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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가 되려면
디도서 1:5~9
사도 바울은 디도로 하여금 그레데섬에 세워진 교회를 잘 목회할 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디도가 그레데에서만 오래 머물면서 계속 사역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디도가 떠난 후에도 그레데섬에서 복음의 사역이 힘있게 이어지기 위해서 앞으로 디도가 떠난 후에도 그레데섬에서 복음의 사역을 할 유능한 지도자를 양성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5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하였습니다.
그레데섬은 작지 않은 섬이었기 때문에 거기에도 도시가 있었을 것입니다. 각 도시마다 거기서 복음 사역을 할 수 있는 지도자를 세우려 하는 것이 말씀의 배경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디도에게 주는 권면을 통해서 나타난 참된 지도자상은 인격과 기능의 균형이 잡힌 사람이어야만 했습니다. 특별히 초대 교회에서는 영적인 지도자를 부를 때 사용했던 호칭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장로와 감독이라는 호칭이었습니다. 장로와 감독은 사실 별개의 직분에 대한 호칭이 아니고 초대 교회에서는 똑같은 사람을 처지와 상황에 따라 장로라고도 불렀고 감독이라고도 했습니다. 이것을 소위 ‘서로 교환될 수 있는 개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장로가 곧 감독이고, 감독이 곧 장로라는 말입니다. 다만 장로는 인격적인 호칭이고 감독은 기능적인 호칭이라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장로를 헬라어로는 ‘ΠρεϬβυтὲρουѕ’라고 하는데 영어에서는‘Presbyterian’로 장로교를 뜻하는 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의 본래의 뜻은 나이든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 나라 말에서도 장로는 길 장(長), 늙은 로(老) 하지 않습니까. 물론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가 아니라 인격적인 성숙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본래 이 장로라는 호칭은 구약시대의 한 성읍의 지도자를 그렇게 불렀던 데서 유래했습니다. 장로는 성문 앞에 앉아서 백성들이 문제를 가지고 나올 때 그 시비를 가려주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신임도였습니다. 시시비비의 문제에 걸린 사람들이 장로에게 가서 해결을 구할 때에는 두 사람이 그 장로를 신임할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장로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은 사람들의 신임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유대인들이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 산헤드린공의회를 조직했을 때 이 공의회 의원들을 장로라고 불렀습니다. 요샛말로 말하면 국회의원을 말합니다. 산헤드린공의회의 의원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자격을 갖추어야 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백성들에게 신임을 받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장로라는 말은 철저하게 인격적인 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정말 인격적인 자질이 갖추어진 사람을 장로님이라고 부를 때 우리 마음이 얼마나 푸근해집니까? 그와 반대로 자질이 부족한 사람에게 장로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어색한 일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사실 ‘목사’라는 칭호가 없었습니다. 그때에는 사회적인 지도자와 영적인 지도자를 함께 장로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장로가 인격적인 측면이 강조된 단어라고 하면 감독은 기능적인 측면이 강조된 단어입니다. 사실 장로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적인 배경에서 나온 단어이고 감독이라는 말은 헬라적인 요소를 가진 단어입니다.
감독을 헬라어로 ‘ὲπіσκοποʂ’라고 합니다. 신교에 여러 교파가 있지만 ‘Episcopal’이라는 교파가 있는데 이것은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Anglican church)’가 미국에서 불려지는 이름입니다. 그리고 성공회에는 소위 ‘Bishop’이 있는데 이것을 감독이라고 합니다.
감독은 교회의 어떤 계급이 아닌 기능을 지칭한 칭호입니다.
감독, Bishop에는 세 가지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감독은 먼저 ‘돌본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감시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돌보는데 잘못 돌보지 않도록 감시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감독은 ‘다스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영어에서 이런 세 가지 의미를 가진 말이 있는데 ‘oversee’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위에서부터 잘 본다는 뜻이 있는 단어입니다.
결국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사역을 수행하고 또 그것을 감독하고 교정하며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는 일을 맡았던 사람을 감독이라 불렀습니다.
따라서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은 기술입니다. “어떻게 돌볼 것인가,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하는 것이 감독으로서 당면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이미 오래 전부터 감독의 가장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는 옳은 방법과 좋은 기술을 가지고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었습니다.
감리교를 영어로 ‘Methodist Church’라고 하는데 이 말은 방법이라는 뜻을 가진 ‘method’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감리교회에는 감독이라는 직제가 있습니다.
똑같은 사람인데도 인격적인 존경에서 부를 때에는 장로라 했고, 그가 행하는 기능적인 사역에 초점을 맞추어 부를 때에는 감독이라고 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에서 영적인 지도자를 부를 때 쓰던 두 가지 개념 속에서 우리는 지도자의 특성에 대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두 가지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인격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능적인 것입니다.
