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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순례의 향기(18)
☞ 순례 장소 : 수리치골 ➟배나드리 ➟홍주순교성지➟
갈매 못순교성지➟해미순교성지➟청양 다락골
정유년 새해 맞이하여 겨울의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어둠을 뚫고 체육관에 가니 많은 자매님들이 순례를 하기 위해 옹기종기모여 이야기꽃을 하고 계셨는데 모든 분들의 얼굴들 낯 설움,
아! 오랜만에 오니 많이 변해버린 순례회원님들에게 어색함을 느꼈다. 회장님의 축송을 받고 목적지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첫 번째 간 곳
● 수리치골
수리치골은 박해 시대 선교사들의 근거지이며 충청도 지역의 선교 중심지인 교우 촌이었다. 특히 한국 교회와 민족을 위해 성모 성심께 한국과 한국 교회를 봉헌하고 성모 성심회를 조직하였던 성모 성심 신심의 발상지로서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 형성에 공헌을 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는 곳이다. 수리치골은 박해 시대 교우촌의 하나다. 당시 공주 지방에는 국사 봉을 중심으로 둠벙이, 용수골, 덤티, 진밭, 먹방이 등 여러 군데에 교우들의 은거지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수리치골이 가장 깊숙하고 넓어 많은 교우들이 모여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수리치골이 특히 교회사적으로 의의를 갖는 것은 1846년 11월 2일 페레올(Ferr´eol, 高, 1808~1853, 요셉) 주교와 성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신부(1857년 주교가 됨)가 박해받는 한국 교회와 민족을 위해 성모 성심께 한국과 한국 교회를 봉헌하고 성모 성심회를 조직하였던 성모 성심 신심의 발상지로서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 형성에 공헌을 했다는 점에 있다. 성모 성심회는 원래 1836년 프랑스 파리에서 창설된 신심 단체로 창설자는 파리의 승리의 성모 대성당 주임이던 데쥬네트(Desgenettes) 신부이며, 본부는 승리의 성모 대성당에 있다. 이 회의 목적은 성모 성심을 특별히 공경하고 성모 성심의 전구를 통해 죄인들의 회개를 하느님께 간구하는 데 있다.한국 천주교회는 초기부터 성모 신심이 유달리 강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신심은 1835년 말 이래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더욱 깊어졌다. 특히 제2대 조선교구장 성 앵베르(Imbert, 范世亨, 1796~1839, 라우렌시오) 주교는 1838년 12월 1일에 조선교구의 주보를 성모 마리아로 모시게 해 달라고 교황청에 요청하였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이를 허락하여 1841년 8월 22일에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성셉’과 함께 공동 주보로 정해 주었다. 이에 감사하기 위하여 다블뤼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함께 1846년 11월 2일 공주 수리치골에서 성모 성심회를 창립하고, 박해받는 조선 교회를 보호해 달라고 전구하게 되었다. 수리치골은 당시 교우 촌이 아니라 단지 열심한 한 신입 교우 가족만이 사는 외딴 곳이었다. 그런데 다블뤼 신부가 이곳을 방문하여 성모 성심회를 설립함으로써 자연 인근의 신앙 중심지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옛 수리치골 교우촌은 미리내 ‘천주 성삼 성직 수도회’와 ‘성모 성심 수녀회’를 창립한 정행만 신부가 오랜 답사 끝에 찾아내게 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 5월 6일 명동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님이 1846년 무서운 박해 하에 공주 땅 수리치골에서 이 나라와 교회를 요셉 성인과 공동 주보이신 성모께 조용히 봉헌했다.”고 상기시켰다. 페레올 주교는 성 김대건 신부에게 성품성사를 준분이다. 현재 미리내 성모 성심수녀회가 성지를 관리하고 있다.
▒ 성모 성심회(聖母聖心會) 1836년 프랑스 파리에서 창설된 신심 단체이다. 창설자는 파리 ‘승리의 성모 대성당’ 주임이던 데쥬네트(Desgenettes) 신부이며, 본부는 ‘승리의 성모 대성당’에 있다. 이 회의 목적은 첫째 성모 성심을 특별히 공경하고, 둘째 성모 성심의 전구를 통하여 죄인들의 회개를 하느님께 간구하는 데 있다. 우리나라에서 1846년 11월 2일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에 의해 공주(公州)의 수리치골에 처음으로 조직되었고, 그 뒤 널리 보급되어 박해 속에서 살아가는 교우들의 신앙생활에 큰 도움을 주었다. 현재 이회는 거의 모든 본당마다 하나씩 조직되어있다.
두 번째 간 곳
● 배나드리
배나드리는 삽교천가의 섬처럼 생긴 마을로 박해를 피해 다니던 신자들이 모여 이룩한 교우촌이었다. 1817년 10월해미 포졸들에게 20∼30명가량의 신자들이 체포되어 민 첨지 베드로와 손연욱 요셉 등은 혹독한 형벌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키다가 옥사로 순교하였다.예산군 삽교읍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삽교천 가에 섬처럼 생긴 마을로 도리라고도 부르며, 홍수가 나면 사면이 물바다가 되어 배를 타고 건너다녔으므로 배나드리라 부르기도 한다. 이곳은 삽교읍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지만 삽교천으로 인해 물이 불어나면 배를 타고서야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으므로 비밀히 신앙을 지키기에 적당한 마을이었고 명칭 또한 바로 이런 지형적 위치에서 연유되었다.
