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그리고 자유]
영화<400번의 구타>와 <바이센테니얼맨><빌리엘리어트><굿모닝 맨하탄><죽은 시인의 사회>를 중심으로..
2011113042 박소영
인간은 자유를 추구한다.
영화 < 바이센테니얼 맨 > 에서 주인공이자 인조인간인 '앤드류'는 수백권 수천권의 인류의 역사에 관한 책을 읽고 이런 말을 한다. " 주인님. 저에게 자유를 주세요. 저는 자유를 원합니다. 인간들은 수천년 역사동안 자신의 목숨을 내걸어서라도 얻으려고 한 것이 '자유' 입니다. 수백만명이 죽어서라도 지킬 가치가 있는 것이 '자유'라면 저 또한 '자유'를 원합니다."
단순히 성장 영화는 어떤 이가 내적이나 외적으로 성장을 하는 단순한 이야기를 넘어선 이 sf영화가 전하는 메세지와 같은 "자유"에 대한 메세지를 전하고 있다.
<400번의 구타>에서도 앙투안이 그토록 사투를 벌이며 원하던 것은 진정한 "자유" 였다. 앙투안이 학교를 가지 않게 된다고 해서, 가족으로 부터 벗어났다고 해서, 원하던 노동을 하게 된다고 해서 그것이 그가 원하는 자유는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을 구속하고 갇히게 하며 자신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사회에서 벗어나 자유를 통한 진정한 '성장'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가 마지막에 바다로 뛰어 간 것도 자유를 향한 발걸음이었을터. 하지만 그는 더 나아가지 못한채 다시 발길을 돌려야했다.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 시사점을 남기는데 나는 이를 성장, 자유의 '한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성장영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온전한 성장을 보여주지 않는다. 현실, 사회의 잔혹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 굿모닝 맨하탄>에서는 보면 봉건적 가족 구성원으로서 '엄마'라는 역할을 충실히 하며 살아왔으나 영어를 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가족 모두에게 멸시를 당한다. 그들에게 엄마란 가장 만만하고 열등한 존재이다. 가족으로부터 계속해서 존경받지 못하고 억눌리고 무시당하는 삶을 살아온 그녀에게 영어를 배울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다. 그렇게 가족으로 부터 해방되어 그녀 스스로 자신의 발전, 성장을 위해서 영어를 공부한다. 가정 내에 있을 때의 그녀와 영어 학원에서 모두에게 사랑받고 동등한 존재로 있을 때의 그녀는 천지차이다. 그녀는 '자유'와 '발전'을 상징하는 영어학원에서 행복하며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녀가 '자유' 를 박탈당하는 가정에서 그녀는 확연히 불행하게 비춰진다. 이 영화는 생각보다 그녀를 완전한 자유와 성장으로 안내하고 있지 않다. 끝까지 가정이라는 굴레에 남아 그토록 그녀가 원하는 영어 시험을 보러 가지 않는 것으로 결정한다. 현실과 꿈(성장) 의 갈등과 한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후에 결혼식장에서 하는 조카의 결혼 연사로 합격증을 받지만, 그것은 그녀의 온전한 '자유'와 '성장'을 통한 쟁취, 성과가 아니다. 불완전한 것이다. 이 영화에서도 <400번의 구타>에서 보여준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그녀가 원하는 자유와 발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현실과 가정이 그녀를 더 나아갈 수 없게 발목을 붙잡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 죽은 시인의 사회 > 에서는 이를 죽음으로 표현하고 있다.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연극'과 '시'를 공부하고 싶었던, 예술을 통해 자유를 얻고 행복하고 싶었던 페리는 아버지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더 큰 자유를 향한 듯한 죽음을 선택한다. 그에게 자유와 성장이 없는 감옥과 같은 삶은 죽음보다 더한 것이었을 거다. 페리의 아버지는 그의 죽음이 자신의 억압되고 체념의 삶을 강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에게 '자유'를 알게해준 선생님에게 그 책임을 묻는 지경에 이른다. 이는 마치 일본의 정치적 특징과 비슷하다. 내부의 문제를 내부에서 반성하고 수정해나가는 발전의 방향이 아닌 외부의 탓으로 돌리고 외부를 공격하는, 더이상의 '발전'이 없는 특징말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보여주는 자유와 죽음은 단순한 한 인물의 자유와 죽음이 아니다. 현 시대의 사회를 지극히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오 캡틴 마이 캡틴'이 가르친 진정한 자유와 발전을 인정해주고 알아주는 이들은 힘 없고 나약한 학생 몇명에 불과하다. 