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이다. 893년(신라 진성여왕 7) 도선(道詵)이 교룡산의 강한 기를 누르려고 창건하여 창건 초기에는 대곡암(大谷庵)이라 불렀다. 1597년(조선 선조 30) 불에 탔다고 하며 이후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조선 중기에 폐사된 뒤 작은 암자로 있다가 조선 후기에 중창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후 다시 폐사로 버려져 있던 것을 1938년 박경찬(朴敬贊)과 그의 부인 황(黃)씨가 중건하였다. 건물로는 극락전과 칠성각·요사채 등이 있다. 이 중 극락전은 1984년 4월 1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48호로 지정된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건물로,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모시고 불상 뒤에 후불탱화와 신중탱화·지장탱화가 걸려 있다.
유물로는 철불좌상과 동종·석불좌상이 있다. 대복사철불좌상은 높이 103cm로, 1973년 6월 23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었다. 결가부좌를 하고 있으며 무릎 앞쪽 바닥에 철물이 흐르던 자국이 남아 있다. 대복사동종은 높이 99cm로, 1973년 6월 23일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었다. 상부에 55개의 작은 불상들이 뾰족한 테두리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독특하다. 하단에 음각되어 있는 명문에 따르면, 1635년(조선 인조 13)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복사 입구
대복사 전경
대복사 전설
조선 철종 때 남원에 살던 대복(大福)이라는 사람의 집에 한 비구니가 찾아와 그의 아내에게 가사 한 벌을 시주할 것을 청하였다. 아내는 남편과 집안의 복을 위하여 옷감 한 필을 시주하였다. 한편 대복은 남원으로 부임해 오는 부사를 맞이하고 읍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리를 건너게 되었다. 마침 다리 아래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내려가 보니 귀와 뿔이 달린 큰 구렁이가 있었다.
구렁이는 본래 대복이 이 달 안에 죽어서 뱀으로 태어날 것이었으나 가사를 시주한 공덕으로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고 알려 주었다. 단, 앞으로 재물을 탐하고 절을 짓지 않으면 뱀의 과보를 30년간 받을 것이고 절을 지으면 뱀이 대복의 과보를 천년 동안 대신해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대복은 무심결에 절을 짓겠노라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서는 아내에게 가사를 왜 시주하였느냐고 추궁하고 심지어 활로 아내를 쏘려고 하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이 때 절에서 가사를 만들고 있던 비구니가 와서 정신이 든 대복을 설득하였고, 이에 감화한 대복이 마침내 지은 절이 바로 대복사라는 것이다.
대복사 요사채
대복사 극락전앞
대복사 요사채
대복사 극락전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48호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으로, 아미타불을 봉안하였고 신장탱화·후불탱화·지장탱화가 안치되어 있다. 극락전 앞에는 당초에 만들어졌다는 석불과 탑의 지대석이 남아 있다. 지대석의 너비가 사방 2m에 달하고 뜰아래에도 석탑 지대석이 남아 있어 규모가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복사는 893년(진성여왕 7) 도선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본래는 대곡암(大谷庵)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조선시대 철종 때에 남원부사청(南原府使廳)에 근무하던 강대복(姜大福)이 중수하였고, 남원부사의 명으로 대복사라 개칭하였다.
대복사 극락전 돌계단
대복사 돌계단은 한개의 돌로 만들어져있다.
대복사 극락전 십우도 벽화
대복사 철불좌상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23호
대복사 극락전에 안치되어 있는 철제여래좌상으로, 높이 103cm, 두부 길이 39cm, 무릎 너비 80cm, 어깨 너비55cm이다. 나발(螺髮)의 머리에 육계는 작고 양귀는 길게 늘어졌다. 안면은 사각형에 가까우나 살집이 적고 전체적으로 근엄한 인상이다.
눈은 작고 눈썹이 없으며, 목의 삼도(三道)는 잘 나타나 있지 않다. 왼쪽 어깨에서 수직으로 흘러내린 법의(法衣)는 왼쪽 옆구리 부분에서 매듭을 지어 팔 위로 늘어뜨렸다. 옷주름은 매듭에서 오른쪽 허리를 향해 비스듬히 흘러내려 왼쪽 무릎에서 오른쪽 무릎 아래로 연결되었다. 결가부좌한 자세로 가슴은 넓게 풀어헤쳐 오른쪽 유두가 드러나 있다.
무릎 높이는 20cm이며, 오른쪽 발바닥이 왼쪽 무릎 위에 위를 향해 놓여 있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 엄지와 중지로 원을 그렸으며,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한 채 왼쪽 무릎 위에서 굽혀들어 역시 엄지와 중지로 원을 그린 모습이다.
대복사 동종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24호
대복사 극락전에 있으며, 1635년(인조 13) 제작되었다. 전체 높이 99cm, 종신 높이 70cm, 구경 58.5cm, 최대둘레 177cm, 용뉴 높이 19cm이다. 견대 상연(上緣)에 55개의 입화식(立花飾)이 있는데 각 화면에는 소형좌상인 화불(化佛)이 새겨져 있다.
회자문(回字文) 견대 아래쪽은 높이 18cm, 상변길이 18cm, 하변길이 21cm의 사다리꼴 모양 유곽(乳郭) 4개를 배치하였다. 유곽 위쪽 양옆으로 이중의 원 안에 범(梵)자 1자씩을 새겼고,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높이 22.5cm의 보살입상이 새겨져 있다. 하대는 구연대에 접하여 높이 6cm의 보상연화 당초문을 새겼다.
제작연대가 확실하고 고려시대 동종의 특징이 남아 있어 조선 전기의 범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대복사 극락전앞 석탑부제
대복사 요사채
스님 기도처
대복사 칠성각
칠성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사면 처마 끝에는 지붕을 받치는 활주를 세웠다. 사면기둥 위에는 거북을 안초공으로 장식하여 상징성을 더했으며, 극락전의 외벽에 그리지 못한 십우도 가운데 일부를 그려 장엄하였다. 정면에 걸린 편액은 거암(巨巖) 김봉관(金奉官)이 썼으며, 내부에는 1935년에 조성한 독성탱과 1936년에 조성한 칠성탱ㆍ산신탱을 봉안하였다.
대복사 칠성각 칠성탱화
대복사 전경
대복사 찾아가는 길
남원에서 24번 국도 순창방면(만복사지 쪽)으로 가다보면 만복사지 못 미쳐 왕정주유소가 나온다. 이 주유소를 지나면 만나는 왕정교를 건너자마자 바로 우회전하여 방죽길로 들어서서 남원여고 쪽으로 직진한다. 남원여고를 지나 조금 가면 제2왕정교가 나오는데, 여기서 다리 쪽으로 가지 말고 좌회전하면 남원경찰서를 만나게 된다. 남원경찰서 앞 삼거리에서 다시 좌회전하여 50m 정도 올라가면 성원고등학교가 있고, 학교 앞에서 오른쪽 담장을 끼고 돌아 별나라?×坪?있는 길로 400m 정도 들어가면 대복사 주차장에 닿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