1817년 10월(음) 해미 포졸들이 갑자기 배나드리에 나타나 신자들을 모두 체포해 갔다. 해미로 체포되어 간 신자는 20∼30명가량인데 대부분은 배교하여 석방되었으며, 민 첨지 베드로와 형수 안나, 송 첨지 요셉, 손연욱( ?~1824, 요셉), 민숙간 등은 혹독한 형벌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키다가 옥사로 순교하였다. 그리고 손연욱의 부친 손 여심은 오랫동안 해미 옥에 갇혀 있다가 10년 뒤인 1827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 후 배나드리 교우촌은 없어졌다. 배나드리의 박해가 공식적인 박해가 아니었으므로 이 순교자들의 행적에 대하여도 분명하게 알려지고 있지 않다. 다만 이들 중 민 첨지는 결성 출신으로 목천 소학 골에서 살다가 배나드리로 이주하였고, 손연욱은 홍주 출신인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배나드리는 박해를 피해 다니던 신자들이 모여 이룩한 교우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순교자 손연욱 요셉은 홍주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열심히 수계 생활을 하고 마음이 양순하고 겸손하여 남을 사랑하는 본분, 특히 신자의 본분을 기리는 일에 지극히 엄격하였다. 그는 가끔씩 하느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싶다는 말을 하곤 하였다. 손연욱 요셉은 순교한 김대건(金大建,1821~1846, 안드레아) 신부의 작은할아버지 김종한(金宗漢, ?~1816, 안드레아)의 딸인 성녀 김 데레사(1779~1840)와 혼인하였다.그러나 1817년 덕산의 배나 다리에서 마을 교우 30여 명과 함께 체포되어 해미 진영으로 압송되어 거기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였다. 그는 오직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만 입을 움직였다. 그리고 남에게 누를 끼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한편 손연욱의 부친 손여심도 아들이 잡혀간 지 3일 후에 체포되어 해미 진영으로 압송되어 몇 차례나 혹독한 형벌을 받고 10여 년 동안 옥살이를 하면서 중병에 걸렸다. 관장은 그를 집으로 보내어 병이 나으면 다시 돌아오라고 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1827년에 세상을 떠났다.
■ 순교자
◆ 손연욱 요셉 ( ? ∼1824)손연욱은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자의 본분을 기리는 일에 지극히 엄격하였다. 1811년에 순교자 김종한(계원)안드레아의 딸인 김데레사(1839년 순교)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결혼 생활 7년 후인 1817년 10월(음) 덕산의 배나 다리(현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에서 마을 교우 30여명과 함께 체포되어 해미 진영으로 압송되었고 거기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였다. 무수한 고문을 오랫동안 당하고 옥중에 갇혀 영영 석방 될 가망이 없어지니 그는 일생을 거기서 지내려는 것처럼 자리를 잡았다. 6∼7년이라는 세월이 이렇게 흘렀지만 그의 열심은 덜해지기는 고사하고 날로 더 단단해져갔다. 마침내 감옥 곁에 있는 어떤 집에서 동생과 같이 살 허락을 얻어 몇 주일 동안 거기서 머무르다가 죽었다.
세 번째 간 곳
● 홍주
홍주의 순교 터인 처형장, 즉 천주교 신자들이 참수형을 받은 장소는 홍주성의 북문 밖, 즉 지금의 홍성읍 오관 리에 소재한 북문교 인근의 월계천변으로 추정되고 있다. 즉 소향 천과 월계천의 합수머리 지점에서 죄인들을 처형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홍주 성지는 기록상으로 211명(또는 212명)의 순교자와 700여 명의 무명 순교자를 배출한 곳이다. 홍주(홍성) 순교 성지의 특징은 첫째 예비자들의 모범 성지이며, 둘째 박해 초기부터 말기까지 순교자가 나온 곳이며, 셋째 한국 천주교회의 핵심 성지라는 것이다.
첫째, 천주교에 입교하여 2년간 예비자로써 수계를 지키며 선교한 원시장(1732~1793, 베드로)은 신해박해 때 옥에서 세례를 받고 동사(凍死)로 순교했고, 장장 22년 동안 예비신자 생활을 하며, 거의 10년 넘게 옥살이를 하다가 순교하기 직전 자기가 자기에게 세례를 주고 하느님을 영접한 이여삼(1770~1812, 바오로)은 바로 ‘예비신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둘째, 1791년 전라도 진산 사건 때 내린 전국 천주교 신자 검거령으로 홍주에서 원시장 베드로가 충청도에서 첫 순교자가 되면서 정사박해(1797년),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박해(1866년)까지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곳이다.
