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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쓴 사내 하나가 느티나무 아래에 앉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쉬고 있었다.
나이는 서른 고개를 막 넘었을까? 비록 갓은 썼다고 하나 축 쳐진 눈꼬리며
쭉 빨아내린 턱주가리가 영락없는 쥐새끼 상이었다. 천상도 그런 천상이 없었다.
그런 천하디 천한 얼굴은 양반이라면 사또 밑에서 알랑방구나 뀌는 이방 이상의
벼슬은 못할 것이며 설령 동냥아치라도 제대로 밥 한끼 얻어먹기 힘들 것이었다.
세상을 떠돌다 보니까 강쇠 놈도 제법 사람의 얼굴은 볼 줄을 알았다.
볼따구니 살이 두툼하고 눈빛은 순하며 인중이 넉넉한 사람일수록 마음씀씀이도
넉넉했으며 인정을 베풀 줄 알았다. 그런데 턱이 쥐새끼 턱처럼 아래로만 길쭉한
사람은 사내건 계집이건 쫌생이기 일쑤였으며, 하는 꼴도 영락없는 쥐새끼 놀음이었다.
그런 얼굴은 남에게 이로움을 주기는 커녕 해만 끼치기 마련이었다.
강쇠 놈이 머슴을 살 때 보면 얼굴이 넉넉한 주인은 사경도 후했으며 아랫사람을 아끼고
보살필 줄 알았지만, 얼굴이 쥐새끼상인 주인은 노랭이 아니면 심술쟁이기 일쑤였다.
그래서 강쇠 놈은 혹시 머슴을 살 일이 있으면 주인의 낯짝부터 살피는 것이 일이었다.
그것은 계집도 마찬가지였다. 부자집 맏며느리상이라는 말은 그냥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얼굴이 넉넉한 주인 아씨는 머슴의 밥상을 오히려 주인상부다 풍성하게 차려냈다.
얼굴이 넉넉한 주모는 탁배기 한 사발을 내놓아도 철철 넘치게 내놓았다.
비록 손님이 먹고 남긴 안주일망정 아끼지 않고 인정을 베풀었다.
주모의 얼굴이 쥐새끼 형상이면서 눈이 번들거리고 눈밑의 주름살이 거무튀튀하면
영락없는 색녀였다. 그런 계집은 제가 받은만큼만 돌려주었다.
아랫녁 송사 때 서너 차례 구름을 타야 닭 한마리가 나올까말까 했다.
어쩌다 마음이 동해 살잔치까지 벌였는데, 뒤끝이 껄쩍지근하면 아침밥도 먹이지 않고
쫓아내기 일쑤였다. 아직까지 강쇠 놈은 살풀이가 시원치 않다고 푸대접을 받은 일은 없었다.
쥐새끼 형상의 갓 쓴 사내를 보니, 일을 당해도 단단히 당한 것이 분명했다.
겉 모습으로 상놈이 분명한 강쇠 놈이 곁에 있는데도 땅이 꺼지도록, 느티나무의 푸른 잎들이
푸르륵 떨도록 한숨을 쉬는 꼴이 그랬다.
오라는 곳 없어도 갈 곳은 많고, 남의 일에 참견하다가 뺨을 맞고 쫓겨날 망정 입이 간질거려
참을 수 없는 강쇠 놈이 갓 쓴 사내의 그런 꼴을 보고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그 쪽으로 흘끔 고개를 돌리며 강쇠 놈이 물었다.
"선비님, 먼 일인디, 듣는 사람 귀창이 나가도록 한숨을 내쉬시요?"
갓 쓴 사내가 벌겋게 닳아오른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색주가가 있다는 소문얼 들은 것 같은디
아무래도 자기가 당한 처지가 억울하여 혼자 울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자네가 상관헐 일이 아니니, 더 이상 묻지 말게."
갓 쓴 선비가 대꾸했다.
"흐따, 선비님께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데 어찌 모른체 헐 수 있다요?
배가 고픈디 밥 사 묵을 돈이 없소? 허면 이놈이 밥 한 끼 못 사주겄소?"
