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근한 생각
커다란
구름이 오른쪽 시야를 반쯤 덮는다 빗방울 몇 알 떨어진다 당신을 향한 내 마음만큼은 좀 지나치게 먹어도 괜찮으리라 믿는다 왼쪽 하늘에서 햇살이
한줌씩 쏟아진다 넓은 주차장 뒤 먼 숲으로 날아가는 내 환상은 아주 노골적이다 유약한 감성을 주제 삼아 아등바등 쓰는 시가 싫어진다고 나는 당신에게
알려주고 싶다
자동차들이 한결같이 발이 넷이라는 사실에 착안점을 두었네요 이 시는 사람이 주차장에서
네 발로 움직이는 그림입니다 배를 아스팔트에 밀착한 개구리 한 마리가 엉금엉금 기어가는 모습이에요 당신이 엎드린 채 고개 들어 치켜보는 하늘이나
푸른 제복의 정신병원 안전요원이 양다리를 브이(V)자로 엎어놓은 자세로 올려보는 하늘이 크게 다르지
않아요
굵은 빗방울이 안경알에 묻는다 기분이 저조한 8층 건물이 내 등을 샅샅이 살핀다 알루미늄 손가방 무게 때문에 왼쪽 어깨가 밑으로 쳐진다 주차장은 조용하다 빗살의
각도가 수직이었다가 45도로 바뀐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김소월과 윤동주의 시가 꺼림칙해진다 무슨 이유가 있겠지마는 그들 또한 형편없는
위선자들이다 나와 때를 같이하여 네 발로 걸어가는
색소폰 길들이기
전압조정기
불량품을 돌려 주려고 전자상회 앞에 차를 세울 즈음 라디오에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번 1악장이 흘러나온다 쇼스타코비치는 '코' 하는 음절에 악센트가 콱 들어간다
이 곡은 그가 19살에 작곡한 곡 나는19살 때 무엇을 했나 고전형식에 막 대들면서
무조(無調)의 멜로디를 추구하는 음표들이 난해한 예술성으로
차 안에 쾅 갇힌다
당신
손등에 내 손가락을 스치듯
새뜻한
색소폰 음정을 가늠한다
입꼬리를
오므리자 졸지에 4분 음표 허리가 휘어지는 건
그건
그야말로 전격적인 충동이었어 나는 깜짝 놀라
음의
진폭을 얼른 추스른다
고음으로
올라갈수록 색소폰의
본성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급기야 당신은
내
지배를 순순히 벗어난다
전압조정기를
인터넷에서 주문해야겠다며 집에 오는 내 앞으로 기아 자동차 한 대가 끼어든다 영어로 기아는'키아'라 해요 코리아도 그렇지만 케이(K)가 들어가는 단어는 아무래도 이미지가
너무 강합니다 라디오에서 아직도 '코'에 악센트가 힘차게 들어가는 쇼스타코비치 1번 교향곡이 흘러나오는 중 나는 19살 때 담배를 열심히 피웠고 문예반 시화전에
꼭 참가했고 고전형식을 무서워한 것이 다다 쇼스타코비치 1번 교향곡을 차고 앞에 차를 세우고 끝까지 듣는다 층계를 올라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테너 색소폰이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모습이 쓱 눈에 띈다
색소폰과 클라리넷
청명한
가을날 나비잠자리 한 마리 꽃밭을 들어선다 나비잠자리
날개에 무지개가 묻어있네 나비잠자리는
한 마리에서 그친다 꽃밭에
꽃이 너무 많아 수를 세기가 힘이 들어요 나비잠자리는
어느새 커다란 잎새에 사뿐 내려앉아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솔솔바람에 몸을 맡긴다 마음껏
알토 음역이 나를 흔든다 당신은 진작에
오감(五感) 중
청각이 으뜸이라는
예감이
