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4화 <요지경 산문> 우리 엄마 3장 미완성
채울 수 없기에 미완성이겠지. 미완성이니까 지금이라도 채워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언제 끝날 줄 모르는 미완성의 삶, 우리 엄마 인생, 아니 영원히 미완성인 채로 남겨질 우리 엄마의 삶.
< 엄마의 귀향 >
수유리 집에서 엄마 아버지를 모시고 살다가 내가 직장을 대원고등학교로 옮기는 바람에 중곡동 집으로 이사를 왔다. 6개월쯤 지나서 등기가 안 된 집을 내가 산 것을 알았다. 건축업자와 등기부상의 주인이 다르다. 당연히 건축업자가 주인인줄 알았는데 아니다. 하여간 소송에 휘말려 우리는 이사 1년 반 만에 내쫓기고 말았다. 완전히 알거지가 되었다. 급히 돈을 융통해 우선 전세를 들어갔다. 아버지는 수유리 집에서 돌아가시고 엄마가 수유리와 중곡동 집에서 아이들을 잘 보살펴 주셨는데 더 힘드시게 되었다. 그때 큰형님과 형수님께서 엄마를 모시고 가겠다고 오셔서 같이 가셨다. 여러 가지 경황도 없었고 엄마에게 이야기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는데 가신 것이다. 형님으로서는 분가 후 처음으로 엄마를 모시게 된 것이다. 엄마는 막내아들네 우리집 등등으로 전전하다가 역시나 맏아들 큰형님네로 가셨다. 어쩌면 이제야 제대로 자리를 잡으신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역시나 한국의 순리는 맏아들 우선,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 후로는 아버지 제사와 구정 추석 차례 또 어머니 생일 모임 등 모든 행사가 다시 형님네에서 치러졌다. 형님도 언젠가는 엄마를 모시고 싶으셨겠지만 무슨 계기가 없었을 뿐이었으리라.
< 재봉틀 >
우리 엄마는 없는 일도 만들어 하셨다. 재봉틀 바느질이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우리가 집에 오기 전에 외출을 하시면 밥상을 차려놓고 상보로 밥상을 덮어놓았다. 그 상보도 조각을 잇대어 만든 상보이다. 여러 가지 천을 네모나게 작게 만들어 그 조각을 이어서 덮개를 만드셨다. 재봉틀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지만 그런 일이 자주 있었다. 1950년대에는 검은 색 가는 전화선으로 만든 장바구니가 있었다. 가는 구리철사를 좀 단단한 고무 같은 것으로 싼 것이다. 튼튼하고 질기기는 하지만 구리철사가 속에 있어 역시나 무겁다. 그래서 엄마는 천으로 만든 보자기를 아니면 손잡이가 있는 가방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시장 가방이다.
재봉틀은 전기용이 아니고 손으로 돌리는 것이다. 물론 발틀도 나중에 나오기는 했다. 한 손으로는 재봉틀을 돌리고 한 손으로는 천을 붙잡아 줄을 맞춰 바늘 밑으로 밀어 넣어야 한다. 그래서 자주 중단하면서 재봉을 하셨다. 재봉틀에 중요한 것은 바늘이다. 재봉틀용 바늘이다. 아무데서나 쉽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재봉틀용 바늘을 귀하게 여기는 이유가 파는 곳이 많지 않아서이다. 그런데도 나는 자주 재봉틀을 사용하면서 바늘을 많이 부러뜨렸다. 재봉틀은 밑실이 있어야 한다. 아래에 밑실 넣는 작은 통이 있다. 또 그 통을 움직이게 하면서도 빠지지 않게 하는 장치인 북이 있다. 작은 바퀴에 밑실을 감아 넣는다. 실을 바퀴에 몇 번 감고 송곳에 끼운 후 재봉틀 휠(재봉틀이 일정한 속도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붙인 작고 둥근 쇠뭉치)에 대고 돌리면 돌아가면서 실이 감긴다. 그런 것이 재미있었다.
또 바느질 간격을 촘촘히 또는 느슨하게 조절할 수도 있다.
지금도 사고 싶은 것이 있다면 재봉틀이다. 딱 짓고 싶은 옷이나 고칠 옷은 없지만 있으면 무엇이든 만들고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또 요사이 나온 재봉틀은 전기용이니 두 손으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 편할 것 같다.