말끝에 강쇠 놈이 옆구리에 차고 있는 전대를 툭 쳤다. 순간 선비의 눈이 번쩍 빛났으나
이내 고개를 돌려 버렸다. 꼴에 양반이 곁불을 쬘 수는 없다는 오기같은 것이 발동한 것이라고
생각한 강쇠 놈이 무릎 걸음으로 다가갔다.
"아, 배고픈디 양반 상놈이 따로 있다요?
상놈의 돈으로 밥을 사묵어도 배때기만 뽈록해지면 되제요.
가십시다. 여그가 인월이든가요? 제법 쓸만헌 색주가가 있다는 소문얼 들은 것 같은디."
강쇠 놈의 말에 선비가 손을 홰홰 내저었다.
"색주가엘 가겠다고? 자네가 돈이 얼마나 있는지 몰라도 그 쪽으로는 아예 고개도 돌리지 말게.
거라지 되기 딱 알맞으니까."
순간 어떤 생각이 강쇠 놈의 뇌리를 치고 지나갔다.
'흐흐, 그렇구나. 선비님께서 색주가에 들렸다가 주머니럴 탈탈 털리고 나오셨구나.'
하늘을 향해 속으로 씩 웃은 강쇠 놈이 선비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 보며 너스레를 떨었다.
"인자본깨 선비님께서 색주가 계집헌테 당헌 모양이시구만요."
"허허, 이 사람,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구만. 자네, 양반을 능멸한 죄로 관아에 끌려가
치도곤을 맞아야 정신을 차릴 것인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선비의 얼굴은 지치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쩌면 이 선비가 색주가의 색시한테 몸은 몸대로 고생을 하고 돈은 돈대로
털렸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강쇠 놈이 큰 소리를 쳤다.
"아, 배고픈 선비님께 밥 한 그럭 사줄라고 했다고 치도곤을 맞아야헌다면 맞제라우.
좋은 일허다가 맞은 것인깨, 설마 죽은 담에라도 보갚음얼 받겄제라우."
"이 사람이, 정말. 내가 지금 자네하고 노닥거릴 기분이 아닌깨, 물러가게."
선비가 얼굴을 일그러 뜨렸다.
"물러나라면 물러나야제요. 헌디, 색주가의 색시덜이 예쁘기넌 헙디까?
아랫녁 재미넌 어떻든가요?
이놈이 쩌그 경상도 땅에서부텀 수많은 계집얼 품어보았십니다만,
사랑방에서 떠돌던 진짜 거시기넌 만내지럴 못했구만요.
강아지 새끼가 제 어미 젖을 묵듯이 쪽쪽 빨아디리는,
수십 수백마리의 거랭이 속에 손구락얼 담가놓은 것 맨키로 고물고물헌
거시기넌 만내지럴 못했당깨요.
선비님이 만낸 색시넌 어떻든가요?"
강쇠 놈이 끈질기게 달라붙자 선비가 할 수 없다는 듯이 픽 웃었다.
"흐흐흐, 선비님께서 참말로 어떤 색시헌테 당했는개비만요.
당해도 아조 쫄딱 망허게 당헌 모양이구만요. 그년이 어떤 년이요?
이놈이 선비님의 웬수럴 갚아주제요."
"원수를 갚아? 자네가?"
선비가 눈을 빤히 뜨고 바라 보았다.
"다른 웬수라면 몰라도 계집허고의 일이라면 못 갚아디릴 것도 없제요.
이놈이 이래뵈도 이놈 밑에서 죽겄다고, 그만허라고 사정사정 안 헌 계집언 없었응깨요.
선비님이 돈얼 빼앗겼으면 돈얼 찾아디릴 것이고, 체면얼 잃었으면 체면얼 찾아디린당깨요."
강쇠 놈의 큰 소리에 선비가 찬찬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자네가 정말 계집이라면 자신이 있는가? 자네 아랫도리 힘이 그리 강한가?"
"그 일이 기운만으로 되는 것이간디요? 요령이구만요, 요령."
