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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사위일몸으로 타인을 상대하는 삶>의 줄거리:
사위일체는 하나님 성령님 예수님 나, 이 네 위격이 일체임을 뜻합니다. 그런데 사위일몸이란 의도적으로 만든 용어로써, 이인삼각처럼 사위가 오직 하나의 육체를 공통적으로 사용한다는 뜻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지요. 예수님을 사랑하여 예수님과 같아진 제자들의 삶은 사위가 오직 몸 하나를 공통적으로 사용하며 타인을 상대하는 삶입니다.
사위일몸으로 타인을 상대하는 삶
(요한복음 14:19~24)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사위일몸으로 타인을 상대하는 삶>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사위일몸으로 타인을 상대하는 삶”
본문의 내용은 어렵습니다. 각각의 구절들을 보면 이해하지 못할 내용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보면 도대체 어떻다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위일체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예수님을 통하여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하는 상황을 묘사한 것입니다. 사위일체라는 말은 우리가 함께 만든 말입니다만 반드시 써야만 합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을 통하여 소개되고 있는 복음을 받아들인 상태를 사위일체보다 더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는 다른 단어는 없는 것 같습니다. 사위일체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과 성령님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나의 네 위격이 하나 됨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목에서 말씀드린 사위일몸이란 무엇일까요? 몸을 한자로 하면 몸 체(體)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사위일체 대신 사위일몸라는 표현을 만들어본 이유를 설명해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이인삼각(二人三脚)이라는 경기를 아실 것입니다. 두 사람이 한 조를 이루어서 한 사람의 오른쪽 다리와 다른 한 사람의 왼쪽 다리를 묶어서 하나의 다리로 만듭니다. 두 사람이 세 개의 다리를 공통적으로 사용하면서 걷거나 뛰는 경기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위일몸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과 성령님과 나의 네 위격이 오직 하나의 몸만을 사용한다는 의미로 만들어 낸 표현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새 계명인 타인에 대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반복하고 계십니다. 예수님 사랑과 타인 사랑을 불가분리의 관계에 묶어두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타인을 사랑하게 되고,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께서는 삼위일체를 이루고 계십니다. 그리고 나는 십자가 예수님 안에 들어감으로써 삼위일체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서로 구분되는 네 위격이 신비한 방식으로 일체를 이룰 때에 오직 나의 몸 하나를 사용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타인을 향하여 펼치는 창조적이고 인격적인 활동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두 사람이 묶인 상태에서 세 개의 다리를 공유하여 걷고 뛰는 이인삼각을 연상시킵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그리고 나의 네 위격이 하나가 되어서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다리가 바로 나의 몸입니다. 그렇기에 누군가를 만난다면 단순히 내가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몸을 공유하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그리고 내가 타인을 상대하게 된 것입니다. 위격으로만 말하자면 4대 1의 상태에서 타인을 사랑하게 됩니다.
한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사위일체의 종합예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합예술은 서로 다른 분야의 예술을 융합시켜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나는 분명히 구분되는 네 위격입니다. 그런데 네 위격이 하나 되어 공통적으로 몸 하나를 사용하면서 한 사람을 상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상대한다는 것이 사위일체의 종합예술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타인을 상대할 때 상대방은 이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나의 몸뿐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아내를 상대한다고 해보겠습니다. 이때 아내는 저의 몸만 보게 됩니다. 몸을 겉사람이라고 한다면 몸 안에 있는 정신은 속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속사람의 정신은 마음과 의식과 지정의를 포함합니다. 이 속사람이 삼위일체 하나님께 참여하여 사위일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내가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내는 나 한 사람을 상대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사위일체의 상태에서 내 몸을 공유하고 있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나를 상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인삼각처럼 사위일몸이라고 불러본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위일몸의 상태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위일몸을 이루지 못하는 상태에서 사람을 만나면 아무리 사랑 같아 보이고 사랑한다고 해도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웃 사랑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타인을 상대할 때에 언제나 나타나야 하는 속성입니다. 이 사랑은 속사람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참여하여 사위일체를 이룬 상태에서만 나오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볼 수 없는 하나님은 세상이 유일하게 보는 몸 이면의 속사람과 하나가 되어 바로 눈앞에 계신 상태입니다. 사람 하나 상대하는데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과 나의 속사람이 하나가 되어 상대하니 어마어마한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면하고 있는 사람이 이 사실을 안다면 깜짝 놀라서 기절할 지경일 것입니다. “나 하나 상대하는데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창조주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님과 그 두 분을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님이 동원되어서 이 사람의 속사람과 사위일체를 이루어서 나를 상대하다니!”라고 깜짝 놀랄 것입니다.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위일체가 되어 내 몸 하나를 사용하여 사람을 상대하며 펼치는 창조적이고 인격적인 활동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새 계명인 사랑입니다.