< 요리, 장 담그기 >
누구나 엄마 밥과 반찬이 제일 맛있다. 태어나서 엄마 밥을 먹고 자랐으니 그 밥과 반찬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리라. 나도 우리 엄마 밥이 제일 맛있었다. 우리 집도 장을 담가 먹었다. 나중에는 간장을 사 먹었지만 사먹는 간장은 왜간장, 집에서 담든 간장은 조선간장이라고 했다. 왜간장은 조선간장보다 덜 짜고 단 맛이 난다. 처음에는 시중에서 사먹지 않고 직접 왜간장 공장에서 사다 먹었다. 내가 자전거를 타고 가서 사왔는데 병에 담아주면서 마지막에 무슨 가루를 손가락으로 집어 병위에서 비벼 넣는다. 그것이 무엇인지 왜 그때 안 물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내가 좀 확실하지 못했나보다. 가을에 우선 흰콩을 사다가 씻고 푹 삶아서 절구에 넣고 조금 찧은 후 꺼내어 네모로 덩어리를 만들어 며칠 말린 후 짚으로 엮어 광에다 매 단다. 겨우내 발효가 되어 푸른곰팡이가 피면 털어내고 봄에 날을 잡아 소금물에 메주를 넣고 간장을 만든다. 이때 붉은 고추 숯 등을 넣어 다른 이물질이 생기지 않도록 한다. 가을에 메주를 다 꺼낸 간장은 일단 한 번 다시 끓여서 독에 붓는다. 그러면 그것은 간장이다. 그리고 간장에 넣었던 메주를 꺼내어 다른 독에 넣으면 된장이 된다.
봄에 콩을 삶으면 그 콩을 얻어먹는다. 많이는 주지 않는다. 또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나서 화장실을 자꾸 드나들어야한다. 삶은 콩도 훌륭한 간식이었다.
< 빵 >
밀가루가 쌀보다는 훨씬 싸다. 한 포대(布袋)씩 사다놓고 처음에는 막걸리 술을 조금씩 넣기도 했지만 우리 집은 술을 거의 넣지 않았다. 집에서는 술 먹는 사람이 없어서이다. 소다를 넣었는데 처음에는 골고루 퍼지지 않으면 몰린 곳이 노랗게 변한다. 소다가 위장 장애를 일으킨다고 하여 다음에는 이스트라는 효소를 넣었다. 아주 작은 병에 담긴 좁쌀모양이다. 물에 넣어서 약간 발효를 시킨 후 밀가루에 넣고 반죽을 했다. 부풀기는 잘 부푼다. 먹을 때에는 버터를 조금씩 발라 먹었다. 버터가 비싸서 그런지 다음에는 마가린을 발라 먹었다. 버터는 우유로 만들고 마가린은 식물성 기름으로 만든다. 그때 배운 단위가 450 그램(g 정확히는 453.6 g, 1 파운드)이다. 서양에서 수입한 기계가 1파운드로 계량되기 때문이었으리라. 그 빵을 한 참 먹었다. 더운 여름이면 마당에 놓은 평상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양이 부족하면 빵으로 더 보충하였다.
차를 타고 다니면서 국도변을 지나다보면 빵을 만들어 파는 장수가 있다. 그때 빠지지 않고 파는 것이 술빵이다. 가끔씩 향수에 젖어 사먹는다. 역시나 막걸리 냄새가 나서 좋다.
< 도시락 >
도시락은 국민학교부터 대학까지 싸들고 다녔다. 대학에서 매일 점심을 사먹으면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기 때문이다. 대학에서는 그래서 국을 따로 팔기도 했지만 그것도 잘 안 사먹었다. 도시락에는 반찬이 거의 정해져있다. 밥을 많이 담기 위해서는 반찬이 적어야한다. 그것이 바로 짠지 같은 짠 반찬이다. 물릴 정도로 많이 먹은 반찬은 오이장아찌와 무장아찌이다. 작게 썰어서 참기름을 넣고 깨소금을 뿌려 무치는 것이 전부이다.
좀 색다른 반찬이 생선묵이다. 전에 없던 반찬이다. 우리는 어묵공장으로 직접 사러간다. 내가 자전거를 타고 가서 사온다. 사오는 어묵은 찢어져 상품 가치가 없는 것을 따로 모았다가 팔아 사오는 것이다. 파는 양은 같은데 값은 훨씬 헐하다. 그러면 엄마는 파를 넣어 볶은 후 간장으로 졸인다. 경복 다닐 때에도 도시락에 반찬으로 많이 싸갔다. 반찬 한 구석에 고추장을 넣어 가면 또 거기에 찍어먹는 맛도 좋았다. 그래서 지금도 어묵조림을 자주 해 먹는 편이다. 아니면 그냥 물에 데쳐서 초간장에 찍어 먹기도 한다. 아주 간단한 초간편식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딸들도 다 어묵을 잘 사 먹는다. 아니 맛있는 집을 찾아다니면서 먹는다. 사올 때면 이천 원 단위별로 만 원어치를 사다놓고 먹는다.
