난 나오셨다. 21 부산에 내려오셔서 부두노동을 하시고 집이 없어 돌을 주어다가 토담집을 지으시고 생활하셨다. |
証言 - 金仁珠 - 波乱の多い生涯 ③ - あらゆる苦難を通過して 私たちは、「神宮前の萬寿台の下にある百中漢医院に優れた医者がいる。」という話を聞き元弼氏を通して来てもらい薬を服用するようにしたところだんだん快方に向かい回復された。先生は横になっておられながらも食口を捕まえて御言を語られた。 先生は蒸し暑いなかでも避暑はされず、厳冬雪寒の中でも暖かい部屋で休んだりもされず、ひたすら人類の救援だけのために祈祷と精誠で日々を過ごされたときだった。 先生は大同保安署から出てこられてから、私が苦痛を受けているとき福実という子供を通して何回も手紙を送ってくださった。「仁珠氏、全ての十字架を越えて行きなさい。天はもっと大きな愛と福をくださる為に試練をくださるのだ。仁珠氏が苦労しているのをご覧になるとき、天はどんなに胸が痛いことだろう。しかし、どうせ行かねばならない復帰の道だから、顔を背けて知らないふりをされる天の心情を考えてみなさい。」という内容だった。 また、私が家を出て、三年間奉仕活動をしながら隠れ住んでいて家に帰ったとき、鉄の鎖で足を縛られて動けなくなったときも、先生が具玉秀氏宛に手紙をくださった。 知恵深く父親の心をなだめ、出てくるようにということだった。 天は私にどんな試練も越えて行けるように励ましてくださり、力を与えてくださった。 あるときは先生とジョンファ氏、そして私と三人でモラン峰に祈梼しにいったことがある。モラン峰に上がると平壌市内が全部見える。その下に乙密台があってその山並みが「エデン宮を建てる所だ。」と啓示を受けて先生に申し上げたところ、先生は、「そこは場所がいいので聖殿を建てようかと考えたことがある。」と語られた。 私が三歳になる恵子を抱いて先生のところに行くといつも恵子をひざに座らせ九九を教えられた。恵子は二×二=四から七の段、八の段へと、何力所かはつまったがスラスラ全部覚えた。それが感心で、行くといつも九九を覚えさせて喜ばれた。 また、先生は断食をどれほどされたか分からない。何日かの断食、また断食、そのときが断食をされる期間だったのかもしれない。 私はそのとき、両親からの迫害をひどく受けた。私が鞭で打たれる日には先生が「仁珠の家に行ってみなさい。」と食口を送られた。あるときは鞭で打たれながら外を見ると食口が立っていたりした。そういうときは鞭も痛くなかった。打つ人だけが気をもみ大変だった。 そうして迫害しながら外にも出させてくれず、私は恵英を産んだあと、食口たちに会いたかったが、前後の門は鍵がかけられてあり台所の戸まで鉄でくくりつけてあって、出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食口に会いたくて風が強い冬なのに門の隙間から「食口がもしかして通りすぎるんしゃないだろうか。」と言う気持ちで、瞬きもせず約束のない待ちぼうけをしたのが一・二回ではなかった。 鞭で打たれる日には、天の天軍天使が白い服を着て降りてきて、主楽を鳴らし素敵な歌と踊りで私を慰労してくれた。それから何でも教えてくださった。あるときは「おまえを迫害する長老が半身不随になる。」と啓示が降りてきて、私の父親が先生の所に行けなくすることから半身不随になるかと思い「お父さん、私のためにそうなったらどうするんですか?」と言ったところ「そうだ、おまえの父親を半身不随にするというところに何をしに通うのか。通わなければお前の父親は半身不随にならないわけじゃないか。」と言いながら役事された。そうしていたところ私の父親に「仁珠を教会に行けないようにしろ。」といつも来て騒いでいた長老が半身不随になった。