"요령이라면 말도 말게. 누구는 그 요령이 없어 당한 줄 아는가?
나도 하룻저녁에 계집년들을 너 댓 번은 죽였던 장사였다네.
그러고도 새벽에 한번 더 계집을 죽였던 나였단 말일쎄.
그런디, 그 계집 앞에서는 그런 내 힘이 물거품이 되었다네."
"그래라우? 거, 겁나게 대단했던 계집인갑지요?"
"말도 말게. 자네가 조금 전에 강아지새끼럴 찾았던가?
수십수백마리의 거랭이를 찾았던가? 꼭 그 짝일쎄."
"차, 참말입니까? 그 계집이 어디에 있습니까?"
강쇠 놈이 금방이라도 달려갈 듯이 설쳤다.
"참게, 참아. 천하없는 사내도 그 계집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을걸세.
내가 자신있게 덤벼들었다가 채 한식경도 못 되어 돈 백냥을 바쳤으니까.
어디 그 뿐인 줄 아는가? 몸의 진기도 다 빼앗겨버렸다네.
그 계집하고 채 한식경도 안 있었는데, 주막을 나오는 내 다리가 후둘거렸다네."
"선비님의 말씀얼 들은깨 더넌 못 참겄는디요. 가십시다. 그 색주가가 어디요?"
강쇠 놈이 몸을 일으키자 선비가 손을 잡아 끌어 앉혔다.
"참게.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가더래도 계집에 대해 알고 가야할 것이 아니던가?
무턱대고 갔다가는 자네도 나처럼 알거지 되기 십상일 걸세.
더구나 계집이 어찌나 야박하던지, 돈을 백냥이나 삼켰으면서도 식은밥은 물론
시디 신 탁배기 한 잔 안 주고 내쫓더군."
"그런 악독한 계집이라면 더더구나 가만 둘 수가 없제요. 그래, 어떻게 당했습니까?
찬찬히 말씸얼 해보시씨요."
"그러세나. 기왕에 자네의 신세를 지기로 했으니까, 내가 자세히 얘기해주지."
선비가 허망한 눈빛으로 하늘을 한번 바라 본 다음 입을 열었다.
강쇠 놈이 히히 웃으며 선비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마천골에 사는 조선비가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가기 위하여 집을 나선 것이 어제 오후였다.
어차피 인월에서 하룻밤을 묵어야했기 때문에 점심을 먹고 늦으막히 출발했다.
마침 해질녁에 인월에 당도했고, 머물 곳을 찾던 조선비의 눈에 주막이 하나 들어왔다.
'겉보기에도 깨끗하고 드나드는 사내들도 별로 없는 걸로 보아 번잡하지 않은 주막이 분명하구나.
밤에 글이라도 몇 줄 읽으려면 저런 조용한 집이 제격이지.'
선비가 작정하고 막 그 주막의 사립을 들어서는데, 수수한 얼굴의 주모가 어서 오시씨요, 하고 반겼다.
"하룻밤 묵어갈 수 있겠소? 어찌 집은 조용하지요?"
"하먼요. 손님 받을라고 낸 주막인디, 못 묵어갈 까닭이 없제요.
요짐언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는 선비님들 말고는 손님도 뜸헌깨,
공부허시는 선비님이 묵기에는 닥상일 것이구만요."
"조용한 방으로 하나 주시씨요."
"선비님일수록 조용한 방을 찾드구만요. 따라 오시우."
주모가 뒤안으로 돌아가면서 돌아보았다. 주막의 뒷방이라면 더구나 조용할 것같아
조선비가 망설임도 없이 따라갔다. 뒤 쪽에는 방이 두 개 있었는데, 방 하나 앞에
여자 것이 분명한 갓신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조선비가 그 신발을 유심히 바라보는 기색이자 주모가 하얗게 웃으며 말했다.
"신경쓰실 것 없구만요. 함양에서 남원으로 간다는 아낙인디,
낮에 묵은 것이 탈이났는가 어쨌는가 배가 쌀쌀 아프다길래 하루 묵어가라고 했구만요.