셋째, 홍주는 내포의 중심지로 이존창(李存昌, 1759~1801, 루도비코 곤자가)이 권일신(權日身, 1742~1792,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서 세례를 받고 여사 울에서 첫 선교를 시작한 후 내포 지역의 수많은 신자들이 홍주 목에서 순교하게 됨으로써 핵심 성지로서 자리 매김하게 되었다. 홍주의 또 다른 순교터인 처형장, 즉 1801년의 황일광(黃日光, 1757~1801, 알렉시오)과 1868년의 유 마르타(1803~1868, 교수형의 가능성도 있음)가 참수형을 받은 장소는 홍주성의 북문 밖, 즉 지금의 홍성읍 오관리에 소재한 북문교(일명 덕산통) 인근의 월계천변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합수머리 지점은 본래 북문교 아래쪽이었는데, 훗날 도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북문교 위쪽이 되었다고 한다. 옛날 홍주 관리가 읍성 북문(북문교 남쪽 60~70m 지점) 옆의 치(雉)에 올라가 신호를 하면 그 신호에 따라 월계천변으로 끌고 간 죄인을 참수형에 처했는데, 그 치가 있던 곳은 지금의 북문 밖 월계천변에서 가까운 북문교 하류 200m 지점이었다. 또 원래 북문은 역대 목사들이 사형수의 처형을 감시해 오던 곳으로, 갑오 동학란 때에는 동학군들을 여기에서 처형하였다고도 한다. 실제로 이곳은 일반적인 참수(斬首) 형장의 조건인 개천과 백사장이며,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장소 등 형장으로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1866년과 그 후 2년 동안 이곳에서 많은 교우들이 잡혀 순교했는데, 《치명일기》에만도 83명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조양 문으로 끌려 들어온 많은 교우들은 관청 뜰 안에 있는 나무에 묶여 있다가 동헌으로 끌려가 심한 문초를 받아 죽기도 했고, 옥에서 굶어 죽기도 하였다. 이렇게 죽은 시체는 성 밖으로 내다 버렸다.▒ 홍주와 홍성 지금의 홍성군은 조선 시대의 홍주목과 결성 현이 합해져 이루어진 군이다. 홍주 목의 고려 시대 이전의 역사는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고려 초인 태조 대에 이곳에 운주(運州)를 설치하고, 현종 3년인 1012년경에 홍주(洪州)로 개칭되었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 홍주는 충청도의 4목(충주, 청주, 공주, 홍주)가운데 하나로 1413년(태종 13년)에는 결성현을 설치했다. 따라서 홍주 목은 내포 지역 통치의 중심으로 관할 영역은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세조 즉위 직후 충청도의 4개 진관 중 하나로 홍주 진관을 설치하고 목사가 겸임하는 첨절제사를 두어 19개의 고을을 관할하였다. 일제는 1914년 행정 구역을 개편할 때에 민족정기를 끊는다는 속심으로 ‘홍주군’과 ‘결성군’의 각 한 글자씩 따서 ‘홍성군’으로 개칭하고 11면을 관할하게 하여 현재(2읍 9면)에 이르고 있다. 충청도의 4목 가운데 ‘홍주’만이 유일하게 일제에 의해 본래의 ‘홍주’라는 이름을 빼앗겨 버린 채 ‘홍성’이란 이름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오는 2012년 충남도청이 홍성으로 이전해 업무를 시작하게 될 ‘충청남도청 홍성 개청 ’연도인 2012년은 ‘홍주’라는 지명 역사가 ‘1000년을 맞는 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 순교자
◆ 복자 황일광 시몬 (1757∼801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황일광 시몬은 천한 신분 출신으로 어린 시절을 아주 어렵게 생활하였다. 1792년 무렵, 홍산 땅으로 이주하여 살던 중에 우연히 이존창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가 교리를 배우게 되었다.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동생 황차돌과 함께 고향을 떠나 멀리 경상도 땅으로 가서 살았다. 교우들은 그의 사회적 신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를 애덕으로 감싸주었다. 1800년 2월 그는 경기도 광주의 분원에 살고 있는 정약종 회장의 이웃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황사영(알렉시오), 김한빈(베드로) 등 여러 교우들과 자주 교류하였다. 그 후 정약종 회장이 한양으로 이주하자, 시몬도 아우와 함께 한양 정동으로 이주한 뒤 땔나무를 해다 팔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땔나무를 하러 나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굳건하게 참아냈다. 그 결과 그는 다리 하나가 부러졌으며, 으스러지도록 잔인하게 매질을 당하고 고향으로 보내 참수하도록 명을 내렸다. 이에 따라 시몬은 고향인 홍주로 이송되어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네 번째 간 곳
● 갈매 못 순교성지
갈매못 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다섯 분의 성인이 치명한 곳이다. 제5대 조선교구장인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황석두 루카 회장, 배론 신학당의 집주인 장주기 요셉 등 다섯 명의 성인이 세실 함장이 침범했던 외연도에서 가까운 오천 수영에서 처형되었다.갈매못이란 영보리 앞바다가 좌우의 육지와 섬으로 둘러싸여 마치 연못 같아 보이는 데서 유래하였다. 오천(鰲川)은 치안과 국방을 담당하던 수영(水營)이 있었고 수군통제사가 있던 곳이다. 이곳 갈매 못이 순교지가 된 이유 중에 하나가 오천면에 속하는 외연도(外烟島)와 관련되어 있다.
