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은 교단의 합동이었다. 나는 이 일을 위해 주님께서 나를 교단의 실행위원 반열에 세워 놓으셨다고 생각했다. 교단총회의 합동은 나의 사명이었다.
총회의 합동을 위해 기도하면서 방안을 찾았다. 우선 합동의 당위성을 정립하고 내게 가까운 사람들부터 접근하여 설득하고 동의를 얻어내는 일을 했다. 특히 중요한 일은 나 자신이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실천하는 일이었다. 그 중에도 양 총회 안에 중립적 입장에 있는 교회들을 찾아 합동대열에 참여시키는 일이 필요했다.
합동에 공감대가 형성되어 갔다. 여기저기서 합동의 소리가 높아갔다. 이때 부산침례교회의 주선으로 양 총회의 실행위원들이 1961년 2월에 모였다. 그러나 그 회의에서는 합동조건에 합의하지 못했다. 포항 측은 조건 없이 합하는 것이지만, 대전 측은 선교부의 불신임이 개인에 대한 것이므로 불신임안을 철회하지 못하겠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본래 분열의 핵심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합동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분열의 장본인들이 견제하고 있는 한 합동은 시기상조였다. 그렇지만 합동의 열기는 꺼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대전 측 젊은 교역자들은 1962년 5월에 규합하여(40여 교회) 서울종로교회에서 개최된 포항파 정기총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합동을 위해 양 총회의 현 임원들을 사퇴시키고 선교부와 같이 일할 것을 제안했다. 노영식 전도사의 간곡한 호소가 있었다. 그러나 포항 측은 젊은이들이 대전총회를 대표할 수 없다고 생각해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가 볼 때 그들은 대전총회를 대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을 거절한 포항총회가 원망스러웠다. 그들은 거절당하자 떠나면서 앞으로 합동은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런 속단하는 말도 나의 마음을 심히 아프게 했다. 나는 젊은 2세들을 기대했지만, 그들이 절망적인 말과 합동포기를 언급할 때 과연 교단합동이 이렇게 어려운 것인가 하는 것을 절감했다. 그러나 합동은 하나님의 뜻이니 조만간 성사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기도하기로 했다.
포항측 총회에는 원로목사들을 중심으로 역사를 지키자는 젊은 교역자들이 모였다. 그들은 선교부의 보조금이 끊긴 채,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의 역사는 냄새가 끊어질 날이 없는 것인가? 그 속에서도 교권 다툼은 여전히 표출되고 있었다. 안대벽 목사를 중심으로 이북에서 온 임원들(한기춘, 이원균, 최성업, 김의경 등)들이 규합하여 김용해 목사에게 사사건건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들은 인천 시온중학교 교장이었던 김용해 목사를 해임하고, 동향인인 젊은 이봉래 전도사를 임명하는 등, 상식 밖의 일을 행했다. 그 결과 김용해 목사와 안목사의 측근이었던 한기춘 목사 등이 본격적으로 충돌을 하기 시작했다. 1962년 안대벽 목사의 불신임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이런 감정도 어느 정도 작용했으리라 본다. 결국 안목사는 국제기독교연합회(ICCC)의 보조비를 받아서 총회 대표와는 아무런 협의도 없이 부동산을 구입하는 등 임의로 공금을 유용했다는 이유로 1964년 2월 5일자로 포항총회로부터도 불신임 공고를 받았다.
사실 포항파 총회가 ICCC에 가입하게 된 것도 안목사의 영향이었다. 1961년 안대벽 총회장이 ICCC(국제기독교연합회)를 총회에 소개하고 가입할 것을 요청했을 때, 총회는 차후 교단합동에 지장이 될 경우 즉각 탈퇴하는 것을 조건으로 가입했다. 덕분에 어려운 개척교회들이 재정적 도움을 받아 교역자들의 생활을 도왔다. ICCC는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창립되어 줄곧 칼 맥킨타이어(Carl McIntire) 목사에 의해 모임이 주도되어 왔다. 우리나라에 이 단체가 들어온 것은 1959년. 이 단체의 신앙노선은 극단적인 보수주의로서, 흔히 분리주의라는 평판이 나 있었다. 이 모임은 해방 이후 한국에 들어왔던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이나 한국적 입장에서 조직된 NCC의 활동을 견제하고 있었고, 한국의 군소교단들을 물질적으로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교단들의 분립과 설립 과정에서 경제적인 도움을 주고 있었다. 이 모임에 가담한 대표적인 교단은 성경장로회, 예수교성결교회, 예수교감리교, 하나님의 교회, 정통장로회 등이었고, 포항파 교단도 총회 합동에 지장이 있을 때는 탈퇴할 것을 조건으로 이 연합회에 가입했다. 안목사는 우리 교단이 그 모임에 가입하도록 주선했다. 1961년 9월경, 서울 아스토리아호텔 강당에서 ICCC 대회가 개최될 때 맥킨타이어의 통역을 맡은 사람은 안목사의 부인인 이순도 여사였다.
포항파 총회는 1962년 서울 종로교회당을 사용하여 대한침례신학교를 설립했다. 초대교장에 안대벽 목사가 취임하고, 교직원에는 한기춘, 이원균, 박경배, 신석태 제 목사를 선임하고 학생모집을 했다. 그 뒤에 캠퍼스를 동자동 총회본부로 이전하고 이상모 목사와 이덕근 목사가 교수진에 충원되었다. 학생은 대략 40명 정도였다.
1963년 3월 양 총회의 재산이 법적으로 분리되었다. 종교단체의 재산관리는 문교부 소관이었다. 관계 담당부에서 재산싸움을 멈추고 평화적으로 분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했다. 양 총회의 실행위원회는 문교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의했다. 포항파는 이미 있던 대한기독교침례회 유지재단으로, 대전파는 기독교대한침례회 유지재단으로 각각 분립했다. 개교회의 재산은 각 교회의 뜻에 따라 등록되었다.
등기가 끝난 뒤에 혹 누락된 교회는 자동으로 기존의 재단법인에 귀속하게 되어 있었다. 중립적 위치에 있던 교회들이 여기에 해당했다. 그러므로 이 작업이 끝날 때까지 치열한 다툼이 계속 되었다. 법적 싸움도 여럿 발생했다. 이런 일로 본의 아니게 총회임원들은 법정에 서야 했다. 생각하면 주님의 몸된 교회의 재산을 가지고 네 것이냐, 내 것이냐? 하며 싸우는 것은 만고에 이같이 무모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각 지방의 교회들은 이 싸움을 그치지 않았다. 과연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교회사에서 보여준 것처럼,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