술손님이 아니니 시끄러울 일언 없을 것이구만요.
앞에서 천둥벼락을 쳐도 여그넌 조용헌 방이구만요. 헌디. 저녁밥얼 잡수셔야지라우.
백반도 있고, 장국밥도 있는디요."
"백반 한 상주시요."
"술언 안 드실라요? 탁배기도 있고, 화주도 있는디요."
"명색이 과거보러가는 선비가 술을 마실 수가 있겠소.
술은 과거에 급제하고 돌아오는 길에 마시리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선비는 과거급제에 목을 맨 순수한 선비노릇에 충실했다.
술을 못 마시는 것도 아니고, 오랫만에 집을 떠나온 첫날이라 마음도 싱숭생숭
술생각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술을 마시면 안 될 것 같았다.
한양까지의 멀고 먼 길에 어찌 술 한 잔 안 마실 수가 있겠는가만,
집을 떠나온 첫날만은 깨끗한 정신으로 보내고 싶었다.
"그러시씨요. 손님께서 싫으시다면 억지로 술얼 권헐 수는 없지요."
주모가 쉽게 포기하고 돌아갔다.
저녁을 먹을 때는 반주 한잔 생각이 간절했지만, 기왕 참기로 한 것 끝까지 참는 것이
선비의 도리가 아니겠느냐고 생각하며 참아냈다.
옆방의 여자는 배 아프다는 말이 참인지 저녁상 들여가는 기척도 없었고,
그렇다고 특별히 밖으로 나가 무얼 먹고 들어오는 기척도 없이 잠잠했다.
주모가 방문을 열고 색시, 그리 아무것도 안 묵고 어쩔라고 그려?
돈달래는 소리 안 헐 것인깨, 장국밥이라도 한 그럭 묵제, 하고 권해도 싫다고만 할 뿐이었다.
'저 아낙은 소피도 안 보는가? 허긴, 먹은 것이 없으니 내놓을 것도 없겠지.'
밤이 늦은 시간, 집에서부터 준비해 온 촛불을 켜놓고 조선비가 글을 읽다가
잠깐 궁금증에 잠길 때였다. 조금전 소피를 보러 나갔다가 주모가 사립을 닫아걸고
방의 불까지 끄는 것을 보고 들어온지도 제법 지난 시간이었다.
이날 따라 다른 손님도 없었는지, 서너개 되는 술방의 토방 위는 모두 비어있었다.
옆방에서 어떤 기척이 느껴졌다. 부스러거리는 소리에 이어 작은 물줄기가 졸졸졸 흘러가는,
술병의 술을 잔에 따루는 듯한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사람치고 소피를 안 볼리는 없지. 다급하기는 다급했던 모양이군.
소리가 제법 울리는 것을 보니.'
조선비가 잠시 귀를 기울이다가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내고
서상으로 쓰는 개다리 소반 앞에 앉았을 때였다.
이번에는 아아아, 하는 신음이 들려왔다.
아낙이 병중이 아니라면 남녀간에 아랫녁 송사를 벌이면서 여자가 구름을 타며
내지름직한 그런 소리가 분명했다. 그것도 아주 조심스러운, 바깥의 사람이 들을세라
입을 절반 쯤 막고 내지르는듯한 그런 소리였다.
이미 아낙의 소피보는 소리에 그 쪽으로 정신을 반나마는 빼앗기고 있던 조선비였다.
아낙의 수상쩍은 소리에 전연 무심할 수가 없었다.
글 읽던 눈길을 들어 잠시 옆방 쪽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다시는 아낙의 신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낙이 잠결에 하품이라도 했던 것일까?'
조선비가 눈길을 내려 글자를 들여다 보았다. 그렇게 얼마 쯤의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다.
다시 옆방에서 앓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아주 끙끙 앓는 소리였다.
조선비가 옆방 쪽의 벽에 가만히 귀를 댔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이고, 아이고, 나 죽겄네,
하는 소리가 들렸다. 참는다고 참으나 고통을 견딜 수 없어하는 그런 신음이었다.