1846년 6월에 프랑스 해군 제독인 세실(C´ecille, 瑟西爾, 1787~1873) 함장이 세 척의 군함을 끌고 서울 한강으로 진입하려고 하였으나 한강을 못 찾고 외연도에 정박하여 당시 임금이었던 헌종에게 1839년 기해박해 때 프랑스 선교사 앵베르(Imbert, 范世亨, 1796~1839, 라우렌시오) 주교, 모방(Maubant, 羅伯多祿, 盧, 1803~1839, 베드로) 신부,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1803~1839, 야고보) 신부 등 3명을 살해한 책임을 묻는 편지만 남겨 놓고 돌아갔다. 이와 같은 세실 함장의 조선 영해 침입 사건을 계기로 당시 옥중에 있던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신부의 처형이 앞당겨졌고,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 李昰應, 호 石坡, 1820~1898)은 서양 오랑캐들을 내친다는 의미로 세실 함장이 침범했던 외연도에서 가까운 오천 수영으로 다섯 명을 끌고 와 외연도를 향하여 처형하게 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 무렵 궁중에서 고종비(高宗妃)의 간택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서울이나 그 부근에서 처형할 수 없어 보령 수영으로 결정하였고, 이에 따라 이들 다섯 명은 이곳으로 이송되어 성금요일인 3월 30일(음 2월 14일)에 순교하였다.순교한 다섯 명의 성인 중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주교는 1845년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다가 1857년 보좌 주교로 성성되었으며, 제4대 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1814~1866, 시몬) 주교가 순교하면서 1866년 3월 7일 교구장이 되었으나 4일 만인 11일에 충청도 내포 지방에서 체포되었다. 이때 그의 복사로 활동하던 황석두(黃錫斗, 1813~1866, 루카)가 함께 체포되었고, 이어 인근에 피신해 있던 오메트르(Aumaître, 吳, 1837~1866, 베드로) 신부와 위앵(Huin, 閔, 1836~1866, 마르티노) 신부가 더 이상 신자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려는 생각에서 자수하였다.이들은 모두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3월 23일(음 2월 7일)에 군문효수형을 선고 받았는데, 이때 충청도 제천에서 체포되어 온 장주기(張周基, 일명 樂韶, 1803~1866, 요셉)도 이튿날 같은 형을 선고받았다. 이중 황석두의 유해는 곧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 졌고, 나머지 네 유해는 3일 뒤 형장의 모래사장에 묻혔다가 6월 초 신자들에 의해 홍산 남포의 서재골(서직골, 서짓골)로 이장되었으며, 1882년 3월 블랑 신부의 지시로 발굴되어 일본 나가사키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1894년 5월 다시 조선으로 옮겨져 1900년부터 명동 성당에, 1967년부터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 지하성당에 안치되었다.
◆ 오성 바위
병인박해(1866)때 순교한 다블뤼 주교, 오매트리 신부, 위앵 신부, 황석두 루가, 장주기 요셉 등 세 성직자와 두 전교회장이 갈매 못을 향해 끌려가는 도중에 길목인 내포 땅 아산군 음봉면 길가의 바위 위에 걸터앉아 여기서 쉬는 동안 포졸들이 포승을 풀어 주어서 안 주교는 교우들을 만나 격려하고 함께 기도한 후 막걸리로 목을 추기고 마지막 설교를 한 다음 성가를 부르며 끌려갔다는 눈물겨운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 때 그 바위는 지난 1973년 음봉 삼거리에서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 광장으로 옮겨져서 '복자 바위'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나 1984년 다섯 분 모두 성인품에 오른 후 '오성 바위'라고 고쳐 부르고 있다. 그 앞의 돌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입국한 다블뤼 안주교가 21년간 숨어 살던 방을 드나들 때마다 밟고 다니던 문지방돌이다. 현재 이 바위는 절두산 성지 야외 전시장에 있다.
