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移葬)
지금 생각해 봐도 어머니의 산소는 명당자리였다. 풍수지리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따뜻한 양지 곁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명당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여덟 살 되던 해부터 몸이 아프셨다. 지금 생각하면 위암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돌아가시기 2년 전에 바람을 쐴 겸 보령 성주산 아래 청라면 나원리에 사시는 작은 고모님 댁에 갔다 오셨다. 갔다 오신 후 어머니는 아버지께
“너무 좋아요. 어디나 맑은 물이 철철 흐르데요”
“그래? 갔다 와서 몸이 좀 좋아졌으면 좋겠네”
우리가 사는 고북면 봉생리는 물이 귀해 방죽을 파서 물을 가두었다가 용수로 사용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우리도 그곳으로 이사를 가면 안 돼요?”
“우리가 종갓집인데, 어떻게 고향을 버리고 떠날 수가 있나?”
그러나 어머니의 요구는 완강했다. 며칠을 두고 계속되었다.
“거기서 살면 내 병도 금방 나을 것 같아요.”
어머니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는 어머니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며칠을 생각한 후 다음날 아침에
“그럽시다. 종중(宗中) 일은 자주 와서 보면 되지”
다음날 아버지는 동네 일가들 중에 어르신들을 모아 놓고 이사를 가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몇몇 분들이
“이 사람아, 종손이 떠나면 우리는 어떻게 되나? 종중 일은 누가 보고?”
“아저씨, 제 처 몸이 좋아지면 몇 년 후에 다시 돌아올 겁니다.”
아버지는 작은 고모에게 연락하여 괜찮은 집을 알아보라고 하셨다. 얼마 후에 고모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괜찮은 집을 보아 놨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직접 가 보셨다. 마음에 드셨던지 부지런히 이사 준비를 하셨다.
오월 초였다. 이사 간 마을에는 보리 이삭이 막 패고 있었다. 풋풋한 보리 냄새가 바람에 풍겨왔다. 어린 마음에도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논에는 다 자란 자운영 꽃들이 붉게 피어 있었다. 논은 자운영 꽃으로 온통 붉은 융단을 깔아 놓은 것 같았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해 나는 청라 초등학교 2학년으로 편입을 했다. 정말 물이 풍부하고 아름다운 고장이었다. 성주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이 골 저 골로 흘러내렸다. 게다가 마을마다 봄이면 앞산엔 진달래꽃이 만발하고, 집집마다 담장 안에는 복숭아꽃 살구꽃이 꽃동네를 이루었다.
어머니는 이사 간 후 몇 달 동안은 몸이 좋아지는 듯싶었다. 그러나 그다음 해 내가 열 살 되던 1월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고향도 아닌 곳이라 경황이 없을 뿐 아니라, 어머니 시신을 200여 리나 떨어진 고향 선산으로 옮겨 묘소를 쓸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아직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급한 대로 고모네 산에 묘소를 썼다.
그 뒤로 20여 년이 흘렀다. 우리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어머니를 두고 오신 것이 영 마음에 걸리신 모양이었다. 하루는 나와 형님을 불러 놓고 말씀하셨다.
“네 어머니를 선산으로 모셔야겠다. 큰애는 비석을 맞춰놨으니 가져오고, 작은애 너는 어머니 산소를 파묘해 모시고 오너라.”
내가 고모네 집에 갔을 때는 내종 사촌 형이 파묘할 모든 장비와 인부를 다 구해 놓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어머니 산소에 가서 절을 하고 포클레인으로 파묘하기 시작했다. 흙이 보들보들한 것이 참으로 좋아 보였다, 인부들은
“이렇게 좋은 명당을 두고 어디로 갑니까?””
또 다른 사람은
“아마 이 묘를 보니까 자손들이 잘 되겠네.”
“감사합니다.”
하고 말했다, 내가 보기에도 정말 명당인 것 같았다. 대개 파묘하다 보면 진흙이 가득 차거나 물이 괴여 있는데, 어머니 산소는 보들보들한 것이 정말 명당자리 같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은 그날따라 몹시 추웠다. 내가 열 살 되던 해인 1953년, 음력으로는 12월 12일이니까 양력으로는 1월 중순경이었다. 그날 아침에 어머니는 마지막 말씀 한 마디 남기시지 못하시고 고통 중에 운명하셨다. 지금도 마지막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제 겨우 47세의 연세로 어린 자식들을 남기고 떠나가시는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하셨을까! 나는 내 여동생을 이끌고 밖으로 나와 말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동생도 돌아가셨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지 내 손만 꼭 잡고
“오빠, 그러면 어머니는 없는 거야?”