'저 여자가 배가 아프다고 하더니, 단단히 탈이 났구나. 이 일을 어쩐다지? 주모한테 알려야겠지.'
그런 작정으로 벌 떡 몸을 일으키는 조선비의 뇌리로 멀고 먼 한양길에 밥탈 물탈에 술탈까지
날 수가 있으니, 지니고 가라면서 마누라가 넣어주던 배탈날 때 먹으라던 환약이 떠올랐다.
'주모가 따로이 배탈약을 가지고 있지도 않을터, 내가 지닌 환약을 나누어줘야겠구나.'
그리 작정한 조선비가 환약 대여섯 알을 꺼내어 들고 옆방으로 갔다.
"아짐씨, 아짐씨, 어디가 편찮으시요? 나는 옆방에 든 글을 읽는 선비요.
내게 배탈약이 있는데, 잡수시렵니까?"
조선비가 물었으나 방안에서는 아이고, 아이고, 소리만 들릴 뿐, 다른 말은 새어나오지 않았다.
아파도 단단히 아픈 모양이라고 짐작한 조선비가 문을 열고 들여다 보았다.
아낙이 배를 움켜 쥔 채 방안을 북북 기어다니고 있었다.
치마말기는 풀어져 절반 쯤 흘러내렸고, 아픈 배를 쓰다듬느라 그랬는지 저고리 고름은
완전히 풀어진 채 잘 익은 복숭아같은 젖통이 아이고, 죽겄네, 아이고 죽겄네, 하면서
아낙이 방안을 길 때 마다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당황하여 눈길을 돌리던 조선비가 사람이 죽어가는 판에 체면이 무슨 상관인가하는
생각에 앞 뒤 계산 속도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아짐씨, 큰 병이 아니라 다만 음식을 잘못 먹어 생긴 탈이라면 이걸 드시면 나을 것이요.
이걸 드셔보시요."
조선비가 아낙을 붙들어 잡고 환약 다섯알을 입 속에 넣어 주고 물그릇을 들어 입에 대 주었다.
물 몇 모금과 함께 환약을 목구멍으로 넘긴 아낙이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조선비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하늘에서 내려 온 선녀처럼 아름다웠다.
비록 머리는 헝클어지고 얼굴에는 분자국 하나 없었지만, 약을 먹고도 배 아픈 것이 덜 가셨는지,
입술을 깨물면서 고통을 참아내는 모습이 그리도 고울 수가 없었다.
"죄, 죄송해요. 글을 읽는 선비님께서 옆방에 드신 것을 알면서도
너무 고통스러워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말투로 봐서 순전히 상놈의 계집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품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괜찮습니다. 아픈 것을 어쩌겠습니까? 아프면 소리를 질러야지요. 이제는 좀 어떻습니까?"
"좀 괜찮아진 것같기는 한데, 명치 밑이 콕콕 쑤시는 것은 여전합니다. 아, 아이고."
아낙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지고 있었다. 비록 이불로 가렸다고는 해도
하얗게 드러난 아낙의 가슴 때문에 눈길 갈 곳이 없는 조선비가 옆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아낙이 비명을 내지르며 앞으로 푹 엎드렸다.
그리고는 오른 손으로 젖통밑 가슴을 사정없이 움켜쥐고 온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이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더 아프십니까?"
"아이고, 엄니. 나 죽겄소. 아이고, 엄니, 나 죽겄소."
너무 고통스러워 체면도 염치도 잊어버렸다는 듯이 아낙이 조선비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허리춤을 잡고 나댔다.
"허허, 이것 큰일이네. 밤이 깊어 의원을 모시러 가기도 힘들 것인데.
작은 고을에 의원이 있을까도 의문이고. 아짐씨, 내게 환약이 더 있는데,
그것이라도 몇 개 더 가져다 드릴까요?"
조선비가 아낙의 양 어깨를 붙들고 묻다가, 어떻게든 아낙을 가슴에서 떼어내려고
안아일으키려는데, 손끝에 물컹 잡히는 것이 있었다.
