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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태릉골에서
이 봉 원
봄소식을 몰고 왔던 도화와 벚꽃들이 작별을 고할 즈음, 장미는 꽃망울을 날로 도톰하게 부풀려 5월을 기다린 인고의 시간을 화려한 자태와 향으로 뿜어낸다. 튼튼한 줄기와 새초롬한 가시로 무장하고 형형색색 저마다의 매력을 뽐내는 장미가 아름다운 어느 날, 나는 오랜만에 세차를 하고 트렁크를 정리하며 부지런을 떨어 본다. 평소 대중교통을 애용하는 편이지만 간만의 출동을 위해 손세차까지 하며 마음이 들떠 있다. 내일 그리운 육사 동기생들과의 특별한 골프 모임이 있기 때문이다.
얼굴로 밀려드는 새벽 공기가 상큼하다. 여유로운 도로 위를 달리며 바라보는 한강은 동녘에 떠오르는 영롱한 태양 빛을 머금어 유난히 아름답다. 강변에는 5월의 꽃들이 만개해 있고, 새벽형의 부지런한 사람들이 여기저기 모여 활기차게 운동하고 있다. 무대 위 강사의 지도에 따라 운동하는 모습들이 재미있기도 하고, 그들의 밝고 힘찬 에너지가 대한민국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일찍부터 각별히 맛있는 식사로 건강한 아침을 열어 주며 즐겁게 놀다 오라고 응원해 준 아내가 떠오르며 새삼 더욱 고맙게 느껴진다.
꽤 일찍 출발했는데도 먼저 도착한 친구들이 있다. 모두들 설레는 마음으로 일찍 출발했다고 한다. 우리들이 육사에 입교한 지 50 주년이 되는 해를 자축하는 뜻깊은 날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야 했던 기초군사훈련 (일명 ‘Beast Training’)을 함께 버텨 내고, 선배들이 후배들을 강하게 키우기로 유명했던 제3중대 (일명 ‘사자 중대’)에 함께 배속되어 강하게 자라난 전우들이다. 힘들었던 만큼 우리들의 전우애는 더욱 끈끈하게 싹텄다. 만날 때마다 쏟아내는 무한 반복 에피소드가 전혀 지겹지 않고 매번 깔깔대며 배꼽을 잡고 웃게 되는 것이 신기할정도이다. 아내들 역시 함께 모일 때마다 늘 새로운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즐겁게 경청하고 공감과 위로를 해 준다. 젊은 날의 추억들은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자산임에 틀림없다. 그 시절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기초군사훈련과 1학년 생도 시절은 누구에게나 견디기 어려워 많은 생도들이 한 두 차례 퇴교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퇴교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린 시절 겪었던 시련들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 준 덕분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젊은 나이에 갑작스레 작고하신 아버지의 부재로 유복했던 가정 환경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수석 입학으로 장학금을 받았으나 숙식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담임 선생님의 소개로 입주 가정교사 생활을 해가며 졸업해야 했고, 어린 나이에 홀로 무작정 상경해 직장 생활도 해보았다. 그래서 나는 혹독한 훈련과 엄격한 규율로 통제된 쉽지 않은 생도 생활도 즐겁게 버틸 수 있었다. 육사에서 만난 좋은 선배·동기·후배들 역시 힘든 순간들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해주는 큰 힘이 되어 주었다. 한 명 한 명 모두 소중한 인연들이다. 어느 조직이나 인간관계가 어렵고 중요하지만 상하관계가 분명한 군에서는 더욱 그렇다고 생각한다.
