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기도에 얽혀 끈적대는 종교적 미신>의 줄거리 :
얍복 나루에서 생사를 걸고 씨름하듯 강렬한 기도 끝에 야곱은 기어코 하나님을 이기고 축복을 받아냅니다. 그러고 나서 형 에서를 만나는데 정말 엄청난 반전이 일어납니다. 복수심에 불타 야곱의 모든 소유를 진멸함이 당연함에도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화기애애한 마음으로 야곱을 맞아 줍니다. 그래서 이 일련의 사건은 소원대로 강력하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마지못해서라도 축복하시고 그 소원을 이룬다는 공식을 만들어 내기에 족합니다. 오늘 이후로는 이러한 종교적 미신을 완전히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기도에 얽혀 끈적대는 종교적 미신
(창세기 33:1~20)
1.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2.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3.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4.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 맞추고 서로 우니라
5.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들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 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
6. 그 때에 여종들이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7. 레아도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헬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
8. 에서가 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9. 에서가 이르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10. 야곱이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11.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시작한 뒤로 끈적거리며 엉기고 달라붙어서 도무지 제거하기 어려운 종교적 미신이 있습니다. 본문은 그 종교적 미신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그리고 성경을 읽을 때 이 세상을 향한 우리의 소원을 따라 하는 기도가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다는 착각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언제쯤이면 이러한 종교적 미신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요?
말씀드렸습니다만 예수님을 믿는 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었기에 주어진 영적 사실들을 다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영적 사실들에 적응하고 맞추어진 인격 상태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허락된 영적인 사실들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거나 적응하지 못한 채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며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을 믿어서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직면하는 것은 첫 번째 특권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옷 입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마음이 붙잡혀 있는 내가 죽고, 마음이 내 육체가 아니라 예수님의 몸을 입고 나면 하늘에서 하나님을 직면하게 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입니다. 하늘에 올라간 마음에는 하나님이 일등으로 보이고, 이 땅을 향해 물 샐 틈 없이 내려오는 하나님의 주권이 보입니다.
24시간 365일 실시간으로 빈틈없이 하나님의 주권이 내려오는 상황에서 나는 이 세상을 향하여 주체가 될 수 없고 소원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빈틈없이 보이는 중에 내가 세상에 대해 주인이 되어서 원하는 것을 소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지난 여름에 일본과 중국과 베트남을 비롯한 나라들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에도 폭우가 내렸습니다. 가령 시간당 100mm의 폭우가 퍼붓고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러한 폭우 속에서 비를 맞지 않기 위해 빗줄기 사이로 다니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처해있는 영적 상황이 이와 같습니다. 폭우 속에서 빗줄기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이 땅에 내려오는 하나님의 주권을 피하는 것입니다. 주권은 주인 된 권리입니다. 내가 삶의 주인이 되어서 무엇인가를 소원할 수 있는 공간을 찾는다는 것은 빗줄기 속에서 비를 안 맞는 것보다 더 힘든 일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주인 된 입장에서 무엇인가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판단하여 소원을 갖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주권자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종교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게 만드는 것이 종교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알게 된 하나님은 창조주요 주권자이십니다. 그리고 그 주권은 24시간 365일 이 땅에 내려오고 있습니다. 행여 우리가 빗줄기 사이로 다닐 수 있는 일은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주권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었을 때 누리게 되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종교는 이 하나님을 제쳐놓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입고 영광의 하나님을 마주하는 대신에 육체를 입은 채로 세상 것을 영광의 자리에 마주합니다. 그럴 때 반드시 나타나는 일은 마음에 담고 있는 세상 것과 연관하여 소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소원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는 신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하나님이라는 신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이고 예배당에 다니며 종교 생활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시간으로 살아서 역사하시는 창조주요 주권자로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마음에서 믿지 않아야만 될 수 있는 것이 종교인입니다.