어따, 뜨거워라, 하며 얼른 손을 떼어내는데, 아낙이 그 손을 꽉 움켜 쥐었다.
"왜 이러시요? 남녀가 유별한데."
조선비의 말에 아낙이 끙끙 앓으면서 대꾸했다.
"남녀가 유별한 것을 생각했다면 처음부터 선비님을 이 방에 들이지 않았겠지요.
덕분에 배앓이는 나은 것 같습니다."
아낙이 그리 말하면서 고개를 들고 바라보며 배시시, 그러나 부끄러운 듯 웃었다.
그 모습 또한 사내의 가슴을 흔들어놓을 만큼 예뻤다.
"헌데, 어찌 끙끙 앓으셨소. 나는 또 아짐씨가 약을 먹고도 아무 소용이 없는가하고
여간 난감하지 않았습니다."
"부끄러워서, 부끄러워서 더 아픈 체 했습니다만,
선비님이 너무 마음 쓰시는 것이 안타까워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부끄러워요?"
조선비가 물으며 아낙을 내려다 보았다. 잘 익은 수밀도같은 젖통이 바로 눈밑에 있었다.
"이리 벗은 몸을 선비님께 보였는데, 안 부끄러울 수가 있습니까?"
아낙이 얼굴까지 붉게 물들이며 하얀 이를 드러내 놓고 생긋 웃었다.
부끄럽다고 하면서도 아낙은 저고리 고름을 매지 않았다.
조선비가 그만 이 방을 나가야하는데, 나가야하는데, 생각은 그리하면서도
차마 떨치고 일어날 수가 없어 이 일을 어찌할까, 이 일을 어찌할까, 머뭇거리고 있을 때였다.
밖에서 자박거리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조선비가 엉덩이짓으로 얼른 물러났다. 주모가 아낙을 향해 고함을 버럭 질렀다.
"요런 썩어 자빠질 년 쫌 보소요. 이래서 사람이 근본언 못 속인다고 글제.
이년아, 네 년이 비록 청루에서 기생노릇을 했다고는 허나, 어찌 과거보러 가시는
선비님을 호릴 수가 있다는 말이더냐?
그리고 내 주막에 머물면서는 사내를 넘보지 않기로 했잖느냐?
여시같은 년. 어서 썩 내 집에서 나가그라. 네 년이 남원으로 간다고 그랬제?
펄쌔 자정이 넘었으니, 운봉 쯤 가다보면 날이 샐 것이니라. 어서 나오그라."
화가 나도 단단히 난 듯 주모가 금방이라도 방으로 들어와 아낙을 끌어낼 듯 설쳤다.
"여염의 아낙이 아니었던가?"
조선비가 말까지 턱 놓으며 물었다.
"소녀, 무엇을 숨기오리까. 함양에서 기생 노릇을 하다가 남원에 가면
쓸만한 사내도 많고 기생집도 서너 군데는 된다고 하여 팔령재를 넘어 왔습니다."
"그렇다면 배가 아프다는 말은 순전히 거짓이었던가?"
"아닙니다. 낮에 음식을 잘못 먹었던지 배가 아팠던 것은 사실입니다.
조금전까지도 명치끝이 송곳으로 쑤시는듯 아팠었구요."
계집이 조선비와 주모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말이 참이제? 선비를 호리기 위해서 부린 수작이 아니란 말이제?"
"이년이 주모 아줌니께 무엇 때문에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알았구만. 기왕지사 젖통꺼정 보여주었으니, 갈데까지 다 간 사이구만.
두 사람의 일은 두 사람이 알아서 허드라고. 나넌 모르겄응깨."
주모가 니년놈들 일을 알아서 하라는 듯 문을 쾅 닫고 돌아갔다.
그 쪽을 바라보던 계집이 고개를 돌려 말했다.
"선비님께서 주신 환약이 참으로 신통합니다.
