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구원의 개념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 죄의 본질과 범주가 개인의 영혼을 넘어서 사회적인 것으로 인정될 경우, 그에 따라 구원의 본질과 범위도 사회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라우쉔부쉬는 이 둘의 관계를 이렇게 천명한다: “만일 죄와 악의 왕국이 초인간적인 대리인으로서 작용한다는 설명이 사실이라면, 영혼과 개인적 관심으로 국한된 구원은 명백히 불완전한 것이며 단지 부분적으로만 효력이 있는 구원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라우쉔부쉬에게 완전한 구원이란 하나님의 영을 통해 주시는 사랑의 원동력에 순종하는 가운데 자신의 삶을 동료들의 삶과 자연스럽게 협력함으로써 상호 봉사하는 하나님의 유기체에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하게 될 때 우리는 최상의 공동선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구원은 영혼을 자발적으로 사회화하는 것이고, 성령은 이 일을 위해 필요한 사랑과 평화와 인내를 일으키게 하는 “혁명적인 힘”이다. 동시에 신앙도 단순히 과거에 형성된 사상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기대요 확신이며, 정의롭고 우애 있는 사회질서의 실현을 위해 전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복음은 최종적으로 악의 왕국을 정복하고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힘이 된다. 여기서 악의 왕국을 하나님 나라로 변혁시키는 것이 사회구원이요, 교회가 성령의 도움으로 완성해야 할 사명이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사회지향적인 진보주의 토착운동이 추구해야 할 목표인 것이다.
물론 라우쉔부쉬의 구원론이 개인구원을 무시하고 사회구원만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 개인구원은 최우선적으로 취급되어야 할 과제이며, 개인의 영적 중생이 빠진 사회적 변혁은 궁극적으로 효과가 없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다만 개인의 구원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고 반드시 사회적 구원이 따라야 한다는 점에서 구원받은 개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는 “인격적인 종교” 혹은 “영적 중생”을 “최상의 가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인정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라우센부쉬는 악의 사회화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복음도 개인에게뿐 아니라 사회화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럴 때 비로소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구원의 대상이 개인에서 사회로 확대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개인의 구원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사회의 구원을 위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노력해야 한다.
[회중주체적 조직신학], 4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