사람됨은 조금 덜 되었는데 기능만 잘 수행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인격은 잘 갖추었는데 기능이 좀 부족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지향하는 영적 지도자는 인격과 기능을 겸비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비단 목사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지도자의 위치에서 사역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이 두 가지를 같이 요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 신임받을 만한 인격으로 성숙해가고 있는가, 그리고 내 인격에 합당하도록 내게 주어진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기능을 내가 갖추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고 또한 이 말씀을 바로 가르칠 수 있는가.
오늘 주신 말씀 6-9절에 지도자의 자질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지도자의 자질로서 순결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오늘 주신 말씀에서는 순결이란 말이 직접 언급되지 않았지만 바울이 말한 여러 말씀을 포괄할 수 있는 말이 결국은 순결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드리는 순결은 영어의 ‘purity’와는 조금 다른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보다는 ‘integrity’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이 이 단어는 좀 번역하기가 어려운 단어입니다. 순결할 뿐 아니라 그 순결함 때문에 신임을 받을 수 있으며 자기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덕, 이런 것을 가리킬 때 우리는 ‘integrity’라는 단어를 씁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편의상 순결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렇습니다.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은 한 마디로 순결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는 지도자로서 구비해야 할 순결을 세 가지 방면으로 언급했는데 그 하나가 관계적인 순결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과의 관계에서 요청되는 덕목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6절에 “책망할 것이 없고”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책망할 것이 없다”는 말을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혹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결정적으로 책망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개인 생활에서 전혀 책망할 것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치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옛말에도 ‘인유무과’라고 했습니다. 사람치고 허물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털어 보면 먼지 안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6절에서 “책망할 것이 없고” 한 말은 우리에게 완전을 요구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면 대인관계에서 어떤 순결을 말합니까?
먼저는 불신자와의 관계에서 순결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디도서와 더불어 목회서신에 속하는 디모데전서에서도 교회 지도자의 자질에 대해서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그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가령 디모데전서 3장 7절에 보면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무슨 말입니까? 교회의 지도자는 교회 밖의 사람에게도 “저 분은 좋은 분이야.” 하는 증거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직장 동료들에게, 우리가 사는 동네 이웃에게 이런 증거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에 그와 반대라면 그래서 “어떻게 저런 사람이 교회에서 목사, 권사, 집사가 되어 일한다고 하지? 정말 의심스러워.” 한다면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꼭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어떤 증거를 얻고 있습니까?
그리고 부부관계에서 순결해야 합니다.
“한 아내의 남편이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은 부부관계에서도 순결을 강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한 아내의 남편’이란 말을 ‘한 여인의 남편’이란 말로 번역하는 것이 원문과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성경학자는 ‘한 아내의 남편이며’라는 말을 ‘한 여자의 남자가 되고’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주장합니다.
‘한 여인만의 남자’라고 번역하면 ‘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말보다 어감이 더 강하게 들립니다.
뿐만 아니라 자녀와의 관계에서 순결해야 합니다.
“방탕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했습니다.
여기서 ‘믿는 자녀’란 예수 믿고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그런 차원에서 머물지 않습니다. 6절 말씀에 만일에 자녀가 믿음의 자녀가 아니라면 그는 방탕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나 자기의 삶에서 질서를 상실하고 불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삶으로 자기 자녀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사람이 한 교회 안에서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영적으로 선한 영향을 끼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영적인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에게는 자녀를 믿음으로 양육하는 것이 하나의 심각한 과제로 대두됩니다.
오늘 주신 말씀 7, 8절은 개인적인 순결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지도자가 되려면 개인적인 열한 가지의 순결이 있어야 합니다.
1. 하나님의 청지기로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청지기로서 순결해야 한다는 뜻은 금전 문제에서 깨끗해야 함을 말씀합니다. 물론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청지기로서의 삶의 아름다움이 있어야 합니다. 자주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이면서도 청지기인 것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선한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2. 제 고집대로 하지 않습니다.
고집이 센 사람에게 제일 큰 문제는 하나님의 뜻 앞에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의지가 너무 강하다 보면 하나님의 뜻 앞에 순종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주님의 뜻 앞에 순종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영적 지도자로서는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집이 센 사람은 영적 지도자의 길을 걸으려는 생각을 포기해야 합니다. 제 고집이 꺾이고 자아가 깨어지지 않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제가 어릴 때 시골서 자라면서 소를 키웠습니다. 지금은 경운기가 있고 트럭이 있어서 그런 형편을 잘 모릅니다만 그때는 시골에서 밭을 갈고 짐을 나르는 것을 소가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힘은 아주 센데 고집이 센 소가 있었습니다. 주인의 말을 잘 듣지 않고 어떤 때는 주인을 받아버리는 사고까지 일으켰습니다. 그런 소는 죽도록 얻어맞았습니다. 그래서 순종하고 들어오면 좋지만 종래 자기 고집 부리면 어디로 가는지 아십니까? 도살장으로 갑니다. 짐승을 부릴 때도 주인의 뜻을 잘 따르는 짐승이 주인의 고임을 받고 부림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람을 쓰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고집대로 하지 않는 사람을 쓰십니다.