정리해봅니다. 나는 겉사람과 속사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나의 속사람이 삼위일체 하나님께 참여할 때에 사위일체를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사위일체가 나의 겉사람인 몸을 사용하는 방식이 사랑입니다. 이런 삶을 살아야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내용과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내용이 붙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과 하나 되고 성령님에 대한 언급이 또 나오고 있습니다. 이 복잡해 보이는 말씀을 단순화하면 14장 전체의 주제는 “사위일체의 종합예술이 바로 타인사랑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속사람이 삼위일체에 참여하여 사위일체를 이루어야만 된다는 뜻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나의 속사람과 일체가 되신 상태에서 나의 몸을 사용하셔서 사랑이라는 창조적이고 인격적인 활동을 펼쳐나가십니다.
여기서 21절을 보면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언뜻 계명을 지켜야 아버지와 예수님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처럼 보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과 예수님께 사랑을 받기 위한 전제조건이라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과는 대치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14장 1절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나의 계명을 지키는 것, 하나님을 믿는 것이 혼재되어 나타나고 있으니 이해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학자들 간에도 이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진땀을 흘리는 상황이 역력하게 드러나 보입니다.
다만 본문은 그렇게 어려운 내용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사랑해서 예수님을 대상으로 관계하면 내 필요에 의해서 예수님의 객관적인 모습이 손상되거나 뭉개져 없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객관적 대상으로 보게 되면 예수님의 매력과 예수님의 특별한 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반할 때도 특별한 매력 포인트를 느끼는 것처럼 예수님에게서 눈에 띄는 부분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의식 속에는 아버지의 존재감만으로 채워져 있고,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아버지의 좋음만으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이 예수님의 특별한 매력 포인트입니다. 이 사실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예수님과 다른 상황인가를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그 차이를 없애고 싶은 열망을 갖게 되는 것이 예수님 사랑입니다. 예수님과 같아지기를 원하면서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는 일이 이루어지면 그 다음부터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나의 의식과 마음이 들어가 있는 상태이기에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에 나도 승천하게 됩니다. 2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간 의식과 마음은 하늘에 올라가서 예수님과 똑같이 아버지의 존재감과 좋음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대한 의식과 마음은 죽어버린 상태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에 대해 죽은 나의 의식과 마음 대신에 하나님의 의식과 마음이신 성령께서 오셔서 세상을 살게 됩니다. 내부적으로는 나의 속사람과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나를 이루는 사위일체가 이루어지고, 외부적으로는 몸으로 다른 사람을 만나며 살게 되는데 그것이 사랑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22~24절을 보면 가룟인이 아닌 유다와의 대화가 나타납니다. 내용을 보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몸의 주인인 속사람과 하나가 되고, 그럼으로써 사람들이 볼 수 없는 하나님께서 몸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당신을 드러내신다는 내용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상황을 전체적으로 보고 계십니다. 사람의 속사람이 삼위일체 하나님께 참여하여 사위일체를 이루게 되고, 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상황 전체를 하나로 묶어보면 예수님께서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계명을 지켜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통하여 사위일체를 이루고 한 몸을 공통적으로 사용하면서 타인을 사랑하는 전체 상태를 하나로 볼 때 특정한 지점들에 대한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지점을 보면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씀이 해당되고, 나의 속사람이 하나님의 존재감과 좋음으로 채워지는 상태를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보면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이 해당됩니다. 또 사위일체 상태에서 몸을 사용하여 타인을 상대하는 상황을 출발점으로 보면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한다는 말씀이 해당됩니다. 내 속사람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여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연합한 상태, 사위일체를 이룬 상태, 사위일체로 몸 하나를 사용하여 타인과 관계하는 상태를 하나로 볼 때 어느 측면을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삼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표현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인을 사랑하는 것과 예수님을 사랑하며 믿는 것은 선후를 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이것을 하나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보실 때에는 속사람의 차원에서 사위일체를 이루고 있고, 사위일체가 몸을 사용하고 있고, 몸을 사용하여 타인과 사랑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 전체를 하나로 보십니다. “나”라는 현상을 보시는 것입니다. 속사람으로는 사위일체, 겉사람으로는 사위일체가 한 몸을 사용하여 타인을 사랑하는 관계가 있습니다. 속사람과 겉사람이 합쳐진 “나”라는 현상 전체를 놓고 볼 때 어느 포인트를 먼저 이야기하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4장 말씀은 3장 16절과 더불어 요한복음의 백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상가나 종교가나 성인들도 상상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 되는 신비함의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십자가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면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서 아버지와 하나가 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주셔서 나의 지정의가 성령님과 하나가 됩니다. 이렇게 속사람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 되는 상황은 눈에 띄지 않지만 그 증거는 만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처럼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위일체의 종합예술입니다. 창조적이고 인격적인 활동입니다.