하고 울먹였다.
“아버지가 계시니까 걱정하지 마”
나는 동생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밖은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장례를 모시고 오는 날 누님들과 친척들은 모두 앞서 가고, 나는 맨 끝으로 형님과 외사촌 형이 이야기를 하면서 가는 그 뒤를 따라갔다. 아침에 내리던 눈은 그치고, 온 동네는 조용하기만 했다. 저녁때라 집집마다 굴뚝에서는 연기가 났다. 한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났는데, 동네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저녁들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의 심정을「눈길」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남겼다.
어머니를 땅에 묻고 오던 날
날씨는 얼어붙어 너무 춥고,
싸락눈까지 날려 잡아먹을 듯이 사나웠다.
돌아오는 길에 개울은 얼음으로 덮여 미끄러웠고,
1월 보리밭의 겨울 푸른 싹들은
눈 속에 모습들을 감추고 흰 세상이 되어 있었다.
보이지 않는 하얀 벌판 위에
정신없이 발자국을 하나씩 찍으며 길을 내면
내 뒤에서는 어머니가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
뒤돌아보면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길과 길이 갈라지는 지점에서
하나의 길을 뒤로한 채
다른 하나의 길은 다시 마을로 이어지고
공허한 가슴은 자꾸 뒤를 돌아보면서
마을로 통하는 길로 들어서야만 했다.
겨울 차가운 언 땅속 깊이 홀로 묻혀
이승과 저승으로 서로를 갈라놓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에
그저 어느 저 편 눈이 날리는 희뿌연 하늘 아래
그 차가운 곳에 어머니를 홀로 남겨두고 온
열 살 어린 마음으로 마을로 돌아왔다.
상실의 마을은 처음으로 낯설기만 한데,
불과 몇 시간 전에 일어난
그 놀라운 사건들은
모두 흰 눈의 정적 속에 파묻혀 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저 고요하기만 했다.
정말 매정하게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보이는 집과 나무들도 그대로 있었고
여느 때처럼 집집마다 굴뚝에서는
저녁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 입구에서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면서
발자국은 떨어지는 눈물을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
할머니는 다음날부터
“네 형은 외지(外地)에 가서 공부하니까 네가 한 달 동안 아침에 성묘를 다녀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할머니는 아침 일찍 나를 깨워 상복을 입히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가게 했다. 학교에 가기 전에 성묘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키가 작은 나는 열 살 어린 아이라 굴건은 쓰지는 않았지만, 베옷 입고 지팡이를 짚고 가는 모습이 너무 처량하게 보였으리라. 이 모습을 본 할머니나 아버지는 속으로 얼마나 우셨을까!
산소는 우리 집에서 거의 3킬로나 되는 먼 거리에 있었다. 한참을 가다가 마을을 가로질러 지나면 산 입구가 나오는데 거기서도 한참을 더 들어가야 했다. 마을을 지날 때면 아침을 짓느라고 물동이를 이고 가던 부인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어린 상제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지나갔다. 그때만 해도 이런 예절이 있었다.
겨울이라, 어머니의 산소는 늘 눈이 덮여 있었다. 눈 위에서 절을 하고, 어머니가 추운 겨울 땅 속에 계시다는 생각을 하면서 눈물을 펑펑 쏟은 일도 있었다. 그런데 절하고 나서는 날은 추워도 어머니가 내 앞에 계시다는 생각에 따스함을 느꼈다. 돌아오는 길에는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보고 울었다. 어떤 때에는 부엉이도 나무 위에 앉자 있었고, 여우도 나무 위에서 한참을 나를 쳐다보다가 달아났다. 무서웠다. 집에 돌아오면 할머니는 언 손을 화로에 녹여 주셨는데, 언 손이 갑자기 뜨거워지니까 더 아파왔다.
한 달이 지나자, 할머니는 초하루와 보름날에만 성묘를 가도록 했다. 학교에서 돌아와 저녁때 누나들과 같이 갔다.