■ 순교자
◆ 성 황석두(黃錫斗) 루가 (1813∼1866)‘재건’이라고도 불렸던 황석두는 충청도 연풍의 양반 가문에서 자라나 부친의 뜻에 따라 과거 시험을 치르러 상경하다가, 한 주막에서 천주교인과 사귀게 되어 입교하였다.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3년 동안 벙어리 행세를 하며 교리서를 탐독하였고, 이에 감동한 부친과 가족들도 입교하게 되었다. 그는 덕행이 뛰어나고 교리 지식이 풍부하여 주교와 신부들의 복사로,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고 주교에게 금욕과 절제를 위하여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받고 독신 생활을 하였으며, 안 주교를 도와 교리서 번역과 교회 서적 출판에도 참여하였다. 1866년 3월에 먼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던 안 주교를 몇 십 리나 따라간 황석두는 결국 함께 체포되어,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5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성 장주기(張周基) 요셉 (1803∼1866)‘낙소’라고도 불렸던 장주기는 경기도 수원 느지지(현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에서 태어나 1826년에 세례를 받았다. 박해와 친척들의 방해를 피해 충청도 배론으로 이사하였고, 회장이 되어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1855년 배론에 신학교가 설립될 때에는 자신의 집을 임시 신학교로 내어 주고, 자신은 신학교에 딸린 땅에서 농사일을 하며 잔일을 도맡아 하였다. 1866년 3월 1일 배론 신학교에서 신 신부와 박 신부가 체포되자 장주기는 제천 부근의 노럴골로 피신하였지만, 다른 교우들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하여 자수한 뒤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의 포청에서 고문을 견뎌 내며 끝까지 신앙을 지켜, 때마침 홍주 거더리에서 끌려 온 안 주교, 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등과 함께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6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그외 순교자들
◆ 박 베드로 박 베드로는 본디 충청 신창 사람이라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 도리를 배워 열심히 수계하더니 창말서 살적에 무진년에 홍주 포교에게 잡혀 "네 천주학을 하느냐?" 묻거늘 "내 과연 성교를 하노라" 하매 즉시 잡아 본관에 가 문목한 후 수영으로 보내어 진 친 곳에서 베어 죽이니 나이 34세더라. 증인은 면천 찻티 사는 그 아우 박 필립보이다. (증언록 130번 224쪽,치명일기 727번, 수영)
◆ 손치양 사도 요한 손치양 사도 요한은 기해년에 치명한 손 안드레아의 사촌이며 홍주 거더리에 살더니 무진년에 경포에게 잡혀 서울로 가 몇 달 동안 갇혔더니, 이에 대원군 아버지 남연군 묘 굴총하던 배 주인이라 하여 큰 죄인으로 잡아 수영까지 보내어 치명하니 나이 50세요, 때는 무진년 5월이라 증인은 재종손 요한이라. (증언록 85번 143쪽, 치명일기 728번, 충주)
◆ 이영중 본래 공주 서면 사람이라 무진년에 경포에게 잡혀 서울에 갇혔더니, 이에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할 때 태워 온 배의 주인이라 하여 손치양과 한가지로 수영까지 끌고가 효수하니 나이 45세더라. (치명일기 729번, 수영)
◆ 이 발토로메오 본디 충청 덕산 사람이라 그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 열심히 수계하더니 병인년 군란 때 경포에게 잡혀가다 도망하였더니 경오년에 수원 포교에게 잡혀 수영으로 가 진터에서 참수되니 나이 24세더라. (증언록 130번 222쪽, 치명일기 730번, 수영)
◆ 임운필 임운필은 임 토마스(치명일기 636번 순교자)의 재당숙이라 여러 일가의 문장 되므로 수하 사람을 잘 교훈하여 성교에 열심하더니 병인년 군난 때 모든 가족들이 많이 잡혀가 죽고 나이 많은 고로 피하여 나가지 못하여 집에 있어 끝을 보려 하더라. 홀연히 수영 포교가 들어와 잡거늘 "내 집은 성교함으로 인하여 아랫사람들이 많이 죽고 나도 성교를 봉행하니 너희 뜻대로 하라" 한즉 잡아 수영으로 가 수사가 문초한 후 즉시 교하여 죽이니 나이 70세라. 증인은 해미 마새 사는 그 재종손 임 베드로이니 나이 43세다. (증언록 )120번 237쪽)
다섯 번째 간 곳
● 해미순교성지
해미 성지는 100년 동안 무려 3천 명으로 추정되는 천주교 신자들을 참혹하게 처결한 조산리 순교 현장이다. 특히 1866년 병인년으로부터 1868년 무진년에 이르는 대박해 때에는 수많은 죄수들을 한꺼번에 죽이면서 시체 처리의 간편함을 위하여 생매장형이 시행되던 거룩한 순교 터다.해미읍내에는 순교 기념지가 여러 곳이 있다. 서문 밖과 옥터, 그리고 소위 생매장지라고 전해지는 조산리다. 조산리는 해미 읍에서 좀 떨어진 내 건너편 벌판에 오리나무와 버드나무 숲이 있는 곳이었다. 바로 현재 해미 성지로 조성된 곳이다.