이러한 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미신 중에 너무나도 떨쳐버리기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창조주요 주권자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마음에 세상을 담습니다. 주권자 하나님을 믿지 않기에 내 주권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내 소원을 따라 하는 기도가 창조주요 주권자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적 미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선민들이 기도할 때도 이 종교적 미신은 따라붙습니다. 너무 끈적거려서 완전히 제거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은 내가 주권자 하나님을 믿지 않고, 먼저 세상 것을 마음에 받아들여서 소원이 생겼을 때, 그 소원을 따라 하는 기도가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다는 종교적 미신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한 그리스도인입니까? 미신에 사로잡힌 종교인입니까? 본문을 통해 이것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종교는 살아계신 창조주요 주권자 하나님을 실시간으로 믿지 않아야만 내 것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인은 살아계신 창조주요 주권자 하나님을 믿지 않아야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에는 야곱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형의 보복이 일어나지 않고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야곱은 에서의 복수심에 의해서 자신의 모든 소유가 멸절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너무 무서워서 그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 얍복강가에서 생사를 건 간절함으로 환도뼈가 탈골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붙잡고 싸웠습니다. 결국 강청함을 통하여 하나님을 궁지에 몰아넣고 억지로 축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벌어진 일이 정말 대박입니다.
야곱은 목숨을 걸고 하나님과 씨름하여 축복을 받아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대로의 축복을 받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축복을 받아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 뒤에 반드시 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할 것이라는 형과의 만남이 기적적으로 반전이 일어나면서 감격과 화해의 재회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보면 정말 야곱처럼 이 세상을 향하여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갖고 싶은 것이 있거나 가진 것을 지키고 싶다면 야곱처럼 목숨 걸고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32장 6절을 보면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주석을 보면 이 부분을 에서가 동생을 환영하기 위한 인원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에서가 야곱에게 그 정도로 정이 있다고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주석들은 이 부분을 에서가 전투를 위한 병력을 동원했다고 봅니다. 이 말이 합당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분노에 불타며 사백 명을 동원한 에서의 복수심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화기애애한 상봉으로 바뀌게 됩니다. 주석들은 그 이유를 얍복강가에서의 야곱의 기도가 이루어진 것으로 봅니다만 정말로 그런 것일까요?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는 대신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본받았다면 어땠을까요? 루스 들판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 제가 소유를 다 강 건너로 보내고 보니 지금까지 그것들을 마음에 담느라 하나님을 보지 못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제야 하나님을 봅니다.’라고 했다면 야곱은 에서와 부둥켜안고 상봉하기에 앞서 하나님을 부둥켜안고 상봉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20년 전에 루스 들판에서 홀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는 마음속에 이 세상 것들을 담은 상태로만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선택하셨다는 책임과 스스로 하신 약속 때문에 야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이삭에게 주신 약속이 야곱에게 상속되기 위해서는 에서를 통해 멸절을 당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은 하나님만을 기뻐하며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내는 것을 본업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삶의 주인이 되셔서 알아서 이끌어 가셨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기뻐하였다면 아브라함처럼 야곱의 삶도 이끄셨을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를 놓고 다시 앞장을 생각해 봅니다. 32장에서 갑작스럽게 마하나임이라는 하나님의 군대가 야곱에게 나타납니다. 