3. 급히 분내지 않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20절에는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이 문장의 낱말들은 대칭으로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노할 때 본질적으로 분노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지배를 받을 수가 없게 되어 하나님의 뜻과 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분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의 쓰임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때 분한 감정이 일어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분을 오래 품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했습니다.
4. 술을 즐기지 않아야 합니다.
이 말은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술은 우리의 지성을 마비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술을 마시면 제정신이 혼미해집니다. 동물적인 본능만 남아 있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술을 마시면 짐승처럼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성경에도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했습니다. 술의 지배를 받을 때 우리는 성령의 지배를 받을 수 없습니다.
5. 구타하지 않아야 합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성격이 다릅니다만 영적인 지도자라는 사람들 가운데도 주먹이 먼저 앞서는 사람이 간혹 있었습니다. 전에 베드로가 성령을 충만히 받기 전에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화가 나면 참지 못하는 불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선생님을 체포하려 할 때 베드로의 마음은 분한 것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옆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서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잘랐다고 했습니다. 어떤 이의 말대로 사실 베드로는 귀를 자르려 한 것이 아니라 머리 중심을 쳐서 갈라 죽이려고 했는데 말고가 재빨리 피하는 바람에 귀만 잘렸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의 손에 총이 있었으면 여지없이 쏘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불행한 사고가 많습니다. 사고를 낸 당사자들은 자기에게 그런 약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이 고쳐지기 전에는 지도자의 길을 걷지 않았어야 했을 것입니다.
6.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않아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에서는 바울이 내세운 가장 중요한 경건의 조건으로서 지족함을 강조합니다. 지족의 반대가 무엇입니까? 탐심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지도자의 경건을 해치는 가장 무서운 것이 이를 탐하는 것이라고 경계했습니다. 이를 탐하는 데서 모든 악이 파생됩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런 저런 사고가 왜 일어납니까? 따지고보면 이를 탐하는 데서 생기는 것 아닙니까? 얼마 전 보도에 의하면 그동안의 건설공사가 낙찰은 100억인데 공사비는 35억으로 했다고 합니다. 100억으로 공사를 해야 정상적인 공사가 될 것인데 35억 가지고 공사를 하니 부실공사가 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나머지 65억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 나눠 먹었지요. 더러운 이를 탐하다 보니 더러운 일만 생기는 것이 오늘 우리 사회입니다.
7. 나그네를 잘 대접해야 합니다.
그 당시에는 오늘과 같은 숙박시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지도자는 항상 자기집 문을 열어 놓고 그들을 대접해야 했습니다. 초대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덕목 가운데 하나가 나그네를 대접할 줄 아는 것이 강조된 것입니다.
이것은 원리적인 면에서 지금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역한다는 것은 결국 사람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8. 선을 좋아해야 합니다.
선이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선을 좋아한다는 말은 주님의 뜻을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도자가 되려면 주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모든 일에 적극적 헌신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9. 근신해야 합니다.
근신이란 말에는 통제한다는 뜻도 있지만, 더 중요한 뜻은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주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필요에 대하여 민감한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사역을 한다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것인데 그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모르면 사역을 바로 수행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10. 의롭고 거룩해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의 지도자가 의롭고 거룩해야 된다는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11. 절제해야 합니다.
지도자는 자신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다스릴 줄 모르면 교회를 다스릴 수가 없지 않겠어요?
끝으로, 9절 말씀은 교리적인 순결을 강조합니다.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이것은 목회자나 교회 지도자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다. 지도자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말하면서, 바울은 바른 교훈으로 교인들을 권면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바른 교훈, 건전한 교리는 정말 중요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바른 교훈이라는 말씀을 단순히 내가 믿어야 할 올바른 진리를 알아야 한다는 그런 차원에서 강조한 것이 아니라 그 교훈에 의해서 지배받고 있는 삶을 강조한 것입니다.
왜냐 하면 영적 지도자는 말씀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권면해야 할 사람인데 자기 자신의 삶 속에서 진리의 요소를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면, 그가 아무리 소리 높여 말씀을 가르쳐도 그 말씀에 권위가 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책망하려면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삶에 떳떳하지 못하면 아마도 그는 책망하기를 포기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아니, 다른 사람을 책망한다 해도 권위가 안 설 것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어떤 사역의 자리에서든 그 메시지가 진정 권위있는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말씀이 내 삶을 지배하는 교리적인 순결이 강조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목사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누구나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려면 영적 지도자의 자리에 서야 한다고 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목사만이 지도자는 아닙니다. 영적으로 장성한 사람은 모두 다른 성도들을 돌보고 양육하는 지도자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한 교회가 건강하다는 것은 그 교회에 얼마나 많은 지도자들이 설 수 있느냐 하는 데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은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언제까지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은 끼치지 못하고 영향을 받으며 살겠습니까?
“하나님, 저로 하여금 신앙생활의 연륜만 높아가는 자리에 이르지 말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격적인 존경과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지도자가 되게 해 주세요. 그래서 주께서 맡기신 영혼들을 잘 돌보고 다스리고 감독해서 주님의 사역의 도구로 사용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