생매장에 관한 일은 유해를 찾을 당시 70년이나 되는 옛날 일이었으므로 확인이 어려웠으나 다행히 노인들 중에 목격자나 전해들은 증언자들을 통해서 생매장 장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 증언에 따라 1935년에 조산리에서 순교자의 유해를 찾게 되었다. 교우들을 묻어 죽인 구덩이 속에 흙이 썩은 것을 보면 의심 없이 수십 명으로 짐작되었으나 수습된 유해는 10명가량 밖에 되지 않았다. 병오년(1906년) 큰물에 봉분이 다 없어져서 무덤의 형적이 보이지 않았으나 증인의 말 을 확인한 후 서산과 해미 관공서의 승낙을 얻어 발굴하였다. 그 결과 유해를 많이 얻었을 뿐 아니라 십자고상이 썩은 형적까지 발견되었다. 발굴된 유해들은 성대한 예식을 갖추어 당시 서산 본당인 상홍리(일명 가재) 공소로 이장하였다. 해미는 특히 1866년 병인년으로부터 1868년 무진년에 이르는 대박해 때에는 수많은 죄수들을 한꺼번에 죽이면서 시체 처리의 간편함을 위하여 생매장형이 시행되었다. 해미 진영의 서녘 들판에 십 수 명씩 데리고 나가서, 아무 데나 파기 좋은 곳을 찾아 큰 구덩이를 만들어 한마디 명령으로 산 사람들을 밀어 넣어 흙과 자갈로 덮어 묻어버렸다. 또한 생매장형이 시행되면서 여름철 죄인의 수효가 적을 경우에는 사령들이 번거로움을 덜기 위한 방법으로 개울 한가운데에 있던 둠벙에 죄인들을 꽁꽁 묶어 물속에 빠뜨려 죽이는 수장 방법이 사용되기도 했는데 해미 지역 외인들은 천주학 죄수들을 빠뜨려 죽인 둠벙이라 해서 죄인 둠벙이라 부르고 있었으나 현재는 이름조차도 변해 진둠벙이라 불리고 있다. 교회가 이곳을 순교지로 인식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농부의 연장 끝에 걸려들어 버려지던 뼈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이때 캐어 내던 뼈들은 수직으로 서 있는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 바로 그것은 죽은 몸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 묻혔다는 증거다. 해미 진영 서녘의 생매장 순교 벌판에서는 1935년 서산 본당의 바로(Barraux, 范, 1903~1946, 베드로) 신부(서산 본당 재임 1932.7.~1946) 지도하에 순교자의 유해 발굴 때 유해 일부와 유품 성물이 발굴되어 30리 밖 상홍리 공소에 임시 안장되었다가, 1995년 9월 20일 유해 발굴터인 원 위치로 다시 안장되었고, 순교자의 유해는 별도로 보존 처리되어 유해 참배 실에 보존되고 있다. 그리고 유해 발굴지 인근 하천 위에 16m 높이의 철근 콘크리트 조형물인 해미 순교 탑이 세워져 있다.
■ 해미 순교와 관련된 신앙 증거 터와 순교 터
◆ 순교자들이 넘던 한티 고개 면천 고을과 예산 및 덕산 고을의 천주교 신자들을 해미 군졸들이 압송하여 넘던 고개이다. 교우들이 무리지어 살던 면천은 황무실 마을과 덕산의 용머리 마을, 배나드리 마을 등지에서는 집단으로 체포되어 넘어 오기도 하였다. 한티 고개를 넘어 붙잡혀 가던 숱한 순교자들이 고개 마루 터에서 고향 마을을 마지막으로 뒤돌아보던 곳에는 잡초만이 무성하다.
◆ 벌판길과 진둠병
1790년대부터 80여 년간 시산 혈하를 이루던 서문밖 사형 터는 병인 대박해시(1866년 이후)에는 주거 인접지역인 관계로 대량의 사학죄인의 시체를 처리하기에는 협소한 장소였다. 1천여 명을 단기간 동안에 처형하기 위해 벌판에서 집행하게 되었는데 죽이는 일과 시체 처리하는 일을 한꺼번에 해치우기 위해서 십 수 명씩 생매장하게 되었다. 생매장 시키러 가는 길에 큰 개울을 만나게 된다. 개울을 건너는 곳에 외나무다리가 있었고, 그 밑에는 물길에 패인 둠벙이 있었다. 두 팔을 뒤로 묶이어 끌려오는 사학죄인들을 외나무 다리 위에서 둠벙에 밀어 넣어 버리기도 하였다. 묶인 몸으로 곤두박질 당한 죄인은 둠벙 속에 쳐 박혀 죽었다. 이 둠벙에 죄인들이 떨어져 죽었다 하여 동리 사람들 입에 ‘죄인 둠벙’이라 일컬어지다가 오늘날에는 말이 줄어서 ‘진둠벙’ 이라 불리어진다.
◆ 생매장 순교지
여숫골 동구 밖 서쪽의 나무가 우거진 곳이었기에 "숲정이"라 불리던 곳이다. 현재는 논으로 가꾸어진 벌판이지만 병인년 대에는 숱한 천주학 죄인들이 산 채로 묻혀 졌던 곳이다. 이 뼈들은 수직으로 서 있는 채 발견 되었다 하는데 그것은 죽은 몸이 아닌 살아있는 사람이 묻혔다는 증거이다. 산 사람들이 묻히던 어느 날엔 함께 묻힐 동아리 가운데에 어여쁜 규수도 있었다 한다. 묻기를 명할 찰라에 형장의 눈에 들어온 규수의 자색은 그 형장의 연민을 자아내었다. 어여쁜 얼굴에 어찌 사학을 하여 죽는 몸이 되었느냐며, 살려줄 터이니 사학을 버리라고 꾀었으나 입술을 깨물고 그 규수가 먼저 구덩이에 뛰어 내리니 동아리 가운데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함께 묻히더라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 온다. 그날 묻히던 그 찰나에 하늘이 천둥으로 합성하고 사흘을 안개로서 생무덤을 덮어 주더라고 전해 온다. 묻히던 순교자들이 한결같이 하늘에 외쳐대는 소리가 있었으니, "예수, 마리아!"라는 간구 였다, 허나 구경꾼들이 듣고 전하여 준 오늘까지의 동리 사람들 말로는 "여수머리"라 하여 여우 홀린 머리채로 죽어 갔다고 해서 이 숲정이를 "여숫골" 이라 부르고 있다.