어묵은 역시나 겨울에 길에서 사먹는 것이 제격이다. 따끈따끈한 국물에 잘 끓여진 어묵을 긴 꼬챙이에서 빼어먹는 맛이 제일 좋다. 물론 짜지 않은 간장을 찍어서 먹으면 맛이 더욱 그만이다.
회사에 잠시 다니면서 잘 사먹은 점심은 오뎅 백반(어묵 백반)이다. 어묵이 주를 이루지만 색다른 어묵도 조금 있고 유부에 당면을 잔뜩 넣고 대[竹]꼬치를 꿰어 푹 끓인 것도 있고 또 밥 대신 유부초밥이 두어 개 나오는 것에 식초에 담근 마늘 같은 것도 곁들여서 먹으면 맛이 좋았다.
또 다른 고추장은 돼지고기를 많이 갈아서 고추장에 넣고 볶은 것이다. 매콤한 고추장에 고기가루가 들어가 있어서 별미였다. 물론 참기름 등을 넣어서 더 고소하였다.
< 영어 연설 >
엄마는 꿈 이야기를 가끔 하셨다. 꿈속에서는 많은 대중 앞에서 연설을 하셨단다. 그것도 우리말이 아니라 영어로 하셨단다. 한 두 마디 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하셨단다. 그러면 우리는 한쪽 귀로 듣고 그만 한쪽 귀로 흘러버렸다.
‘아! 왜 그랬을까!’ 지금 혼자서 장탄식을 한다.
‘엄마, 정말야?’ 그러면서 함께 들어주고 손뼉이라도 치면서 잘했다고 동의, 동조라도 해야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후회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엄마도 무엇인가 사회를 향해 또 집안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으리라. 다만 그런 기회도 없었고 또 항변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마음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또 우리는 엄마가 이름도 읽지 못하면서 하는 선입견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엄마를 인정하지 않은 우리를 보고 엄마는 얼마나 섭섭하게 여기셨을까!
언젠가 한 번 선거가 끝나고 나서 나는 엄마에게 누구를 찍었느냐고 또는 몇 번 막대기에 투표를 했느냐고 물었다. 엄마가 한 대답은 아무렇게나 찍었다고 하셨다. 누구를 찍고 싶지도 않았고 사회에 대한 불만이 많아 엉뚱한 곳에 일부러 기표를 한 것이었다. ‘아, 그렇구나!’ 그것은 엄마가 할 수 있는 사회와 가정에 대한 무언의 시위, 반항, 항변이 아니었을까.
그 당시에 많았던 무효표는 기표를 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사회에 대한 불만을 투표용지에 항의하여 표시하였던 것이라고 엄마를 이해하게 되었다.
< 다듬잇돌 >
그때는 다듬잇돌이 집집마다 있었나보다. 저녁이면 다듬이소리가 들리곤 했단다. 화학섬유가 없어 대부분 목화로 만든 면직물과 누에에서 나온 견직물이 있었다. 나중에 인조견이 나온 것을 보면 무슨 화학사가 나온 것은 틀림이 없다.
면직물은 구김이 가고 뻣뻣하여서 다듬이질을 하였다. 혼자서도 하지만 둘이 마주앉아 하기도 한다. 나는 어려서 할 기회가 없었지만 우리엄마는 작은 형하고도 짝을 이루어 다듬이질을 많이 하셨다. 말과 글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이지만 장단은 정말 듣기 좋았다. 빠르고 느린 박자의 장단과 세게 치기와 약하게 치기의 음 높이가 어울리도록 치는 소리는 들을 만 했다. 둘이 두드리면서 합주도 하고 이중주도 한다. 또 엇갈리면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 다듬이소리가 발전된 것이 「난타 공연」이리라 생각된다.
재작년 겨울 1월 중순에 양평 용문사로 답사를 나갔었다. 몹시 추웠다. 용문사까지 올라가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한 문우가 약수터에서 물을 받더니 물 떨어지는 소리를 동영상으로 찍는다. 나중에 그 소리를 들어보니 계속 물 떨어지는 소리가 다정하게 들렸다. 절의 정적 속에 의미 없는 물소리가 어쩌면 많은 이야기를 하는 듯 하였다. 물소리도 듣기 나름이다.