また朴お母さんの御主人は先生の悪口をよく言っていたのだがその日を以て世を去り、私たちを苛めていた平壌の各教会の長老たちは国軍が北韓に戦撃した弾みに内務署員たちによって窪みのなかで銃殺された。 その後先生は警察局に再び拘束され多くの拷問と裁判までも受けることになった。裁決のとき、裁判所に行ったところ、先生とジョンファ氏と一緒に裁判を受けにこられたのにもかかわらず「産後に出で来た。」と心配され、「家に帰りなさい」と頭で合図されるので裁判は見れずに帰った。その日の午後になり、先生は社会秩序錯乱(乱すこと)の容疑で五年刑を言い渡された。ジョンファ氏は一年の刑を受けた。先生が平壌の監獄だと私たちが面会に行くだろうと思われたのか、興南監獄に移監になってしまった。 そのとき、興南監獄には元徳と言う人がいたのですが、前の日の夜夢に、亡くなった父親が出てきて言われたのが「明日になれば、天が一番愛する息子が入ってこられる。私はその方に対して恐れ多くて挨拶もできないのだ。私についてきなさい。」と言われ階段を三段上がって礼をし、また三段上がって礼をし、その階段を全部上がり終わって初めて敬礼するのを見せてくれながら「このお方の前には恐れ多くて前に行って礼をすることもできないのだ。」と言われた。心の準備無くしては顔をあげることもできないのでそこのところを悟っておまえがいる監獄に入って来られたらよく侍りなさい。」と言ってお父さんは消えたと言うのだ。 次の日、先生が監房に入られると、元徳という者が真心込めて侍り、良い場所を用意して差し上げながら夢の話をしたそうだ。 先生は興南監獄で肥料のかますを束ねる仕事をされた。玉オモニがはったい粉を作って面会に行くと、そのはったい粉は絶対に一人で食べられず食後に容器のなかで練って餅を作って囚人たちに全部分けてあげ、監獄を出てこられてから玉オモニの家に来られたとき、先生は「私が監獄で少し残しておいて食口にあげようと思って持って来たんだ。」と言われながら、はったい粉を練って餅を作られ食べなさいとくださった。 興南監獄でこのような苦労をしながら二年八ヵ月を獄中生活されたのだが、国軍が北韓に入城することになって共産党が監獄にいる囚人たちを全部殺して逃げるのに最初は無期刑の囚人から順番に殺していった。 昼にはその日の夜引かれていく囚人を車に乗せて連れ出して、穴を掘らせてまた連れてきて、夜になると皆出てこいと言い、昼に掘っておいた穴に入れて銃殺にしたという。 金元徳氏は、昼穴を掘って夕方呼ばれて銃殺された。ところが、しばらくして意識を取り戻してみると、銃で撃たれたところまでは思い出せるが、その後は分からないと言うのだった。そのとき彼は水の上にうつ伏せていたのだが、それは水ではなく血だった。死体の中からやっと出ようとするのだが、手に結ばれた紐のせいで立つこともできず、足の部分に銃が当たって出られず、しばらくのあいだ考え込んだが、監房に眼鏡をした囚人がいたのを思い出して死体を引っ繰り返し、眼鏡を探し出し、口で割ってその破片で結ばれた紐を切り生き返ったと、先生のお誕生日のとき大邱に来て語っていた。 先生は監獄の監守たちが皆避難した後、外に出てみると爆撃が雨のように激しかったのが、天から御言があって「どこでも先生を中心として一二m以内は爆撃を避けられるようにするので、どこかに座りなさい。」と言って、監獄から出てきた人々を呼び集めて破片一つ当たらず生き残ったのに、その言葉に耳を貸さなかった人は爆撃に遭って死んだ。 先生は監獄で一緒にいた朴正華氏に平壌で会われた。足が折れ、親戚も捨てて避難したのだが、先生は元弼氏と一緒に自転車に正華氏を乗せありとあらゆるつらい苦労をされながら避難された。 釜山に下りて来られ、埠頭での仕事をされ、家がないので石を拾って土塀の家を建てて生活された。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