동기들이 속속 도착하여 모두 모이고, 힘찬 악수로 반가움을 나눈 우리들은 한껏 유쾌해져 태릉골프장 그린으로 향한다. COVID-19로 거의 3 년간 골프 모임을 가지지 못했고 대부분 비등한 실력이기에 다들 경기의 승패는 크게 신경쓰지 않지만, 재미나게도 우리는 은근히 서로의 드라이버 비거리를 비교하곤 한다. 누가 평소에 더 체력 관리를 잘해서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지를 나타내 주는 지표인 것 같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꾸준히 운동한 보람이 있어 나이를 거스르는 비거리 실력을 뽐내 본다. 공이 잘 맞고 비거리도 잘 나오면 괜스레 젊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좋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친구들과 걷고, 웃고, 이야기를 나누며 보내는 시간이 참 즐겁다.
태릉골프장은 평생 전후방 곳곳을 수도 없이 옮겨 다니고, 지휘관과 참모로 재직하는 동안 일정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늘 긴장 상태로 살아온 직업군인들의 복지 혜택을 위한 시설이기에 앞서, 수도권에서 근무하는 현역 장교, 하사관, 군무원들이 주말에 부대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고 운동하면서 대기할 수 있는 휴식처이자, 지역 주민들의 체력단련장이기도 하다. 전세계 대부분 나라들도 군인들의 체력단련을 위한 시설들은 복지혜택 차원에서 국가적으로 지원해 주려고 노력하는데, 태릉골프장에 대해서는 특혜라는 부정적인 시선들이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
태릉골프장이 위치한 서울 동북의 태릉골은 주변의 세 대학교 덕분에 젊음의 기운이 흘러 넘치고 건강한 숲과 자연을 아름답게 유지하고 있다. 또한, 호국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으로, 불암산과 검안산 사이의 봉화산에는 봉수대가 있고, 육사 내에는 6·25 때 물밀듯이 내려오던 북한군을 막아내기 위해 생도1기와 2기 선배님들이 젊은 목숨을 바쳐 싸우다 전사하신 역사의 현장인 92고지도 있다. 임관을 20여일 앞둔 생도1기와 입교한 지 20여일 남짓 되어 총도 제대로 다뤄보지 못했던 생도2기 선배님들이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버텨 낸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절로 경건해진다. 만약 우리들이 그 상황에 처했더라면 오늘의 우정 넘치는 재회도 장담하지 못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태릉골프장의 부지 개발계획이나, 다른 지역으로의 육사 이전에 대한 의견들에 동의하지 않는다. 태릉에 위치한 육군사관학교는 국방경비대 제1연대가 창설된 곳이고, 독립군과 광복군 출신의 용사들을 입교시켜 정예로운 장교로 양성시킨 국군의 모태와 같은 곳이다. 그런 역사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북한이나 주변국들을 고려했을 때 군사외교활동을 위한 중요한 위치에 자리했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이 핵으로 무장한 북한과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서 우리의 국토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강군을 양성해야 함은 너무도 당연하고 중요한 일인데, 태릉골은 바로 그 대한민국의 강군을 이끌어 갈 미래의 지휘관들을 양성하는 중요한 터전인 것이다. 우리 국군은 국가와 국민에 대한 충성심과 사명감을 가지고 강한 전투력을 유지하기 위해 밤낮으로 노력하고 있는데, 국민들의 신뢰와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운동 후에 우리는 샤워장에서 서로의 뱃살을 비교하며 낄낄거린다. 식사 자리에서는 모두 운전을 위해 음료수로 건배를 하며 못다 한 이야기들로 다시 수다의 꽃을 피우는데, 예전과 달리 건강과 노년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대화의 주제 또한 우리와 함께 나이를 먹어가고 있나보다.