◆ 무명 순교자 묘
서산 상홍리 묘 병인박해 시 해미 생매장 순교 현장을 목격하였던 이주필, 임인필, 박승익 등의 증언에 따라 1935년 서산 성당의 범 베드로 신부가 생매장지 일부를 발굴하여 순교자들의 유해 및 묵주, 십자가를 수습하여 서산군 음암면 상홍리 공소 뒷산에 안장하였었다. 1995년 순교자 대축일에 이를 다시 해미 성지로 이장하여 본래의 순교터(현 순교자 기념탑 앞)에 모셨다. 상홍리 순교자 묘소 자리에는 십자고상과 진토가 된 순교자 유해 일부를 모셔두고 있다.
■ 상홍리 ‘해미 순교자 묘’ 발굴과 이장 서산시 음암면 상홍리 산 105번지의 백씨 문중 묘역에 모셔져 있던 ‘병인박해 해미 순교자 묘’는 1995년 9월 18일에 파묘 및 순교자 유해를 원래 치명하셨던 해미로 옮기는 이장식이 있었다. 교구 사법부 대표 윤인규 신부를 비롯하여 다섯 명의 신부와 각 본당 수녀들 10여 명, 해당 본당 회장단과 상홍리 공소 교우등 30여 명이 참관하였다. 아침 7시 15분쯤 파묘 식을 거행하고, 포크레인으로 봉분을 파헤친 후 수작업으로 유해를 찾아 들어갔다. 형체가 분명한 약 50여 개의 뼈와 형체가 불분명한 50여 개의 뼈를 추려 낼 수 있었고, 약 200여 개의 치아를 따로 모을 수 있었다. 9월 19일 9시 40분경 교구 대표로 총대리 김병재 신부가 도착하여 파묘 경과를 보고받고 최종 확인을 하였다. 해미로의 이장 유골은 세 개의 자기 항아리에 모셨으며, 그중 하나의 항아리에는 진토만을 모셨다. 유해 가운데 형체가 분명한 뼈는 화학 처리하도록 해미 본당으로 직접 모시고, 불분명한 뼈는 즉시 약 200m 떨어진 상홍리 공소 강당으로 모셔 교우들이 교대로 참배하였다. 그런 다음 오전 10시에 서산 동문 본당으로 봉송하여 신자들이 철야로 참배한 후, 다음 날인 20일 오전 9시 30분경 이원무 신부가 본당 회장과 함께 유해를 해미 성지로 모시게 되었다. 파묘 장소에는 여러 부장품을 넣은 50cm 높이의 보통 옹기 그릇 하나와 진토를 담은 자기 항아리 하나를 모셨다. 부장품은 대형 나무 묵주 하나, 25cm 높이의 성모상 하나, 10cm 정도의 예수 그리스도상 하나, 그리고 ‘상홍리 순교자 묘역 조성까지의 내력’이란 제하의 글을 붓글씨로 쓴 전지 규격의 창호지를 담은 비닐 주머니 등이었다. 이렇게 해서 본래 순교하셨던 곳으로 다시 모시게 되었다.
■ 해미 순교자 묘 발굴과 바로 신부 서산 동문동 제6대 바로(Barraux, 1903~1946, 范 베드로) 신부는 1935년 해미면 조산리(현 해미순교 성지) 해미 하천변에 생매장되어 있던 병인 순교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묵주고상과 유골을 발견하여 수습하여 상홍리 백씨 문중의 묘에 안장하였다. 1930년 6월 29일 프랑스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고 1932년 8월 5일 서산 본당 신부로 부임하여 1937년에는 서산 성당을 신축하였다. 사목 활동에도 열심이었던 바로 신부는 어느 날 봉성체 중에 병환 중에 있는 교우가 영하지 못한 성체를 대신 영하고 결국 병을 얻어 선종하였다.