< 사진 촬영 >
1960년대 초반에 나 바로 위의 형이 흑백 사진기를 장만하여 필름을 집에서 현상 인화까지 하였다. 그래서 집에서도 사진을 많이 찍었다. 어머니에게 사진을 찍자고 하시면 거절하시는 일이 없었다. 물론 사진을 인화해서 갖다 드리면 좋아하셨다. 엄마는 이왕이면 화장을 하고 찍자고 하신 적이 없다. 물론 화장품이 따로 없기도 했지만 있는 화장품으로 해드릴 수도 있었을 덴데 하는 아쉬움이 많다. 나중에 칼라 사진이 나왔는데도 화장을 하자고 하는 말을 왜 안했을까? 딸들이라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사실 화장을 하고 나면 화장품 냄새가 음식에서 날까봐 엄청 신경을 쓸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시골 대청마루에 걸렸던 가족사진 문화가 이제는 완전히 없어져버렸다. 우리집에도 엄마 아버지 사진 한 장 집에 걸려있지 않다.
< 돌절구 >
집에 절구가 있었다. 행당동 집에까지 가지고 갔지만 그 다음 집부터는 없어졌다. 김치를 자주 담가 먹는데 고추를 찧어야한다. 물론 없으면 도마 위에 고추를 놓고 식칼 손잡이로 찧을 수는 있지만 조금 많이 찧으려면 절구가 편했다. 엄마로서는 절구가 요리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지금은 전기 믹서로 다 할 수 있으니 없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 찹쌀떡을 찧을 수도 있다. 떡판과 떡메가 있으면 칠 수도 있지만 집에는 없었다. 자주 떡을 해 먹지는 않아서 활용도가 높지는 않았다.
< 엄마의 식성 >
엄마는 쇠고기와 돼지고기는 먹었지만 생선은 거의 먹지 않으셨다. 조기와 명태만 잡수셨다. 아버지가 천렵을 좋아해 냇가에서 잡아온 물고기도 전혀 먹지 않았다. 비린내를 엄청 싫어하셨다. 조기와 몀태 동태도 엄마가 먹을 만큼 남겨두지 않고 우리를 모두 주셨을 것이다. 또 북어도 국을 끓이거나 구어도 살은 우리를 주시고 대가리만 잡수셨을 것 같다.
< 화로>
화로도 꽤 오랫동안 가지고 다녔다. 자기를 만드는 흙으로 빚은 높이 40cm 지름 50 cm 정도의 원형화로이다. 겉이 매끄럽고 자기 같다. 모양도 채색도 넣은 것이다. 그런데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철사를 ㄷ 자로 구멍을 내고 꿰맸다. 안에 재를 2/3 정도 많이 넣었다. 불을 붙인 숯을 넣는다. 그리고는 재로 덮는다. 그러면 빨리 삭지 않고 오래 간다. 중학동 집 2층에서 사용했었다. 일식 다다미방이라 겨울에는 난로로만 난방을 하였다. 숯을 넣고는 꼭 굵은 소금을 뿌렸다. 냄새 제거와 일산화탄소 중독 방지용이었다고 생각된다.
작은 무쇠화로가 하나 더 있다. 숯 저장방법은 같으나 이것은 엄마가 바느질을 하면서 인두를 달구었다가 사용하는 것이었다. 옷감을 접어서 박음질을 하기 전에 인두로 지지면 잘 접어진다. 인두가 너무 뜨거워지면 물을 갖다놓고 식혀서 사용하였다. 인두는 작은 삼각형 모양의 쇠로 앞부분은 얇지만 곧 두꺼워 열 보존 시간이 길어야한다. 또 집안에서 공기가 건조해지는 것을 방지하려고 주전자에 물을 담고 올려놓기도 하였다. 화로용 주전자는 완전 구리제품으로 열전도율이 높아 쉽게 물이 데워진다. 두 화로에 쇠 젓가락이 있다. 숯불을 열거나 재를 덮을 때 사용한다. 두 젓가락 위에는 작은 원형 고리로 서로 연결되어있다. 물론 화로에는 삼발이가 있어 주전자에 넣은 물을 데울 때에 사용된다.