군대의 존재 이유는 싸워서 지키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체 무엇과 싸워서 지키시겠다고 야곱에게 군대를 의식하게 하셨던 것일까요? 그것은 사백 명을 데리고 오던 에서의 마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에서의 마음에 하나님의 군대가 쳐들어간 것입니다. 분노와 복수심에 부글부글 타오르던 에서의 마음에 하나님의 군대가 진격해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 에서의 복수심과 분노를 죽이실 것임을 군대를 통해 야곱에게 드러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군대를 보았고, 식솔들을 먼저 강 건너로 보냈습니다. 혼자 남은 야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하여 억지 축복을 받아냅니다. 이미 하나님은 야곱이 자기 소유를 지키겠다고 하나님을 붙잡고 몸부림칠 것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을 붙잡고 있으면서도 마음에서는 하나님을 보지 않을 것도 아셨습니다. 야곱은 마음에서 오직 자기 소유만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먼저 군대를 보이셨음은 야곱이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혼자 남았을 때 20년 전 루스 들판에서의 하나님을 떠올릴 수 있어야 했습니다. 에서와 20년 만에 만나게 되었지만 그에 앞서 20년 만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야곱은 오로지 하나님 자신에게만 집중하면 되었습니다. 심지어 야곱은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고자 580마리나 되는 가축 떼를 나누어서 예물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군대가 선행하는 단계에서 이것은 전혀 필요 없는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9절을 보면 에서는 야곱이 예물로 보낸 가축 떼가 전혀 필요하지 않았음이 직접적으로 드러납니다. “에서가 이르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라고 했습니다. 에서는 사백 명의 장정을 전투에 동원할 수 있을 만큼 갑부가 되어 있었습니다. 야곱이 에서와의 화친을 위해 짠 전략은 애초에 불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선민의 삶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만을 마주하여 마음에서 하나님을 지켜내는 것을 본업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선민이 본업을 잃을 때 의식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놓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대한 주권을 마하나임이라 불리는 하나님의 군대를 통해 야곱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마음에 세상 것을 붙잡느라 주권자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직 종교의 형태로만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을 뿐입니다. 이미 마음에 세상 것을 담고 있었고, 세상 것을 담고 있었기에 생겨난 소원을 따른 기도를 했습니다. 종교의 형식으로만 하나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소원이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야곱은 완전히 착각에 빠져있었습니다. ‘이것 봐라. 내가 얍복강가에서 목숨을 걸고 기도했더니 내 뜻대로 되었다. 환도뼈가 탈골되었을 때 포기했으면 에서와 화기애애한 상봉을 하기는커녕 죽었을 것이다. 역시 기도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붙잡고 강청하는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나는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다. 하나님을 통해 내 소원을 이룰 수 있다.’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본문을 보는 모든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하겠지만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오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왜 군대를 먼저 보여주셨는지를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군대는 야곱을 앞서가고 있었습니다. 이 군대가 어디에 가서 무엇을 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군대는 야곱을 향한 에서의 마음을 죽였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마음에서 지켜내는 본업을 잃어버린 선민의 삶은 고단합니다. 물 샐 틈 없이 내려오는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과 뜻이 삶을 이끌어 감에도 불구하고 아무 필요 없는 일에 생사를 걸고 난리를 피웁니다. 이것은 안 해도 되는 일을 넘어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불필요한 일입니다.