한편 본문 22절 이후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2절을 보면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성령님도 직접적으로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지는 않으십니다. 이어지는 23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또한 “나”라는 현상과 관련이 있습니다. 몸이라는 겉사람 차원과 정신이라는 속사람 차원을 포괄해서 일어나는 “나”라는 현상 전체를 놓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고, 그럴 때 아버지와 예수님께서 지상에 있는 나를 거처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14장 앞부분에서는 우리의 의식과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서 아버지 집에 거하는 것에 대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14장 마지막에서는 반대로 아버지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살고 있는 나를 거처로 삼으신다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속사람 차원과 겉사람 차원을 통틀어 “나”라는 현상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속사람은 사위일체를 이루고 겉사람은 사위일체에서부터 기운이 뻗어 나와 사람을 상대합니다. “나”라는 현상 전체의 어느 부분을 보며 이야기를 하느냐에 따라서 표현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염두에 두고 계신 것은 순서가 아닙니다. 겉사람의 몸이 타인을 만나서 사랑의 형태의 말과 행동을 하는 것과, 의식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 중에 무엇이 먼저인가를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는 현상 전체를 하나로 보시면서 본문의 구절들을 통해서 여러 측면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믿음이 이야기되는가 하면 새 계명인 행위가 이야기될 수 있고, 아버지 집에 거하라는 말씀을 하시는 한편 아버지가 이 땅에 사는 나를 거처로 삼으신다는 말씀도 하신 것입니다.
가룟인이 아닌 유다가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라는 질문은 합당합니다. 전통적인 메시아 이해 안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은 받아들여질 수 없었습니다. 메시아는 선민의 나라 이스라엘을 로마의 식민지에서 독립시키고, 왕의 자리에 등극해서 다른 모든 이방 나라 위에 우뚝 세워진 우월한 국가로 만드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메시아는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야 했습니다. 따라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지 않으셨던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갖고 있던 메시아관의 입장에는 맞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메시아이기를 포기하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신 뒤에 보좌 우편에 계신 분이심을 이 세상에 드러내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과 성령님께서도 직접적으로 이 세상에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그렇기에 성령님에 대해서도 17절에서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님과 예수님이 이 세상에 대하여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을 포기하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예수님께서는 23절에서 보면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라는 현상 전체에서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이 증거로 나타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오셔서 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의 눈에 보이게, 귀에 들리게, 손으로 만질 수 있게 나타내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거처를 삼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보고 있는 나의 몸을 통하여 당신의 계심의 기척을 드러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지금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나”라는 현상 속에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이 땅에서 나를 거처로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나의 속사람을 거처로 삼으심으로써 나의 겉사람인 몸을 통하여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며 세상을 살아갈 때 당신을 드러내시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곧 사위일몸의 현상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서 나의 속사람과 사위일체를 이루어 나의 겉사람인 몸을 공통적으로 사용하시면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현상이 바로 나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나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은 자의 의식을 갖고 있는 나입니다. “나”라는 현상은 사위일몸으로 타인과 관계하는 나입니다.
우리는 오늘 하루를 사위일몸으로 살아야 합니다. 속사람이 예수님을 통하여 삼위일체에 참여하여 사위일체를 이루면, 거울에 보이는 내 몸 하나를 이용하여 살게 됩니다. 그럴 때 아내를 대하든 자녀를 대하든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하든 사장님을 대하든 인격의 관점에서는 4대 1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속사람의 차원에서 사위일체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겉사람의 차원에서는 사위일몸이 이루어집니다. 네 위격이 공통적으로 나의 몸을 이용하며 사람을 대하게 됩니다. 이러한 관계의 현상이 사랑입니다. 누구를 대하든 사위일몸으로 대할 때에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속사람은 사위일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격이 나의 속사람과 더불어 우리가 되어 똘똘 뭉쳐야 합니다. 사위일체에는 삼위일체 하나님 외에 어떤 것도 포함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사위가 똘똘 뭉친 상태에서 몸 하나를 사용하여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대할 때만이 아니라 일을 할 때도 물건을 대할 때에도 과제를 대할 때에도 언제나 사위가 똘똘 뭉쳐 몸 하나를 사용함으로써 주권자 하나님이 갖고 계신 창조적 계획이 펼쳐지게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 최선의 길을 제시하고 최선의 것을 줄 수 있는 사랑의 삶은 가능해집니다.
십자가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짐으로써 이렇게 사위일몸으로 펼쳐내는 창조적이고 인격적인 활동의 주인공들이 되시고, 사위일체의 종합예술을 삶의 내용으로 채워가는 아버지의 아들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사위일몸으로 이 세상의 사람과 일과 대상을 만남으로써 종합예술처럼 창조적이고 인격적인 활동을 펼치는 삶의 주인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