이른 아침에 시작한 운동이었기에 식사까지 마치고도 해가 많이 남아있다. 그래서 태릉까지 온 김에 울타리 너머의 육사를 방문해 본다. 50 년 전, 지금은 돌아가신 둘째 누나의 배웅을 받으며 입교했던 화랑대! 그 후 생도 시절을 포함해 만 40 년간을 군에 몸 담았는데, 육군사관학교장이 마지막 직책이었던 것은 나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육사에 대한 애정이 더욱 커졌고,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나라도 더 하고자 최선을 다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육사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육사 발전을 위해 다양한 면을 점검하고 개선 및 향상시키고자 무던히 노력했다. 생도들에게는 기본적인 양질의 수업 외에도 사회 각 분야에서 성공하신 분들의 다양한 인생관을 들을 수 있는 초빙 강연을 자주 들려주고 싶었는데, 학사 일정이 꽉 차게 짜인 터라 별도의 시간을 만들기가 어려웠다. 고민 끝에 대신『사관생도를 위한 명사들의 명언』이라는 책을 만들어 배포했다. 분야별로 성공하신 분들께 일일이 편지를 보내 그분들의 인생 모토와 삶에 대한 귀중한 말씀들을 글로 보내 주시기를 요청드렸는데 감사하게도 모두가 좋은 일이라며 흔쾌히 보내주셨다. 전국의 대학 도서관들에도 한 권씩 기증했는데 놀랍게도 전역 후에 이 책을 더 구할 수 있는지 묻는 이들이 꽤 있었다. 글을 보내 주신 분들 중 열 분을 ‘육사 발전 자문위원’으로 위촉하여 정치·언론·교육·사회의 각 분야에서 육사를 지지하고 대변해 주실 것을 부탁드렸고, 그 분들은 기꺼이 힘을 보태 주셨다. 또한, 나의 군 생활 중의 다양한 경험과 철학을 바탕으로 한 『지휘관, 무한 책임의 주역』이라는 책을 발간하여 사관생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배포했는데, 후에 이 책을 보신 분들의 초청으로 영국 옥스포드 대학에 가서 강연을 하기도 했다. 군 생활의 경험이 다른 분야의 사람들에게도 여러모로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 즐거운 경험이었다.
재직 시절 내가 창안해서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져 오고 있는 것 중에 ‘1·1·1 운동’이 있다. 육사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육사 졸업생들 중 원하는 경우에 ‘1명’이 ‘1개월’에 ‘1만원씩’ 육사발전기금으로 기부를 하면 그 기부금을 후배들의 해외 순방과 교육지원에 사용하도록 하자는 취지의 운동인데, 고맙게도 기대 이상으로 많은 동문들과 졸업생들이 기쁜 마음으로 참여해 주었다. 또한, ‘화랑 리더 CEO 과정’을 신설해 사회의 저명인사분들이 일일 사관생도가 되어 체험할 수 있게 하고 육사에서 리더십 교육도 받으실 수 있는 기회를 드렸는데, 그 후로 그분들은 육사의 든든한 후원자들이 되어 주셨다.
군의 제한된 예산이 늘 전투부대들에 우선적으로 집행되다 보니, 육사 내의 종합교육관인 충무관과 육사아파트 등 일부 건물들이 워낙 노후화되어 비가 새고 그 자국이 천장과 벽에 누렇게 남아 있음에도 개보수들이 계속 연기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것은 위생과 안전상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사관생도들과 교수들 및 학교 간부들의 긍지와 자존심에 관한 문제이기도 했기에 중요한 사안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치밀하게 논리를 정리하고 상급 기관에 수차례 방문하여 지속적으로 설득한 결과, 결국 필수 시설들의 신축공사를 관철시키고 재임 중에 착공할 수 있었다. 선배들의 값진 노력으로 후배들이 깨끗한 건물에서 공부하고 생활하는 것을 보니 뿌듯한 마음이 든다.
당시 실내 체육관인 서애관도 역시 천장에서 물이 새고 있었다. 풍산그룹에서 기증한 건물이었기에 회장님을 직접 찾아뵙고 선친의 훌륭하신 뜻을 이어가 주실 것을 건의드렸는데 흔쾌히 보수공사를 바로 시행해 주셨고, 추가로 새 건물을 하나 더 신축해 주시겠다고까지 약속하셨다. 내가 퇴역한 후에도 그 약속을 지켜 주셔서 너무나 감사할 따름이다. 살아오면서 많은 분들이 남을 위해 아낌없이 큰 마음으로 베푸는 것을 보았다. 그런 따뜻한 진심들이 이 사회를 풍요롭게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라고 믿는다.