이 세상을 향한 소원은 우리에게 허락된 바가 없습니다. 100mm 폭우 속에서 빗줄기 사이를 지나다니며 비를 안 맞는 것보다 이 땅에 내려오는 하나님의 주권을 피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서 소원하고자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의식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피하고자 한다면 하나님을 안 믿고, 무시하고 멸시하고 버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창조주요 주권자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생활 현장을 보면 드러나는 모습이 전혀 다릅니다. 이 세상에서 내 뜻과 계획과 소원을 주장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신앙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닙니다. 종교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인이 갖고 있는 공통적 미신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믿는 모든 종교인들도 소원하여 간구하면 신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다.’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정말로 지성이면 감천일까요? 아브라함은 이 세상 삶을 위하여 지성을 들여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드렸을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에 감동하셨습니다. 또한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라고 합니다. 결국 이 세상을 향해 갖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향해 내가 뜻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24시간 365일 물 샐 틈 없이 내려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폭우 속에서 빗줄기 사이로 다니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피하는 것보다 쉬운 일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의 뜻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고진감래이다.’라는 격언을 온 인류가 추앙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마주하게 된 이후로는 복에 대한 권리가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마주하여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데 그 하나님 외에 다른 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다른 복이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신명기 6장 5절에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율법으로 생각합니다만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벌고 하나님을 가지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면 그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은 복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멸시한다면 세상에 대한 소원이 생깁니다. 이제부터는 종교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기도해서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마음에 세상을 담고 소원이 생겨서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신 경험이 있습니까? 이제 스스로 속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야곱은 자기의 소유를 지켜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그 소원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미 있었기에 이루신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강요해서 이루어진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대한 소원을 갖고 기도했는데 응답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계획하셔서 이루시려고 하신 것을 간구했기에 이루신 것입니다. 정말로 여러분의 기도가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다면 왜 소원과 바람대로 이루어 주시는 횟수가 가뭄에 콩 나듯이 하십니까? 그런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소원을 한다면 내가 삶의 주인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이 땅에서 진행되는 삶에 대해 하나님이 주인이신데 내가 또 다른 주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사실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뭉개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의 기도는 중언부언의 공회전 하는 기도이며, 불필요한 일들을 덧붙이는 삶입니다.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형과 화친하기 위하여 머리를 싸매고 전략을 짭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단 하나도 필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야곱은 하나님만을 좋아하면 되었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사는 것은 종교인의 심성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야곱의 모습 속에서 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안타까움과 희망이 있습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께 몰두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첫째, 복수심에 불타던 에서와의 화해는 반전의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군대로 표현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둘째, 야곱과 하나님의 관계는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관계처럼 영광의 하나님을 보며 하나님을 복으로 누리는 상태가 되었을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의미를 지니는 이스라엘이라는 악한 이름이 세상에 나타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선민을 나타내는 이름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나, 하나님의 아들들이나, 예수님의 십자가 가족들이라고 하면 충분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세상에 등장해서는 안 되는 이름입니다.
이러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본문을 찾아보면 희망도 보입니다. 본문 20절을 보면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엘엘로헤이스라엘”에서 엘은 ‘하나님’이라는 뜻이고 엘로헤는 ‘~의’라는 뜻으로써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환도뼈를 치셔서 탈골되게 하셨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축복의 개념을 야곱에게 주입하려 하셨다가는 야곱이 죽게 생겼기에 야곱이 바라던 축복을 그대로 해주셨습니다. 야곱은 이것을 자기의 기도를 따라 하나님이 이루어 주셨다고 믿게 되는 상황이 반복되며 진행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엉터리 신앙이 진행되는 가운데 야곱의 마음에는 서서히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자기편을 들어주신다는 오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자꾸 정이 쌓여갑니다.
야곱은 “엘엘로헤이스라엘” 다시 말해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제단을 쌓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기는 것들의 존재감으로 가득 차 있던 야곱의 마음속에 조그마한 틈새가 생기며 하나님의 존재감이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야곱은 에서와 상봉한 뒤에 헤어져서 숙곳이라는 지역에서 꽤 오랜 기간을 머물다 세겜으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세겜에서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부르며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 시간을 지나는 동안에 야곱의 마음속에 이 세상에서 얻고 싶은 소원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존재감이 작게나마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다리심과 바라시는 바가 이러한 경위와 과정과 경화를 거치면서 야곱의 마음속에 싹트기 시작하고 진행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당신의 존재감을 세상 소원과 무관하게 느끼기 시작한 야곱의 상황을 어떻게 박차를 가하시고 고삐를 조여가시며 끌고 가실지 기대가 되는 국면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종교인으로 살 때 내 마음에 붙은 종교적 미신이 너무 끈적거립니다. 세상 소원이 끈적거리며 생기고 그 소원을 따라 기도하려는 의지가 끈적거리며 떨어져 나가지 않습니다. 오늘도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음으로써 주님의 보혈이 내 마음에서 끈적거리는 종교적 미신을 말끔히 씻어 주시는 역사가 지속될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