있었던 거야 뚜렷하게
색소폰과 클라리넷이 속삭이며 대화를
나눈다 나는 엿듣는다 솔솔바람 속
서늘한 사연을
I love you
I love you too
은연중 클라리넷에 비브라토가 들어가네 색소폰은 순 제 멋대로야 둘은 같은 음정으로 동시에
노래하지 않습니다 번갈아
가면서 우리 둘이 주제와 변주곡을 연주하는 거에요 화음을 넣다가 말고 꽃밭이 가을을 힘껏
껴안는다 갈갈이 흩어지는
색소폰 소리 쉬잖고 흐느끼는 솔솔바람 속
빼앗기는
마음
한
달에 한 번씩 205 병동 환자들은 각자 푼돈을
모아 중국 음식을 단체로 시킨다 그리고 넓은 방에 나란히 앉아 요리를 먹는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네 누구도 음식 씹는 소리를 내지 않아요 어쩌나?! 혈색이 안 좋은 정신과 환자들이 부동자세로 묵묵히
입만 움직인다 이건 그들이 들리지 않는 재즈 리듬에 박자를 맞추는 입놀림이야
내가
당신 마음을 빼앗는 순간
내
마음을 당신에게 빼앗긴다
저녁
노을이 무서운 기세로
병원
주차장을 덮는다
내가
저녁 노을에게 넋을 빼앗기자
저녁
햇살은 금세 사라지고
당신과 내가 짜릿하게
없어진다
낮이
밤으로 느껴지는 금요일 오후 한 시에 성격이 급해서 신세 거덜난 여자환자를 마주한다 이 여자는 갈 곳이 없다는 게 무언지 잘 알고 있고 앞뒤를 안 가리는 행동의 결과일랑 혼쭐나게 겪었다 어떡해?!
세상이 어렴풋해! 이건 창밖 풍경을 배경 삼아 205 병동 환자들이 약간씩
입을 벌린 모습이 담긴 실물 크기의 오일 페인팅이야
주고
싶은 마음
눈이 큰 멜리사가 205 병동에 살면서
가끔씩 이물(異物)을 삼킨다 목걸이나
십자가를 물도 없이 삼킨다
정물화, 차가운 쟁반 위에서 몸을 서로
기대는 사과와 포도송이가 있는 그림 같은
내 정신상태를 당신에게 주고 싶었는데
마음은 풍경화일 수도 있다 큰
의미가 없는
강 언덕에 바람이 불고 그 뒤쪽으로 조개구름이
깔려있는 수채화를 일방적으로 내 마음이라면서
당신에게 보낼까도 싶었어
앞으로 얼마나 더 우리 누구도 먹지 못하는
감정을 꿀꺽꿀꺽 삼킬 것인가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자기 정신상태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멜리사는
여리디 여린 속을 채워주는 배터리, 툭하면
이상한 에너지가 숨겨진 AA 배터리를 삼키는
205 병동의 멜리사에게 내 마음을 주고 싶었는데
미리암의 귀에 대한 오해
미리암
귀 속에 쥐가 여럿 있어서 양쪽 귀 사이를 기어 다닌다 쥐들이 어떻게 그녀의 내이(內耳)에 들어갔나요 외부자극이 미리암 영혼을 아슬아슬하게 침범하는 메커니즘을 알아내야겠어 미리암 뇌 속에 전 남편이
설치해 놓은 전자 칩에서 지직지직 전류가 일어난다 미리암이 그와 은밀히 소통하는 장면을 스마트폰으로 찍어 뒀거든 배경음악 없이 화면을 척척 진행시키는
기교가 정신상담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
소통의 내용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목소리
높낮이가 내가 느끼는 당신의 전부야
초음파
음역에 파묻힌 당신 얼굴이
손에
닿을 듯 말 듯해요
I don't want to talk about it. I
don't want to hear it.
Believe or not, you already talked about it. You already heard
me.