이제 배가 씻은듯이 나은 것 같습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계집이 스스럼없이 사내의 손을 끌어다 제 가슴에 얹어 주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흠칫 놀라 손을 빼내려던 조선비의 뇌리로
어차피 기생이라면 내가 몸을 사릴 계집도 아니구나,
또한 전 벌여놓고 하는 장사도 아니니, 새삼 꽃값을 달라고 할 것도 아니고,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러나 다짜고짜 계집을 이불 위에 눕힐 수도 없는 일이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기 마련이었다. 또한 멀쩡한 정신으로는 조선비
자신이 계집의 속살을 탐할 염치도 없었다.
"기생노릇을 했다면 술은 한 잔씩 할 줄 알겠구만."
조선비의 물음에 계집이 고개를 끄덕였다.
"술 한 잔 못 마시면서 어찌 기생노릇을 하겠습니까?"
"어떤가? 밤은 깊었지만, 기왕에 이리되었으니, 나하고 술 한 잔 하는 것이."
"술을요?"
계집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싫다면 어쩔 수 없고. 기왕지사 글을 읽기는 글렀으니,
자네하고 술이나 한 잔 했으면 해서 해본 소리일쎄."
"하오나, 이년의 술버릇이 나빠서 선뜻 그러자고 할 수가 없습니다."
"술버릇이 나쁘다니? 사내도 아닌 자네가 주먹질을 할리도 없을 것이고."
"주먹질이 아니라, 사내의 옷을 벗기고 든답니다."
"사내의 옷을 벗겨? 그것이야 사내 쪽에서 바라던 바가 아닌가?
어쩔텐가? 나하고 술 한 잔 하겠는가?"
조선비가 다그치듯 물었다.
"이년이 술 취해 한 일을 너그럽게 용서해주신다면 못 마실 것도 없겠지요."
계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누구의 술버릇이 더 고약한가 우리 내기를 하세."
계집의 승락을 얻은 조선비가 주모. 주모하고 불렀다.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주모가 뽀르르 달려왔다.
그렇게 시작된 술판이었다. 미리 준비라도 해놓았는지,
계집이 너비아니가 먹고 싶다면 너비아니가 나왔고, 자반고등어가 먹고 싶다면
자반고등어가 안주로 나왔다.
계집년과 둘이서 화주 한 병을 거즌 비워갈 무렵이었다.
멀리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리고도 제법 한식경이나 지난 다음이었다.
두 발로 술상을 한 쪽 귀퉁이로 밀어붙인 계집이 술버릇이 나오는지 손 하나를 느닷없이
조선비의 허리춤 속으로 집어 넣었다.
"에게, 이것도 물건이라고 달고 다니십니까?
허우대는 멀쩡한데 물건은 꼭 일곱살 짜리 어린애같소."
계집이 같잖다는 투로 입가에 비웃음까지 띠고 말하자 순간 조선비의 비윗장이
팍 상해 버렸다.집안 형편이 넉넉하여 자주는 아니지만, 글 읽는 동문들과 더불어
진주의 기생집에도 찾아가 보았고, 함양의 색주가에도 몇 번 들락였지만,
시원찮다는 소리는 한번도 들어 본 일이 없었다.
오히려 물건 하나만은 사내 가운데 사내라고 칭찬이 자자했었다.
어디 그 뿐이었던가? 하룻밤에도 계집을 서너번은 죽이고도 새벽이면
또 기운차게 일어서던 놈이었다.
그런 물건을 두고 일곱살 짜리 어린 아이것이라니?
"무슨 소리, 이날 이때껏 내 물건을 두고 그리 말한 계집은 없었다네.
자네가 아직 맛을 안 봐서 그렇지, 한번 맛을 보면 사족을 못 쓰고 덤빌걸세.
날더러 부처님, 부처님하면서 덤벼들걸세. 이 물건이 하룻밤에 계집을 다섯번도 죽이고
일곱번도 죽인 물건일쎄."
호호호, 거짓말."
"거짓말이라니? 명색이 선비가 어찌 하찮은 기생년 앞에서 거짓말을 한다던가?
자네도 한번 죽어볼라는가? 아마 한 식경도 못 되어 날더러 살려달라고 애원을 할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