< 다리미 >
전기다리미 나오기 전에는 숯다리미이다. 둥근 원형과 작은 보트형의 주물 쇠 다리미가 있다. 원형은 지름 15cm에 높이 8cm 정도의 접시 모양이다. 주로 이불 요 등 넓은 천이나 치마 같은 것을 다렸다. 이럴 때에는 누군가가 다릴 옷이나 천을 엄마 맞은편에 앉아서 옷감을 붙들어 주어야 할 수 있다. 바닥에 놓고 다리는 것이 아니어서 다리미가 움직일 때마다 옷감 아래에서 나오는 열기가 훅하고 얼굴로 올라왔다. 물론 엄마한데도 가지만 다리미가 나에게로 가까이 오면 나에게로 열기가 올라오는 것이다. 작은 옷들은 보트 배 모양으로 숯을 넣고 뚜껑을 덮어 위에 손잡이가 있는 다리미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바닥에 놓고 다리는 것이라 열기가 사람에게 올라오는 것은 적었다. 다리미가 너무 뜨거우면 옷감이 열기에 상하니까 다른 헝겊으로 옷을 덮고 다리미질을 한다.
< 상청(喪廳) >
집안 어르신이 돌아가시면 장례를 치르고 나서 대청마루에 상청을 차린다. 돌아가신 분의 혼백이나 신주를 모셔놓는 곳이다. 대개 뒤주를 가운데에 놓고 사방을 흰 광목으로 싼다. 물론 3면은 막혀 있지만 앞쪽은 양쪽으로 열린다. 그곳에 죽은 이의 혼백과 신주(죽은 사람의 위패. 대개 밤나무로 만드는데, 길이는 여덟 치, 폭은 두 치가량이고, 위는 둥글고 아래는 모지게 생겼다.)를 모신다. 그리고 음력 초하루와 보름이면 상청에 메(제사 때 신위(神位) 앞에 놓는 밥)와 숙랭(물의 높임말)을 올린다. 올린 후 그곳에 빈 놋그릇을 놓고 젓가락으로 세 번 울리는 것이다. 그리고 30분쯤 지나서 메와 숭냉을 거둔다. 우리 아버지는 차남이라 우리 엄마가 직접 올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제사는 큰아버지 댁에서 지냈다. 추석과 구정 때 가면 그런 의식이 있었다. 지방을 쓰고 차례가 끝나면 태워버리는 ‘소지(燒紙) (민속: 부정(不淨)을 없애고 신에게 소원을 빌기 위하여 흰 종이를 태워 공중으로 올리는 일. 또는 그런 종이.)’를 한다.
지금도 초상 때 베로 만든 상복을 입는 경우를 종종 보기는 하지만 전에는 거의 전부 상복을 입었다. 장례절차도 엄격하고 정해진 것이 무척 많고 복잡하다
내가 아무리 글을 쓰고 애써도 돌아가신 엄마는 돌아오지 않는다. 내가 할 일도 더 이상 없다. 하지만 아직도 내 가슴은 여전히 허전하다. 내 마음을 위로하가 위해서 나는 무엇인가를 자꾸 알려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은 엄마에게 글을 읽고 쓰게 하는 신령이 내려지기를 하늘에 이야기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이렇게 애달파하고 안타깝다. 무엇을 채워도 미완성이겠지만 한글 읽기, 하나만이라고 보태고 다듬어 드리고 싶은 마음이 정말 간절하다.
형제끼리도 싸울 때가 있으면 엄마는 씩씩거리는 나에게 와서 넌지시 “지는 게 이기는 거야!”라고 하신다. 전혀 수긍 할 수가 없었다. 지는 것은 지는 것이라고 생각될 뿐이었다.
무엇인가 나를 달래주고 싶으셨지만 마땅한 이야기가 없어 그저 깊으신 마음으로 나를 보살펴주시려고 하신 이야기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덕(德)이 있으면 외롭지 않다’는 말씀이셨을 것이다.
역시나 치사랑은 어렵다는 것을 나 스스로도 알아야한다.
나 역시도 아직 미완성(未完成)이니까.
“엄마! 엄마~아! 엄마~아~앙~앙~!”
|
첫댓글 재봉틀, 장담그기, 빵, 도시락, 다듬잇돌, 돌절구, 화로, 숯다리미, 인두...엄마와 관련된, 지금은 잊혀진 추억의 물건들 이네요. 우리집의 경우 싱거미싱은 아내가 물려받아 애지중지 지금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민형 덕분에 엄마얼굴과 추억의 물건들이 오버랩 됩니다.
잊혀지지 않는 엄마의 얼굴, 그 얼굴을 그리며 평생 살겠지요. 잊을래야 잊을 수 없어 울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썼던 것 입니다. 김 형네는 재봉틀이 남았다니 잘 보관하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