울타리를 따라 순환 구보 코스와 92고지도 정비했고, 성당과 법당 시설도 증·개축을 했다. 법무천에 물을 채우기 위해 매달 고가의 수도세가 지출되고 있어서
화랑연병장 지하수를 이용하여 끊임없이 맑은 물이 흘러 들어가게 만들었다. 나를 반기는 듯 무지개를 그리며 뿜어내는 분수대를 보니 감회가 새롭다. 짧은 재직기간이었지만 치열하게 고민하고 바쁘게 움직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굳건한 쌍사자 동상은 여전히 힘차고 듬직하다.
군생활의 시작과 마무리를 함께 한 내 마음의 고향인 육군사관학교의 구석구석을 둘러보면서, 치열했던 나의 젊음과 그 모든 노력들이 이곳에서 밑거름이 되어 토양을 비옥하게 하고 그 위로 튼튼한 새싹들이 아름답게 자라나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다시 한 번 간절히 빌어 본다. 우리 국군이 진정한 ‘국민의 군대’가 되기 위해서는 좀 더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와 태도가 필요할 것 같다. 뼈아픈 역사적 배경들을 통해 덧씌워진 군림의 이미지를 벗어내고, 폐쇄적인 집단이라는 쓴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는 시대착오적이고 시행착오적인 제도들은 수정하고 개선하면서 거듭 발전하고, 뚝심 있는 실행으로 변화를 보여줘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단장 시절, 넓게 전개된 지역 중 소규모로 주둔하고 있던 격오지 부대원들이 갑자기 아팠을 때 인근 민간 병원에서 적극적으로 치료해 주던 일을 잊을 수 없다. 우리 군도 보안에 문제가 없는 한, 지역 주민들과 학교 시설의 운동장 같은 군 시설들을 공유하고 작은 것들부터 활발히 교류를 가진다면 더욱 견고한 신뢰관계를 형성할 수 있지 않을까?
학교를 둘러보며 추억에 잠기던 시간을 뒤로 하고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마침 퇴근시간이 임박하니 도심지는 온통 정체가 시작된다. 이른 아침 시원하게 뻥 뚫려 막힘없이 달려왔던 바로 그 길이다. 조금만 일찍 출발했더라면 정체를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역시 타이밍이 중요하다. 나는 지금, 앞으로의 생을 위해 어떤 생각과 일을 해야 하는 타이밍에 놓인 것인가? 육사를 입교한 지 반백 년의 세월이 흘러간 지금, 긍지와 자부심 그리고 아쉬움이 혼재된 내 삶의 궤적을 되돌아본다. 그래도 열심히 살아왔다는 자평을 하면서, 앞으로의 나의 시간이 살면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 함께 더욱 따뜻하고 여유로운 행복들로 가득 채워지기를 염원한다. 5월의 햇살과 바람이 키워낸 도로변의 꽃들이 잔잔히 미소 지으며 응원해 준다.
첫댓글 짤렸네여
이봉원 동기님의 글을 읽으며 신념에 찬 삶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고, 육사교장을 역임하였기에 남달리 육사에 대한 애착심이 크다는 것도 알수 있습니다.
세월은 흘러서 모든 것이 과거로 돌아가지만 삶에 대한 의지와 가치있는 인생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절대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봉원 동기님이 바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되네요.
앞으로 살아가는 모습도 기대가 됩니다. 좋은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들의 모교인 육사에서 학교장으로서 학교 발전을 위해 애쓰셨던 모습이 또렷하게 그려집니다. 지금도 태릉골프장을 아파트단지로 만들려는 계획을 저지시키려고 총동창회를 비롯한 동문들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다니 꼭 그렇게 되길 소망합니다. 그래야 육사와 더불어 태릉 일대가 호국 안보의 요람으로서 길이 보존될 것입니다.
장군님들의 선문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