여섯 번째 간 곳
● 다 락 골
청양 다락골은 땀의 순교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와 그의 부친인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이 탄생한 유서 깊은 교우촌이자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이다. 병인박해 때 순교한 치명자의 묘소로 추정되는 30여 기의 묘가 이곳 다락골에 줄 무덤을 이 루고 있다. 청양에 복음이 전파되고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한국 교회 최초의 박해라 일컬어지는 신해박해(1791년) 직후였으며,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 신부의 집안이었다. 그리고 그 집안이 정착한 곳이 바로 다락골이었다. 여기에 천주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1791년이다.신해박해의 모진 서슬에 최양업 신부의 조부 최인주(崔仁柱)가 그의 어머니, 곧 내포의 사도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 1759~1801)의 누이를 모시고 피난해 들어오면서 교우촌이 시작되었다. 모자는 다락골로 들어와서 공토를 개간해 살림을 이어 갔는데 이때 그들이 개간했던 땅이 새터로서, 점점 이웃이 모여 들어옴에 따라 새로운 마을을 이루었던 것이다.다락골은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와 그의 부친인 최경환(崔京煥, 보명 永訥, 1805~1839, 프란치스코) 성인이 탄생한 유서 깊은 교우촌이자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이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고, 박해의 손길이 충청도 땅에도 거세게 몰아쳐 와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다. 이때 순교한 치명자의 묘소로 추정되는 30여 기의 묘가 이곳 다락골에 줄 무덤을 이루고 있다.이 무덤이 있는 산은 경주 최씨(최양업 신부 집안)의 문중 산으로 이 묘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홍주와 공주에서 순교한 교우들이라는 설과 해미나 갈매못에서 순교한 교우들이라는 설이 있다. 다만 최양업 신부의 집안에서 이들의 유해를 순교지로부터 옮겨서 이곳에 매장하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줄 무덤의 총수는 37기다. 성역화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방윤석 베르나르도 신부가 이 마을의 구전과 사료를 수집하여 현지 답사를 계속한 끝에 1981년에 줄 무덤이 한 군데가 아니고 세 군데임을 밝혀냈으며, 편의상 제1, 2, 3 줄 무덤으로 구분하였다. 제1 줄 무덤은 14기로서 세 단계로 모셔져 있다. 오기선 신부의 증언에는 17기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14기가 있는데 비신자인 최 씨들이 임자 없는 무덤이라 하여 이장하는 바람에 아깝게도 3기가 파묘 유실되었다.
제1 줄 무덤 서남쪽으로 밑으로 20m쯤 떨어진 지점에 10기의 제2 줄 무덤 있다. 제3 줄 무덤 제1 줄 무덤에서 100m 떨어진 능선 너머에 위치해 있는데 13기가 있다. 이렇게 이곳에 있는 무명 순교자의 무덤 수는 모두 37기가 된다. 그러나 각 무덤에 몇 구의 유해가 들어있는지 확인되지 않았지만 개발 당시에 무덤들이 100년이 넘었고 흙을 쌓지도 않았는데 유난히 봉분이 큰 것으로 보아 한 무덤 안에 여러 유해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 다락골의 교회사적 특성 내포교회사연구소에서 발간한 다락골 자료집(2009.12)에서는 다락골의 교회사적 특성을 몇 가지 제시하고 있다.
첫째, 다락골은 멀리는 신해박해(1791), 가까이는 신유박해(1801) 이후 형성된 교우촌으로 적어도 병인박해(1866) 초반기까지 지속된 공동체였다. 지금까지 다락골은 최양업 신부와 최경환 성인의 고향으로, 병인년 순교자들의 줄 무덤 있는 곳으로만 알려져 왔다. 이러한 면만 부각되다 보니 다락골 전체의 모습이 드러나지 못하고 있었다.
둘째, 다락골은 박해 중에도 비교적 안전했던 교우촌으로 교회재건운동과 기해박해 기간 중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805년에 순교한 최신덕(바오로)은 신태보(베드로) 등과 더불어 신유박해로 흩어진 교우들을 결집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기해박해(1839) 중에는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에게 피난처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이 다락골에서 마지막 편지와 사목서한을 남기고 최후의 미사를 거행한 장소가 되었다.
셋째, 다락골은 위치상 중간 지점에 있기에 박해기간 동안 한국 교회의 가교역할을 하였다. 다락골 교우촌은 규모가 크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나 큰 신앙공동체 사이의 왕래에 있어 거점이 되었다. 다락골은 서울, 경기, 내포(충청도 북서부), 전라도 북부 지역에 형성된 큰 신앙공동체의 중간에 위치하며 가교의 몫을 담당하였다. 금정 일대에 비교적 많은 신자들이 생겨나고, 최신덕이 교회재건운동에 참여하며, 모방과 샤스탕 신부의 피난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다락골이 여러 공동체의 중간지역에 위치해 있던 특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2번째
순례의 향기의 소감의 글은 내 개인 생각은 접어두고 순례지의 특징, 중요성, 순교자의 생애의 글을 중점으로 글을 써 보았다.
여기에 쓴 글과 사진들은 ‘한국의 성지와 사적지’ 및 ‘굿 뉴스 ’에서 따온 글임을 밝히면서 많은 ‘청주교구 사도성 야고보 순례단 ’ 회원님들의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글을 쓰려고 노력을 할 것 입니다.
2017. 2. 11. 대전 중반기 순례체험을 마치며
김 홍 숙 헤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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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두번째 대전 중반기 순례 후 소감을 올렸습니다.
순례하신 회원님이 다시한번 더 순교자님 영성을 회상할 수 기회를 주시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