여름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먼 데 밖을 바라보면 어머니 산소가 있는 산이 보였다. 나는 가끔 창에 기대어 어머니가 잠들고 있는 산 쪽을 바라보곤 했다. 음악시간이었다.「산바람 강바람」 노래를 배웠다.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여름에 나무꾼이 나무를 할 때
이마에 흐른 땀을 씻어 준대요
이 노래를 배우면서 멀리 어머니 산소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아련한 슬픔 같은 것을 느끼면서, 어머니의 산소에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인부들은 포클레인으로 어느 정도 파고 나서 다음부터는 시신을 건드릴까 봐 호미로 조금씩 흙을 거둬냈다. 그런데 아무리 파내도 시신이 보이지 않았다.
“시신이 다른 데로 이동할 수도 있어”
“그래, 조그만 더 파보세”
바로 그때였다. 어머니의 시신은 다 썩어 없어지고 아주 작은 뼛조각만 몇 개 나왔다. 그것을 보는 나는 가슴이 울컥해졌다. 눈물이 나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나를 낳고 업어 키워주신 어머니가…. 인생의 허무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속으로 울고 있는데,
“야 정말 명당이네, 나는 이런 명당은 처음 보았어.”
명당은 시신이 이렇게 잘 썩어야 된다고 했다.
나는 준비한 백지에 유골과 함께 근방의 흙을 모아 싸 가지고 선산으로 가기 위해 차에 올랐다. 차에서 나는 어머니를 내 가슴에 품고 울면서 왔다. 이 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한 송이 꽃을 심고
엄마 이장(移葬)하던 날 형은 비석(碑石) 집으로 가고
나는 엄마 무덤으로 달려갔네.
서러웠던 삼십 년, 심심산골 밤이면 밤마다
부엉이, 소쩍새, 솔바람 소리에 혼자서 얼마나 무서웠을꼬!
한 삽 한 삽 떠낼 때마다 우리 엄마 정말 살아났으면
내 눈물 받아먹고 살아났음 얼마나 좋을까!
홀로 보낸 사무친 서러움이 한 치의 뼈로만 남았네.
영혼의 조각들을 모으고, 눈물 섞어 백지에 싸들고
예전엔 우리 엄마 나를 품에 안고 살더니
어허, 이젠 내가 우리 엄마 품에 안고 왔네.
그런데, 우리 엄마 왜 이렇게 가벼울까!
선산 아래 양지 곁에 누이시고
이제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렸네.
섧게 울던 울음 이젠 기뻐서 엉엉 울었네.
아버지, 우리 엄마 왔다고
너무 좋아 두 손 붙들고 속삭이는 소리 들으며
당신의 아들딸들도 모두 여기 있노라고
항상 곁에 있노라고 말씀하시네.
그래도 서러워 무덤가에 꽃 한 송이 심고 왔네.
고향 선산에 돌아오자, 아버지와 형님 누님들이 다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오자, 모두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미리 파 놓은 곳에 안치하고 봉분을 새로 만들었다. 묘소 앞에 묘비를 세웠다. 그리고 누님이 준비한 진달래꽃 몇 그루를 심었다. 나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슬퍼하면서도 남편으로서의 할 일을 다 했다는 생각을 하시는 모양이었다. 봉 주위를 몇 바퀴 돌면서 하나하나 살폈다.
그날 저녁에 아버지께서는 우리 남매들을 모아 놓고
“너희들 수고 많았다”
여동생이 말했다.
“아버지, 이제 좋으시죠? 아버지도 돌아가시면 어머니 옆에 모실 거예요.”
“고맙다. 그렇게 한다니 나도 마음이 놓인다.”
그 후, 내가 마흔 한 살 때 1984년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어머니와 합장을 했다. 나는 아버지께 제대로 된 효도 한 번 못했다. 한창 살기 어려울 뗬다. 그러나 그건 핑계였다.
내 나이 이제 78세, 왜 이토록 어머니가 그리워지는지 모르겠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서럽고, 아버지를 생각하면 효도를 못 해드린 것이 너무 후회스럽다. 그래도 고마운 것이 하나 있다. 어머니가 안 계서 가슴 한 편에는 늘 허전함을 느끼면서도, 할머니, 형수님, 누나들이 너무 잘해주셔서 나는 별로 외로운 줄을 모르고 자랐다. 어찌 고맙지 않으랴! 그래도 어머니 아버지가 보고 싶다.
2021. 4