205 병동
미리암이 간호원실 앞을 서성인다 미리암은 날 좋아해 날보고 미쳤다고 하면 내가 얼른 맞장구를 치거든 전 남편이 지극히 정상이라는 거야 나는 미리암
귀 속의 쥐들이 죽지 않고 펄펄 살아 돌아다녀서 참 좋다고 했어 미리암이 낮은 음정으로 속삭인다 나는 미키 마우스(Mickey Mouse), 나는야
미키 마우스, 미키
마우스, 미키 마우스! 미리암이 이렇게 노래하는
동안 내 정신상담 기술이 턱없이 좋아진다는 것
대담한 발상
영화에서는
남자들이 얼토당토아니하게 공격적이잖아요 그래서 재미있잖아요 답답하고 후줄근한 역경이 다 지나가고 평온한 시간이 한참 흐른 다음에야 당신은 죽음이
두려워서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남자들에게 질깃한 연정을 느끼잖아요
참나무 잎새를 포근히 감싸주는
하늘을 올려보는 순간이 딱 그랬어요
코리언 에어라인 창문 밖 구름 밑에 깔린
발 아래 뉴욕의 야경이 또 그랬고요
그건 손을 내쳐 뻗쳐도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내가 황홀한 시선을 보내면 응당 들이닥치는
아찔한 현기증이었어요
더 이상 참지 않기로 결정을 내린 게 화근이었던 거야 혹한의 추위가 당신의 거실을 뻔뻔스레
침범한 토요일이었나 싶은데 그건 당신이 손에 땀을 쥐고 관람한 전쟁영화였는지 온통 땀으로 번질번질한 얼굴의 남자들이 막무가내로 뛰어다니는 전쟁터에서 터진 일이었던 거야
수건 논란
수건은 발이 두 개인데다가 스스로의 자유의사 또한 있어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순 제
마음 내키는 대로 왔다 갔다 한다 수건은 변덕을 잘 부린다 수건의 DNA가 돌연변이를 일으키면 일으킬수록 수건의 변덕이 미치고 환장하게 심해진다 그런
수건의 성향에 대하여 감정을 잘 다스릴 줄 아는 대학교수들은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다
자신과 남의 존재감에 늘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미래파 시인들이 수건에 날개가 달렸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러나 갑남을녀들은 수건의 큼지막한 날개를 전혀 보지 못한다
수건은 올의 굵기와 살갗에 닿는 질감도 질감이지만 크기도 문제가 된다. UN의 수건보장이사회는 한국의 좌파 우파처럼 사사건건 서로 으르렁대는 두 파로 갈라진다 수건은 모름지기 크기가 사람 얼굴 정도라야 된다는 이념을 신봉하는 소건(小巾)파가 있고 비치타월처럼 성인의 몸통을 아낌없이 가릴 만큼 커다란
수건만을 정통파 수건이라고 우기는 대건(大巾)파가 있다
소건파와 대건파는 상대 파가 너무 쉽사리 호락호락 수그러들면 본인들의 치열한 존재가치가
절감되는 좌절감 때문에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가 많다
수건의 존재이유도 문제가 된다 수건이
인류의 피부관리에 끼치는 지대한 공헌 때문에 수건을 의료 기구로 간주하자는 여론이 있는가 하면 A4 용지 정도 크기의 수건이
남녀 섹스의 뒤끝을 마무리해주는 점에 착안점을 두고 수건의 깊은 의미, 소위 시니피에를 연구하는 시인들의 카페가 유행한다
평소에 말을 길게 하기를 꺼리는 사람들끼리 그런 카페를 수건과 시니피에와 카페의 첫
글자를 따서 수시카라 지칭한다 모든 시인들은 죄다 미래파에 속한다는 학설을 따르는 인텔리들이
수시카를 곧잘 제시카로 혼동한다 몇몇 이름 없는 글쟁이들이
한 동안 뜸하다가 어느 밤 갑자기 잠꼬대를 할 때 수시카! 수시카!하며 잠꼬대를 하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다
마주하기
맨드라미 빛 코피가 터지면
금세 으앙 울어버리는 초등학교
방과후 싸움 때도 그랬다
말을 하면 코 앞에
입김이 펑펑 서리던
한겨울 밤 키스가
조용하면 할수록 좋았다
다른 건 다 양보해도 시방
정면충돌만은 양보 못하겠다
질문
열린 음악회라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어
시간의 문은 굳게 닫혀있다
금세 인기척이 나면서 누군가
안쪽에서 네? 하는 가을 아침에
박수를 칠 때 한쪽 손바닥이
다른 쪽 손바닥에게 고마운 마음이 전혀 없듯이
나도 당신에게 고마운 마음이 별로 없어요
잡힐 듯 말듯 점점 더 크게 가까이
음악소리 울려오는 가을 아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