기득권층의 보수적 성격. 조금의 변화도 원치 않는 그들의 성격. 천편일률적이고 통제가능한 인간형을 원하는 사회.. 이것들에 대한 비판 의식과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성장 영화'가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비록 <빌리 엘리어트>는 다른 결말을 보여주고 있지만 결국 같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누군가의 '자유'에는 누군가의 '희생'과 '억압'이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빌리 소년은 <죽은시인의 사회>의 아버지같은 엄격하고 선입견이 가득 찬 아버지의 반대로 한번의 왕립발레학교 시험에 응시할 수 없게 된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는 아버지가 처음에 허락을 떨떠름하게 해준뒤 실제로 연극무대를 보고 절대로 더이상 연극을 할 수 없게 하여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반대로 <빌리엘리어트>는 처음에 반대한 아버지가 자신의 발레를 보고 감동하여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성장'을 얻게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빌리가 왕립학교를 가고 발레를 함으로써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버지와 형의 절대적인 희생과 억압이 전제되어 있었다.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얻은 자유는 절대 완전한 자유일 수 없다. <바이센테니얼맨>에서도 '자유'를 요구하는 인조인간 앤드류에게 주인이 아주 중요한 말을 한다. "자유를 얻으면 그에 따른 희생이 있다.(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 그 정도는 각오해야하는 것이다." 라고 말이다. <빌리 엘리어트> 영화는 희망적이고 감동적인 빌리의 성공기를 그리는 것이 목적이었을 수 도 있으나, 내가 생각하기엔 그 너머의 사회적 현실과 불온전한 자유를 시사한다.
주로 자유를 구현하는 데엔 예술이 사용된다.
어째서 자유를 표현하는 데에 예술이란 매체가 사용된 것일까. 단순히 겉보기에 자유로워 보이기 때문인 것일까. 아니면 예술이 가지는 창작의 자유, 표현의 자유 라는 성격 때문인 것일까. 개인적으로 예술도 마찬가지로 사회이기에 완전한 자유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영화에서 이토록 자유와 성장에 '예술'을 사용하는 것은 창작과 표현의 자유라는 성격때문이라고 생각한다. <400번의 구타>에서도 앙투안이 삶에서 유일하게 스스로 성장하기 위해, 스스로를 위해서 한 자유로운 행위인 "소설 창작"활동은 잔혹한 사회와 권력을 상징하는 선생님에 의해 처참히 꿈이 짓밟힌다. <바이센테니얼 맨>에서는 인조인간 앤드류 또한 조각하는 창작활동 예술활동을 하며 감성을 성장시킨다. <빌리 엘리어트>에서는 발레를 통해서 내면의 자유의 쾌락을 찾아냈다.(<피쉬탱크> 에서도 춤을 통해 스스로 성장하려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는 권력과 억압의 상징인 학교에서 자유와 사유적 성장을 위한 '시'창작 모임과 '연극'이 등장한다. <굿모닝 맨하탄>에서는 억압의 가정 속에서 그녀가 유일하게 행복해하는 예술활동인 요리가 나온다. 그녀는 '라두'를 만드는 것을 남자가 하면 예술, 여자가 하면 노동 이라며 비하를 한다. 하지만 프랑스 요리사 로랑은 그녀의 '라두' 또한 사랑을 담은 예술이라고 귀결한다.
사회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보다 강제성에 의해 행동을 하게 하고 천편일률적이고 똑같은 인간상을 추구한다. 마치 <메트로폴리스>의 노동자들의 모습처럼 말이다. 반면에 예술은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주체성을 가지고 자신의 욕망과 창작욕구로 부터 빚어지는 것이다. 타의성(강제성)과 자의성(주체성)이라는 이분법적 기준 때문에 수많은 성장담 영화가 예술을 통해서 강제성으로부터의 '자유'와 '성장'을 표현하려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사회를 구성하고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그렇기에 사회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고, 권력구조와 피권력 구조에서도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희생을 치뤄서라도 얻고 싶은 것이 "자유"인 인간이기에 끝없이 인간은 "창작"을 하고 예술활동을 하는 것이다. 인간의 본능이 사회 속 "생존" 임과 동시에 사회로부터의 "자유"또한 가지고 있다. 이런 양가성을 가진 인간 또한 양면성을 가진다. 인간은 이 사회로부터 벗어 날 수 없음을 알기에 "예술"을 통해 잠시라도 탈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